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만 있으면 ‘빠져들게’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프롬의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기술이 아니다’라고 답변한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뿐인데, 사랑에 대해 왜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냐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고 아파하지만, 사랑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기술인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실 지식을 습득하고 배워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대해 막연히 ‘그건 원래부터 할 수 있다’ ‘그건 굳이 배울 필요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에 대한 착각도 그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 때문에 놀러 가는 일인 여행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거의 없다. 태국이면 태국, 일본이면 일본, 장소만 정해서 떠나면 여행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통해 사랑이 고난도 기술임을 밝혔듯,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을 통해 여행이야말로 지식을 습득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여행을 단순한 놀이 정도로 생각한 내 여행 경험을 통해, 여행의 진정한 기술을 되짚어 본다.


1.출발-기대에 대하여

여행의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007년-일본 오사카/교토/도쿄 (나고야돔 포함)

처음으로 혼자 한국을 나섰다. 출발 전 세 가지 낭만적인 기대가 있었다. 첫 번째, 업무에 지친 그대여, 떠나라! 맥주를 마시며 나고야돔에서 이승엽/이병규의 경기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피로가 절반은 풀리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신간센 열차 안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일본 근교의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니 혼자 하는 여행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끝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에 빠질 수 없는 기대. 이국적인 장소에서 이국적인 이성과의 우연한 만남. 몇 년 전 개봉했던 비포선라이즈의 영향탓에, 일본 여성의 접근을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숙소를 찾아 육교를 다섯 번 오르내리며 반나절을 헤맸고, 나고야행 열차를 놓쳐 헐레벌떡 간신히 나고야 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벗 삼아 멋진 글을 쓰기 위해 가져간 노트북은 어깨에 엄청난 압박을 가하며 육체의 피로를 가중시켰으며, 이국적인 여성의 접근은커녕, 3일이 넘게 아무와도 10초 이상 대화를 나누지 못해 입에선 쉰내가 나고 있었다.


여행의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이것이 여행을 출발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분명 예기치 못한 돌발 사고가 있을 수도 있고, 길을 헤매다 하루를 허비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여행의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들이다. 그럼에도 낭만적인 기대에 둘러싸인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일들을 겪고 난 후 ‘이번 여행을 최악이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복권 당첨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은 결코 낙원으로의 도피가 아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이자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우린 항상 출발 전에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여행 전, 여행지에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을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행 전 기대가 주는 낭만은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지 모르니 말이다.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여행의 가장 즐거운 시기는 떠나기 전, 여행을 준비할 때라고.  



2.동기-호기심에 대하여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1999년-프랑스 파리를 포함한 서부/중부 유럽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었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주도적으로 여행을 기획했으며, 마침 방학 때 특별한 계획이 없던 난 다 준비된 밥상에 숟가락만 살짝 올리듯 무리에 합류했다. 유럽에 간 지 약 20일째 되던 날, 파리에 도착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둘러본 뒤,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우와 이 그림 좀 봐. 진짜 크다’ ‘야. 이거 미술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초반부터 난 루브르의 전시품 앞에서라면 나올법한 1차원적 감탄사들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뻔한 감탄사는 ‘잘 그렸네’ ‘아까 본 거랑 비슷하다’와 같은 맥 빠진 반응으로 대체됐고, 급기야 나는 루브르 박물관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모나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야 지겹다. 전부 똑같아. 모나리자만 보고 가자’ 그러나 모나리자 주변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선 줄을 서야 할 것 같았고, 그마저도 귀찮아서 다시 뛰어서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당시 루브르 박물관 구경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호기심이 충족되며 발생한다. ‘열대 지역의 어류들은 어떤 모양일까’ ‘그곳의 산호초들은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라고 있을까’ ‘바다는 얼마나 투명할까’와 같은 호기심을 갖고 남태평양의 섬을 찾는 것과 남태평양 5박6일 패키지여행의 즐거움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호기심은 언제나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원동력이며, 여행은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여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결국 호기심과 여행은 일종의 공생관계인 셈이다.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독일의 자동차 박물관과 BMW 전시관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고, 미술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이나 프라도미술관 관람이 재밌을 것이다. 결국 여행의 동기는 호기심이고, 여행의 준비는 호기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패키지 단체 관람은 지리적인 논리에 따라 미술관과 자동차박물관을 동시에 제공한다.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알랭드 보통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3.풍경 & 예술-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2009년-미크로네시아 연방 축섬

얼마 전 출장을 다녀왔다. 미크로네시아 연방국의 작은 섬 축(Chuuk). 축은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으로 투명한 바다와 푸른 하늘 해변가 곳곳에 야자나무가 자라고, 바다 밑엔 다양한 모양의 산호초가 자라는 지상 낙원 같은 곳이다. 당연히 주변에선 부러움이 쏟아졌다. 실제로 축에서 맞는 첫 아침, 축의 하늘과 바다는 과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뒤 해가 떠 있는 동안, 다시 말해 축이 자신의 이국적인 광경을 과시하는 동안엔 하루 종일 일을 했고, 해가 진 후, 다시 말해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축에 어둠이 깔린 동안엔 쉬었다. 출장은 월~금이었고, 실질적으로 잠시 짬을 내 바닷가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망중한을 즐기거나 스노쿨링을 즐길 순 없었다. 축의 이국적인 풍경은 짧은 스틸 화면으로 스쳐지나갔으며, 귀국해서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선명한 축의 이미지를 흐리멍텅하게 만들었다. 귀국한 뒤, 주변에선 여전히 축 여행(?)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축의 이미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우린 그 아름다움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업무를 위해 떠난 여행에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설 여유조차 없었다. 아름다움을 가슴이 감상하지 못하는 데, 그 대상이 모나리자든, 그랜드 캐년이든, 어떤 감흥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일로 떠난 여행은 즐거울 수가 없다. 일반 여행도 마찬가지다. 주마간산식 여행을 하거나, 중요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사라진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예술과 풍경을 마음에 제대로 담아두기 힘들고, 여행의 즐거움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만다. 사회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이 성급한 여행을 비판했다.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진에 대해서도 존 러스킨은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됐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멋진 풍경과 예술 작품 앞에서 사진 플래시를 터뜨리기 전, 가만히 가슴 속에 멋진 이미지를 투영시켜보자.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잔상은 깊게 가슴 속에 박힌다. 그 때서야 비로소 여행의 참 알맹이가 주는 즐거움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발에서 여행지 감상까지, 여행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물론 외적인 기술이 있을 수도 있겠다. 외국에선 어떤 버스를 타야하는지, 숙소는 어디가 좋은지 알아내는 경험의 기술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기술이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던, 그 곳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내 삶의 자양분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비로소 여행은 삶의 커다란 에너지원이 된다. 서점 여행 코너에 가보면, 수 백 권이 넘는 여행 서적이 있다. 대부분이 어느 곳에서 어디를 어떻게 이용하라는 외적인 기술에 관한 책이다. 내적인 기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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