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
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정택영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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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도 이런 하루 보낸 적 있다. 한두 번쯤? 아니 여러번이다. 삶이 팍팍하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런 생각 안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야말로 책의 제목처럼 아주 완벽하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생각이다. 아무에게도 들킬 수 없는 나만의 작전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할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를 삼킨 이 괴물이 어느 순간 느닷없이 떨어져내려 박살이 난다거나 아니면 끝도 없이 치솟아 올라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저 많은 차 중에서 어느 하나가 미친듯이 질주해 와 나와 포옹해주기를, 아니면 신호가 바뀌기 전에 그냥 확 뛰어가볼까?  하는 그런 생각, 솔직히 한번도 안해봤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이런 나의 글을 읽으면서 음, 이 사람 좀 심각하군 혹시 우울증 아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는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어찌보면 황당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거나, 어쩌면 주변의 누군가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의 많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었다거나... 뭐, 이유야 어떻든 나는 이 책속의 상황에 대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말았다. 그럴 수 있다! 정말 충분히 그런 생각하며 살 수도 있는 일이다. 일종의 생각이었을 뿐인데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이렇게도 글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살아가는 모습은 누구나 똑같다. 단지 그 방법에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까지 공감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왜 가슴 한쪽이 아련해짐을 느껴야 했다. 무언가 잡힐 듯 하면서, 어떤 것을 본 듯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그 이상한 느낌이라니...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려 순간 책을 놓치고 말았다.  그 흔한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왜 사는가?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삶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끝도없이 밀려오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들이라니...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놓친 것들이 많았구나, 하는 그런 생각... 알 수 없다.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 책속의 주인공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은 아닐까 싶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뭔가 가려웠으나 손이 닿지 않아 긁지 못했던 부분을 긁어준 느낌이랄까? 나만 그런가? 세상이 팍팍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느낌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는 중요하다. 이겨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즐거움을 맛보고 행복이 이런 것일까 묻고 싶어질테니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 대신 내가 이렇게 속시원한 생각을 해 줄테니 당신은 그저 앞만 보면서 달려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메세지쯤으로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 하는... 그래서 이 책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심각하지 않게 죽음에 대해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또한 우리 삶의 한부분이기도 하겠기에. 평행선으로 달려가는 삶과 죽음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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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의 생물들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모든 문제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시리즈 1
이브 시아마 지음, 심영섭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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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이 책의 목차를 대충 훑어보자. 대부분의 우리가 무시하고 사는 생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장마다 특징을 잘 담아놓은 걸 볼 수가 있다. 많은 생물이 왜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나뉘어져 있는지, 그들의 삶은 어떻게 유지되어져 왔는지... 하지만 책은 작다.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이라는 말처럼 손 안에 쏙 들어올 정도의 크기다. 그런 분량으로 이렇게나 무거운 주제을 다룰 수가 있다고? 그런데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사전이라는 통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굳이 많은 쪽수를 할애하지 않고도 이렇게 딱 부러지게 보여줄 수도 있는거구나 싶었다. 학창시절에 단 하나의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하여 열심히 외웠던 생물 분류 단계  '종→계'... 이 책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파괴시켜가고 있는지, 우리 주변에서 어떤 것들이 아파하며 신음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테니까 말이다.

우리 시대는 사실상 자연에서 관찰된 '정상적'인 속도보다 1000배에서 1만배 빠른 멸종률을 보이고 있다. 지질학적 시대의 자연에서 관찰되는 정상적인 멸종속도는 대략 4년에 1종이었는데 현재는 하루에 대략 1종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32쪽-

따오기, 원앙사촌, 크낙새, 종어...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러나 이런 생물의 이름은 이제 사전에서나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들어진 생물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조류 95종, 양서·파충류 43종, 어류 76종 등 멸종위기종 214종의 현황을 담은 『멸종위기종 적색자료집(Red Data Book)』을 발간했다는 기사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적색자료집』이라는 명칭은 세계자연보전연맹이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의 상태를 알리기 위해 빨간색 표지의 책자에 멸종위기종을 수록한 데서 유래됐다는데 멸종위기종을 수록한 총서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다급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뜻있는 몇몇의 외침에 불과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발 우리도 이제는 경각심을 가지고 자연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어린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따오기가 이미 32년전에 우리나라에서 사라졌다니...

