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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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멈춰 선 태양"

 

  니체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문명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무슨 의미일까? 오후 2시에 태양이 멈춘다면? 신혼 부부들은 들끓는 성욕(생산욕)을 분출하지 못해 어둠을 찾아 헤멜 것이며 멜랑콜리한 여성들의 감성을 살살 녹이던 카사노바들의 '사랑의 세레나데'도 약발을 다할 것이다. 광란의 사랑을 찾아 헤메는 젊은 남녀들의 파티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밤. 그것은 단순히 해가 진 시간이 아니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낮의 견고한 질서가 잠시 느슨해지는 순간, 이성이 잠시 자리를 피하고 감성이 원기를 회복하는 순간이 바로 밤이다. 니체는 당시 유럽에서 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오후 2시에 멈춰선 태양의 이글거림은 밤에 만개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녹여버렸다.

 

  소설가 박형서가 두 번째 단편집 <자정의 픽션>을 냈다. 제목을 보자. <정오의 팩트>가 아닌 <자정의 픽션>이다. 이 것만 잘 이해해도 소설 전체 성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자정은 밤의 절정이다. 그의 소설은 밤이 지닌 속성을 그대로 가진다. 터무니 없는 내용(물론 이성의 기준에서)이 소설의 기둥 줄거리가 되기도 하고(<두유전쟁>) 심지어 내용이 없기도 하다. (서사가 없다는 의미다.<사랑손님과 어머니 음란성 연구>). 설사 이해되는  내용이라 해도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다.(<날개>를 비록한 대부분 작품) 또 작가는 소설 줄거리와 전혀 무관한 내용에 핏대를 세운다.(<사랑손님과어머니 음란성연구>를 비롯한 다수 작품. 계란 얘기하다가 불알 얘기하는 식이다.) 작가는 텍스트란 공간 안에 언어의 축제를 벌여 놓은 셈이다. 밤의 축제처럼 그의 소설은 무질서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롭다. 서사가 없다. 그는 그저 언어를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다. 흥부전의 주제는 착하게 살자이며 춘향전의 주제는 배신하지 말자라고 배워온 독자들은 무질서에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이 이 소설의 묘미다. 

 

  가장 재밌게 읽은 <두유 전쟁>은 머리에서 유전을 방불케 하는 기름이 생산되는 저능아를 두고 벌이는 전쟁 이야기다. 미국은 인간 유전을 얻기 위해 스파이와 특공대를 한국에 보낸다. 한국의 대통령과 군 수뇌부는 인간 유전의 처리를 두고 고심한다. 인간 유전은 현대 문명의 고뇌를 상징하지도, 그렇다고 국제 정치의 냉혹함의 희생양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저 '간이 안 좋으면 더 많은 기름이 생산되는' 인간 유전일 뿐이다. 물론 내용은 재밌다. 의미도 없는데 문체마저 무미 건조하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을 가장한 일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견해로 붕산칼슘처럼 생긴 문학평론가 정찬호의 논문이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든가 '그렇게 불려진다면 인도의 간디라도 물레를 움켜지고 쫓아올 것이다.'('두유 전쟁')란 문체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지독한'유머를 선보인다. 그는 소주 3병에 쏘맥 5잔 반을 마신 재치꾼 김부장이 캬바레서 떠들법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표현해 놓았다. 그렇기에 평론가 김형중은 박형서의 소설은 소설의 정의 상자에 쉽사리 안 들어간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의도 없는 메시지가 강한 법이다. 김형중의 말처럼 그의 소설엔 메시지가 없다고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강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오후 2시에 멈춰버린 태양'같은 우리 사회에 대한 강력한 조소다. 그는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이성적 질서를 무시했다. 그 질서를 까려고 했건, 아니면 그냥 기존의 소설작법이 재미없어서건 작가로서 그의 행동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 그것이 바로 이성중심의 사회에 대한 비아냥이자 조롱이다. 내 코드와 이 소설이 맞 닿은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결국 님도 보고 뽕도 딴 격이다. 소설이 아닌, 텍스트란 넓은 공간 위에서 언어로 놀면서 동시에 이성에 대한 조롱도 날렸으니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가 초대한 밤의 축제에서 유쾌하게 놀면서 동시에 많은 사색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게 바로 소설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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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 문화로 읽는 영국인의 자화상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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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K. Marx)의 등장과 함께 경제결정론이 등장했다. 경제결정론은 말 그대로 경제가 사회, 정치, 문화 등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상부-토대 설명이 나온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경제는 토대다. 사회, 정치, 문화 등은 토대 위에 설립된 상부다. 토대가 변하면 상부구조는 자연히 변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경제의 변화로 읽었다.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은 이후 많은 학자들의 반박을 받았다.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톰슨(E.P Thompson)은 문화의 능동성을 이야기하며 생산방식 자체가 계급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산방식 외에 개인이 생각하는 계급의식, 즉 문화도 계급형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알튀세르(L. Althusser)는 더 나아가 경제나 문화나 사회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한 요소에 불과하며,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사회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 톰슨과 알튀세르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통해 문화도 역사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자 도구가 되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국사책의 모든 챕터는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었다. “1.고려시대의 성립 2. 고려시대의 정치적 변화 3. 고려시대의 경제적 발전 4. 고려시대의 문화” 항상 문화는 마지막이었다. 내용도 정치나 경제 부분과 달리 그저 악기, 그림, 소설 등의 작품 등의 나열로 이뤄졌다. 하지만 문화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려는 학문이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점에서도 문화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가 쓴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한 역사서이다. 저자는 영국성(Englishness)이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시작하여, 영국의 역사를 형성하고 이끌어온 문화적 요인들을 찾아낸다. 문화는 하나의 단어에 포함시키기 힘들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뤄져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형성된 자연스런 부분과 지배자들이 통치를 위해 형성한 인위적 부분이 합쳐져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 속에 형성된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환경, 몸, 신화, 정신이란 카테고리를 이용한다.


