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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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시리즈하면 뭐니뭐니해도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 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눈 뜬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짜릿함을 떠올렸을 게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느낌속에 다시한번 젖어들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아주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몇 초안에 알게 되었을 때의 허망함이라니... 이래서 선입견은 참 무섭다. '생각이 금지된 구역'이라는 부제처럼 어쩌면 나도 생각없이 이 책을 읽었어야 했던 것일까? 도무지 앞뒤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어색함과 난감함때문에 당혹스러웠다. 뭐지? 책장을 넘기면서 이제는, 이제는하고 바랬던 것들이 어이없음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때 나는 다시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독설과 께름직한 생각은 단지 문화적인 차이때문이었을거라고.

스페인을 발칵 뒤집은.. 멍 때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발칙한 경고.. 왜 이런 소개글이 필요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때는 49세기다. 전 우주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모든 것, 하다못해 인간의 감정까지도 머리쓸 일이 없게 된 세상이라는 말이다. 사랑까지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게 21세기라고 하니 멀고도 먼 미래의 이야기쯤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까? 하니 그러기엔 너무 진부하다. 이미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이 그 멀고도 먼 미래, 49세기를 다루고 있는 책속에 버젓이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뭔가 색다른 느낌조차도 전해받지 못하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조차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끼어드는 감정이라는 물결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마치 떨쳐내야할 그 어떤것과 마주한 것처럼.. 이쯤에서 나는 아하! 그런거였나? 싶은 생각하나 하게 된다. 디지털, 멀티시스템, 스피드에 뒤엉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들이 잃어버린 것,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는 경고성 플랭카드를 하나쯤 걸어둔 것 같다고...

억지로 꿰어 맞춘듯이 정신 사납게 헷갈리는 무슨 무슨 부처의 이름이나 장관 이름따위는 싹 잊어버리자. 단 우리의 주인공이 공무원이라는 것과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속에 휘말려 희생양으로 처리된다는 것만은 잊어버리지 말자. 우리의 주인공 카르멜로는 내리막길만 보면 생겨나는 질주본능을 어쩌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환자다 (질주본능에 이끌려 다니는 현재의 우리에 비유된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무언가에 부딪히기 전에는 어지간해서 멈추지 않는 그가, 어느날 우연히 대통령의 소매치기를 붙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지만 무슨 사연인지 쫓기는 신세가 되고 새로운 의술의 실험양까지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끝났으면 좋았을 그런 스토리라인이 엄청 부담스러웠던 순간이다. 졸지에 스타맨과 수퍼맨이 되어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한마디로 황당했다.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라는 작품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왜 그 작품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먼 미래의 세상을 다루고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그 작품속에서는 어느정도의 공감성도 확보되어 어색하지는 않았었던 기억이다. 현재의 정치상황을 빗댄 듯 보여지는 관리들의 잇속 챙기기 라거나 부패성 따위를 논하자고 했다면 굳이 그 멀고먼 미래 49세기를 거론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토록 먼 미래를 보여주었던 것이 어쩌면 반어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비뚤어진 현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먼 미래에서조차 전혀 변하지 않을 거대조직의 그림자속에서 그저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인양 그려낸 것이 왠지 서글프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끝은 어떨까? 블랙유머라고는 했지만 정말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에필로그'가 있었고 '에필로그 후편'이 있었고 그 마지막에 'Fin (에필로그 후편)'이 또하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둥근 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Fin (이제는 정말 끝이다)... 그래 나도 끝이다. 이 책의 끝..  옮긴이의 말이나 역자후기 하나쯤 곁들여 있었다면 좀 괜찮았으려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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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사진의 모든 것 ㅣ 포토 라이브러리 8
브라이언 피터슨 지음, 공민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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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 사실 나는 사진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한다.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찍어놓은 작품사진을 제대로 감상할 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라는 것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 아주 대단하리만치 커다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을 보면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피사체에 접근하는 그들의 무아지경에 놀라기도 하고, 한장의 사진속에 어떤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다시한번 더 놀란다.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 한장의 사진이 전해주는 감동에 대하여 보고 들을 때가 있다. 그 한장의 사진으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렸던 그 무엇에 대하여 말할 때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외심까지 품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무생물로써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는 까닭이다.

