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0
이경덕 지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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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는 말을 듣게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윤기..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보고 신화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해도 나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아마도 내게 신화속으로의 여행을 부추킨것도 이윤기의 책일 것이다. 이후로 나는 여러나라의 신화와 만났다. 한편으로는 조금 어이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신화를 더 많이 보게 된듯도 하지만... 북유럽신화를 시작으로 이집트신화, 켈트신화 등등 신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우리신화를 찾게 되었고 일본이나 중국신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처음 그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신화로 재창조되어질 때의 흥분이라니!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옛날 이야기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신화가 나는 왜 그리도 좋았던 것일까?

신화속에 존재하는 신들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인간을 만들고 지배를 하기도 했지만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인간이 힘겨움을 호소하면 그것을 해결해주기도 했고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어 가질 줄도 알았다. 그랬던 신들이 왜 인간을 버렸을까? 아니 왜 인간을 떠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욕망, 욕심..... 지금의 이 세상을 멍들게 하고 있는 욕심이 그 시대에도 우리에게서 신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욕심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 과정은 흔히 만날 수가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리고 처음의 세상속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먼저 아는자,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았던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신에게 소원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장 먼저 잊는 것이 명사라고 합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 생활에서 명사가 가장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것은 바로 동사입니다. 신화도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화는 굳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05쪽)  놀랍다. 그리고 공감한다. 신화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 단순한 옛얘기가 아니라 신화가 안고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너무 황당한것 같아 신화를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하기에 꼭 읽혀야 하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해주니 의아해하던 후배의 표정이 생각난다. 마음속의 편견을 버리고 신화를 다시 보라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놓치지 말라고.. 어쩌면 신화는 지금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길라잡이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는 멀리있지 않다. 아주 먼 시절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존재한다. 일주일이 신들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은 기본적인 신화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토테미즘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뭔가 안타까운 것들이 그 속에 존재한다. 신화속에는 한 시대가 들어있고 그 시대를 이루게 되는 배경이 들어있고, 그 시대의 사회적인 모습이 들어있고, 그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적인 흐름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말해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도 신화와 어울어진 우리의 일상과 만날 수가 있다. 영화나 그림속에서 혹은 길을 걷다가도 만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가끔 찾아가는 절에서도 신화를 만날 수 있으며 포크나 저울, 사과나 옥수수같은 우리의 생필품이나 먹거리속에도 신화는 숨어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굳이 찾으려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서양의 신화와 동양의 신화를 서로 비교해주었다. 어찌보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지만 분위기와 느낌은 많이 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우리신화 이야기가 반가웠다.

영화를 통한 신화읽기는 재미있다.  <반지의 제왕>은 켈트신화를 바탕으로 깔았던 작품이다. <메트릭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 세계와는 다른 또하나의 세계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또하나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그려주고 있다.  세상의 종말을 그렸던 <딥 임팩트>, <아마게돈>, <하드 레인>처럼 종말을 예고하는 신화도 참 많다. <트로이>, <페드라> 같은 경우에는 신화를 영화로 옮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신화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절에서 만날 수 있는 신화로써 귀면상을 예로 들어주는데 그 귀신형상같은 얼굴이 왜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서야 했는지를 신화를 통해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즘 들어 부쩍 이슈화되고 있는 '가이아 이론' 또한 그렇다. 대지의 여신이 바로 '가이아'인 까닭이다. 살아 숨쉬며 대지위의 자연이 파괴될 때마다 몸을 흔들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우리는 그것을 자연재해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는 아이가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 역시 신화속에서 찾아냈다. 호루스의 저울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 저세상으로 가면 한쪽에 신의 깃털이 올려진 저울에 인간의 선악을 저울질 한다는... 그리하여 거짓을 고한 사람은 돼지로 다시 태어난다는...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정의까지 심판하고 있음이다.

