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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0쇄 기념 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역사는 시간이 지날 수록 발전한다는 시각. 헤겔의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는 순환한다는 시각이다. 니체가 여기에 포함된다. 물론 니체는 경제시간에 배운 경기곡선처럼 규칙적으로 역사가 순환한다고 보진 않았다. 고귀한 정신이 그 시대를 얼마나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발전한 역사가 나올 수도 타락한 역사가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역사를 고귀한 정신이 발현한 시기로 보았고 자신이 살았던 당시 유럽에 대해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근본적인 문제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무렵엔 박정희의 그늘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었다. 경제 발전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니 난 발전론적 역사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보다는 고려시대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가 조선시대 보다는 오늘날이 더 나은 역사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1980년대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발전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발전했어야 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다. 당시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하드보일한 문체로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쓴 문장은 독자의 폐부를 건드렸다.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눈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줬다. 노동자들은 핀에 찔려가며 심지어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일을 한다. 철거민들은 갈 곳이 없다. 90데시벨이 넘는 소음과 39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그들은 일했다.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역사는 틀림없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래서 참고 일햇을 것이다. 역사 발전에 뛰어든 많은 투사들도 있었다. 주인공 영수도 투사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열악한 삶을 폭로했다면 영수는 테러를 통해 고발했다. 많은 투사들이 나타나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개선되어 갔다. 역사는 발전한 것 같다. 헤겔의 말은 옳은 듯 보인다. 실제로 핀에 찔려가며 90데시벨의 소음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적어도 사라졌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점은 헤겔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80년대 영수가 보여줬던 노력은 헛수고였다. 변한 것은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탄압의 기제가 눈에서 사라졌다는 점. 즉 조는 노동자들의 팔을 찌르는 핀 대신 무형의 무언가가 우리 팔을 끊임없이 찌르고 있다는 점만이 변한 부분이다. 그렇다. 다음 논리 전개 내용을 한 번 보자. "우리는 핸드폰을 쓰고 인터넷을 쓴다. 우리의 삶은 80년대에 비해 더 없이 윤택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행복해졌다."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연결이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틀렸다. 우리는 결코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상의 가치들, 근면 의식, 세계화의물결, 무한경쟁시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들이 조금이라도 나태해질라면 우리의 팔을 찔러댔다. 일의 양은 줄지 않았다. 80년대는 타의에 의해 했다면 지금은 자의적으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난 결국 발전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노동자를 지배하는 권력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은 구조를 바꿔 버렸다. 이제 우리에겐 타도해야 할 대상이 없다. 아니 타도해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영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 2의 영수, 영희가 되어 이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영수란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지섭은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소모한 대가로 조금씩 돈을 벌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열정, 에너지, 가치들을 소진해나가며 돈을 받는다. 니체가 옳았다. 그래서 우리 어깨 위에 놓인 노동의 굴레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