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만화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4
성완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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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11년 리치오토 카뉴도란 사람이 ‘영화는 제7의 예술’ 이란 선언을 한다. 이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그럼 나머지 6개의 예술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나머지 6가지 예술은 건축,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이다. 카뉴도는 여기에 20세기 초에 막 탄생한 영화를 새로운 예술 장르에 포함시켰다. 번호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면 또 다른 예술이 탄생하는 소리가 들린다. ‘제9의 예술...’ 1911년 예술가(家)의 7번째 자식이 탄생한데 이어 100여년 만에 9번째 탄생이 진행 중인 것이다. 그 9번째 자식은 만화. 만화가 예술이라니. 어렸을 적 재수를 하기 위해 서울 우리 집으로 올라온 사촌 형은 만날 방에서 만화책을 쌓아놓고 봤었다. 당시 우리 엄마는 그런 형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해댔었다. 그래서 나 역시 몰래 형 방에서 만화를 훔쳐봐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만화가 제9의 예술이라니.
 

 사실 만화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탄생이 조금 찜찜하였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저질 대중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니 말이다. 1896년 2월 16일, 뉴욕의 일간신문 <뉴욕 월드>에 실린 <옐로 키드>와 함께 이 세상에 만화가 태어났다. 만화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상류계급이 발행하는 신문의 논조에 염증을 느끼던 대중들은 <옐로 키드>의 서민적인 유머와 구어체 대사에 환호를 보냈다.’ ‘내용이 쉽고, 코믹하다’ 란 <옐로키드>의 이미지는 이후 만화 전체의 이미지를 결정짓게 된다. 하지만 만화는 말한다. 자신은 충분히 예술가의 9번째 자식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단순하게 쉽게 읽고 즐기는 오락만이 아니라고. (그래서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만화를 Comics란 단어 대신에 ‘함께 섞는다’는 의미의 Comix로 표기하자고 주장한다.)  

실제로 만화란 장르가 지닌 특성은 지난 번 언급한 뮤지컬 못지않게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요소란 바로 만화 속에는 텍스트와 이미지, 즉 문자와 그림(영상)이 공존한다는 사실. 만화는 문자가 등장한다는 면에서 소설이나 시가 갖고 있던 예술적 특성을 표현할 수 있다. 동시에 그림이 있기에 회화가 지니고 있던 특성도 살릴 수 있다. 컷이 나눠진다는 점에서는 영화가 지닌 강점도 드러낼 수 있다. 칸과 칸 사이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성완경씨는 "그림과 말의 상호결합이 낳는 힘의 핵심은 이처럼 '사로잡는 것'과 '잘 알게 해주는 것'이 있다"고 말하며 "'보여주며 말하기'는 모든 예술, 모든 지식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우월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렇다. 만화는 늦게 태어난 장르이기에 가능한 강점, 다시 말해 기존의 예술이 지니고 있던 특성들을 적절하게 융합하여 만들어낸 강점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만화의 내용은 조금 저질스럽지 않냐고. 물론 그런 만화도 있다. 하지만 성완경의 <세계만화>에 등장하는 만화들을 보면 만화가 또 다른 형태의 문학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인문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여 문화 발전을 돕는 작품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면 기존의 만화들도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조지헤리만의 <크레이지 캣>은 시적인 대사로 프로스트의 시를 읽는 듯한 감동을 제공한다. 에르제의 <땡땡의 모험>은 이야기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문명을 소개해주는, 인문서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칠레의 현실을 비판한 네루다처럼 브레시아의 <빼라무스>는 불합리한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를 고발한다. 로버트 로웰이나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현대 문화를 비판했듯, 로버트 크럼이나 장 마르크 레제르는 기존의 주류문화가 지닌 보수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 문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클레드 브레테셰의 <욕구불만자들>은 시몬드 보부아르의 작품 못지않게 남성 중심의 사회에 반발한다. 그 밖에 만화는 동시에 그 사회의 문화를 읽는 창이 되기도 한다. <아스테릭스>엔 프랑스인의 기질이 잘 나타나있으며 <슈퍼맨>류의 미국 영웅 만화 속에 나타난 미국인들의 세계관이 드러나있다. 

  박성봉 교수는 “예술을 존재의 만남”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엄마의 김치찌개에서 익명화되어가는 자신의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면 그 김치찌개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술자리에서 서투른 음정과 박자로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순간 고마운 마음과 함께 존재의 만남이 이뤄진다면 그 형의 노래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이 세상에는 널린 것이 예술이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9의 예술이라는 만화의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제9의 예술이란 이름을 얻고 태어난 아기 예술답게 만화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신대륙이다. 우리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만화를 접한다면 더 잦은 존재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만화를 숨어서 볼 필요는 없다. 만화는 예술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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