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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나 어렸을적에는 50환짜리 은전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5원짜리 동전과 같은 의미였다. 1원짜리 은전도 사라졌고 백원과 오백원짜리 지폐도 지금은 사라져 모두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처음 오백원짜리 동전이 나왔을 때의 신기함은 아직도 기억속에 남아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돈이라는 가치로써 따지기조차 힘든 십원짜리 동전이 아주 작은 크기로 바뀐 것도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돈의 가치보다 돈을 만드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 작아진 십원짜리 동전을 보면서 옛날 학창시절에 썼던 토큰이 생각났었다. 버스 안내양이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에 우리를 밀어넣으며 "오라이~" 를 외쳤던 그 시절... 엽전같이 생겨 여러개를 한꺼번에 사서 줄에 꿰고 다녔었는데 그 모양이 정말 옛날의 엽전같아 우리끼리는 엽전꾸러미라고도 불렀었다. 호지키스라고 불렸던 스테이플러로 한쪽 구석을 콕 찍어서 갖고 다녔던 종이로 된 회수권보다는 이용하기가 훨씬 수월했던 것도 같다. 만원버스에 몸을 구겨넣으며 죽네사네 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었다.
시장은 통通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소통하고 물화가 모여들어 사방으로 흩어지니, 막힘이 없는 곳이다. 또한 시장은 욕망이 들끓고 서로 이익을 다투는 곳이다. - 그리고 시장은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139쪽)
그 통通함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돈이 생겨났다. 돈이라는 것이 가진 의미가 오로지 편리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몰랐다. 대저, 진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며 변해가는 것이다. 좀 더 간편하게 그리하여 좀 더 편리하게... 하지만 '당백전'만큼은 달랐다. 간편과 편리를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한사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겨났다. 그 돈이 생겨남으로써 겪어야 할 수많은 폐단들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서로 통하여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시장이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변화에 민감한 시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들이 이상하게 보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세상속에서 '당백전'과 같은 돈이 생겨난다면 어떤 반응이 일까?
"동전을 상평常平이라 이름 한 것은 항상 물건 값과 균형을 이루고자 함이다" (-250쪽)
역사팩션이라는 말은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어떤 소재가 되었든 역사의 한귀퉁이를 찢어내어 자신만의 글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거기다 배울 수 있는 점을 가미시켜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별전의 조각이 불러왔던 살인을 쫓아가는 주인공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저 아주 옛날에 대원군이라는 사람이 경복궁 중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것이 '당백전'이었다는 작은 상식의 틀을 깨기에 충분함이 느껴졌다. 하나의 돈이 만들어져 유통되기까지의 과정.. 그 흐름을 읽어내려가던 주인공의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니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일거양득이었다. 오래도록 조선의 백성들 사이에 머물렀던 '상평통보'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당백전'의 결말은 어찌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세상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 곡학아세曲學阿世..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말.. 책을 읽는 내내 내 주변을 맴돌았던 말이다.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대체 간사한 짓을 하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일까? 그것이 돈일까? 그렇다면 돈의 유통에는 반드시 악의 유통이 뒤따르는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근원은 돈이 아니라 오로지 이익만을 얻고자 하는 인간들의 그릇된 마음일 게야... 또한 오늘의 이런 한심스러운 세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고....'(-377쪽)
그랬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에 다를게 있을까? 주인공의 생각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한심스러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잘못된 마음이 원인일거라던 주인공의 말이 아프게 허를 찌른다. 금전만능주의라는 말을 겉으로는 혐오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일테니...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진화하는 인간의 표본은 바로 욕망이며 욕심일거라고.. 글의 흐름속에서 저마다 누군가의 위에 서기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저마다 채우지 못한 자신만의 창고를 바라보며 좀 더 채우지 못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높이 올라야 하고 많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 진정 약육강식의 생태일까?
언젠가는 알게될거라는 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그 진실도 때에 맞춰 나타나야 빛을 발한다. '언젠가는' 이라는 막연한 말로 치장한 진실은 제대로 된 진실이 아닐 거라는 말이다. 정랑 박일원이 찾아헤맸던 진실은 끝내 몸을 숨겼다. 단 몇사람의 입을 통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던 당백전의 진실.. 깨어진 별전 조각으로 인해 살인이 일어나야만 했던 그 순간조차도 어느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어두운 진실은 숨어있었다.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일원의 발걸음속에서 많은 것을 본다. '당백전'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현실과, '당백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내비쳤던) 사람들의 욕망과, '당백전'으로 인해 울고 웃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그리고 '당백전'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경제의식과... 이 책의 내용이 비단 그 시절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우리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악화惡貨가 만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잘못된 욕망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하는 일만큼은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흥미로웠던 책이다. 역사적인 사실 한조각에 얹혀진 작가의 상상력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풍성한 지식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긴장감이 부족했던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책장을 덮으면서 꽉찬 느낌을 안아든다. 추천인의 말처럼 묵직한 주제였을 테지만 그리 무겁지 않게 다가와 주었던 책이기도 했다. 복잡한 이 시대를 바라보며 역사속에 모든 정답이 들어있다던 어느 명사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