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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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린 분명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좀 더 유식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 쾌감을 느낍니다. 지식을 전달해주는 대표 주자는 책입니다. 지적인 책들은 책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리 눈을 켜고 주변을 둘러봐도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감세와 경제 성장의 관계,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쾌락의 의미, 노동의 소외를 불러오는 분업, 차이와 동일성에 관한 들뢰즈의 사상 등은 평소에 자주 고민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을 ‘땅을 파는 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땅 밑에 숨겨져 있던 지식들을 직접 파헤쳐 우리 눈에 보여준다는 의미죠. 반면 공감의 즐거움을 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누군가가 비슷하게 이야기할 때, 우린 내 생각을 누군가가 이해해준다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커피숍에서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 때, ‘어머, 맞다 맞어 얘’라며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들은 신문을 보며 이야기를 못한다는 사실, 답문을 하지 않는 남자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 성공하기 위해선 철저히 다이어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 등에 대한 책들이 대표적이죠. 공감을 전달해주는 책을 ‘가리키는 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희미하게 보이던 사실들을 손으로 가리켜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의 기준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이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책도 마찬가집다. 유용한 정보를 주는 지적인 책은 좋은 책이겠죠. 섬세한 공감으로 감동을 주는 책 역시 고대 그리스 기준에 위배되지 않는 좋은 책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좋은 책을 고르는 법은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죠. 예를 들어 들뢰즈의 책엔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레스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들뢰즈가 제공해주는 정보는 유용한 정보가 아닙니다. 땅 밑 1cm 밑에도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들뢰즈의 책은 10만km의 내용을 보여주는 셈이거든요. 결국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은 자칫 너무 난해하다는 어려움에 봉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 앎의 즐거움은 커녕, 스스로의 무식함에 대한 좌절을 겪게 될 겁니다. 가리키는 책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감수성이라곤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수준인 사람에게 ‘이별은 슬프다’ ‘사랑은 달콤하다’ 따위의 뻔한 가리킴은 전혀 공감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을 흘리는 습자지 감수성은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 수 있고요. 시력이 0.1이라 눈 앞의 돌멩이만 간신히 보는 사람에게 섬세한 시집은 200m 전방에서 흔들리는 물망초의 모습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애매한 감수성과 지식으로 고민하는 분께 작가 한 분을 추천해드립니다. 바로 알랭드보통입니다. 알랭드보통은 앎의 즐거움과 공감의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해주는 작가입니다. 보통의 세상은 풍부한 인문, 예술 지식의 기반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깊이 있는 사실들이 글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보바리 부인과 젖소부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보통이 전하는 인문 예술학의 향연은 함께 즐길 수 있는 파티입니다. 동시에 더듬이라고 부르고 싶은 탁월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주변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사물들을 가리켜, 그곳에서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사랑에 실패해본 사람이라면, 여행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나 <여행의 기술>을 보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은 땅을 파는 작가일까요, 아니면 가리키는 작가일까요. 전 페인트를 뿌려대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보통은 인문학, 예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땅 위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형태를 생생하게 복원해냅니다. 제 눈에 보통의 작업은 마치 공기 중 위에 부유하는 투명한 사물에 페인트를 뿌림으로써 그 형태를 잘 보이게 만들어 주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인문학적 지식이 페인트라면,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페인트를 뿌리는 그의 손입니다. 때문에 보통의 글을 읽으면 앎의 즐거움과 공감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보통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연애 소설입니다. 물론 말이 연애소설이지, 실제로 남성과 여성, 더 나아가 인간의 속성을 분석한 책입니다. 사랑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말초적인 차이점을 인식하기에 앞 서, 인간 특유의 성향과 본성을 이해해야만 성공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랑일까>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속성을 이야기합니다.

-A가 B를 바라보면 B는 A의 눈길에 담긴 생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A가 B를 작고 사랑스럽고 피부가 보드라운 천사라고 생각하면 B는 작고 사랑스럽고 피부가 보드라운 천사가 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A가 B를 2+2도 못하는 천하의 멍청이로 생각하면, B는 그 생각에 맞게 자신의 능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어, 결국 2+2=6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 (=>비단 남녀 관계 뿐만 아닌,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이죠?)

