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릇한 친절 - 캐나다 총독 문학상, 의회 예술상 수상작
미리암 토우스 지음, 황소연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글쎄.. 잘 모르겠다. 책을 읽고나니 공연스레 마음만 뒤숭숭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종잡을수가 없다. 꼬아도 너무 꼬아버린듯한 느낌이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입속에서 웅얼웅얼거리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는 말이다. 문화적인 차이일까?  하지만 이 책을 말해주고 있는 낱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종교에 관한, 신앙에 관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비록 그 테두리가 희미하긴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책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직설적인 화법을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서, 그녀가 바라보는 가족과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는, 그리하여 그녀의 좁은 시선속에 머무는 하나의 관념을 읽어낸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만 그랬을까? 어쩌면 그랬을수도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노미의 가족들이 서로를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이야기.. 그들은 왜 서로의 곁을 떠나야 했을까? 그리고 남겨진 자들은 그것을 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했을까?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운듯이 흘러가는 노미의 가정생활은 뭔가 불안하다. 그녀 또한 자신앞에서 사라져버린 엄마와 언니의 존재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반목과 이해를 거듭한다.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엄마와 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이제 남은 아빠를 위해 무언가 해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작고 소박한 꿈들을 이루기엔 뭔가 이상하다. 동네사람들, 학교, 그리고 외삼촌의 방문.. 그녀의 외삼촌은 목사다. 현실속의 삶보다는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을 내리는 악마같은 존재이다. 아이러니다. 내세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키우는 그의 존재가 현실속에서 행복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악마같은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이..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가끔씩은 생각해보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삶보다도 죽음뒤의 삶에 대하여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앞에서 나 역시도 허허웃음지을 때가 많았지만 노미가 겪어내야하는 슬픔에는 반도 따라가지 못할 듯 싶다. 점점 무너져가는 노미의 어린 삶이 너무 서글펐다. 거대한 무언의 존재앞에서 자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정체성마져 흔들리는 사춘기소녀에게 떨어진 무서운 형벌, '파면'... '야릇한 친절'이라는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실제적으로 내 삶의 곁에서 머무는 믿음의 허상 또한 그 '야릇한 친절'을 늘 품에 안고 다닌다고 생각해왔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뱉어내는 그 '야릇한 친절'의 뉘앙스가 역겹기까지 했었다. 결국 '파면'당하여 떠나야 하는 작은 딸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가족 아빠마져도 노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간혹 매스컴을 통해서 들려오던 믿음을 가진 자들의 욕망앞에서 왠지 나는 주눅들어버리곤 한다. 절대의 존재만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다고 수혈도 거부한다는 사람들(이 책속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노미의 친구 리디아를 통해서 보여주는..), 절대의 존재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나라에 대한 충성조차도 거부한다는 사람들.. 정말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사실 내게 중요하지않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죽음뒤의 삶에 대한 그들만의 이기심이 나는 두려울 뿐이다. '믿음'이라는 휘장을 내려놓고서 그들만의 틀에 갇혀사는 그 고집스러운 점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에 대하여 어떻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그들이 책임져야 할 그들만의 삶일테니 말이다.

책정보에 나와 있는 수많은 격찬들이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한 광고성 멘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져 들었다.(오해마시라,이건 단순히 나혼자만의 생각일뿐이니!)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처럼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미래가 없는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지독한 쾌락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현재가 없는 미래에만 중점을 둔다는 것도 문제있다. '중도'.. 참 어려운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뒤의 천국을 위하여 현재를 부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종교는 종교고 세상은 세상이다.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미래만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것은 분명 어불성설이다. 세상의 쾌락이 모두 죄악시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엄격한 규율도 때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갉아먹는 상태가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야릇한 친절'에 관한 이 책의 느낌은 제목처럼 정말 '야릇하다'. 자신이 살았던 메노파 마을의 이면성을 소설로 풀어냈다는 말을 보면서 그다지 용기있는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던 탓이다.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저자의 글이 왜 내게는 다가오지 못했을까?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현실속의 삶에서 느껴야하는 불안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 무엇을 탓할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죽을 수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고 말한 어린 노미의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아이비생각


사족...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지극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기에 옮겨보았다)

메노파... 전 세계에 150만 명의 신자가 있다지만 우리나라에는 단 두 개 교회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메노파(메노나이트교회)는 우리에게 꽤 낯선 교파이다. 이런 까닭으로 메노파 교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의 16세 소녀가 화자인 이 책은 그 배경부터가 충분히 독특하다.
책 속의 주인공 노미 니켈이 ‘우리 십 대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창피한 종파’라고 말한 메노파는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자 메노 시몬스가 설립한 재세례파(再洗禮派)로, 오늘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서적 생활 방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도와 의식 등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열도 일어났던 이들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 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한다. 삶보다는 죽음을, 축제보다는 고행을 가치 있게 보는 이들의 사상은 감수성 예민한 열여섯 살 소녀에겐 숨통을 틀어막고 온몸을 옥죄는, 벗어버리고 싶은 옷과 같은 존재다. (-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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