영국의 시인 오든(W.H Auden)은 '헉과 올리버'(Huck and Oliver)란 에세이를 통해 영국과 미국의 문화를 설명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과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를 통해 두 문화를 비교했다. 다양한 비교 중 자연에 대한 묘사의 비교가 나온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의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 그래서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했다면 디킨스는 고향, 낙원, 내가 쉴 곳으로 묘사를 해놓았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자연을 통해 전원적 이상을 꿈꾸었다. 철저한 계급사회,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영국인들은 현실과 대조되는 이상을 시골 자연에 투영했던 것이다. 그 결과 풍경화가 컨스터블(J. Constable)과 터너(J.M.W Turner)가 국민화가로 추앙받게 된다. 여기에 더해져 영국 지배세력은 1900년 중반 파시즘과 같이 외부 세계가 특별히 위협적으로 보일 때, 안전하면서 아름다운 영국의 자연을 잉글랜드 찬양과 연결시켰다. 애국심이 전원적 잉글랜드 이상과 연결되었던 것이다.(83쪽) 자연스럽게 또는 지배세력에 의해 영국인들은 시골 풍경을 전원적 이상의 장소로 생각하게 되었다.


‘몸’에서는 스포츠를 통해 영국인의 문화를 설명한다. 이 장을 보면 왜 영국인들이 축구에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있다. 스포츠가 막 싹 트던 18세기,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수입이 증대되었고 잉여수익을 스포츠 관람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가 건설되는 등 산업상의 발전으로 대중이 좀 더 쉽게 스포츠를 접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지배세력은 19-20세기 사회적 다윈주의의 대두와 함께 스포츠와 국민 정체성을 연결시키려 했다. 그 결과 다양한 스포츠가 가장 먼저 영국에서 싹 틀 수 있었다.