-그녀에게는 순수한 의식, 순수한 자신,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남았다. (=> 때문에 우린 모두가 돈을 보고 하는 사랑, 외모를 보고 하는 사랑 등이 옳지 못한 사랑이란 걸 압니다. 현실에서는 존재 때문에 하는 사랑이 매우 적기 때문에 사랑 자체가 영속적으로 즐겁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랑 이렇게 있으면 정말 편안해요.”/ 그도 비슷한 말로 대답했으리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그 남자는 호응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본드 영화를 하죠?”/ 맞은 사람도 없고, 멍이나 비명도 없었지만, 권력의 균형이 에릭 쪽으로 확 쏠렸다. (=>스탕달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사랑 크기가 똑같지 않는 이상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행복한 사랑을 위해선 비슷한 크기의 사랑이 중요하죠.)


알랭드 보통의 책을 지금까지 4권 읽었습니다. 언제나 중간 이상의 즐거움을 줍니다. 당연한 결과죠. 웃기거나, 감동적이거나, 새로운 사실을 제공해주는 것이 좋은 수사학이라는 그리스의 기준을 고려할 때, 유머감각이 있으면서도 방대한 인문 예술학적 지식을 자랑하는 풍부한 감수성의 소유자 알랭드보통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그의 인기를 등에 업고 그의 전작들이 빠르게 번역되고 있는데요. 과거의 책들을 다 읽기 전에 그의 최신작이 나오길 바랍니다. 손꼽으며 차기작을 기다리는 작가가 또 한 명 늘었는데요. 이래서 독서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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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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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만 있으면 ‘빠져들게’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프롬의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기술이 아니다’라고 답변한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뿐인데, 사랑에 대해 왜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냐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고 아파하지만, 사랑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기술인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지식을 습득하고 배워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대해 막연히 ‘그건 원래부터 할 수 있다’ ‘그건 굳이 배울 필요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에 대한 착각도 그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 때문에 놀러 가는 일인 여행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거의 없다. 태국이면 태국, 일본이면 일본, 장소만 정해서 떠나면 여행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통해 사랑이 고난도 기술임을 밝혔듯,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을 통해 여행이야말로 지식을 습득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여행을 단순한 놀이 정도로 생각한 내 여행 경험을 통해, 여행의 진정한 기술을 되짚어 본다.


1.출발-기대에 대하여

여행의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007년-일본 오사카/교토/도쿄 (나고야돔 포함)

처음으로 혼자 한국을 나섰다. 출발 전 세 가지 낭만적인 기대가 있었다. 첫 번째, 업무에 지친 그대여, 떠나라! 맥주를 마시며 나고야돔에서 이승엽/이병규의 경기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피로가 절반은 풀리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신간센 열차 안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일본 근교의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니 혼자 하는 여행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끝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에 빠질 수 없는 기대. 이국적인 장소에서 이국적인 이성과의 우연한 만남. 몇 년 전 개봉했던 비포선라이즈의 영향탓에, 일본 여성의 접근을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숙소를 찾아 육교를 다섯 번 오르내리며 반나절을 헤맸고, 나고야행 열차를 놓쳐 헐레벌떡 간신히 나고야 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벗 삼아 멋진 글을 쓰기 위해 가져간 노트북은 어깨에 엄청난 압박을 가하며 육체의 피로를 가중시켰으며, 이국적인 여성의 접근은커녕, 3일이 넘게 아무와도 10초 이상 대화를 나누지 못해 입에선 쉰내가 나고 있었다.


