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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책갈피BooKiss-행운의열쇠
아름다운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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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인터파크에서 북키스 제품을 2,400원에 산 적이 있었다. 한 6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가격이 별로 오르지 않은 것을 보니 놀랍다.  지금보다 펜던트의 종류도 훨씬 다양했었는데, 종류별로 한개씩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었고, 지금도 나는 사용하고 있다. 

예전제품은 줄이 도금을 한 금속실체인이었고, 이음새도 견고했었는데, 이번에 구매한 제품은 줄의 재질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싼티나는 재질인데다 더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약해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펜던트는 정말 깜찍하기 그지 없다. 북키스의 펜던트가 너무 크면 책에 걸리적 거려서 상당히 불편하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 애시당초 줄을 교체할 생각이었다. G마켓에서 은제품의 실목걸이를 8천원에 구매한 후 줄을 교체했더니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완전 명품(?) 북키스가 되었다.  

  

물론 15,000원짜리 은제품 북키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은 선물하나라도 정성이 들어간 것을 주는 편이라 굳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악세사리인 북키스. 조금만 신경쓰면 작은 물건이지만,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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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현암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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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4. 7. ~ 2008. 5. 8. 

"상앙, 한비자"라 한다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는 "법가"이다. 그런데, "법가" 하면 바로 튀어 나오는 단어는 '진나라와 진시황'이다.

고등학교 졸업한지도 벌써 16년이 넘었는데도 당시에 열심히 외웠던 제자백가들은 아직도 머리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그저 시험문제용으로 암기하여 머리속에 꾸역꾸역 넣기 위해 이 순서 그대로 외웠던 것들이라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다.

하지만, 당시 제자백가들의 특징 등을 별생각없이 달달달 외우면서도 유독 '법가'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많았다. 어쩌면 법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을 때가 바로 법학이라는 학문과의 인연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솔직히 <法家>라고 하길래 한비의 100년 후배인 키케로의 법사상과 유사한 철학적 사고가 있지 않을까 해서 나름 기대를 했으나, <한비자>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실망감 그 자체였다.

법가를 받아들였던 진시황의 진나라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이러니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비자>의 핵심은 <法>이 아니고, <군주>다.  <法家>보다는 차라리 <君主家>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즉, 성악설을 모티브로 해서 <모든 신하와 백성은 군주를 위해 존재하며, 법도 군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군주는 법을 수단으로 하여 군주에게 위협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신하들은 모두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가 이 책의 일관된 논리다.

언뜻, 이 책의 논조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홉스의 경우 그가 주장한 법을 통한 권력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의 보호이나,  한비가 법치를 주장하는 근본 목적은 오로지 군주의 권세를 위함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비 사상은 형식적으로만 법치주의일 뿐 홉스와는 그 목적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물론, 간혹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글들도 있긴 하지만, 주로 한비의 궤변이나 일반화의 오류가 더 많고, 이 책을 거의 한달동안 읽으면서 정말 한비는 왜 이런 황망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 또는 저주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듯 보였다.

단지 그러한 사상적 배경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환경이다 라는 단순한 설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비의 스승이 순자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한비와 순자의 공통적 사상은 오로지 "성악설"밖에 없는데, 혹시 성악설 때문에 순자가 한비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禮가 무엇이냐"에 대한 철학이 있지만, 법가에서는 "法이 무엇이냐"에 대한 철학이 없이 "군주는 법을 수단으로 자신의 권세를 누려야 한다" 이런 식인데, 아무리 옛날 사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용주의>를 표방한다는 법가는 동시대의 儒家와 비교해 보았을 때,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철학적 사고가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책 한권으로 법가를 통달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비자에 써 있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가는 나라 말아먹기 최고일 것이다. 그러니 진나라가 망하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法家는 法學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한비의 法治는 法治가 아니다"  이게 <한비자>를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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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튀데모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6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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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3. 26. ~ 20008. 4. 6.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글귀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우리들의 가장 큰 오해는 뭐니 뭐니 해도 그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굳건히 믿는다는 것이 아닐까?

사실,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며,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 때문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형식논리적이고, 말장난을 일삼는 소피스테스-여태까지 ‘소피스트’로 알고 있었으나, ‘소피스트’는 영어식 표기이며, ‘소피스테스’는 옛 그리스어 음사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우회적으로 알게 되었다-와 별다를 것이 없는 철학자’정도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러한 오해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은 뒤에도 그다지 개선되지는 않았는데, 저자들의 전달력 부족과 논리의 오류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비록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석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만 오히려 증폭될 뿐이었다.