특히 영국인들은 축구에 열광을 하였다. 이는 영국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상, 엄밀히 말하면 남성상과 연관이 있다. 사실 신사다움이 영국의 이상적 남성상이었다. 신사는 점잖고 예의바르고 자존심을 지키고 조국에 충성해야 했다. 하지만 신사의 이상은 그 어원에서 드러나듯 계급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막대한 유산The Great Expectation>에서 주인공 핍이 보여주듯 하층민은 신사가 될 수 없었다.(184쪽) 결국 중간계급이 세력을 얻으면서 엘리트층의 신사다움은 남자다움으로 변해갔다. 물론 남자다움의 구체적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하지만 1830-40년대 찰스 킹즐리(Charles Kingsley)가 ‘강건한 기독교도’를 주창하면서 육체적 강건함이 중요한 남자다움의 요소로 떠올랐다. 이런 이상은 이튼과 같은 사립학교에 의해 확산되었다. 자연히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축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축구는 당시의 남성다움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의 신사다움적 전통을 계승하는 기독교적 남성성이 강조되었기에 강건한 육체성 외에 도덕적 남성성이 강조되었다. 사립학교들은 축구를 통해 협동정신, 희생정신, 페어플레이등을 지도했다.(물론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참여보다 승리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훌리건의 등장은 19세기 제국주의 전통의 산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화’에서는 아서왕과 로빈 후드, 엘리자베스 여왕과 처칠 수상의 신화를 통해 영국성을 살펴본다. 아서 왕은 지배세력에 의해 확산된 신화였다. 아서는 출중한 군사지도자로서 군사적 영광을 강조하면서 충성과 통합을 고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로빈 후드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 사람이란 영국인의 정체성을 강화해주었다.(300쪽) 엘리자베스 여왕과 처칠 수상의 신화 속에서는 지배세력이 국가의 통치를 위해 어떻게 신화를 만들어내는지가 잘 나타나있다. 즉 여성이자 처녀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불확실한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통해 신화를 만들었다. 당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존 폭스(John fox)의 <순교자 열전The Book of Martyrs>이나 홀린세드(R. Holinshed)의 <연대기Chronicles of England>등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결단력 있고 천리안적 시각을 지닌 통치자로 묘사하는 목적론적 서사를 만드는데 공헌했다.(310쪽) 처칠 역시 영국을 2차 대전 독일의 공격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처칠은 60년간 하원에 있으면서 많은 실수를 한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실수 중 하나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르다넬스 작전의 실패. 작전의 실패로 영국군인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무장관, 재무장관 시절에는 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차 대전에서 주전론을 내세우며 영국을 구해냈다. 또 빼어난 화술로 영국민을 사로잡았다.(1940년 5월 13일 하원에서 한 연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끝으로 영국 지식의 전통을 살펴본다. 영국인들은 대륙 유럽인들과 달리 이론을 싫어하고 실용성에 자부심을 가지며 ‘인격이 지성보다 중요하다’고 배우고 그렇게 간주한다.(431쪽) 이런 전통 속에서 등장한 사람들이 공적 도덕론자다. 지식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의무감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이다. 밀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 역할을 떠맡았으며 동시에 그들을 비판하고 훈계하는 도덕적 엄정함도 지니고 있었다.(440쪽)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에어총독 사건이다. 에어(E. J Eyre) 총독은 자메이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계엄령을 선포해 반란군 지도자를 처형했다. 하지만 밀은 에어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용서될 수 없다며 재판을 통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은 반제국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제국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전통적 영국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런 엄격한 도덕과 의무감에 반발하여 케인즈(J. M Keynes)를 위시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등장한다. 그들의 특징은 엘리트 문화와 지적 능력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성적 관계의 완전 개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엘리트 문화를 지키려고 애를 썼으며 과거의 지식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신화를 해체했다. 예를 들어 블룸즈버리 그룹 멤버인 스트레이티(M. Straight)는 기존의 명사들을 유능하지만 괴팍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주변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혹사한 사람들로 묘사한다.(446쪽) 기독교 신화도 해체하려 했으며 동성애로 내부의 결속을 다졌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케임브리지의 스파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케임브리지 스파이들은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영국의 외무성 등에서 고위관료로 활동하던 인물들로 KGB에 포섭되어 스파이 활동을 하였다.)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은 다양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영국의 오랜 문화를 구석까지 훑는 방대한 역사서다. 영국의 문화는 그 복잡성만큼이나 짧게 정의내리기 어렵다. 때론 영국인들의 삶을 통해 형성된 반면, 일부는 홉스봅(E. Hobsbawm)의 주장처럼 지배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 연구는 자칫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더 나아가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 만큼 더 정확하고 엄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 점에서 다양한 문헌과 사실들을 묶어 가능한 객관적으로 문화를 분석한 <영국적인..>의 장점은 더욱 크게 보인다. 이는 저자가 역사가로서 갖고 있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2000년 들어와서 우리 사회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요소들은 쉽고 간략하게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좋은 역사와 나쁜 역사로 간단하게 재단된다. 개인을 생각해보자. 다양한 변수와 상황들에 영향을 받는다. 자연히 자신을 포함한 개인은 한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하물며 무수한 개인이 만들어낸 역사는 얼마나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겠는가. 처칠에 대한 저자의 평을 통해 우리가 역사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해본다.


