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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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 외면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진실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에게 진실이라는 것이 인정받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정말 아무런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줄수는 있는 것일까? 이 책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은 게으름이라고. 진실은 너무 교만해서 도무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그리하여 진실은 진실아닌 것들이 진실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때 그저 누워서 입에 감떨어지기만 바라고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상처와 실망을 안겨줄 뿐이라고... 단연코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동의한다. 진실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인식될 뿐이고 흔적을 남기기에도 너무나 미미한 존재일뿐이라고..

처음부터 단호하게 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다. 책속의 주인공 강인호와 서유진이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을 위하여 법정에 섰을 때 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도 없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돈도 없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조용히 해 이것들아!... 벌써 여러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잊지 못하는 남편의 목소리속에도 그 일갈은 남아 있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심적으로는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지만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노라고 말했다던 법률심사원의 말을 들려주면서 무너져내리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내게는 생생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官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가 그저 힘없고 돈없는 현실만 탓할 수 밖에 없었듯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여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너희도 하나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법정싸움도 불사했던 강인호와 서유진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장애우라는 말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얼만큼이나 껴안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말을 못할 뿐인데, 남들보다 조금 생각하는 힘이 모자랄 뿐인데, 단지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이 생각할 줄 알고, 그들보다 조금 덜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불편을 이용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천벌받아 마땅한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전에 읽었던 정유정의 소설이 떠올랐다. <내 심장을 쏴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두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갇혀진 공간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탓일게다. 그곳을 떠난다해도 마땅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던 자애학원의 말 못하는 아이들과 세상에게 등떠밀려 들어왔던 정신병원의 두 남자에게 다가왔던  외면이라는 서글픈 진실..  그 공간속에서 정해진 규율은 그들을 옭아매는 올무같았을 것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목을 조여오는 올무같았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라>의 저자처럼 실제적인 체험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랬던 나의 간절함이 끝내 무너져내리던 순간 작가의 말은 내게 하나의 비수처럼 꽂히고 말았다. 단 한 줄의 신문기사때문이었다고.. 그 순간부터 가시에 찔린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고..  교장에게 행정실장에게 생활지도교사에게 많은 시간동안 성폭행을 당해왔던 아이들이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작은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사람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닐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삶의 무게가 그들을 진실앞에서 외면하라고 유혹했을 것이다. 비참한 현실의 짧은 안위를 위하여 어린아이들의 절규를 합의금이라는 악마에게 팔아버려야 했던 아이들의 부모조차도 우리는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책속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무진시는 하나의 거대괴물같다. 처음부터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았을게다. 자석처럼 달라붙어버리는 힘과 권력과 돈의 흐름이 그 괴물을 점점 부풀어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 괴물의 몸뚱이에 붙어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들조차 탓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또한 서럽고도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갖 비리와 부조리가 보란듯이 우뚝 서버린 세상..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죠... 모든것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서유진은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었을 게다. 정말로 절대자의 힘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되어지는 때마다 혼자였다고 느꼈기에 그들은 '홀더'라는 이름을 앞세운채 살아남았을 것이다. '홀로 더불어'.. 홀로 서고 더불어 산다.. 비록 법정싸움에서는 패했지만  세상속에서 내밀어준 식지않은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러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고 위안 삼았을 게다. 저자는 말한다. 성폭행의 피해앞에서 동생을 잃어야했던 어린 민수의 입을 통하여.. 우리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힘있고 돈있는 저편에서 본다면야 당연히 진 것이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이긴 것인지도 모른다고 서글픈 독백을 한다.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그야말로 비리와 부조리의 도가니, 광란의 도가니가 아닐수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조바심이 났다. 강인호가 아이들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못하고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웠을 때부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녹화를 하고, 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텔레비젼 방송이 나가고, 그들이 법정싸움을 시작했을 때,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될거라고, 길고 지루한 싸움속에서 철저하게 짓밝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또하나 만들게 될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서글프게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일테니 말이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니 우리가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던 장애우들의 외침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하나둘씩 불러주던 그 이름들이 보여질 때 정말 많이 아팠겠다고 먹먹해지던 가슴속의 느낌..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이 울림이 되어 우리의 가슴속에 메아리쳐주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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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밍쯔 - 산양은 천당풀을 먹지 않는다