여행의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이것이 여행을 출발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분명 예기치 못한 돌발 사고가 있을 수도 있고, 길을 헤매다 하루를 허비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여행의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들이다. 그럼에도 낭만적인 기대에 둘러싸인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일들을 겪고 난 후 ‘이번 여행을 최악이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복권 당첨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은 결코 낙원으로의 도피가 아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자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우린 항상 출발 전에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여행 전, 여행지에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을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행 전 기대가 주는 낭만은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지 모르니 말이다.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여행의 가장 즐거운 시기는 떠나기 전, 여행을 준비할 때라고.  



2.동기-호기심에 대하여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1999년-프랑스 파리를 포함한 서부/중부 유럽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었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주도적으로 여행을 기획했으며, 마침 방학 때 특별한 계획이 없던 난 다 준비된 밥상에 숟가락만 살짝 올리듯 무리에 합류했다. 유럽에 간 지 약 20일째 되던 날, 파리에 도착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둘러본 뒤,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우와 이 그림 좀 봐. 진짜 크다’ ‘야. 이거 미술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초반부터 난 루브르의 전시품 앞에서라면 나올법한 1차원적 감탄사들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뻔한 감탄사는 ‘잘 그렸네’ ‘아까 본 거랑 비슷하다’와 같은 맥 빠진 반응으로 대체됐고, 급기야 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모나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야 지겹다. 전부 똑같아. 모나리자만 보고 가자’ 그러나 모나리자 주변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선 줄을 서야 할 것 같았고, 그마저도 귀찮아서 다시 뛰어서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당시 루브르 박물관 구경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호기심이 충족되며 발생한다. ‘열대 지역의 어류들은 어떤 모양일까’ ‘그곳의 산호초들은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라고 있을까’ ‘바다는 얼마나 투명할까’와 같은 호기심을 갖고 남태평양의 섬을 찾는 것과 남태평양 5박6일 패키지여행의 즐거움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호기심은 언제나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원동력이며, 여행은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여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결국 호기심과 여행은 일종의 공생관계인 셈이다.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독일의 자동차 박물관과 BMW 전시관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고, 미술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이나 프라도미술관 관람이 재밌을 것이다. 결국 여행의 동기는 호기심이고, 여행의 준비는 호기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패키지 단체 관람은 지리적인 논리에 따라 미술관과 자동차박물관을 동시에 제공한다.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알랭드 보통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3.풍경 & 예술-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2009년-미크로네시아 연방 축섬