“처칠은 위인이었다기 보다 거인이었다. .....거대한 만큼 업적도, 실수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컸다. 처칠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인물에게 어던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 과정의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가 옳은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칠의 생애와 그에 대한 기억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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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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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사물을 바라볼 때 더 신중해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단순했다. 단순한 눈에 비친 세상 역시 단순했다. 아니 명료했다. 모든 것을 칼로 베듯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신문의 내용이 내 망막을 통해 전두엽에 도달하는 찰나에 판단이 이뤄진다. ‘이런 나쁜 놈…’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책 하나라도 더 읽을수록 사물의 가치판단은 어려워졌다. 특히 두 가지 경험을 통해 난 이 어려움을 확인했다. 하나는 X파일 사건. 소싯적의 나라면 단연코 삼성과 중앙일보에 비난을 퍼부었을터. 하지만 사안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 때 난 내용 못지 않게 절차가 중요함을 어렴풋이 깨달았고, 롤즈의 <정의론>을 읽으면서 더욱 절차가 내용의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장하준 교수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기존의 가치대로라면 저자는 분열증 말기 환자가 분명하다. 재벌을 옹호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박정희 시절 경제 성장을 높게 평가하면서 노동자의 인권을 강조한다. 좌우가 한 사람 안에 뒤섞여있다. 하지만 사소한 사물 하나도 복잡하게 구성되어 존재하는 공간, 그 곳이 바로 세상이었다.


정운영 선생의 칼럼 모음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이렇게 복잡한 세상을 냉철하게 살피고 있다. 선생은 모든 사안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때로는 우파적 의견이, 때로는 좌파적 의견이 담긴 칼럼 모음집이 탄생했다. <심장은…>은 이데올로기적 카타르시스를 독자에게 제공하진 못할지라도 짧은 글 속에 복잡한 세상을 쾌도난마로 담아내는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다시 말해 이 책에는 뜨거운 가슴을 자극하는 선동은 없어도 차가운 머리를 울리는 논리가 존재한다. 결국 선생은 이데올로거가 아니었다. 단지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선생의 글을 보며 다시 한번 세상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눠질 수 없음을 느꼈다.


2004년 2월 11일에 ‘말로 천 냥 빛도 갚는다는데’란 칼럼이 나온다. 칼럼에서 선생은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지 사회 공헌이 아니다’란 쓴 소리를 대책 없이 해대던 ‘Mr. 쓴 소리’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박회장은 “기업은 좋은 제품 만들어 돈 벌고 세금내면 그만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정운영 선생은 ‘돈 벌어 세금 내면 그만이라면서도 소비와 투자 활성화에 근본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정부에 대드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박 회장이 “기업이 실업자 구제기관입니까? 손해 보는 것을 알면서 필요없는 사람을 뽑는 기업이 있다면 위선자다”란 말에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가 산다는 말이 진정으로 빛나려면, 근로자가 죽으면 기업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기계는 기름칠만 하고 3년을 묵혀도 괜찮지만, 사람은 사흘만 입에 풀칠하지 않으면 다시 쓰지 못한다.’ 철저하게 노동자의 삶을 중시한다. 하지만 이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다. 단지 노동자 개개인의 삶을 생각할 뿐.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칼럼도 나올 수 있다.


2004년 12월 8일 ‘나라위해 변절합시다’란 칼럼에서 선생은 당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에게 공정거래법 완화를 부탁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법 강화로 소버린이 SK를 집어삼키려하고 포스코의 외국인 지분이 77퍼센트에 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재벌의 버릇은 고쳐야 하지만 한 층 더 절박한 숙제가 우리 기업을 지키는 일이란 말이지요.’ 그는 기업의 존재를 중시한다. 보수적인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IMF시절 보다 더 고통 받는 시민 개개인을 생각한 것이다. 그의 칼럼에 이데올로기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스크린쿼터를 옹호하면서도 기업을 살리라고 말한다. 반미규제 완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분별없는 시위대를 비판한다. 이 모든 주장의 무기는 논리일 뿐,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선생의 칼럼을 한층 더 빛내는 것은 유려한 문장과 해박한 지식이다. 딱딱한 칼럼 중간 중간에 나오는 미문들은 명징한 논리를 사람들이 가슴 속에 담아준다. 경제학을 비롯한 해박한 지식은 논리력의 창 끝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정운영 선생은 한겨레에서 중앙일보로 적을 옮긴 후 변절했다는 비판을 자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겨레 시절의 선생이나 중앙일보 시절의 선생은 그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글을 썼을 뿐이다. 다만 그 마음의 표현이 때로는 세상 기준의 왼쪽으로, 때론 오른쪽으로 향했을 뿐이다. 세상은 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단면만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칼럼 모음집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좋은 길잡이이자 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많은 그의 칼럼을 이 짧은 서평에 소개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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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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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넣었어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동료가 그를 감싸 안는다. 축구장 주변은 완전한 축제 분위기다. 잉글랜드 축구가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남자가 응원하는 세계 최강의 축구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리그우승, FA컵 우승에 이어 챔스리그 우승이라도 차지한 것일까? 아니다. 잉글랜드 4부리그 소속 맨체스터 스탁 팀이 수 많은 리그 경기 중 한 경기에서 극적으로 비겼다. 남자의 눈물은 4부리그 팀의 극적인 무승부 때문이었다. 4부리그 팀의 무승부 때문에 울다니...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눈물을 보이는 남자, 그리고 환호하는 팬들 뒤로 나레이션이 흐른다.
 