이렇게 신화는 화석화된 이야기도 아니고, 따라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거짓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신화는 늘 우리 주위에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로서만 보려고 하고 명사로서만 신화를 보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206쪽)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준다는 네 시대에 대한 이야기(237쪽~240쪽)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대였다는 '황금시대', 그런데 그 좋은 시대에 인간은 너무 흥청거리며 마셔댔다. 제우스는 그들을 지구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은의 시대'가 왔다. 은의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먹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하지만 인간은 하찮은 일에도 불평을 터뜨렸고 사소한 일로도 싸웠다. 제우스는 인간을 모두 멸종시켰다.  다음은 '청동시대', 이 시대에 계절이 생겨났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절망적인 겨울의 추위가 닥쳤다. 예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술과 능력이 발달했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시대를 마감했다. 그 다음 '철의 시대'가 되자 인간은 욕망을 알게 되었고 죄악이 세상에 넘쳐났다. 이 때 제우스가 보낸 여인이 판도라다. 결국 인간을 벌하기 위해 보낸 여인이 판도라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들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신들은 하나씩 하늘로 돌아갔다. 이 때  인간이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홀로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저울은 점점 악한 쪽으로 기울어졌고 아무리 바로 잡으려해도 소용이 없자 그녀마저 인간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끝없을 것같은 인간의 욕망.. 그 욕망으로 엮여지는 죄악들.. 이제 인간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신을 품고 산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저마다의 신을 부른다. 신은 끝내 인간을 버릴까?  종말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정화되어지지 않을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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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 카툰 - 보이지 않는 영과 혼의 세계를 찾아가는 카툰 라이프
오차원 지음 / 펜타그램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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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사람이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氣의 흐름을 볼 때 오른손으로 氣를 빨아들이고 왼손으로는 氣를 방출한다는 말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왼손과 오른손으로 서로 악수를 하게 된다면 당연히 왼손을 내미는 쪽이 氣를 빼앗기는 것이 될 테다. 책을 읽는 중에 '에너지 뱀파이어'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수긍을 하게 된다. 쉬운 예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 그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는 날이면 초죽음 상태가 되어버린다던 예를 들어본 적이 있음이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인데...그 반면에 상대방은 그 학생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컨디션이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 그만큼 상대에게 氣를 빼앗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게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무슨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 곁에 머무는 영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런 현상을 내가 직접 겪어보기도 했고 친정엄마와 이야기하다보면 그런 존재가 아주 없지만은 않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이 단순히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실제와 연결되는 부분이 생겨난다면 부정만 할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이 책속에서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지만 친정엄마를 통해 할아버지 묘의 이장과정을 들으면서 속으로 놀랐던 적이 있었다.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꿈속에서 몇 번씩이나 보신 엄마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스럽다하여 아버지께 말씀 드린 후 할아버지의 묘를 파 보았더니 물이 가득 차 있더라는 말은 실제로 겪으신 엄마의 경우이니 완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갑짜기 죽음을 맞이하면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어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중간계에 머문다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다. 그것이 실제가 되었든 상상이 되었든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소설도 꽤나 된다. 또한 무언가 마음속에 미진한 것이 많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그 중간계에 머물러 이승으로 왔다갔다 한다는 소재도 많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그 세계를 그리는 사람들의 표현이 너무나도 상반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향기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고 어떤 이는 무채색의 삭막한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보여지던 유치한 그림을 보면서 흔하디 흔한 심령체험인 모양이라고 편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커져가는 공감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전적으로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에 놀랐다. 자신의 생체에너지가 약해 氣가 허한 사람들이 그런 상황과 자주 마주친다는 말도 그렇지만 나무가 방사하는 '에테르오라'를 통해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다는 W.E.버틀러의 방법은 흥미로웠다. 역시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모양이다. 동물조차도 자신에게 이상이 생기면 치유할 수 있는 풀을 찾아 뜯어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 몸의 여러곳에 있는 정신적 힘의 중심점이라는 차크라 chakra 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위치해 있는 아즈나 차크라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에 영계를 볼 수 있는 제 3의 눈이 있다는 말을 보면서 인도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들이 양미간에 점을 찍는 이유가 바로 제3의 눈을 의식하라는 뜻이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하여, 아니 증명할 수 없다하여 무조건 터부시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일전에 읽었던 <괴물전-악몽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의 저자는 자신의 악몽과 싸워 이기기 위하여 그렇게 기록을 해 놓았다고 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남과 다른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른 氣를 가졌기에 너무나도 힘겨웠지만 그것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으니 더욱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자신의 힘겨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저자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세상사람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에 대한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이 이채로웠다. 그 과정을 쫓아가는 나 역시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부분이 참으로 많았다.