얼마 전 출장을 다녀왔다. 미크로네시아 연방국의 작은 섬 축(Chuuk). 축은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으로 투명한 바다와 푸른 하늘 해변가 곳곳에 야자나무가 자라고, 바다 밑엔 다양한 모양의 산호초가 자라는 지상 낙원 같은 곳이다. 당연히 주변에선 부러움이 쏟아졌다. 실제로 축에서 맞는 첫 아침, 축의 하늘과 바다는 과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뒤 해가 떠 있는 동안, 다시 말해 축이 자신의 이국적인 광경을 과시하는 동안엔 하루 종일 일을 했고, 해가 진 후, 다시 말해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축에 어둠이 깔린 동안엔 쉬었다. 출장은 월~금이었고, 실질적으로 잠시 짬을 내 바닷가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망중한을 즐기거나 스노쿨링을 즐길 순 없었다. 축의 이국적인 풍경은 짧은 스틸 화면으로 스쳐지나갔으며, 귀국해서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선명한 축의 이미지를 흐리멍텅하게 만들었다. 귀국한 뒤, 주변에선 여전히 축 여행(?)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축의 이미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우린 그 아름다움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업무를 위해 떠난 여행에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설 여유조차 없었다. 아름다움을 가슴이 감상하지 못하는 데, 그 대상이 모나리자든, 그랜드 캐년이든, 어떤 감흥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일로 떠난 여행은 즐거울 수가 없다. 일반 여행도 마찬가지다. 주마간산식 여행을 하거나, 중요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사라진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예술과 풍경을 마음에 제대로 담아두기 힘들고, 여행의 즐거움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만다. 사회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이 성급한 여행을 비판했다.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진에 대해서도 존 러스킨은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됐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멋진 풍경과 예술 작품 앞에서 사진 플래시를 터뜨리기 전, 가만히 가슴 속에 멋진 이미지를 투영시켜보자.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잔상은 깊게 가슴 속에 박힌다. 그 때서야 비로소 여행의 참 알맹이가 주는 즐거움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발에서 여행지 감상까지, 여행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물론 외적인 기술이 있을 수도 있겠다. 외국에선 어떤 버스를 타야하는지, 숙소는 어디가 좋은지 알아내는 경험의 기술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기술이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던, 그 곳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내 삶의 자양분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비로소 여행은 삶의 커다란 에너지원이 된다. 서점 여행 코너에 가보면, 수 백 권이 넘는 여행 서적이 있다. 대부분이 어느 곳에서 어디를 어떻게 이용하라는 외적인 기술에 관한 책이다. 내적인 기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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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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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 회사원 친구 3명과 술을 마셨다. 그 중 S 전자에 다니는 친구 한 놈이 갑자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회사 일이라는 게 결국은 상사 눈치 잘 보고, 적절한 코멘트 달고 하는 거야. 내가 헝가리로 출장 간 적이 있거든. 작은 계약 건이었는데, 처음에 난 거기 선배들한테 인정받으려면 멋진 프레젠테이션으로 계약 따고, 악수하고, 뭐 그런 걸 상상했었거든. 근데 다 필요 없더라고. 헝가리 담배가 엄청 비싸거든. 면세점에서 담배나 두둑이 사들고 가면 바로 인정이야.” 그렇게 친구는, 꽤 긴 시간 직장인이 밥벌이를 하며 겪는 비루함에 대해 토로했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근데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우리 같은 직장인은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할 수밖에 없어. 죽을 때 까지 스스로를 개발해야 되는 거지. ” 그 순간, 이야기는 밥벌이의 비루함을 거쳐, 직장인의 성공방법에 대한 강의로 급격히 전환되고있었다. ‘아니 이 바닥에서 인정받는 게 눈치 빠르게 윗사람 대하는 거라면서, 결론은 끊임없는 자기혁신이라니.’ 의아했다. 동시에 궁금했다. 친구의 눈빛이 너무 단호해 묻진 못했지만 말이다. ‘얌마, 너 근데 행복하니?’


결국 여의도 증권가에 다니는 친구에게 물었다. S 전자 친구가 자기 혁신을 이야기할 대 가장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였다. “야. 근데 자기 혁신은 왜 하는데? 뭘 위한 자기 혁신이냐? 오래 회사에 버티려고? 그렇게 자기 혁신 열심히 해서 회사에 오래 살아남으면, 그 다음은 뭐냐? 돈 많이 버는 거? 그럼 행복한 거냐?” S 전자 친구는 ‘이런 철없고 어린 녀석을 봤나’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질문을 외면했다. 증권가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눈에, 난 세상을 너무 모르는 숙맥이었다. 친구들은 축구장 안에서 어떻게 주전 선수가 되고, 골을 넣어야 할런지 고민하고 있는데, 난 그 친구들에게 축구는 왜 하고, 골을 넣으면 뭐하냐고 반문하고 있었다. 대화가 이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자리를 일어날 무렵, 고개를 끄덕이던 증권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 질문을 다 이해하진 못하겠는데, 자기 혁신 계속하며 사는 게 즐겁진 않을 거 같다.”


분명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공기처럼 당연한 제도다. ‘자본주의는 좋은 제도인가?’란 질문은 ‘인간은 왜 사는가?’란 질문만큼이나 막연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왜 굿모닝인가?’란 질문만큼이나 황당하다. 실제로 자본주의 가라사대. “자본주의의 세례가 너에게 아이팟과 PMP의 은총을 내리리니, 의심하지 말고 너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본주의를 따르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대로 이루어 질 지어니, 다만 열심히 화폐를 축적하라.” 분명 자본주의는 선택의 자유를 넓혀줬다. 이제 돈만 있으면 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는 행복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 것일까? 왜 나도 자기혁신을 주장하던 S전자 친구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까?