"승부의 결과는 중요치 않다. 이기면 더 기쁠 뿐. 축구는 이들에게 생활이자 문화이다."
삐-- 귀에 거슬리는, 아주 잘못된 문장이 나왔다. 승부의 결과는 중요치 않다니.. 잉글랜드 축구팬에게 승부의 결과가 중요치 않다니. <어바웃어보이>의 작가 닉혼비가 이 나레이션을 들었다면 그 PD에게 자신의 책을 건내며 한 마디 했을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하이버리(지금은 없어졌으니 불가능하구나.)에 오셔서 노스랜드에 서있는 팬들의 표정을 살펴보세요."
 
잉글랜드 팬에게 축구가 생활이자 문화인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축구가 생활이자 문화라면 승부의 결과 역시 생활이자 문화이다. 만약 축구가 스포츠라면, 그리고 책에서 보아왔던 스포츠 특유의 참가정신, 페어플레이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 운동 경기 중 하나라면 결과는 중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데바요로가 골 에어리어에서 아무리 헛발질을 해도, 갈라스가 상대편 공격수의 뒤꽁무니를 아무리 따라다녀도, 그들이 흘린 땀방울에 박수쳐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츠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라 하더라도 골 에어리어에 몰려서 반니스텔루이에게 린치를 가한다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포츠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인들에게 축구는 결코 스포츠가 아니다.
 
21세기 역사학의 화두는 '문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박지향 교수는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이란 책을 통해 문화란 프리즘을 이용해 영국 사회를 바라봤다.  여러 문화적 키워드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스포츠, 특히 축구였다. 박교수는 거시적인 영국역사의 흐름 속에서 잉글랜드인에게 축구가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닉혼비의 <피버피치>는 좀 더 다른 접근, 미시적인 개인의 삶을 통해 잉글랜드인이 생각하는 축구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런 차이다. '일제 말 일본의 수탈이 극에 달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경제도 이 시기에 놀라울 정도의 발전을 보인다.'란 이야기를 '얘야. 내가 고등학생 때는 쪽바리 선생한테 날이면 날마다 따귀를 맞았단다. 음식점에서도 일본 손님이 들어오면 자리를 비워야 했지. 그래도 어렸을 때처럼 나무 껍질 죽을 먹는 일은 없었단다.'란 이야기로 바꾸는 효과. 우린 닉혼비가 느낀 개인적 감정, 생활 등을 통해 생활로서의 축구를 확인한다.
 
닉혼비는 아스날 경기가 있는 수, 토요일에 가족이나 친구의 결혼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아스날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긴장감으로 인해 속이 메스껍다. 닉혼비에게 세상의 한 해는 8월에 시작하고 4월에 끝이난다. 프리미어리그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축구장에서 본 멋진 골장면은 오르가즘의 쾌락을 넘어선다. 오르가즘이야 몇 번 다시 느낄 수 있지만 1989년 아스날의 우승을 가져다 준 후반 47분 토마스의 극적인 골은 다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닉혼비도 인정한다. 자신을 비롯한 잉글랜드 축구팬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강박증과 우울증 말기의 현상을 자신이 지니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잉글랜드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님이 확인된다.
 
걸프전이 발생했다. 멀리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스날이 에버튼에게 1-0으로 이기는 순간, 닉혼비가 생각하는 세상의 중심은 하이버리가 된다.  닉혼비는 이렇게 말한다.
 
