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넣었어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동료가 그를 감싸 안는다. 축구장 주변은 완전한 축제 분위기다. 잉글랜드 축구가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남자가 응원하는 세계 최강의 축구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리그우승, FA컵 우승에 이어 챔스리그 우승이라도 차지한 것일까? 아니다. 잉글랜드 4부리그 소속 맨체스터 스탁 팀이 수 많은 리그 경기 중 한 경기에서 극적으로 비겼다. 남자의 눈물은 4부리그 팀의 극적인 무승부 때문이었다. 4부리그 팀의 무승부 때문에 울다니...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눈물을 보이는 남자, 그리고 환호하는 팬들 뒤로 나레이션이 흐른다.
 
"승부의 결과는 중요치 않다. 이기면 더 기쁠 뿐. 축구는 이들에게 생활이자 문화이다."
삐-- 귀에 거슬리는, 아주 잘못된 문장이 나왔다. 승부의 결과는 중요치 않다니.. 잉글랜드 축구팬에게 승부의 결과가 중요치 않다니. <어바웃어보이>의 작가 닉혼비가 이 나레이션을 들었다면 그 PD에게 자신의 책을 건내며 한 마디 했을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하이버리(지금은 없어졌으니 불가능하구나.)에 오셔서 노스랜드에 서있는 팬들의 표정을 살펴보세요."
 
잉글랜드 팬에게 축구가 생활이자 문화인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축구가 생활이자 문화라면 승부의 결과 역시 생활이자 문화이다. 만약 축구가 스포츠라면, 그리고 책에서 보아왔던 스포츠 특유의 참가정신, 페어플레이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 운동 경기 중 하나라면 결과는 중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데바요로가 골 에어리어에서 아무리 헛발질을 해도, 갈라스가 상대편 공격수의 뒤꽁무니를 아무리 따라다녀도, 그들이 흘린 땀방울에 박수쳐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츠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라 하더라도 골 에어리어에 몰려서 반니스텔루이에게 린치를 가한다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스포츠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인들에게 축구는 결코 스포츠가 아니다.
 
21세기 역사학의 화두는 '문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박지향 교수는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이란 책을 통해 문화란 프리즘을 이용해 영국 사회를 바라봤다.  여러 문화적 키워드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스포츠, 특히 축구였다. 박교수는 거시적인 영국역사의 흐름 속에서 잉글랜드인에게 축구가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닉혼비의 <피버피치>는 좀 더 다른 접근, 미시적인 개인의 삶을 통해 잉글랜드인이 생각하는 축구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런 차이다. '일제 말 일본의 수탈이 극에 달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경제도 이 시기에 놀라울 정도의 발전을 보인다.'란 이야기를 '얘야. 내가 고등학생 때는 쪽바리 선생한테 날이면 날마다 따귀를 맞았단다. 음식점에서도 일본 손님이 들어오면 자리를 비워야 했지. 그래도 어렸을 때처럼 나무 껍질 죽을 먹는 일은 없었단다.'란 이야기로 바꾸는 효과. 우린 닉혼비가 느낀 개인적 감정, 생활 등을 통해 생활로서의 축구를 확인한다.
 
닉혼비는 아스날 경기가 있는 수, 토요일에 가족이나 친구의 결혼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아스날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긴장감으로 인해 속이 메스껍다. 닉혼비에게 세상의 한 해는 8월에 시작하고 4월에 끝이난다. 프리미어리그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축구장에서 본 멋진 골장면은 오르가즘의 쾌락을 넘어선다. 오르가즘이야 몇 번 다시 느낄 수 있지만 1989년 아스날의 우승을 가져다 준 후반 47분 토마스의 극적인 골은 다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닉혼비도 인정한다. 자신을 비롯한 잉글랜드 축구팬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강박증과 우울증 말기의 현상을 자신이 지니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잉글랜드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님이 확인된다.
 
걸프전이 발생했다. 멀리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스날이 에버튼에게 1-0으로 이기는 순간, 닉혼비가 생각하는 세상의 중심은 하이버리가 된다.  닉혼비는 이렇게 말한다.
 
'힐스브로 사태(리버풀대 포레스트의 경기가 벌어진 힐스브로에서 방벽이 무너져 축구 팬 95명이 숨진 사건) 이후 첫 경기에서 아스날은 하이버리에서 노위치와 맞붙었다....애도기간은 끝났고...아스날은 골 잔치를 벌이고......경기는 축제 분위기를 띠었다...그 날 오후 우리는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포레스트 대 리버풀 전을 다시 할 수 있었을까? 어찌 보면, 그건 전부 똑같은 것이다. 내가 아스날 대 노위치 전을 보러 가서 즐거워 한 까닭은. 헤이젤 사태(리버풀대 유벤투스의 챔스리그 결승전 중 리버풀 훌리건 때문에 유벤투스 서포터 38명이 사망한 사건)이후 리버풀 대 유벤투스의 결승전을 끝까지 본 것과 같은 이유이며, 또 축구가 100년이 지나도록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이다. 축구경기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제정신과 상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축구경기에서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은 지 열엿새 만에 또 경기를 보러 가서 즐기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런 인명 피해를 불러온 문화와 상황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워질 것이다.'
 
이제 맨체스터 스탁 팬이 4부리그 팀의 무승부에 눈물을 보인 이유를 알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KBS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정정해보자. '승부의 결과가 그들에겐 전부이다. 이기면 오르가즘의 쾌감을, 지면 우울증의 극단을 맛보게 된다. 축구는 이들에게 생활이자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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