친구는 끊임없는 혁신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다. 도태되는 순간 수입은 끊기고 화폐의 은총 속에 마음껏 누리던 자유도 사라진다. 계속 소비하기 위해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혁신을 멈춰선 안 된다. 궁극적으로 우린 끊임없이 소비하기 위해 노동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계급을 생산수단이 결정한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소비가 계급을 결정하는 사회다. 루이비똥을 사는 사람과 동대문 가방을 사는 사람, 벤츠를 타는 사람과 마티즈를 타는 사람은 같은 월급을 벌더라도 다른 계급에 속한다. 결국 높은 계급에 도달하기 위해선 비싼 제품을 사야하고, 비싼 제품을 사기 위해 노동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친구 표현에 따르면 자기 혁신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노동의 강도를 높이고 자기 혁신을 멈추지 않는 일은 고되다. 고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건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이다. 소비를 하고 나니 심신의 피로가 풀린다. 노동자들은 또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동의 소외에서 오는 괴로움은 구찌 명품백과 아우디가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의 구원은 찰나적이다. 반면 노동의 소외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길다. 구찌 백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짧지만, 김 부장의 갈굼과 단락의 줄을 맞추는 문서 작업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만약 문서의 줄을 잘 맞추고 김 부장의 갈굼에도 실실거린 결과물이 윈도우나 맥북 정도라도 되면 노동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견딘 갈굼과 잡일의 고통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도통 눈에 보이질 않는다. 난 무얼 위해 일을 하는 걸까. 결과물이 사라진 노동은 결국 소외의 고통을 안겨준다. 분업이 더욱 고도화된 지금, 노동의 소외가 주는 고통은 마르크스의 시대보다 심하면 심하지 절대 덜하진 않다.


물론 노동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만약 S전자 친구가 소비에 대한 열망을 조금만 줄인다면, 자기 혁신에 따른 고통도 줄일 수 있다. 구찌 백에 대한 미련을 조금만 줄인다면, 김 부장의 갈굼을 참고 견딜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도 밥벌이는 힘들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쾌락을 강조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얻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기들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변덕스러운 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위해, 아테네 상업 세계의 고용 관계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고, 독립을 누리는 대신에 보다 검소한 생활방식을 수용했다.” 그 결과 에피쿠로스는 자유의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소비를 줄이고 노동의 피로를 줄여라. 말이야 쉽다. 하지만 알고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S전자 친구는 결국 자기 혁신에 대한 고통을 견뎌낸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DSLR이 나오고, PMP가 나오고, 터치 폰이 등장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들 없이 살 수 있었지만, 상품이 나온 지금 첨단 기기들을 욕망한다. 만약 최신 상품의 홍수를 에피쿠로스 학파가 경험했다면, '이봐. 난 어제 부터 일을 시작했다네. 에피쿠로스는 자네가 잘 지키게'하고 떠나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게다.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허영심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허영심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면 소비에 대한 화수분 같은 욕망이 탄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고, 명품 백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허영심 때문에, 우린 수많은 백화점과 광고,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는 상품의 전열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집어등의 강력한 불빛을 보고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오징어처럼 우리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불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나오는 문장이다. 노예는 스스로 노동을 그만둘 수 없다. 주인이 시키면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현대의 노동자들 역시 노예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현대인은 소비를 한다. 소비는 노예의 삶을 행복하게 바꿔놓지 못한다. 오히려 고대의 노예가 그랬듯, 우리도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무수히 상처받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하는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당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자본주의가 당연히 따라야 할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냥 자기 혁신해야 한다며 굳은 의지를 다지며 자본주의가 주는 상처를 고스란히 감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우리 모두에겐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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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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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입대 전까지 그냥 살았습니다. 시간이라는 커다란 조류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는 방향대로 떠내려가는 플랑크톤 인생이었죠. ‘나’라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당시, 가장 최근에 읽은 책 목록에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 숙제를 위해 읽은 ‘어린왕자’나 ‘갈매기의 꿈’이 올라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책을 읽지 않으니 생각도 없었고, 절 둘러싼 환경에 무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의 강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살다 군에 입대했습니다. 일과 후 남는 시간이 무료해 책을 읽었습니다. 소설, 중고생용 철학서, 그리고 칼럼모음집 등을 주로 읽었습니다. 2년간 나름 독서인으로 성실히 살았습니다. 제대할 무렵 절 둘러싼 세상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도 했고요. 고민을 하자 시간이란 강이 절 어디론가 정신없이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제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생각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때로 강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세상을 끊임없이 둘러보고, 시간의 강 속에서 부유하는 제 위치를 인지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후 좀 더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됐습니다. 저만의 개똥철학도 형성됐습니다.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회의 문제점도 인식했고요. 시간의 강을 부유하던 플랑크톤은 서서히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몸짓하는 작은 피라미로 성장했다.