'힐스브로 사태(리버풀대 포레스트의 경기가 벌어진 힐스브로에서 방벽이 무너져 축구 팬 95명이 숨진 사건) 이후 첫 경기에서 아스날은 하이버리에서 노위치와 맞붙었다....애도기간은 끝났고...아스날은 골 잔치를 벌이고......경기는 축제 분위기를 띠었다...그 날 오후 우리는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포레스트 대 리버풀 전을 다시 할 수 있었을까? 어찌 보면, 그건 전부 똑같은 것이다. 내가 아스날 대 노위치 전을 보러 가서 즐거워 한 까닭은. 헤이젤 사태(리버풀대 유벤투스의 챔스리그 결승전 중 리버풀 훌리건 때문에 유벤투스 서포터 38명이 사망한 사건)이후 리버풀 대 유벤투스의 결승전을 끝까지 본 것과 같은 이유이며, 또 축구가 100년이 지나도록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이다. 축구경기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제정신과 상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축구경기에서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은 지 열엿새 만에 또 경기를 보러 가서 즐기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런 인명 피해를 불러온 문화와 상황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워질 것이다.'
 
이제 맨체스터 스탁 팬이 4부리그 팀의 무승부에 눈물을 보인 이유를 알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KBS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정정해보자. '승부의 결과가 그들에겐 전부이다. 이기면 오르가즘의 쾌감을, 지면 우울증의 극단을 맛보게 된다. 축구는 이들에게 생활이자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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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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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역사는 시간이 지날 수록 발전한다는 시각. 헤겔의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는 순환한다는 시각이다. 니체가 여기에 포함된다. 물론 니체는 경제시간에 배운 경기곡선처럼 규칙적으로 역사가 순환한다고 보진 않았다. 고귀한 정신이 그 시대를 얼마나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발전한 역사가 나올 수도 타락한 역사가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역사를 고귀한 정신이 발현한 시기로 보았고 자신이 살았던 당시 유럽에 대해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근본적인 문제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무렵엔 박정희의 그늘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었다. 경제 발전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니 난 발전론적 역사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보다는 고려시대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가 조선시대 보다는 오늘날이 더 나은 역사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1980년대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발전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발전했어야 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다. 당시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하드보일한 문체로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쓴 문장은 독자의 폐부를 건드렸다.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눈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줬다. 노동자들은 핀에 찔려가며 심지어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일을 한다. 철거민들은 갈 곳이 없다. 90데시벨이 넘는 소음과 39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그들은 일했다.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역사는 틀림없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래서 참고 일햇을 것이다. 역사 발전에 뛰어든 많은 투사들도 있었다. 주인공 영수도 투사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열악한 삶을 폭로했다면 영수는 테러를 통해 고발했다. 많은 투사들이 나타나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개선되어 갔다. 역사는 발전한 것 같다. 헤겔의 말은 옳은 듯 보인다. 실제로 핀에 찔려가며 90데시벨의 소음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적어도 사라졌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점은 헤겔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80년대 영수가 보여줬던 노력은 헛수고였다. 변한 것은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탄압의 기제가 눈에서 사라졌다는 점. 즉 조는 노동자들의 팔을 찌르는 핀 대신 무형의 무언가가 우리 팔을 끊임없이 찌르고 있다는 점만이 변한 부분이다. 그렇다. 다음 논리 전개 내용을 한 번 보자. "우리는 핸드폰을 쓰고 인터넷을 쓴다. 우리의 삶은 80년대에 비해 더 없이 윤택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행복해졌다."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연결이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틀렸다. 우리는 결코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상의 가치들, 근면 의식, 세계화의물결, 무한경쟁시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들이 조금이라도 나태해질라면 우리의 팔을 찔러댔다. 일의 양은 줄지 않았다. 80년대는 타의에 의해 했다면 지금은 자의적으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난 결국 발전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노동자를 지배하는 권력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은 구조를 바꿔 버렸다. 이제 우리에겐 타도해야 할 대상이 없다. 아니 타도해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영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 2의 영수, 영희가 되어 이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영수란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지섭은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소모한 대가로 조금씩 돈을 벌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열정, 에너지, 가치들을 소진해나가며 돈을 받는다. 니체가 옳았다. 그래서 우리 어깨 위에 놓인 노동의 굴레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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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2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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