한번 더 생각해 본다. 과학만이 살 길일까? 우리의 진화는 오로지 과학적인 것을 통해서 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편리를 위해서만 변하는 것이 진화라면 그것은 진정한 진화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진실을 알기 위해 표류했으며 또 표류한다던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일을 기억해내고 이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있었다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돌아가신 후 삼칠일을 지내는 동안 내 곁에 아주 가까이 붙어 계셨던 아버지의 형상을 기억한다. 실제로 살아계신 것처럼 너무나도 똑같은 느낌을 주었던 아버지의 형상.. 나는 너무 무서워서 울었다. 주변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를 보내주지 않아 그렇다고 말했지만 실제적으로 당하는 나는 얼마나 끔찍스러운 공포였는지 모른다. (나는 사실 아버지를 무척이나 많이 미워했었다! 돌아가신 그 순간까지도!) 어찌어찌해서 다행히 아버지의 형상은 보이지않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는 지금까지도 그 기억은 나를 섬뜩하게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봄직한 이야기들이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우연이겠지,하며 지나쳤던 일들... 과장이나 거짓이 없어보이는 작가의 이야기속에 흠뻑 빠져들었었다. 공포보다는 신비롭게 보여지기까지 했던 책 속 여행이었다. 靈의 공격... 그리고 그 靈의 공격을 느끼거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을 떠도는 靈중에도 좋은 靈과 나쁜 靈이 있다는 이야기.. 사람마다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靈이나 수호천사가 있다는 이야기.. 기회가 된다면 氣체험을 한번쯤 해보고 싶어진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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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 의열단, 경성의 심장을 쏘다! 삼성언론재단총서
김동진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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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독자 가운데는 거의 처음으로 김상옥과 황옥, 김시현, 김원봉의 이름을 접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260쪽)

바로 내가 그렇다. 나는 정말로 이 책을 보고서야 그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했다. 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앞장서지 않았을 뿐 뒤에서 묵묵히 대한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름들이 얼마나 많았을런지 그것은 짐작조차도 못할 일이다. 무관심이라는 말은 참말이지 무서운 말이다. 오죽했으면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을까? 문화 유적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다보면 표지석 하나만 덩그마니 서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무슨 무슨 표지석이라고 아주 간단히 한두줄 적어 놓기는 했지만 그것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역사가 아무리 승리한 자에 의해 쓰여진다고는 하지만 우리처럼 우리의 역사에 대한 흔적을 도외시하는 민족도 없을 듯 싶다. 신문을 읽다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갯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품어안을 수 있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보게 된다. 보여주기 위함보다는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다.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나이 김상옥과 황옥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단순히 이러이러한 항일투쟁이 있었다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 안타까웠기에 저자도 이렇게 책으로나마 그들을 알리고 싶어 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많았다. 그런데 의열단이 무엇일까?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단체다. 암살과 파괴, 테러와 같이 과격한 방법만이 식민통치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 그랬기에 그들은 폭탄제조법을 배웠고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폭파 실험도 하며 그 위력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는 기발한 작전도 도모했다.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만약 그들의 계획이 실패하지 않고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우리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3.1운동으로 한바탕 호되게 당했던 일제는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내세워 우리 민족을 두갈래로 찢어 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살기 위해 그랬을테지만 그들의 기만은 친일파를 만들었고 우리 민족의 분열을 불러왔다. 그렇게 그들의 손안에서 놀아난 우리의 현실은 참담했다. 항일의지를 불태우며 투쟁을 감행했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같은 민족이면서도 그들을 밀고했던 자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김상옥과 황옥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경성 삼판통에서 벌어졌던 김상옥 최후의 순간은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제발 빠져나갈 수 있기를.... 총에 맞았으면서도 입 밖으로 고통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던 김상옥의 결의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런가 하면 황옥은 또 어떤가? 겉으로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속으로는 우리의 의열단과 함께였다. 그러니 그의 투쟁의지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도 감옥에서 얻은 병마로 인하여 쓸쓸히 여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던 삼판통은 지금의 용산구 후암동이라고 한다. 일제의 총독부는 우리의 지명조차도 자기식으로 편하게 고쳐 불렀다. 서울의 행정명인 한성부를 경성부로 부르기도 했고 정, 정목, 통 등의 한자를 붙여 각 지역의 이름도 고쳐 불렀다고 한다. 서울의 황토마루(지금의 광화문)는 광화문통, 구리개(지금의 을지로)는 황금정, 웃다방은 다옥정, 명동은 명치정 등으로 바꿨다. (- 68쪽)  그렇다면 광화문이라는 말이 일제의 잔재였었나?  황토마루라는 멋진 이름이 아쉽다. 뭐 따지고보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수없이 많겠지만 말이다.