보통 플랑크톤에서 피라미로 성장하는 과정엔 외부의 환경 변화가 영향을 미칩니다.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망하고, 사랑하던 여자 친구가 날 떠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외톨이 생활을 경험하고,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손에 기름을 묻혀야 했고 등등. 잔잔했던 시간의 강에 파문이 일어나면, 플랑크톤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주변 환경은 플랑크톤에게 고민을 강요합니다. 고민 속에서 플랑크톤은 나와 세상을 인지하게 되고, 피라미를 거쳐 숭어나 연어로 성장해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극히 평온한 강가에서 살아갑니다. 피라미가 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성인 플랑크톤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고민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때문에 성인 플랑크톤은 조류에 따라 사고합니다. 조류가 오른쪽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이면 왼쪽으로 생각합니다. 기존의 사고를 고스란히 체화합니다. 자연히 성인 플랑크톤은 사회의 주류적 사고를 형성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은 경쟁과 효율성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도도하게 가로지르는 강은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약자들은 결국 경쟁에서 도태한 패자로 지목하고, 그들의 아우성은 경쟁이 가져 온 사회의 효율성을 발목 잡는 행동으로 규정합니다. 그 강 속에서 자라난 성인 플랑크톤의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내 발목을 잡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적 행동이고, 공장을 점거한 쌍용노동자들의 절규도 회사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을 읽었습니다. 그는 학창시절 재일교포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겪었습니다. 나름 그가 머문 강가에 큰 파문이 인 셈이었죠. 요동치는 강물 속에서 그는 고민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성장해 갔습니다. 그 시절을 겪은 고민을 통해 강 교수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고민이 갖는 힘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를 체험한 것으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말 “호모 페이션스(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를 인용하며, 고민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책은 돈, 사랑, 앎, 청춘, 노동 등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고민의 항해에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동참합니다. 그가 전하는 고민의 내용은 체계적이지 않지만,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는 있습니다. “자기의 성만을 만들려고 하면 자기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고민했던 지식인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베버는 고민을 통해 시대의 거친 격류를 멈추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고민의 힘은 거기에 있습니다. 고민은 자신과 세상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동시에 나와 세상을 연결해줍니다. 세상과 연결된 나는 나만의 성공보다는 함께의 성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회의 숨은 약자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게 되고요. 자연히 세상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떨까요. 세상은 점점 정글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 방송국에선 500명의 계약직이 해고했습니다. 쌍용차에선 해고된 노동자들과 사측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극장에선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대한뉴스가 부활했습니다. 검찰은 개인의 이메일을 조사, 공개하며 한 방송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은 차단된 지 오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함께 잘살자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직 정글 속에서 나만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변에 어떤 참극이 벌어지건 묵묵히 나만의 길을 가는 플랑크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강이 워낙 탁하기도 했지만, 무수한 플랑크톤들도 피라미로 성장하려는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 번쯤이라도 경쟁을 강요하는 도도한 흐름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일어나 저항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비슷한 시기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읽었습니다. 글쓰기를 위해 읽은 책이었지만, 동시에 이외수 선생이 깨달은 생각을 적어놓은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내용입니다.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놈이 나쁜 놈일까. 나는 딱 한 가지 부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나뿐인 부류다. 그러니까 나뿐인 놈이 바로 나쁜 놈이다.” 전 고민 없는 플랑크톤은 나뿐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뿐인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 문제들도 늘어나게 되고요. 적어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급식 예산이 절반으로 줄어 굶는 초등학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안철수씨가 출연한 무릎팍도사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사를 나오면서 주식을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습니다. 회사의 성공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직원 모두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무릎팍 도사에 나왔던 가수 비가 떠올랐습니다. 비는 피나는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주변의 열악한 여건도 노력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는 불가능은 없다며 노력하면 모든 것은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공에 대한 대조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안철수 교수가 생각하는 성공의 밑바탕엔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 구조 같은 주변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 비의 성공의 토대엔 개인의 노력밖에 없습니다. 전 후자의 생각은 위험한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패자의 비겁한 변명으로 돌릴 수 있다는 위험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의 성공은 안철수 교수가 말한 대로 한 개인의 역량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세상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부패하고 비정상적이라면, 그 세상에 얽힌 개인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에디슨, 퀴리부인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란 우스개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만 잘했기 때문에 수능점수가 낮아 대학에 못 갔을 것이고, 에디슨은 특허 절차가 워낙 복잡해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퀴리부인은 여자라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을 것이란 내용인데요. 과장된 면이 있지만 분명 한 개인의 성공이 세상의 모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농담입니다. 분명 ‘나’를 위해서라도 함께 잘 사는 고민은 필요해 보입니다.


