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라는 말을 듣게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윤기..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보고 신화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해도 나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아마도 내게 신화속으로의 여행을 부추킨것도 이윤기의 책일 것이다. 이후로 나는 여러나라의 신화와 만났다. 한편으로는 조금 어이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신화를 더 많이 보게 된듯도 하지만... 북유럽신화를 시작으로 이집트신화, 켈트신화 등등 신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우리신화를 찾게 되었고 일본이나 중국신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처음 그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신화로 재창조되어질 때의 흥분이라니!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옛날 이야기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신화가 나는 왜 그리도 좋았던 것일까?
신화속에 존재하는 신들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인간을 만들고 지배를 하기도 했지만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인간이 힘겨움을 호소하면 그것을 해결해주기도 했고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어 가질 줄도 알았다. 그랬던 신들이 왜 인간을 버렸을까? 아니 왜 인간을 떠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욕망, 욕심..... 지금의 이 세상을 멍들게 하고 있는 욕심이 그 시대에도 우리에게서 신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욕심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 과정은 흔히 만날 수가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리고 처음의 세상속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먼저 아는자,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끝까지 살아남았던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신에게 소원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치매에 걸리면 가장 먼저 잊는 것이 명사라고 합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 생활에서 명사가 가장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것은 바로 동사입니다. 신화도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화는 굳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05쪽) 놀랍다. 그리고 공감한다. 신화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 단순한 옛얘기가 아니라 신화가 안고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너무 황당한것 같아 신화를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는다고 하기에 꼭 읽혀야 하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해주니 의아해하던 후배의 표정이 생각난다. 마음속의 편견을 버리고 신화를 다시 보라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놓치지 말라고.. 어쩌면 신화는 지금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길라잡이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는 멀리있지 않다. 아주 먼 시절에 쓰여진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존재한다. 일주일이 신들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은 기본적인 신화이야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토테미즘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뭔가 안타까운 것들이 그 속에 존재한다. 신화속에는 한 시대가 들어있고 그 시대를 이루게 되는 배경이 들어있고, 그 시대의 사회적인 모습이 들어있고, 그 시대를 풍미하던 정신적인 흐름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말해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녹아있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도 신화와 어울어진 우리의 일상과 만날 수가 있다. 영화나 그림속에서 혹은 길을 걷다가도 만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가끔 찾아가는 절에서도 신화를 만날 수 있으며 포크나 저울, 사과나 옥수수같은 우리의 생필품이나 먹거리속에도 신화는 숨어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굳이 찾으려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서양의 신화와 동양의 신화를 서로 비교해주었다. 어찌보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지만 분위기와 느낌은 많이 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우리신화 이야기가 반가웠다.
영화를 통한 신화읽기는 재미있다. <반지의 제왕>은 켈트신화를 바탕으로 깔았던 작품이다. <메트릭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 세계와는 다른 또하나의 세계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또하나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그려주고 있다. 세상의 종말을 그렸던 <딥 임팩트>, <아마게돈>, <하드 레인>처럼 종말을 예고하는 신화도 참 많다. <트로이>, <페드라> 같은 경우에는 신화를 영화로 옮긴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신화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절에서 만날 수 있는 신화로써 귀면상을 예로 들어주는데 그 귀신형상같은 얼굴이 왜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서야 했는지를 신화를 통해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즘 들어 부쩍 이슈화되고 있는 '가이아 이론' 또한 그렇다. 대지의 여신이 바로 '가이아'인 까닭이다. 살아 숨쉬며 대지위의 자연이 파괴될 때마다 몸을 흔들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우리는 그것을 자연재해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는 아이가 어른으로 변하는 과정 역시 신화속에서 찾아냈다. 호루스의 저울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 저세상으로 가면 한쪽에 신의 깃털이 올려진 저울에 인간의 선악을 저울질 한다는... 그리하여 거짓을 고한 사람은 돼지로 다시 태어난다는...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정의까지 심판하고 있음이다.
이렇게 신화는 화석화된 이야기도 아니고, 따라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거짓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신화는 늘 우리 주위에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로서만 보려고 하고 명사로서만 신화를 보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206쪽)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준다는 네 시대에 대한 이야기(237쪽~240쪽)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대였다는 '황금시대', 그런데 그 좋은 시대에 인간은 너무 흥청거리며 마셔댔다. 제우스는 그들을 지구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은의 시대'가 왔다. 은의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먹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렸다. 하지만 인간은 하찮은 일에도 불평을 터뜨렸고 사소한 일로도 싸웠다. 제우스는 인간을 모두 멸종시켰다. 다음은 '청동시대', 이 시대에 계절이 생겨났고 인간에게 처음으로 절망적인 겨울의 추위가 닥쳤다. 예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술과 능력이 발달했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시대를 마감했다. 그 다음 '철의 시대'가 되자 인간은 욕망을 알게 되었고 죄악이 세상에 넘쳐났다. 이 때 제우스가 보낸 여인이 판도라다. 결국 인간을 벌하기 위해 보낸 여인이 판도라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들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신들은 하나씩 하늘로 돌아갔다. 이 때 인간이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홀로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저울은 점점 악한 쪽으로 기울어졌고 아무리 바로 잡으려해도 소용이 없자 그녀마저 인간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끝없을 것같은 인간의 욕망.. 그 욕망으로 엮여지는 죄악들.. 이제 인간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신을 품고 산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저마다의 신을 부른다. 신은 끝내 인간을 버릴까? 종말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정화되어지지 않을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