그런데, ‘에우튀데모스’를 읽고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나의 편견은 오해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무지에 대한 충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소크라테스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논쟁술이 무익한 것임을 그의 아이러니한 행동과 대화로서 지적하고 있는데,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 같은 자들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점을 보면, 2400년전에 벌어졌던 대화임에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지적-지식이란 습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습득된 지식을 옳게 사용하여야 참된 지식이다-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이런 것을 두고 ‘溫故而知新’이라 하는가 보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이 자식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구할 때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쓸모 있든 쓸모 없든 상관하지 말게’라고 말한 대목이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들을 공격하면서도 이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궤변론을 연구하여 상업화하는 소피스테스라 할지라도 참된 지혜를 연마할 수 있는 상대역으로서는 쓸모있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의 해석이 맞는다면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자유’를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의 말도 안되는 궤변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해도 안가고 매우 짜증이 났지만(이로 인해 이 책을 3번이나 읽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대판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현대판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닌지.

한편 나 자신도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처럼 내 상황에 따라 모순된 주장을 하지는 않는지,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른 적은 없는지, 지식도 없으면서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지, 논쟁을 통해 자가당착에 빠진 적은 없는지,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고전읽기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비교적 얄팍하고 그나마도 주석과 해설이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책이지만, 번역작업에 얼마나 심오한 정성을 들였는지 느껴질 정도로 만족감이 매우 높았다. 일어판 또는 영어판을 중역한 것이 아니라 역자가 직접 연구하고 텍스트 자체를 완전히 소화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여 마치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훈수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 나름대로 꽤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바이나,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인문학 번역서를 접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근래 들어 선택한 책 중에 단연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체불명의 실용주의가 판을 치면서 이른바 ‘돈 되는 학문’에 밀려 그 존재마저 위태로운 인문학 초토화 위기의 시대에 남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묵묵히 기초학문의 기반을 닦아 주시는 이 책의 역자와 같은 학자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청소년을 위한 권장도서는 바로 이런 류의 책이지 제국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세뇌시키는 로마인이야기 따위가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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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erver 2008-05-1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
 
괴테와 다산, 통하다 -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
최종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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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3. 19.~ 2008. 3. 25.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던 중이었다. 

출퇴근시간대 지하철 안에서 주로 책을 읽는 나로서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으며 쉽사리 그 내용을 가늠하기 힘든 <감시와 처벌>을 가벼운 마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읽으려고 시도를 한 것은 너무 무리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사실, <감시와 처벌>은 절반가량 읽기는 했으나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푸코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짜증이 슬슬 나기 시작하여 <감시와 처벌>은 휴일에 시간을 내어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리라 마음먹고, 미리 사두었던 최종고 교수의 <괴테와 다산, 통하다>를 서재에서 꺼냈다.

법대생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법사학과 법철학에 관심이 많은 터라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법사학/법철학 교수인 저자의 논문을 빠짐없이 읽곤 했었는데, 최종고 교수의 글들은 여타 법학교수의 글과는 뭔가 다른 맛이 있어, 과연 이 분이 괴테와 다산에 대하여 어떤 내용의 글을 쓰셨을까 하고 내심 기대에 부푼 상태였다.

주지하다시피 괴테는 법학을 전공한 문학가이고, 다산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형법 교과서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학자인데다, 두 사람 모두 다방면에서 그 재능을 펼쳤던 제너럴리스트인지라, '괴테와 다산'이라는 그 제호만으로도 경외심이 느껴졌다.

게다가 다산은 내가 최고로 존경하고, 내 인생의 지침인 분이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산의 또 다른 부분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다산과 괴테의 삶과 사상, 학문적 업적 등을 교차방식으로 전개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읽기가 매우 수월하다.

'글이 수월하게 읽힌다'는 것은 저자가 괴테와 다산에 대해서 남에게 가르칠 만큼 이해도가 높기 때문에 독자에 대한 전달력이 좋다는 의미이다. 몇 년전에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던 <루소>를 읽었던 적이 있는데, <루소>를 읽으면서 고생했던 기억과 비교된다.