차오원쉬엔 지음, 김지연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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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사람은 수영을 하지 못한다. 죽겠다고 했던 사람도 위기의 순간에서는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수영은 못하지만 그사람 살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무엇이든 곁에 있는 것은 잡아볼 것이고 누구든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도움으로 어딘가에서 썩은 나무조각이라도 흘러내려온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17세 밍쯔>를 읽으면서 내내 떠나지 않고 있던 내 머리속의 영상이다. 그만큼 밍쯔의 삶은 절실했다. 누군가에게 손내밀수도 없었던, 아니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기에 혼자 아파해야 했고 혼자 성장해야만 했다.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들은 도대체 어떤 규칙속에서 움직이는 걸까? 어떤 빌어먹을 존재가 나를 희롱하는거지? 도대체 왜 나만 이렇게 갖고 노는거야?  더이상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다가왔던 복권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차가운 현실이었다. 있는 돈 모두 털어 복권을 사는 밍쯔의 마음은 차라리 현실에 대한 절규였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보고싶지 않았을게다. 그 지독한 자신의 현실을.. 차마 개봉하지도 못한 채 주변사람에게 되팔아버린 그 몇 장의 복권속에서 조롱하듯이 남의 손안에서 1등에 당첨되는 한장의 복권을 보는 순간 그 절망은 형언할 수조차 없었을게다. 하늘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도대체 왜 나만 안되는거지? 왜? 누구나 한번쯤은 하늘을 향한, 누군가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에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아프도록 때려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밍쯔는 울지 않았다. 눈물조차도 거부해버린 밍쯔의 서글픔을 누가 알아줄까?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거대 공룡처럼 밍쯔를 몰아부쳤다. 밍쯔의 절망은 분노로 변하고 그 분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게 된다. 더러운 도랑물을 건네 달라고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소녀에게 밍쯔는 보란 듯이 내밀었던 손을 슬쩍 다시 거두어 들이고 소녀는 도랑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밍쯔에게 흙탕물을 튀겼다는 것도 알지 못한채 밥을 먹고 나온 트럭 운전수는 밍쯔가 사과상자를 묶었던 끈을 풀어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출발했던 트럭의 짐칸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사과상자와 거리를 가득 메우는 빨간 사과의 물결은 마치도 상처받은 밍쯔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떨어져 굴러다니던 사과 몇 알이 배고픈 자들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뱃속을 채워주던 순간은 정말이지 너무도 서글픈 장면이 아닐수가 없다.

이 소설속에는 것은 어린 소년 밍쯔가 자라는 모습과 함께 변해가는 중국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아울러 자연과 멀어지는 인간의 모습도 함께.. 어떤 사회든 변화는 찾아온다. 숱한 시행착오와 절망을 함께 동반한채로..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변화라는 물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밍쯔가 살았던 고향 샤오더우의 절망은 작은 희망을 데리고 찾아왔지만 이내 다시 절망으로 부서져버린다. 그야말로 '종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변화의 물결이 하얗고 고귀한 모습을 한 양의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왔지만 환영과도 같은 존재로써 다가왔을 뿐이었다. 서로 돕지 않고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변화를 자연은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나 원했던 희망이었기에 샤오더우의 많은 풀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굶어죽는 양들의 모습,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던 양들의 모습을 통해 희망이라는 단어의 낯설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정말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 끝없을 것 같은 절망속에서도, 진흙탕같은 현실속에서도 희망을 싹틔우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쯔웨이라는 소녀에게 지팡이를 만들어주는 밍쯔의 마음을 통해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휠체어를 탔던 소녀는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의 밍쯔가 건네주었던 그 지팡이로 인하여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잠시동안만.. 아프게 성장하는 밍쯔의 모습과 일치되는 상황이다. 포기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희망을 가질수도 없는 모진 현실.. 소녀가 잠시라도 걸을 수 있게되는 과정속에서 밍쯔 역시 서서히 어른으로 변해간다. 마침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된 소녀와 이제 어른으로써의 자리매김을 해가는 밍쯔..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곳도 아니야..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지나치게 성실해서도, 양심을 내팽개쳐서도 안 되는거야... 모순이다. 하지만 또한 진리다. 지나치게 착하거나 성실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남을 마구 짓밟아서도 안되는 게 세상이치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아채야만 하는 것일까? 목공일을 배우기 위해 자신에게 왔던 밍쯔와 헤이관에게 목수스승 싼스님은 나의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분별력을 가르치지 못해 미안하다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손기술만을 가르쳤을 뿐이라고.. 그러니 그 다음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게 된다.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실을.. 우리가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남겨주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들이 이 험하고 거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는 있는 것일까?  진실로 가슴아픈 대목이 아닐수가 없다.