취미생활을 하며 만날 수 있는 아주 작은 꽃들을 지나쳐가기보다는 가까이 다가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변변한 사진기 하나 없었고 사진에 대한 어떤 최소한의 지식조차 없으면서 무작정 꽃들을 향해, 혹은 자연속의 작은 움직임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디카를 알기 전에는 몰랐던 색다름을 디카를 만나면서부터 알게 되었듯이 마음을 열고 바라보았던 작은 생명체들이 내게 전해주었던 작은 떨림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지금도 내 가방속에는 어딜가나 나와 함께 동행하는 작은 디카가 들어있다. 그리곤 아무데서나 마음가고 시선 머무는 존재라면 무조건 찰칵,이다. 얼마전 연꽃구경을 하기위해 관곡지를 찾았을 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들.. 그 카메라들은 무식(?)한 내가 보아도 참 멋져보였다. 에고고, 연꽃이 만개했을 때는 절대로 가방속에서 내 후진 디카를 꺼내지 말아야지 할 정도로..

이 책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잘 모르는 사진찍기의 방법을 좀 알고 싶어서였다는 게 솔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바램과는 조금 어긋난 내용으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건 나같은 사진의 문외한이 보기엔 수준있는 강의가 아닌가 싶어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자꾸만 망설여졌다. 광각렌즈,매크로렌즈,어안렌즈,클로즈업렌즈 등 가끔씩 말로만 접했던 렌즈의 많은 이름들이 나를 주눅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사진기를 가진 사람들 혹은 사진을 찍을 줄 알거나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웬 횡재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 같다. 카메라의 장비들을 어떻게 사용하면 좀 더 나은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주제를 설정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면 좀 더 멋지게 담을 수 있을지, 또한 카메라의 기능들을 어떻게 이용하면 좀 더 이로운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었기에 사진을 좀 아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을 많이 전해받았다.

나도 그랬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사라는 말의 유혹을 강하게 받아 들였을게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피사체의 또다른 느낌을 한번쯤은 나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했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접사와 클로즈업 사진은 단연코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게 그거 아닌가? 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책속에서 비교하며 보여주는 선명한 이미지를 보면서 그말에 대하여 아주 조금씩 고개를 끄덕거려보기도 했다. 텅스텐 화이트밸런스라거나 VR 렌즈와 IS 렌즈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야생: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 아차!싶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과 필요에 따라서 조금씩 움직임을 주는 것에 대한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정말 간단해보이면서도 쉽지않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지금 세상이야 찍은 사진에 덧칠하는 프로그램도 많이 있으니 좀 더 멋지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 같다. 쉽게 말해 포토샵 하나만 제대로 배워도 포장하는 기술은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고.. 이렇게 작은 블로그의 사진올리기 기능만 보더라고 쉽게 보정할 수 있는 기능들은 참 많다. 대부분의 내 사진들도 맘에 안들면 이 과정을 거쳐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쉬운 점은 많다. 보정하지 않고도 멋지게 담아낼 수 있다면,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느낌을, 마음을,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걸보면 무언가를 제대로 해낸다는 것이 쉬운일만은 아니겠구나 자책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77장을 활영한 노력의 결과로 76번째 촬영한 사진이 99.9퍼센트 완벽하게 나왔다는 저자의 말은 참으로 의미있게 들려왔다. 사진작가로 그리고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써도 백프로의 만족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틀에 박힌 시선으로 사물을,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자신만의 표현법이 오직 사진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때문이기도 하다. 욕심을 부려서 만나게 된 책이었지만, 비록 지금의 내게는 많은 것을 줄 수는 없는 책일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사진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사진을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정말 욕심일까? 작고 미세한 차이점을 말해주고 있는 이 책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정말 부질없는 욕심일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을테니까 하나둘씩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기에 나는 나대로 사진이라는 것과 조금씩 친해보려고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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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천사와 악마
이경윤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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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에 <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천사와 악마의 싸움 중간에서 그 둘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사와 악마 모두가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이다. 이미 악이 만연해진 인간세상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사뿐이라는 듯 교만을 보여주는 천사 가브리엘과 어쩌면 그런 허상과도 같은 천사의 손길을 거부할수도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악마 루시퍼의 대결은 볼 만했다. 마지막 대결에서 이긴 천사 가브리엘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날개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 천사에게 다가가 주먹을 한방 날린 인간이 이렇게 말했었다. 아픈가요? 바로 그 아픔이 인간의 고통입니다. 바로 지금 인간이 겪고 있는 현실이지요. 라고.. 어쩌면 천사든 악마든 우리 인간의 필요성에 만들어졌다는 것에 나는 공감한다. 다수를 다스리기 위한 소수의 선택이었다는 말에도 백프로 공감한다. 어찌보면 지금 이시간에도 그런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 많을테니까..