우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은, 절대 자신과 무관한 달나라가 아닙니다. 고민을 하게 되면 좀 더 시야가 넓어집니다.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이제 더 멀리 봐야 할 때입니다. 무수한 동료들이 해고되더라도, 그 해고 명단에 나만 없으면 괜찮다는 사고는, 언젠가 나도 동료처럼 억울하게 해고될 수도 있다는 사고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비정규직은 나보다 무능한 인간이 아닌, 비정상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받는 억울한 인간이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현재의 조류 속에서 나와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한다면 나뿐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고민을 통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플랑크톤의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던지십시오. 고민이야 말로 어둠밖에 남지 않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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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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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이란 말을 참 많이 씁니다. ‘내 생각엔’ ‘내가 볼 땐’ ‘내 말은’ ‘상식적으로’ ‘솔직히’ 등등. ‘솔직히’나 ‘상식적으로’도 제가 하는 말을 강조해주는 수식업니다. 솔직해봤자, 더욱 순도 높은 ‘내’의견이 나올 뿐이고, 상식을 들이대 봤자 그 상식은 ‘내’ 상식일 뿐이거든요. 전 언제나 ‘나’를 강조합니다. 아내는 그런 제 말투엔 ‘제 뚜렷한 주관’과 함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나는’ ‘내 생각엔’ ‘상식적으로’를 강조하면 할수록, 상대의 주장이나 감정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어머니도 가끔 제게 말씀하십니다. ‘넌 논리적이고 정확한 데, 감정은 좀 메마른 것 같아.’ 네 동생은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 어디가 아파? 괜찮아? 많이 아파”라고 말하는 데, 넌 “병원 가봤어? 병원에 가야지. 병원 빨리 가봐”라고 말해’. 그럼 전 이렇게 대꾸합니다. ‘엄마. 나는 말이야. 솔직히 병원에 안 간 엄말 걱정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물론 대꾸 과정에서 또 다시 ‘나는’으로 시작하는 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늘어놓고 맙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과연 옳긴 옳은가 봅니다.