시작은 정말이지 답답했다. 흐름이 너무 더디기만 했다. 아픔과 절망부터 시작했던 <17세 밍쯔>의 이야기는 중간부분부터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처 달려나가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목소리로 메아리를 만든다. 목공일을 하는 싼스님과 헤이관과 밍쯔는 하나의 현실이었고, 밍쯔에게서 지팡이를 받았던 쯔웨이는 절뚝거리는 희망이었으며, 쯔웨이 곁에 잠시 머물렀던 깔끔하고 부유해보였던 소년 쉬다는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이상이었다. 현실은 서로 부딪히며 얼굴 붉히기도 하고 큰소리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절름발이 같은 희망이라할지라도 그것을 곁에 두려고 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잔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글픈 이야기였기도 했다. 이제 어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도약하는 밍쯔의 앞날에 밝은 빛이 비춰주기를.. 그에게 올바른 희망의 싹이 움터나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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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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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작부터 스포일러를 자처해야겠다. 무슨 말이냐하면 추리소설이나 영화속의 범인은 항상 곁에 머문다는 것이다. 늘 그랬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범인을 쫓아가는 형사의 주변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보면 대충은 맞아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은자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범인은 후자일까 전자일까?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긴장감이 생겨난다. 누가 범인일까? 같은 호흡을 하며 범인을 쫓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영화를 볼 때도 그렇지만 소설도 어느정도는 그 형식을 충실하게 따가가고 있는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범인을 알아맞추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설령 범인에게서 살짝 멀어졌다해도 소설의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어느정도 범인의 윤곽을 그려내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알아챘는데도 재미있느냐고? 물론이다. 사건은 사건대로, 해결해야하는 과정은 과정대로 그것을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면 구성이 너무 허술한 탓일게다.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온다. 어느순간 무릎을 딱,치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는 말도 될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났을 때 범인이 밟아가던 그 기막힌 범죄의 구성이 참으로 놀라웠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잔잔한 애정공세라니... 그 느낌을 다시 <잠자는 숲>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잠자는 숲>이라는 제목과 책표지의 그림 토슈즈를 보면서 나는 두가지를 떠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와 언젠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다. 엉망이 되어버린 그녀의 발모양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놀라워 했던 그 때를...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발레리나들의 삶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의 열의와 준비된 노력이 없이는 프리마발레리나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꿈꾸는 것을 누구나 가질수는 없다는 것.. 그랬기에 그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더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것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초대받지 못한 마녀의 주술에 걸려 물레에 찔려죽을 운명이었으나 백년동안의 잠을 자는 것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는 오로라 공주. 그녀가 잠들자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도 잠이 들었었다. 모티브가 된 동화속 이야기와 이 소설의 발레단이 이끌어가는 묘한 심리전이 신기하게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야기 설정자체에서도 묘한 여운을 남겨준다.