이 책의 천사와 악마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까닭이리라. 물론 학창시절에 유행처럼 번졌던 그리스 로마신화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윤기의 작품만큼 흥미진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미로운 스토리라인들이 얽혀 마치도 실제인양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었으니까.. 신화라고 하면 얼핏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 신화를 이해함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많았다. 오딘이나 토르, 발데르등이 나오는 <북유럽신화>와, 태양신 라, 토드,오시리스등이 주인공인 <이집트신화>, 그리고 바리데기나 조왕신, 삼신할미, 옥황상제, 염라대왕등이 나왔던 <우리의 신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 <천사와 악마> 속에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화의 그림자가 꽤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 서양세계의 천사와 악마에 대한 탄생배경이나 천사의 급수, 악마의 급수,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그들이 담당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말함에 있어 철저히 성서위주로 보여주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느낌은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갈고 닦아 만들어진 그들만의 신이었고 그들만의 천사였으며 그들만의 악마였음을 인정하고 있다는것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동양세계의 천사와 악마는 어떨까? 서양세계의 선과 악이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배경이었다면 동양세계의 선과 악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적이다. 약간의 차이를 이야기해보자면 서양의 기독교가 자신의 것외에는 모두 배척하는 분위기였다면 동양의 불교는 자신외의 것까지도 아우를 줄 알았다는 것일까? 자신의 입장에서만 천사와 악마를 규정지었다는 건 사실 맘에 들지 않는다. 내 편이면 천사고 이교도는 무조건 악마가 될 수 밖에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사와 악마의 등급을 나누었으며 분류를 해 놓았다는 거다. 천사였다가 악마의 수장이 되는 루시퍼가 절대자의 우편에 섰던 최고등급이었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다. 그런데 같은 급이라고 생각했었던 가브리엘이 루시퍼보다 한참 아래라는 설정은 재미있다. 미카엘이나 우리엘, 라파엘, 가브리엘과 같은 4대천사의 이름이 세상속에 많이 떠돌기는 한다. 하지만 그에 맞서 루시퍼나 벨제브,리비야단,아프락사스등의 악마도 우리곁에서 머물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했으면 외경이라는 <에녹서>에서 주장하기를 전체 천사의 90%가 타락하여 악마가 되었다고 주장했을까?  정말 오래전에 본 영화 <그렘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반지의 제왕>을 통해 우리의 기억속에 멋지게 각인되어진 골룸과 스미골이 한몸이었듯이 그렘린 역시 같은 몸이지만 선과 악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 책속에서 그 하얗고  귀여웠던 그렘린을 다시보니 반갑기까지 하다. 비록 악마의 이름속에서 재회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천사와 악마라는 이름을 만들어 기어코 구분지어야만 했던 인간의 모습을 악마의 가장 최고등급에 올려놓는다면 딱 어울릴 듯 싶기도 하다.

내가 신화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듯이 이 책속에서 나열되어지는 천사나 악마의 계보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아 보인다. 너무 많은 이름을 열거하고자하는 욕심때문에 뒤로 갈수록 쳐지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데로 속도를 놓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같이 보여주는 일러스트때문이었을까?  천사나 악마를 표현하는 그림이나 이름을 볼 때 신화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을 살짝살짝 비틀어놓은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나름 흥미로웠다는 말이다. 공작이나 뱀 혹은 용의 모습을 들이대는 것에서 신화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과 역할까지도 비슷하다. 한 때 아이들이 즐겨보았던 만화 시리즈 <포켓몬>이나 <디지몬>은 아마도 천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 혹은 창의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책을 읽던 중에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아들녀석이 흥미로운지 고개를 들이민다. 그러더니  "엄마, 이거 유희왕이예요? 그 카드그림하고 똑같아요"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카드놀이속의 그림이 이 책속의 캐릭터와 너무도 닮았다. 이처럼 우리주변을 살펴보면 신화나 천사와 악마를 다룬 소재들은 참 많은 듯 하다. 그래서 이런 류의 책도 만들어지는 모양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속 주인공인 지니가 악마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요즘의 아이들, 날개달린 아기 모습의 천사를 믿기는 할까? 머리에 뿔달고 나오는 지독한 인상파를 악마라고 생각을 하기는 할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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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2009-07-1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어느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질테니 말이다.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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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 외면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진실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에게 진실이라는 것이 인정받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정말 아무런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줄수는 있는 것일까? 이 책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은 게으름이라고. 진실은 너무 교만해서 도무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그리하여 진실은 진실아닌 것들이 진실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때 그저 누워서 입에 감떨어지기만 바라고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상처와 실망을 안겨줄 뿐이라고... 단연코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동의한다. 진실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인식될 뿐이고 흔적을 남기기에도 너무나 미미한 존재일뿐이라고..

