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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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 20120124


작년 즈음에 필립 딕의 전집이 출간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우연히 읽은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필립 딕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분이 바로 내가 즐겨봤던 블레이드러너, 토탈리콜, 마이너리티리포트 등 유명한 SF영화의 원작자라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니 SF영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SF소설은 그다지 읽어 본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올해는 필립 딕의 소설을 시리즈로 모두 읽어볼 계획을 세웠다.


이 작품은 SF의 탈을 썼을 뿐 SF소설의 느낌은 별로 받을 수 없었다. 정신분열증을 앓았다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대한 변론 내지는 소회감(?)을 시간의 뒤틀림이라는 관념을 빌려 소설화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번득이는 상상력을 기대했던 만큼 약간의 실망감이 없지 않았으며, 약간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작품보다 책의 뒷편에 부록으로 나와 있는 작가의 연대기가 더 흥미진진했다.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단어나 표현에 대한 번역에 있어서 어색한 곳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휴대용 통신기 그냥 휴대전화기로, 오히려 넴뷰탈 같은 단어는 최면진정제 등으로 번역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비정상아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으나 어감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또한 ‘계약을 샀다’라는 어색한 번역보다는 ‘고용계약 또는 근로계약을 승계했다’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 번역을 해주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원문에 충실한 번역도 좋지만, 소설번역이 학술논문번역도 아니고, 문학번역작품도 원작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작품성을 가진다는 점, 결국 번역된 작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읽기 위함이라는 점 등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좋은 번역이란 읽는 이를 위한 최상의 번역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읽는 이가 거침없이 읽어 나갈 수 있는 번역이 최상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전반적으로 단어선택에 있어서 문장의 흐름이나 전개상황에 맞추어 적합하고 읽기 흐름에 방해되지 않도록 융통성을 발휘하는 센스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은 어니와 잭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인물은 화성인 헬리오가발루스와 자폐아 만프레드인 것으로 보였다. 이 들의 이름이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인 것을 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 헬리오가발루스: 로마 제국의 23대 황제, 또라이 기질이 있었다고 함.

* 만프레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사생아로서 1258년부터 1266년까지 시칠리아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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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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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2~2009.11.6.] 

소설의 작가 '엘리자베스 문'은 미국에서 꽤 유명한 SF소설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전혀 접해본 적이 없었다.
SF소설로 유명하다길래 이 소설이 SF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제목도 SF소설의 느낌이 난다. 어둠의 속도.
하지만, 첫장을 펴고 첫 줄을 읽는 순간 낚였다는 생각이 '어둠의 속도'보다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개인적으로 휴머니즘 소설을 싫어하는 편인데, 이런 류의 소설들은 리얼리티를 가장한 교조주의적 계몽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휴머니즘적 소설이라 하기에도 뭔가 아쉬운 점이 있다.
자폐인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자폐증세가 어떤 증상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루'는 단지 내성적인 사람에 불과한 것 같은데, 내성적인 성격이 자폐증은 아니지 않은가?
의학적으로 자폐증은 "외부와 소통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내면세계에 갇혀 현실감을 상실하게 되는 정신질환"이라고 하는데, '루'는 이 정의에 해당하는 증상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평균적 일반인보다 천재적인 학습능력, 더 좋은 직장(프로그래머), 고상한 취미(펜싱, 고전음악)를 갖고 있으며,  단지 일정한 생활영역에 대한 반복성이 강할 뿐이고, 생각이 좀 많을 뿐이다.  일정생활영역에 대한 반복성이 강한 것은 오히려 현대인들의 일반적 생활패턴이 아닐까 싶다.
루와 같은 사람들을 자폐증이라 한다면 도대체 자폐증이 아닌 자들이 얼마나 될까?
심리학에서 떠오르는 자폐증 이론인 ‘마음이론{Theory of Mind : 자폐증은 마음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시스템인 주의공유기제(Shared Attention Mechanism)과  마음이론기제(Theory of Mind Mechanism)가 결여된 마음맹(Mindblindness) 상태라는 이론}’에 의한다 해도 '루'를 자폐인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다.
자폐인과의 경험적 접촉이 전무한터라, 솔직히 전체적으로 별로 공감되는 부분은 없었다. 몇 가지 관심이 증폭되는 2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싱겁게 종결되어 전반적으로 지루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번역이 자연스러워 가독성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번역자가 번역을 위해 관련 지식을 사전에 익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역자는 사회복지학과 철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후기에 자폐증에 관한 사전 학습을 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장인정신이 있는 번역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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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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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기간 : 2008. 7. 11~ 2008. 7. 28. 

고등학생 시절 영화 '터미네이터2'를 보고 나서 한때 SF영화에 몰입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날 때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SF영화 비디오를 구하러 다녔더랬는데, 그 때는 다른 장르의 영화에 비해 SF영화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전만큼 열성적이진 않지만 지금도 SF영화를 찾아서 보는 편이다. 그러나 요즘 SF영화는 오히려 90년대 SF영화에 비해 퇴보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약간 든다. 

SF영화를 꾸준히 감상하다보면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SF영화는  미래사회를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되면서 독점자본주의와 전체주의가 절묘하게 야합된 사회구조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Demolition Man, Equilibrium, Judge Dredd 등이 그렇다. 즉 발달된 과학기술이 사회안전보호라는 대의적 명분과 결탁하여 전체주의사회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농후함을 묘사하고 있다. 