도쿄의 유명 발레단..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아무런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던 첫번째 살인의 증거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가가형사의 마음속으로 조용하게 다가오던 미모의 발레리나 미오.. 실질적인 주인공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설명을 주도하는 듯한 미오의 존재가 조금은 의아했었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가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뒤쪽 역자후기를 읽으면서 가가형사에 대한 프로필을 조금은 얻을 수 있었고 가가형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듯 하다.) 그 시리즈에 대한 궁금증을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하고 형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자를 용의자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써 대하는 그의 여림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책속에서 살인을 불러들일만큼  발레리나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순애보보다는 미오를 향한 가가의 마음이 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내게 전해져 온다.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주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정의는 여러번을 생각해보아도 참 아름답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순간적인 사랑보다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림으로 전해져오는 진실된 사랑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어쩌면 폐쇄적인 공간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발레단원들은 서로의 모습속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로든 테두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외로움이었을 게다. 그리고 욕심이었을 게다. 어떤 외로움이었든, 어떤 욕심이었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버텨내게 해주는 하나의 버팀목이었을 게다. "그냥 왠지 오늘은 나를 위해 누군가가 이야기해주는 걸 듣고 싶었어요. 나 혼자만을 위해"..라고 말하던 미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리소설을 읽고 난 뒤 안도감이 아니라 이렇게 뭉클하게 젖어드는 뒷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을 전해주는 형사를 만난다는 것도 그리 흔치는 않을 듯하다. 추리소설치고는 상당히 여리고 감성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사고 후유증으로 소리를 잃어가던 발레리나와 그 친구의 마지막 춤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프리마발레리나를 위해서, 또한 관객을 위한 최고의 발레공연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니..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멋진 발레로 그려지는 영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앞에 그려진다. 동화와 발레와 추리소설의 만남.. 멋지지 않은가! 거기에 양념처럼 맛을 내주는 범인과 형사의 사랑이라니! 이쯤에서 나는 가가형사의 뒤를 밟아보고 싶어진다. 역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가가형사 시리즈'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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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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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고전을 대할 때마다 이 부끄러움앞에서 그저 먹먹하다. 말로는 우리의 것을 가까이하자고 하면서 과연 나는 얼만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뿌듯한 것은 이렇게라도 우리의 고전과 마주할 수 있다는 다행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부제처럼 이 책은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다보니 좀 더 크게 아우르는 것은 역시 중국기행이다. 세계 3대 중국견문록중의 하나라는 이 작품은 실망스럽게도 우리에게서가 아닌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는 책. 국제 상황과 정세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의 가치를 우리에게보다 일본에게서 먼저 인정받았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성종 18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던 조선 선비 최부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했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인 나주를 향해 배를 출발 시킨다. 그다지 좋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급한 마음에 배를 띄웠지만 그만 풍랑을 만나 배는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 와중에서 위기에 닥쳤을 때 문제해결을 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좌절해버리는 조선의 근성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는 건 왠지 씁쓸했다. 그렇게 바다를 표류하던 중 해적을 만나 고충을 겪기도 하고, 왜구로 오인을 받아 중국땅에서도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선비 최부는 함께 배를 탔던 몸종과 군인들을 통솔할 줄을 알아 힘겨운 여정속에서도 멋진 통솔력을 보여준다. 마흔세명의 일행이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치와 벼슬아치로써의 곧은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최부의 여정을 따라가는 도중 고비마다 설명을 해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한번 요점을 설명해주는 대목이 참 좋았다. 어른인 나조차도 그 설명이 꽤나 유익했다는 말이다. 왜구로 오인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한 최부는 몰래 빠져나와 그때부터 중국땅을 기행하게 된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기에 가는 곳마다 공포와 두려움이 따라오지만 그 때마다 그의 박학다식함이,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이 그를 구해낸다. 중국관리들로부터 인정을 받기까지, 그리하여 외국관리로써의 예우를 받기까지 참으로 힘겨운 여정을 지난다. 결국 중국의 황제까지 만나게 되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 최부.

최부의 표류기를 듣고 난 성종은 그것을 기록하라 명하고 드디어 최부의 표해록이 만들어진다. 본래 제목은 '중조견문일기中朝見聞日記'였는데 뒤에 간행할 때 이름을 표해록으로 바꿨단다. 일본 스님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는 표해록에는 주변국들, 중국 내륙에 관한 지리적, 군사적인 면이나  중국의 생활양식, 인심, 풍속들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만 설명되어져 있다).  물론 최부 혼자서 쓴 글이 아니라 수행했던 아전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가 틈틈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되고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사형을 당한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최부..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대하여 애석해 했다고 한다. 늘 그렇다. 그 쓸데없이 허울만 좋은 말싸움에 우리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스러져 갔다. 그래도 그가 남긴 작품이 있어 그 후대의 자손들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싶다.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다행스러움이 아닐까? 정말 멋진 이야기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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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한 친절 - 캐나다 총독 문학상, 의회 예술상 수상작
