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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평점 :
요시무라 간이치로 선생 귀하
요시무라 간이치로 선생님.
방금 사스케에게 선생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그 처참한 죽음을 말이죠. 선생은 신센구미 대원복과 갑옷을 단정하게 개켜놓고 이빨이 빠진 낡은 칼로 배를 힘겹게 가르셨습니다. 쉽사리 죽어지지 않던 선생은 결국 목과 눈을 칼로 찌르고 몸에 있는 모든 피를 밖으로 빼낸 후에야 돌아가셨습니다. 선생은 마치 선생의 생애에 할당된 고통의 양을 다 채우지 못한 듯,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제 마음 속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모리오카의 기타카미 강을 범람케 할 것 같습니다. 선생 같은 의인이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곳이 이 세상이라면, 전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당함’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지당하게’ 산 결과가 선생의 고통이라면, 전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과연 정의(正義)란 것이 있는지 전 정말 도통 모르겠습니다.
사실 선생님, 전 정의란 말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혐오하고 냉소했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학살한 많은 행위들이 정의란 이름으로 행해졌으니까요. 선생이 그러셨지요? 무엇을 위한 무사도인지, 정의인지 모르겠다고요. 선생이 살던 시기, 백성들에겐 관군이고 역적 군이고 없었습니다. 그저 눈앞에 들이닥친 굶주림과 추위만이 있을 뿐이었죠? 그럼에도 사무라이들은 사쓰마 조슈가 어쩌고 존왕양이가 어쩌고 하며 백성을 기아의 지옥으로 내몰았습니다. 오히려 정의란 이름으로 동료에게 할복을 강요하고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 말로 무사의 영예이자 정의라며 가난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정의란 이름이 굶어죽는 가족을 위해 탈번한 선생에게 천하의 죄인이란 낙인을 찍었으며, 선생의 가족을 고향땅 모리오카에서 시즈쿠이시로 쫓아냈습니다. 선생의 말씀대로 무엇을 위한 정의이며 무사도인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선생님. 지금이라고 선생이 살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데미안은 잉글랜드의 폭정에 고통 받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해 잉글랜드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어쩔 수 없이 아일랜드를 배신한 어린 소년 크리스를 죽입니다. 아일랜드의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 13세 소년을 총으로 쏴 죽인 겁니다. 선생님. 도대체 아일랜드의 독립이란 대의는 무엇인가요? 왜 그 정의를 위해 형이 동생을 죽이고 그 동생이 또 다른 동생을 죽여야 하나요? 그런 정의가 진정 정의인가요? 지금 한국에서도 모두가 정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가치만이 정의랍니다. 자신의 정의를 무기로 다른 사람의 정의를 탄압하고 억압합니다. 지로에 나리도 난부 번을 지키기 위해, 천황에게 반역한 신센구미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명분을 위해, 선생에게 할복을 명합니다. 아니, 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로에 나리는 정녕 대의(大義)를 위해 소의(小義)를 희생하신 것인가요? 천황에게 복종하는 것,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가족의 일원을 죽여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정의인가요?
하지만 선생님. 누군가 제게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정의가 없는 것이냐고요? 정의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는 결국 아리아 민족 부흥을 기치로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행위나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인을 공격한 한국독립투사들의 행동을 동일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고요. 한 동안 무엇이 정의이고 대의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생의 모습을 보기 전까진 말이죠. 처음에는 선생이 가족을 위해 무사도의 정의를 깨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갔습니다. 아내가 아프고 자식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무사도의 정의는 무엇을 위한 정의냐고 하셨던 내용 말에요. 개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정의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순간 걸리는 것이 있더라고요. 선생은 가족을 보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고 수전노처럼 행동하며 세상의 모욕까지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생이 탈주할 수 있었음에도 패배가 명백한 전쟁터에 남아있었습니다. 소위 정의란 것을 위해서 선생은 한 번도 못 본 막내 아이를 볼 기회를 저버렸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으로 향하던 장남 가이치로에게 돌아가라고 하셨던 선생입니다. 그런 선생이 정의를 위해 가족을 버리시다니요?
하지만 이내 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정의인지 말이죠. ‘지당함’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정의란 허울을 쓰고 개인을 억압했을 뿐, 진정한 정의는 희미하게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단 사실을 전 선생의 모습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이케다 시치사부로가 선생에 대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가 그곳에 서 있었어요. 사무라이라는 허깨비, 인간의 껍데기를 쓴 사무라이라는 허깨비가, 닥쳐드는 새로운 시대 앞을 가로막고 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의를 위하여, 라고 요시무라 선생은 분명하게 말했어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의란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이지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어요./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위하여 요시무라 선생은 싸우고 죽었다. 얘기가 그렇게 되는가요? 요시무라 선생이 단신으로 맞섰던 상대는 천왕도 아니고 관군도 아니고 뭔가 좀더 거대한 불합리 같은 것이었을까요?요시무라 선이 단신으로 맞 불합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맞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의를 가장한 허깨비들이 판치는 세상에 맞서셨습니다. 인간의 껍데기를 쓰시고요. 진정한 정의를 보여주신 거죠. 선생님. 인간이 없는 정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빠진 정의가 바로 허깨비 정의입니다. 미천한 개인도 보호할 수 있는 가치가 바로 진정한 정의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항상 그런 모습을 지키며 살아오셨습니다. 가족을 위해 허울뿐인 정의를 내버렸지만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사이토 하지메 등을 차마 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가족에게 갈 수 있었음에도 탈주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게죠. 임전무퇴의 무사도 정신이란 정의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남은 것이 아닌, 동료들에 대한 인간애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계셨던 것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정의고 대의입니다. 정의를 위해 소의를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키는 정의는 정의일 수 없습니다. 설령 희생시킨다 하더라고 그 정의를 위해 희생한 개개인에게 피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였던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모든 혼란스런 퍼즐이 한꺼번에 정리가 됩니다.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인간의 기본적 정의는 처자식에 대한 의에서 시작된다.’ ‘죽이지 않으면 죽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한다.’ ‘설령 무사도에 어긋나는 것이라도 사람의 길에서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 되겠지.’ 라며 진정한 정의의 모습을 보여준 선생의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의가 진정한 정의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난부 무사라고 생각했다. 사내대장부라고 생각했다. 난부 무사라면, 난부 사내라면, 나의 목숨을 이어주는 밥줄인 난부 백성을 목숨 걸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야 그토록 간절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불볕 내리는 네거리에서 가만히 국화꽃에 파묻혀 있는 너를, 사무라이의 색시가 되게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무사도라는 건 기껏해야 그런 정도의 것이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선생님. 선생님 말씀처럼 정의란 것이 꼭 거대한 가치를 담고있는 것만은 아니네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모든 것이 곧 정의인게죠? 선생님의 모습을 오랫동안 제 가슴 속 한편에 담아두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렇게라도 선생의 혼이 제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선생처럼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그곳에서 장남 가이치로와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