처음부터 단호하게 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다. 책속의 주인공 강인호와 서유진이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을 위하여 법정에 섰을 때 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도 없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돈도 없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조용히 해 이것들아!... 벌써 여러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잊지 못하는 남편의 목소리속에도 그 일갈은 남아 있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심적으로는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지만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노라고 말했다던 법률심사원의 말을 들려주면서 무너져내리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내게는 생생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官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가 그저 힘없고 돈없는 현실만 탓할 수 밖에 없었듯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여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너희도 하나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법정싸움도 불사했던 강인호와 서유진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장애우라는 말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얼만큼이나 껴안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말을 못할 뿐인데, 남들보다 조금 생각하는 힘이 모자랄 뿐인데, 단지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줄 알고, 그들보다 조금 덜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불편을 이용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천벌받아 마땅한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전에 읽었던 정유정의 소설이 떠올랐다. <내 심장을 쏴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두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갇혀진 공간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탓일게다. 그곳을 떠난다해도 마땅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던 자애학원의 말 못하는 아이들과 세상에게 등떠밀려 들어왔던 정신병원의 두 남자에게 다가왔던  외면이라는 서글픈 진실..  그 공간속에서 정해진 규율은 그들을 옭아매는 올무같았을 것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목을 조여오는 올무같았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라>의 저자처럼 실제적인 체험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랬던 나의 간절함이 끝내 무너져내리던 순간 작가의 말은 내게 하나의 비수처럼 꽂히고 말았다. 단 한 줄의 신문기사때문이었다고.. 그 순간부터 가시에 찔린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고..  교장에게 행정실장에게 생활지도교사에게 많은 시간동안 성폭행을 당해왔던 아이들이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작은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사람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닐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삶의 무게가 그들을 진실앞에서 외면하라고 유혹했을 것이다. 비참한 현실의 짧은 안위를 위하여 어린아이들의 절규를 합의금이라는 악마에게 팔아버려야 했던 아이들의 부모조차도 우리는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책속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무진시는 하나의 거대괴물같다. 처음부터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았을게다. 자석처럼 달라붙어버리는 힘과 권력과 돈의 흐름이 그 괴물을 점점 부풀어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 괴물의 몸뚱이에 붙어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들조차 탓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또한 서럽고도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갖 비리와 부조리가 보란듯이 우뚝 서버린 세상..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죠... 모든것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서유진은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었을 게다. 정말로 절대자의 힘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되어지는 때마다 혼자였다고 느꼈기에 그들은 '홀더'라는 이름을 앞세운채 살아남았을 것이다. '홀로 더불어'.. 홀로 서고 더불어 산다.. 비록 법정싸움에서는 패했지만  세상속에서 내밀어준 식지않은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러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고 위안 삼았을 게다. 저자는 말한다. 성폭행의 피해앞에서 동생을 잃어야했던 어린 민수의 입을 통하여.. 우리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힘있고 돈있는 저편에서 본다면야 당연히 진 것이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이긴 것인지도 모른다고 서글픈 독백을 한다.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그야말로 비리와 부조리의 도가니, 광란의 도가니가 아닐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강인호가 아이들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못하고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웠을 때부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녹화를 하고, 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텔레비젼 방송이 나가고, 그들이 법정싸움을 시작했을 때,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될거라고, 길고 지루한 싸움속에서 철저하게 짓밝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또하나 만들게 될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서글프게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일테니 말이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니 우리가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던 장애우들의 외침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하나둘씩 불러주던 그 이름들이 보여질 때 정말 많이 아팠겠다고 먹먹해지던 가슴속의 느낌..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이 울림이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 메아리쳐주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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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밍쯔 - 산양은 천당풀을 먹지 않는다
차오원쉬엔 지음, 김지연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사람은 수영을 하지 못한다. 죽겠다고 했던 사람도 위기의 순간에서는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수영은 못하지만 그사람 살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무엇이든 곁에 있는 것은 잡아볼 것이고 누구든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도움으로 어딘가에서 썩은 나무조각이라도 흘러내려온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17세 밍쯔>를 읽으면서 내내 떠나지 않고 있던 내 머리속의 영상이다. 그만큼 밍쯔의 삶은 절실했다. 누군가에게 손내밀수도 없었던, 아니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기에 혼자 아파해야 했고 혼자 성장해야만 했다.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들은 도대체 어떤 규칙속에서 움직이는 걸까? 어떤 빌어먹을 존재가 나를 희롱하는거지? 도대체 왜 나만 이렇게 갖고 노는거야?  더이상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다가왔던 복권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차가운 현실이었다. 있는 돈 모두 털어 복권을 사는 밍쯔의 마음은 차라리 현실에 대한 절규였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보고싶지 않았을게다. 그 지독한 자신의 현실을.. 차마 개봉하지도 못한 채 주변사람에게 되팔아버린 그 몇 장의 복권속에서 조롱하듯이 남의 손안에서 1등에 당첨되는 한장의 복권을 보는 순간 그 절망은 형언할 수조차 없었을게다. 하늘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도대체 왜 나만 안되는거지? 왜? 누구나 한번쯤은 하늘을 향한, 누군가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에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아프도록 때려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밍쯔는 울지 않았다. 눈물조차도 거부해버린 밍쯔의 서글픔을 누가 알아줄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거대 공룡처럼 밍쯔를 몰아부쳤다. 밍쯔의 절망은 분노로 변하고 그 분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게 된다. 더러운 도랑물을 건네 달라고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소녀에게 밍쯔는 보란 듯이 내밀었던 손을 슬쩍 다시 거두어 들이고 소녀는 도랑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밍쯔에게 흙탕물을 튀겼다는 것도 알지 못한채 밥을 먹고 나온 트럭 운전수는 밍쯔가 사과상자를 묶었던 끈을 풀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출발했던 트럭의 짐칸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사과상자와 거리를 가득 메우는 빨간 사과의 물결은 마치도 상처받은 밍쯔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떨어져 굴러다니던 사과 몇 알이 배고픈 자들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뱃속을 채워주던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도 서글픈 장면이 아닐수가 없다.