책의 서두에서 역사가 궁극적으로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후손들이 기억해 줄 때에 그 역사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찬란한 순간이었든 처절한 아픔의 순간이었든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부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들을 허술하게 다루고 있다는 말에도 적극 공감한다. 핑게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을 되새겨보게 하는 우리 정부의 반응은 볼 때마다 안타깝다. 물론 역사인식이 제대로 되지않은 탓도 있겠지만 앞장서야 할 정부가 그 모양이니 두말 할 필요가 없는 듯 하다. 개발만이 능사는 아닌데..... 언제쯤이면 우리가 '보여주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을런지... 서울성곽의 흔적위에 세워진 집들,  도로를 만들기 위해 뚝 끊겨져버린 남한산성의 성곽길 (그 도로는 통행량이 그다지 많지도 않아 보인다. 살펴보면 성곽을 끊어버리지 않고도 도로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전탑의 어깨를 스치듯 휘돌아나가던 열차의 철로, 문화재 밑으로는 지하철이, 위로는 고가도로가 지나가는 우리의 현실속에서 잠시나마 우리의 미래를 위해 싸웠던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역사의 아픔이 아닐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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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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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적에는 50환짜리 은전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5원짜리 동전과 같은 의미였다. 1원짜리 은전도 사라졌고 백원과 오백원짜리 지폐도 지금은 사라져  모두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처음 오백원짜리 동전이 나왔을 때의 신기함은 아직도 기억속에 남아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돈이라는 가치로써 따지기조차 힘든 십원짜리 동전이 아주 작은 크기로 바뀐 것도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돈의 가치보다 돈을 만드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 작아진 십원짜리 동전을 보면서 옛날 학창시절에 썼던 토큰이 생각났었다. 버스 안내양이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에 우리를 밀어넣으며  "오라이~" 를 외쳤던 그 시절... 엽전같이 생겨 여러개를 한꺼번에 사서 줄에 꿰고 다녔었는데 그 모양이 정말 옛날의 엽전같아 우리끼리는 엽전꾸러미라고도 불렀었다. 호지키스라고 불렸던 스테이플러로 한쪽 구석을 콕 찍어서 갖고 다녔던 종이로 된 회수권보다는 이용하기가 훨씬 수월했던 것도 같다. 만원버스에 몸을 구겨넣으며 죽네사네 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었다.

시장은 통通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소통하고 물화가 모여들어 사방으로 흩어지니, 막힘이 없는 곳이다. 또한 시장은 욕망이 들끓고 서로 이익을 다투는 곳이다. - 그리고 시장은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139쪽)
그 통通함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돈이 생겨났다. 돈이라는 것이 가진 의미가 오로지 편리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몰랐다. 대저, 진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며 변해가는 것이다. 좀 더 간편하게 그리하여 좀 더 편리하게... 하지만 '당백전'만큼은 달랐다. 간편과 편리를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한사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겨났다. 그 돈이 생겨남으로써 겪어야 할 수많은 폐단들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서로 통하여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시장이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변화에 민감한 시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들이 이상하게 보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세상속에서 '당백전'과 같은 돈이 생겨난다면 어떤 반응이 일까?

"동전을 상평常平이라 이름 한 것은 항상 물건 값과 균형을 이루고자 함이다" (-250쪽)
역사팩션이라는 말은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어떤 소재가 되었든 역사의 한귀퉁이를 찢어내어 자신만의 글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거기다 배울 수 있는 점을 가미시켜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별전의 조각이 불러왔던 살인을 쫓아가는 주인공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저  아주 옛날에 대원군이라는 사람이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것이 '당백전'이었다는 작은 상식의 틀을 깨기에 충분함이 느껴졌다. 하나의 돈이 만들어져 유통되기까지의 과정.. 그 흐름을 읽어내려가던 주인공의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니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일거양득이었다. 오래도록 조선의 백성들 사이에 머물렀던 '상평통보'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당백전'의 결말은 어찌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세상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 곡학아세曲學阿世..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말.. 책을 읽는 내내 내 주변을 맴돌았던 말이다.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대체 간사한 짓을 하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이 돈일까? 그렇다면 돈의 유통에는 반드시 악의 유통이 뒤따르는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근원은 돈이 아니라 오로지 이익만을 얻고자 하는 인간들의 그릇된 마음일 게야... 또한 오늘의 이런 한심스러운 세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고....'(-377쪽)
그랬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에 다를게 있을까? 주인공의 생각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한심스러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잘못된 마음이 원인일거라던 주인공의 말이 아프게 허를 찌른다. 금전만능주의라는 말을 겉으로는 혐오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일테니...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진화하는 인간의 표본은 바로 욕망이며 욕심일거라고.. 글의 흐름속에서 저마다 누군가의 위에 서기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저마다 채우지 못한 자신만의 창고를 바라보며 좀 더 채우지 못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높이 올라야 하고 많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진정 약육강식의 생태일까?

