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 1 - 레제르 만화 컬렉션
장 마르크 레제르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올드보이를 보고 친구와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영화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영화 속 인물들도 실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천사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아니꼽게 본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달랐다. 굳이 영화가 어두운 인간의 면모를 다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악한 인간 속에서 산다고 굳이 그 현실을 직시하며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는게 요지였던 것 같다. 논쟁의 끝은 지금에서야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논쟁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둘 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순자처럼 성악설을 주장하는 건 아니란 의미다.)  지금도 인간에겐 악한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특성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이기심의 핵심엔 우리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난 프로이드 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정의한다. 우리 안에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어둡다. 욕망은 파괴적이고 본능적이며,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섹스하고 싶으면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만이 존재하는 현실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는 법칙과 질서를 만들어냈다. 인간은 현실 유지를 위해 좋든, 싫든 사회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시험 때문에 잠을 참으며,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으며, 사회적 안정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을 억누르는 사춘기 남학생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회가 만든 법과 질서는 우리 내부의 욕망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욕망은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절제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절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안의 소위 자아(ego)란 것이 이 조절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욕망도 적당히 억압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법칙과 타협하여 적당히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자아란 의미다. 인간 안에는 결국 어두운 욕망과 사회적 법칙, 그리고 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함께 존재한다. 인간이 악하기만 한 것도, 그렇다고 전혀 악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란 의미다. (사실 프로이드는 욕망 대신 id란 표현을 썼죠. 엄밀히 말해 id는 욕망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제가 그냥 그렇게 이해한 것일 뿐이죠. 이진경씨는 거시기란 번역을 했던데.. 그것도 좀 거시기합니다.^^)
 

시대에 따라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사회적 법칙의 힘의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요즘엔 사회적 법칙의 힘이 욕망의 힘을 압도하고 있다. 욕망은 어두운 것이니 무조건 억압하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욕망도 결국 우리 안의 일부다. 사회적 법칙의 힘이 지나치게 약화됐을 경우 우리 사회가 혼돈에 빠지듯, 욕망이 지나치게 억압되었을 경우 개개인은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개인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여하고 있다. 마치 사회적 법칙만이 옳은 것이며 욕망은 ‘없어야 할 것’, ‘더러운 것’ ‘죄악’ 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 욕망을 사회적 법칙으로 옥죄느라 가끔 참 피곤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안의 욕망을 시원하게 까발린 책이나 영화를 보면 감옥에 갇힌 욕망에게 잠시 외출을 허용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곤 한다. 장 마르크 레제르의 <원시인>이 내겐 갑갑한 이 사회를 잠시 벗어나게 해준 파란 하늘이자 턱 트인 공터처럼 느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원시인>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 법칙이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물론 레제르는 욕망의 추악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사회적 법칙의 힘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우리 안의 분명한 일부분이었던 잃어버린 욕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사회적 법칙은 언어로 이루어졌다. 솔직한 욕망으로 가득한 이 책엔 그래서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압축적인 그림만을 통해 우리 안의 욕망을 가볍고 재밌는 터치로 다룬다. 이런 식이다. 코끼리 한 마리가 농부의 밭을 다 망쳐버린다. 코끼리의 계속된 횡포에 농부는 자살을 한다. 그 때서야 코끼리는 눈물을 흘리며 뉘우친다. 슬퍼하는 그에게 여자친구가 다가온다. 둘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섹스를 마친 코끼린 언제 슬퍼했냐는 듯, 새로운 농장을 망치러 향한다. (채소밭)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선교사. 영업사원이 화장품 하나 더 팔려고 하듯, 그도 원시인에게 선교를 한다. 선교에 성공한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장부에 표시를 하고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한 그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옷을 벗고 이웃의 물건을 파손하고 여성에게 치근덕거린다. 그리고 술에서 깬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선교를 하러 나간다. (선교사) 그의 그림 스타일 역시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한 순간에 그린 것 같은 거칠고 빠른 선, 압축적인 형상화는 우리 안의 욕망을 어둡지 않게 다루기에 매우 적절해 보인다.  

레제르의 만화는 ‘보여주며 말하기’가 강력한 표현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단순하고 거친 레제르의 그림은 억압된 우리 안의 욕망을 살며시 꺼내준다. 꺼내는 방식은 웃음이다. 웃음으로 끌어내기에 오랜 세월 감옥에 익숙했던 우리의 욕망도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동시에 사회적 법칙이 우리에게 주입한 것처럼 욕망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보통 사회적 법칙에 세뇌당한 우리의 자아는 욕망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욕망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 믿기에.) 지금의 난 예전처럼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한 때 악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욕망)이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어두운 부분도 자연스런 우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을 뿐이다.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잠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애마부인을 보았던 과거 선배들의 모습들, 그게 바로 우리의 자연스런 모습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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