이 소설속에는 것은 어린 소년 밍쯔가 자라는 모습과 함께 변해가는 중국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아울러 자연과 멀어지는 인간의 모습도 함께.. 어떤 사회든 변화는 찾아온다. 숱한 시행착오와 절망을 함께 동반한채로..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변화라는 물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밍쯔가 살았던 고향 샤오더우의 절망은 작은 희망을 데리고 찾아왔지만 이내 다시 절망으로 부서져버린다. 그야말로 '종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변화의 물결이 하얗고 고귀한 모습을 한 양의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왔지만 환영과도 같은 존재로써 다가왔을 뿐이었다. 서로 돕지 않고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변화를 자연은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나 원했던 희망이었기에 샤오더우의 많은 풀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굶어죽는 양들의 모습,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던 양들의 모습을 통해 희망이라는 단어의 낯설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정말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 끝없을 것 같은 절망속에서도, 진흙탕같은 현실속에서도 희망을 싹틔우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쯔웨이라는 소녀에게 지팡이를 만들어주는 밍쯔의 마음을 통해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휠체어를 탔던 소녀는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의 밍쯔가 건네주었던 그 지팡이로 인하여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잠시동안만.. 아프게 성장하는 밍쯔의 모습과 일치되는 상황이다. 포기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희망을 가질수도 없는 모진 현실.. 소녀가 잠시라도 걸을 수 있게되는 과정속에서 밍쯔 역시 서서히 어른으로 변해간다. 마침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된 소녀와 이제 어른으로써의 자리매김을 해가는 밍쯔..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곳도 아니야..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지나치게 성실해서도, 양심을 내팽개쳐서도 안 되는거야... 모순이다. 하지만 또한 진리다. 지나치게 착하거나 성실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남을 마구 짓밟아서도 안되는 게 세상이치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아채야만 하는 것일까? 목공일을 배우기 위해 자신에게 왔던 밍쯔와 헤이관에게 목수스승 싼스님은 나의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분별력을 가르치지 못해 미안하다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손기술만을 가르쳤을 뿐이라고.. 그러니 그 다음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게 된다.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실을.. 우리가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남겨주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들이 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는 있는 것일까?  진실로 가슴아픈 대목이 아닐수가 없다.

시작은 정말이지 답답했다. 흐름이 너무 더디기만 했다. 아픔과 절망부터 시작했던 <17세 밍쯔>의 이야기는 중간부분부터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처 달려나가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목소리로 메아리를 만든다. 목공일을 하는 싼스님과 헤이관과 밍쯔는 하나의 현실이었고, 밍쯔에게서 지팡이를 받았던 쯔웨이는 절뚝거리는 희망이었으며, 쯔웨이 곁에 잠시 머물렀던 깔끔하고 부유해보였던 소년 쉬다는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이상이었다. 현실은 서로 부딪히며 얼굴 붉히기도 하고 큰소리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절름발이 같은 희망이라할지라도 그것을 곁에 두려고 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잔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글픈 이야기였기도 했다. 이제 어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도약하는 밍쯔의 앞날에 밝은 빛이 비춰주기를.. 그에게 올바른 희망의 싹이 움터나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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