언젠가는 알게될거라는 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그 진실도 때에 맞춰 나타나야 빛을 발한다. '언젠가는' 이라는 막연한 말로 치장한 진실은 제대로 된 진실이 아닐 거라는 말이다. 정랑 박일원이 찾아헤맸던 진실은 끝내 몸을 숨겼다.  단 몇사람의 입을 통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던 당백전의 진실.. 깨어진 별전 조각으로 인해 살인이 일어나야만 했던 그 순간조차도 어느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어두운 진실은 숨어있었다.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일원의 발걸음속에서 많은 것을 본다. '당백전'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현실과, '당백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내비쳤던) 사람들의 욕망과, '당백전'으로 인해 울고 웃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그리고 '당백전'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경제의식과... 이 책의 내용이 비단 그 시절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우리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악화惡貨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잘못된 욕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하는 일만큼은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흥미로웠던 책이다. 역사적인 사실 한조각에 얹혀진 작가의 상상력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풍성한 지식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긴장감이 부족했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꽉찬 느낌을 안아든다. 추천인의 말처럼 묵직한 주제였을 테지만 그리 무겁지 않게 다가와 주었던 책이기도 했다. 복잡한 이 시대를 바라보며 역사속에 모든 정답이 들어있다던 어느 명사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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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전 : 악몽일기
박승예 글.그림 / 책나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런 책은... 솔직하게 말해 좀 당혹스럽다. 책표지의 그림은 무한한 소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악몽일기라는 제목조차도 '꿈'이라는 낱말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을 거부할 수 없게 했다. 그림에세이... 그림과 글이 서로 어우러져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 꽤나 난감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야말로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기록들이라니... 이 책에 호기심을 느낀 것은 단순히 책표지의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에게 꿈이라는 것, 그리고 악몽이라는 것은 그다지 먼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꿈 좀 꾸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다보니 꿈이라는 소재가 궁금했던 거다. 내노라하는 사람들의 거창한 꿈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나에게 어떤 이들은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서 그리도 꿈에 시달리느냐고 하고, 어떤 이는 그냥 머릿속을 비우면 잠을 잘 잘수가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나 역시도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해 꿈에 끌려다닌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왠지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말이다. 보다못해 <수면의 기술>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던 지인은 지금도 가끔 요즘은 어때? 라고 물어온다.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 100,99,98,97, 100부터 거꾸로 숫자세기... 잠이 올 때까지 책읽기(하지만 이 방법은 절대 안된다. 나는 책만 읽으면 오던 잠도 달아나는 판이니)..  해 볼 건 다 해봤지만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 잠이 올 때까지 자연스럽게 기다리기다. 어쩌면 이 책을 구원의 심정으로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꿈을 꾸면서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 혹시나 하는 마음을 이제는 접어야겠지만 무의식의 존재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무의식의 양면성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내 안에 자라고 있는 작은 아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이건 그 의미와는 별개인 듯 하다. 현실과 꿈은 정말로 그 반대의 현상일까? 무의식적으로 내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 꿈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일까?  악몽 자체를 두려움과 불완전함이라던 저자의 말에 어느정도는 공감을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불완전함이 아니라 불안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림에세이 인지라 그림 반, 글 반이다. 그런데 그림이 주는 느낌은 너무 강렬하다. 꿈의 재해석쯤으로 보고 싶은데 그 꿈, 악몽이라는 것이 그토록이나 강렬하게 우리를 잡아채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상상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틀에 얽매인 상상같다는 생각을 한다. 정석에서 살짝 비틀어놓은 그런 느낌 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고 나는 혼자서 생각한다. 꿈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비틀린 현실일 것이라고... 내가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나의 꿈조차도 현실속에서 무언가에게 쫓기듯하는 내 생활의 일부일 것이다. 좋은 뜻의 꿈이라고 하면 일단 돼지꿈? 용꿈? 똥꿈? 대체적으로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어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인 꿈해석도 다양하다. 그만큼 우리의 주체적인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말일게다. 그러니 어쩌면 꿈조차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데 잘 모르겠다.

이 책을 내면서 작가의 말이나 누군가의 해설을 어느 한쪽에 첨부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관념의 세계를 아무런 장치도 없이 들여다 본다는 것은 그다지 상쾌한 일은 못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그리 많은 것을 던져주지 못한 듯 하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또다른 괴물의 존재라는 말보다도 공생의 방법을 모색하면서 불안과 불만의 삶을 극복하려 하려고 합니다.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거울 밖의 실제 모습에서 또 다른 기준의 욕망을 발견 (책소개글에서).. 이라는 말은 가슴에 와 닿는다.  악몽이었지만 꿈에 대한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 무언가를 극복하려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이겨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어쩌면 내어주고는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은 아닐까? 비워야 한다는 것, 비운다는 것의 의미가 강하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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