인간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연 환경은 없다. -51쪽-

맞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모든 생물의 천적은 인간이라고 말을 할까?  위험지역이나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대개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라는 말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연을 훼손한다. 나무를 자르고 물길을 막고, 바다를 메우며 오직 인간만이 살 길을 찾아 헤맨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놓아도 공공연하게 숲은 파괴되어진다. 그 힘이 때로는 만들어놓은 법조차 파괴시킨다. 파괴된 숲에서 동물이 살 수 없는 건 둘째치고 하다못해 작은 곤충이나 식물마져도 나무나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풀들의 전략>이라는 책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잡초가 살 수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다고.  점점 더 많은 곳이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데 그것이 누구 탓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인간인 우리가 빠른 산업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지구의 기온을 높여놓은 까닭이다. 지금 세계적인 추세로 나타나는 자연재해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물난리가 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폭설 때문에 야단이다. 이쪽에서는 며칠 째 산이 불타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골프공만한 우박이 내리기도 한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고만 한다.

인간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는 종은 증식을 잘하는 경향이 있다. -83쪽-

얼마전 방송에서 꿀벌이 사라져가고 있다,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토종벌이 집단으로 죽는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우선 급한대로 서양벌들을 풀어놓았다. 토종벌보다는 생명력이 더 강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벌을 키우는 사람들은 걱정을 앞세웠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토종벌들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하고... 벌뿐일까? 곰쥐나 고양이는 새를 전멸시켰다. 모피용으로 뉴질랜드에 수출되었다는 주머니쥐가 숲과 새둥지를 파괴했다. 민물낚시용으로 들여놓았다던 나일퍼치는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강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엉뚱한 곳으로 와서 '생태5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뉴트리아, 베스, 블루길, 붉은귀거북, 황소개구리같은 외래종들은 우리나라의 생태계를 단 몇 년만에 뒤흔들고 파괴했다. 그것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면 모피용이나 식용이었다. 단지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런 일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들어오는 외래종이 증식을 잘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가 있다. 사람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더 강해지려 한다는 걸 생각해보라! 다른 생물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말이다. 단순히 인간들의 취미생활로 희생되는 것들도 많다. 인간의 몸에 좋다고 약용으로 쓰이는 동물이나 식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만약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21세기 말에는 식물종의 3분의 2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128쪽-

<툰드라> 라는 제목의 다큐를 시리즈로 본 적이 있다. 도시개발이라는 형태나 벌목 따위의 끔찍한 일 때문에 그곳에서 삶의 모든 걸 해결하던 원주민들조차 쫓겨가듯이 밀려나고 있었다. 아마존의 원시림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허파노릇을 하는 건 아닐게다. 그렇게 자연의 흐름에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긴 채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바로 우리의 허파이며 심장일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물과 흙이 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던 물고기와 동물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그곳을 들락거리는 트럭의 배기가스와 소음으로 인해 이미 숲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남지 않았다는 생태계의 보고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글프게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환경은 자생능력이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환경쓰레기가 바다를 떠돌다 하와이까지 갔다. 대단히 먼여행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안은 물론이고 일본등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환경쓰레기나 중국의 환경쓰레기등은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하와이의 해변에서도 그랬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어떻게 그토록이나 먼 곳까지 흘러갔느냐가 아니다. 흘러가는 동안 부서지고 분해되어져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미세하게 분해되어진 환경쓰레기들은 바다에 떠다니는 미생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험삼아 잡아본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던 플라스틱 조각들이라니!  우리는 그런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산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재앙일 뿐이다. 그러니 누굴 탓하겠는가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멸종위기라는 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내는 재앙이다. 문제를 만든 사람이 해답을 쥐고 있을테니 마냥 뒷짐지고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될 발등의 불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새가 없어지고 벌이 없어지면 그 다음은 식물이 사라질 것이다. 식물은 모든 생태계의 기본이다. 멸종위기라는 것이 단지 말로만, 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이제는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세상이라는 걸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의 표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제목이 그냥 스쳐지날 수 없게 한다.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모든 문제'...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겠지만 그 중요함 역시 주관적일 수 밖에 없기에 조금은 신중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고 다 읽고나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문제화시킬 수 있었는지 '자연의 적은 오직 인간뿐' 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산업화니 개발이니 하는 것을 하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나 개발에 끼워넣기식으로 전개되는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은 바뀌어야만 한다. 개발의 한귀퉁이에 끼워맞추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게 먼저 맞춰주는 개발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다.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물려줄 지구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당장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지금의 우리도 신음하는 자연의 대재앙을 몸으로 겪으며 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 그것도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자연을 떠나서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일테다. 동물이나 식물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해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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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의 전략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최성현 옮김, 미카미 오사무 그림 / 도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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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끝내주게 경이로운 책이다.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풀들의 삶..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그저 스쳐지나거나, 혹은 우리 발밑에 깔려 죽어간다해도 눈길한번 주지 않았을 그런 풀들마저도 저마다 살기 위한 전략을 짠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살아남기 위한, 그리하여 모든 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그러나 그들에게서 욕심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살아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소개되어지는 풀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내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늘 보아왔던 풀들이 저렇게도 이쁜 이름을 갖고 있었구나 싶었다.  가장 마음 아팠던 풀들은 원예용이었다가 자꾸만 밀리고 밀려 결국은 들판으로 쫓겨나야만 했던 꽃들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저들만의 삶조차도 변화되어버리는 현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야생화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관심있게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크게 이야기하자면 자연이 살아나는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될 식물.. 그 안에 속해있는 작은 풀.. 그리고 우리에게 잡초라고 불리워지는.. 하지만 그들은 정말 강인했다.