솔직히(엇, 또 쓰고 말았습니다.) 전(이 말은 솔직히와 뗄 수 없는 단어죠.) 아픈 사람에게 병원 가라는 말이 가장 합리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이 단어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많이 쓰는 논리적 단어입니다) ‘엄마가 아프다’란 말에 ‘병원가라’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죠.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분명 어머니는 병원 가는 법을 몰라서 하는 얘긴 아니었을 겁니다. 초등학생도 아프면 병원 간다는 사실을 알거든요. 오히려 ‘엄마가 아프다’란 말 뒤엔 ‘엄마가 아프니 너도 함께 걱정해주지 않으련?’이란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아픔을 함께 해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하지만 전 초등학생도 아는 논리적 정답을 제공해놓고 의기양양합니다. 예전에 아내와도 이 문제로 종종 다투곤 했습니다. 한 때 취업 실패로 괴로워하던 아내는 1년 더 놀면서 입사를 준비해야할지, 아니면 작은 회사라도 일단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전 “그 직업을 도저히 포기 못할 것 같으면 한 해 더 하는 거고, 네가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다면 일단 취업하고 보는 거지”라는, 마치 “지금 상황에서 투수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직구 아니면 변화구입니다.”라고 말하는 야구해설위원처럼 뻔한 말을 냉정하게 던진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자신의 심정을 누군가가 이해해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전 논리적 해답을 제공하는 데 그쳤습니다. 감정적 이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제가, 다름 사람의 마음에 종종 비수를 꽂는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입니다.


영국의 젊은 작가 마크 해던이 쓴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보며 제 행동을 떠올려봤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단점이 아닌, 질병 또는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자폐 증세를 보이는, 크리스토퍼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퍼는 논리적,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분야에선 천부적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어떠한 스킨십도 거부하는 소년입니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마치 자폐증 아이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자폐아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을 놀랍게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보면 크리스토퍼의 행동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실 크리스토퍼와 우린 서로 다른 원칙 속에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크리스토퍼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생각에 관심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린 크리스토퍼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외면합니다. 일반인들이 자폐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됩니다. 영화 <레인맨>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모르는 형 레이몬드 배빗(더스틴 호프만). 하지만 오직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는 동생 찰리(톰크루즈) 역시 형의 감정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찰리 역시, 어떤 면에선 자본주의사회가 만든 중증자폐아일지도 모릅니다. 감정적 이해를 구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논리적 정답을 제공해주고 자신의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하는, 더 나아가 ‘내가 해답을 줬는데도 넌 왜 괴로워하니’라며 상대 감정을 할퀴는 제 모습 역시 개인주의 사회가 만든 질병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전 저와 같은 현대인의 증세를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질병입니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에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화내고 싶어도 화내지 못하는 크리스토퍼의 행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크리스토퍼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한층 성숙해집니다. 타인의 감정에도 예전보다 관심을 나타내고요. 그럼에도 전 시종일관 크리스토퍼가 보여주던, 자기중심적 사고가 참 무서웠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소통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이동합니다. 소통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부를 수 없겠죠. 인간의 특징에서 ‘사회적 동물’이 사라진다면, 인간이 유지해온 사회와 문명도 지속될 수 없겠고요. 오직 혼란만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의 무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은 이미 개인의 질병을 넘어 사회를 좀 먹는 질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 가정에서 ‘상식적으로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니. 난 이해가 안 된다’라며 아내를 타박하는 환자들이 목격됩니다. 비단 가정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도 현재 서민들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거든요.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전경차로 소통의 광장을 차단해버립니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보면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행동 원칙을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중 몇 개만 소개합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게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때린다' 얼마나 많은 사회 지도자들이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세에 시달리는 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에서 크리스토퍼는 한 단계 성장합니다. 영화 <레인맨>의 두 주인공도 우애의 감정을 깨닫게 됩니다. 선천적으로 이해 능력이 부족했던 크리스토퍼와 레이먼드의 소통능력이 향상된 것입니다.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희망의 작은 불빛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은 불치병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일단 감정 이해 부족증세를 보이는 저부터 변해야겠습니다. ‘나는’ ‘내 생각엔’ ‘내가 볼 땐’과 같은 말부터 줄여봐야겠습니다. 제 상식에 비추어 남의 감정을 재단하는 일을 그만둬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후천성 감정 이해 부족증에 시달리고 있는 높은 분들도 울부짖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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