미리암 토우스 지음, 황소연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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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쎄.. 잘 모르겠다. 책을 읽고나니 공연스레 마음만 뒤숭숭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종잡을수가 없다. 꼬아도 너무 꼬아버린듯한 느낌이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입속에서 웅얼웅얼거리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는 말이다. 문화적인 차이일까?  하지만 이 책을 말해주고 있는 낱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종교에 관한, 신앙에 관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비록 그 테두리가 희미하긴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책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직설적인 화법을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서, 그녀가 바라보는 가족과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는, 그리하여 그녀의 좁은 시선속에 머무는 하나의 관념을 읽어낸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만 그랬을까? 어쩌면 그랬을수도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노미의 가족들이 서로를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이야기.. 그들은 왜 서로의 곁을 떠나야 했을까? 그리고 남겨진 자들은 그것을 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했을까?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운듯이 흘러가는 노미의 가정생활은 뭔가 불안하다. 그녀 또한 자신앞에서 사라져버린 엄마와 언니의 존재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반목과 이해를 거듭한다.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엄마와 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이제 남은 아빠를 위해 무언가 해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작고 소박한 꿈들을 이루기엔 뭔가 이상하다. 동네사람들, 학교, 그리고 외삼촌의 방문.. 그녀의 외삼촌은 목사다. 현실속의 삶보다는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을 내리는 악마같은 존재이다. 아이러니다. 내세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키우는 그의 존재가 현실속에서 행복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악마같은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이..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가끔씩은 생각해보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삶보다도 죽음뒤의 삶에 대하여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앞에서 나 역시도 허허웃음지을 때가 많았지만 노미가 겪어내야하는 슬픔에는 반도 따라가지 못할 듯 싶다. 점점 무너져가는 노미의 어린 삶이 너무 서글펐다. 거대한 무언의 존재앞에서 자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정체성마져 흔들리는 사춘기소녀에게 떨어진 무서운 형벌, '파면'... '야릇한 친절'이라는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실제적으로 내 삶의 곁에서 머무는 믿음의 허상 또한 그 '야릇한 친절'을 늘 품에 안고 다닌다고 생각해왔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뱉어내는 그 '야릇한 친절'의 뉘앙스가 역겹기까지 했었다. 결국 '파면'당하여 떠나야 하는 작은 딸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가족 아빠마져도 노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간혹 매스컴을 통해서 들려오던 믿음을 가진 자들의 욕망앞에서 왠지 나는 주눅들어버리곤 한다. 절대의 존재만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다고 수혈도 거부한다는 사람들(이 책속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노미의 친구 리디아를 통해서 보여주는..), 절대의 존재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나라에 대한 충성조차도 거부한다는 사람들.. 정말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사실 내게 중요하지않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죽음뒤의 삶에 대한 그들만의 이기심이 나는 두려울 뿐이다. '믿음'이라는 휘장을 내려놓고서 그들만의 틀에 갇혀사는 그 고집스러운 점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에 대하여 어떻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그들이 책임져야 할 그들만의 삶일테니 말이다.

책정보에 나와 있는 수많은 격찬들이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한 광고성 멘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져 들었다.(오해마시라,이건 단순히 나혼자만의 생각일뿐이니!)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처럼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미래가 없는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지독한 쾌락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현재가 없는 미래에만 중점을 둔다는 것도 문제있다. '중도'.. 참 어려운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뒤의 천국을 위하여 현재를 부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종교는 종교고 세상은 세상이다.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미래만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것은 분명 어불성설이다. 세상의 쾌락이 모두 죄악시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엄격한 규율도 때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갉아먹는 상태가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야릇한 친절'에 관한 이 책의 느낌은 제목처럼 정말 '야릇하다'. 자신이 살았던 메노파 마을의 이면성을 소설로 풀어냈다는 말을 보면서 그다지 용기있는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던 탓이다.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저자의 글이 왜 내게는 다가오지 못했을까?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현실속의 삶에서 느껴야하는 불안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 무엇을 탓할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죽을 수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고 말한 어린 노미의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아이비생각


사족...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지극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기에 옮겨보았다)

메노파... 전 세계에 150만 명의 신자가 있다지만 우리나라에는 단 두 개 교회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메노파(메노나이트교회)는 우리에게 꽤 낯선 교파이다. 이런 까닭으로 메노파 교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의 16세 소녀가 화자인 이 책은 그 배경부터가 충분히 독특하다.
책 속의 주인공 노미 니켈이 ‘우리 십 대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창피한 종파’라고 말한 메노파는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자 메노 시몬스가 설립한 재세례파(再洗禮派)로, 오늘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서적 생활 방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도와 의식 등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열도 일어났던 이들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 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한다. 삶보다는 죽음을, 축제보다는 고행을 가치 있게 보는 이들의 사상은 감수성 예민한 열여섯 살 소녀에겐 숨통을 틀어막고 온몸을 옥죄는, 벗어버리고 싶은 옷과 같은 존재다. (-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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