<멋진 신세계>는 이 모든 SF영화의 종착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래사회의 특징을 종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멋진 신세계>의 가까운 과거가 영화 가타카에서 묘사하는 사회가 아닌지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앤드류 니콜 감독은 아마도 이 소설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티브가 매우 유사했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의 시대적 배경을 A.F 642년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포드의 대량생산체제 시스템이 1900년대 초반에 완성되었니까 대략 A.D 2500년 중반 정도면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인간의 인위적인 대량생산체제로 돌입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듯 싶다. 헉슬리의 가문이 과학자 가문인 것을 상기한다면 그다지 황당무계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소위 '맞춤아기(Designer Baby)'는 합법이라는 영국의 판결도 있었고, 미국에서도 신생아의 눈색깔, 모발, 피부색깔까지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광고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헉슬리가 예상했던 인간생산체제가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걱정을 매우 낙천적인 태도로 무시하고 있다는 점과 권력의 인간통제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 여론 조작 등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함께 <멋진 신세계>를 건설중에 있다. 차라리 인간 유전자에 따른 계급화와 인간생산체제사회가 되는 것은 막을 방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물론 헌법 제10조에 표현되어 있는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정말 존중받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볼 문제이긴 하지만─에 대한 의식은 '역사의 소각장'에서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그저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런 세상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단지 바램일뿐인 것이다. 어느 누가 좋은 유전자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멋진 신세계>는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번역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우선, 헉슬리의 '서문'을 왜 뺐는지 모르겠다. 다른 번역판의 '서문'을 읽어보니 본문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인 것 같던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번역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은 우리나라 번역작품의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1998년에 출간된 2판본임에도 불구하고 맥을 끊는 이상한 단어의 사용과 대화를 문어체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정말 너무하지 않나 싶다. 꼭 번역본의 티를 내야 하는지 번역도 하나의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번역가들의 프로의식이 너무 아쉽다. 더구나 이 책의 번역자는 영문과 교수님이신데, 이 분이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자기 이름만 빌려준게 아닐까 싶다. 만약 이 분이 번역했다면 정말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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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발렌타인
제임스 마이클 프래트 지음 / 다리미디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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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기간 : 2008. 6. 16. ~ 2008. 7. 10.

다소 무거운 책들만 읽다가 머리를 조금 식혀보고 싶었다.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먼지가 뽀얗게 내린 책을 발견했으니 제호도 멜랑콜리한 '라스트 발렌타인', 그리고 좌측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홍보성 글귀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다만 뉴욕타임스가 선정했다는 글귀에 약간 호감을 갖긴 했다.

독서성향상 로맨스 소설을 굳이 내 돈을 들여가면서 사지는 않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증정용으로 받은게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을 완독하는데 25일 걸렸다. 그나마 24일 동안 180페이지읽고, 25일째 되던날 나머지 140페이지를 지하철 안에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어려운 내용의 소설도 아니고 문학성이 있는 소설도 아닌데, 완독기간이 늘어진 이유는 억지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시 책은 억지로 읽으면 부작용이 생긴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선정'이라는 글귀가 무색할 정도로 진부하다. 만일 이 소설이 70년대나 80년대에 출간되었다면 상당히 잘 쓴 소설일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후반에 나온 소설치고는 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친 우연성의 반복, 작위적인 상황 설정,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 스타일의 스토리. 여기저기서 이야기 구조를 조금씩 베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작가의 프로필을 보아하니 이 소설의 작가는 전업작가가 아닐 듯 싶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작가 수업은 했을 듯 한데, 이야기의 뻔한 전개나 표현의 진부함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 였다는 것은 좀 의아한 점이다. 그것도 뉴욕타임스가 선정했다는...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판매부수 조작이 미국에서도 벌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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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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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2. 19. ~ 2008. 3. 9.

크리스챤들이 지탄해 마지 않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작가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나도 비록 크리스챤이긴 하나, 자만심과 독선에 빠져 있고 도대체가 본이 되지 않는 무리들인 한국의 크리스챤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소설을 썼다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관심을 끌 만한 작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대학생때부터 읽고 싶은 소설목록에 항상 있었지만,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제목에 쉽사리 범접할 수 없어 매년 미루어 놓기만 하다가 드디어 책장을 펴보게 된 것이다.

작가가 러시아 사람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콜린 윌슨의 격찬이 책 뒷표지에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일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20여일에 육박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이 책을 읽고 나서 - 물론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은 출퇴근할 때 뿐이지만 - 느낀 점은 결국 인생을 망나니처럼 살았던 노인과 사업하다 망한 이야기를 뭘 이렇게 길고도 지루하게 썼는지.. 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을 떠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살만한 후기겠지만, 나와는 그다지 궁합이 맞지 않는 소설이다.

도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명제가 과연 성립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조용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인생에 부침이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이라면, "이런 삶이 정답이다"라고 과연 누가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으며, "이런 삶이 정답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긴 얘기 아닐까?

물론, 나는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이 소설의 화자가(아마도 작가)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기는 했다. 그러나 실존인물이라는 '조르바'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남자들끼리 농반진반 얘기하는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하는 우스개소리로 치부할 수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조르바의 그런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느낌이 매우 강했고, 거부감 마저 느끼기도 했다. 

진정 조르바의 삶이 '자유로운 삶'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수 있을 만큼 카잔차키스가 동경할 만한 것이었을까? 조르바처럼 인생을 자기 멋대로, 남이야 상처를 받거나 말거나 내 욕정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책임감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부셔버려야 할 족쇄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자유로운 삶인지는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극찬하는데, 왜 나는 별 다른 감동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냥 법학서적이나 추리소설, 판타지 소설이나 읽어야 할 팔자인가..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이신 이윤기 교수님이야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감히 지적하기가 좀 그렇지만,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곳이 많은 편이다.

물론, 역자께서 관형어나 부사어 등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나 스스로 감탄이 나올만큼 번역서 가운데 상당히 수준급에 속하는 것 같기는 한데, 문장을 좀 더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번역해 주셨다면 더 훌륭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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