자신이 쓴 글이 전문적 학술논문이 아닌 바에야 일반인이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면 글쓴이의 이해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어떤 노교수님의 강의도 있었는데, 이런 점에서 최종고 교수의 글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고, 영남대 법대 박홍규 교수의 <돈키호테처럼 미쳐>는 이 책과 비교된다.

다만, 이 책이 다산 보다는 괴테에 좀 더 치우쳐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인데,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다산보다 괴테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한 아이러니한 풍토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경우에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읽었지만, 다산의 저작물은 법대 3학년 시절에 <목민심서>를 처음 읽었으니,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파우스트>는 알아도 <흠흠신서>가 무슨 책인지 모르는 이들도 꽤 있을지 않을까 싶다.

저자 역시 다산학에 대한 국내의 상황과 다산의 <여유당문집>의 번역이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니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다산과 괴테에 대한 내용이 아닌 이 책의 에필로그 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위인을 위인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남이 잘되는 것, 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빗나간 권리의식으로 불평등을 참지못하는 '평등주의'가 우리의 심성을 자해하고 있다. 잘된 사람과 비슷해지려는 욕구로 발전되어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법학교수다운 글이긴 하나, 우리사회의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사회의 불평등이 정당한 불평등인지'를 다산의 사상을 빌어 지적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괴테와 달리 삶의 대부분이 억압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나 그 억압과 고통을 오히려 혁신적인 작품과 사상으로 승화시킨 다산 선생에 대한 가볍지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책이, 다산 선생의 이해를 위한 입문서로서 훌륭하게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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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권창은 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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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2.  3. ~ 2008.  2.  13.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알고 있을까?

기껏해야 그가 플라톤의 스승이라는 것, 그의 후원자 크리톤, 독배, 악법도 법이다, 그의 악처였다는 크산티페(과연 악처였을까?) 정도가 내가 아는 단편적인 지식들이다.

사실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흔히 소크라테스를 서양철학의 시조 내지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하지만, 그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모를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학창시절부터 뇌리에 남아 있던 구호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라는 교육을 받았을 뿐이고, 그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고등학생때까지는 의문을 가졌으며, 법대 법철학 강의시간때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만약 했다면 실질적 법치주의 시대인 현대에서는 인용해서는 안될 말이며 논리모순이라는 강의를 들었다.

이 논문에서는 소크라테스는 결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플라톤의 저작인 <크리톤>과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을 분석하고, 국내외 여러 학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위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잉의욕이 오히려 독이 되어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으나 그렇게 해석될 만한 말은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권창은 교수는 <크리톤>을 분석하면서 결국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몰고간 불경죄에 관한 법은 악법이 아니고 배심원들의 잘못된 재판이 문제이며, 소크라테스는 인격화된 아테네 법과의 대화를 통하여 잘못된 재판이라도 그것이 법의 효력을 지지해주는 버팀목이기 때문에 그러한 법의 효력을 지키기 위해 탈옥하지 않았다라는 좀 이상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결국 권창은 교수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실체법이 아니라 절차법을 지키기 위해 탈옥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수긍하기 어려웠다.

특히 저자들이 법조계와 법철학 학자인 라드부르흐의 소크라테스 법사상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들이 법학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이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라드부르흐 저서의 전후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저자들이 맘에 들지 않는 부분만 들춰 내어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악법과 법>을 논하기 전에 과연 "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체로 법철학계에서는 <악법>이라는 단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법의 성질과 효력에 관한 법철학적 논의를 이해하면 "법"앞에 "악"을 붙이는 것은 논리모순임을 알 수 있다.

즉 악법은 법일 수가 없으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준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준수할 것을 강요당하면 시민불복종권 행사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 법학계의 논리이다.

물론 나보다야 더 대단하신 분들이겠지만, 저자들이 법철학과 헌법학에서의 관련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하게 고찰했다면 하는 생각을 감히 해봤다.

한편, 소크라테스의 후원자였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 비해 상당히 저평가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과연 크리톤이 그렇게 후세 사람들로부터 저평가를 받아야 할 만큼 무능하고 무지한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소크라테스가 탈옥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 자신이 70세까지 장수를 하여 살만큼 살았고, 이것 저것 귀찮기도 하고 하여 독배를 마신 것은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도 해봤다.

마지막으로, 논문의 문체가 너무 산만하고 장황한데다가 간혹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도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나마 정치학 교수인 강정인 교수의 논문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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