이 책에 소개되어진 이름만 기억해도 우리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비꽃, 큰개불알꽃, 별꽃부터 시작해서 매혹적인 입술을 내밀고 있는 광대나물을 보게 되면 정말로 그 꽃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둑새풀, 살갈퀴, 쇠뜨기, 냉이, 민들레를 보면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하고, 귀화식물의 대표격으로 귀하신 몸으로 들어왔다가 새로운 꽃들에게 밀려 하나의 잡초신세로 전락하게 된 개망초의 기구한 운명은 또 어떤가! 살아남기 위해 수시로 전략을 바꿔야만 했던 그들을 탓하기보다 그들을 그렇게까지 만든 우리는 뭐가 그리 잘났을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광대수염, 클로우버, 새포아풀, 참나리처럼 본 것도 같고, 보지 못한 것도 같은 이름들... 지은이는 친절하게도 그들과 대면할 수 있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세밀화를 통해 그들의 작은 특징까지도 잘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면 살랑거릴 것처럼 보인다. 질경이 -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길, 타래난초 - 목숨을 건 전략, 쇠비름 - 기쁜 일이 있으면 문에 걸었던 풀, 닭의장풀(달개비) - 축구팀을 앞서는 조직 플레이, 개구리밥(부평초) - 떠돌이의 삶 처럼 저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을 살려낸 부제목과 함께 등장하는 풀들.. 그런가하면 아픔을 보여주는 제목도 눈에 띄어 다시한번 훑어보게도 한다.

강아지풀,  방동사니, 바랭이, 땅빈대, 반하(끼무릇), 피, 메귀리, 금방동사니 같은 풀들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주쳤던 풀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면서 아하, 그게 이거였어? 하는 반가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쯤에서 퀴즈를 하나 맞춰보자. 나팔꽃이 먼저일까? 메꽃이 먼저일까?  이 책을 보면서 아차,싶었던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는데 보통은 나팔꽃이 먼저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 학교에서 관찰일기를 써야 할 때 곁에 두었던 꽃이기도 하지만 메꽃보다는 크기도 크고 우리 주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꽃이 나팔꽃이다. 하지만 자연도감에서 나팔꽃은 메꽃과의 식물로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비슷하지만 결코 비슷하지 않은 두 꽃.. 메꽃이 밭에 침입하면 엄청나게 성가신 잡초가 된다는데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전략 또한 엄청나다. 수를 늘리기 위해서 공포영화속의 주인공처럼 팔을 잘라도 다시 나고, 다리를 잘라도 다시 난다. 거기다가 잘려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마저 다시 살아나는 꽃이 메꽃이라고 하니 연약한 생김새와는 너무나도 다른 생존전략이다. 재미있게도 메꽃을 소개하는 부제목이 '그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이다. 나팔꽃을 겨냥한 제목같은데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살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왔던 것이 물옥잠과 물달개비였다. 자색의 수술이 오른쪽에 있느냐, 왼쪽에 있느냐에 따라 우형과 좌형으로 나뉜다는 물옥잠.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예측할 수 없는 잡초의 세계에서  좋다, 나쁘다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분별하기보다 다양성이 풍부한 쪽을 선택한다는 물옥잠. 그렇게 사는 물옥잠의 방식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숙연해진다. 그런 물옥잠도 멸종 우려가 있는 동식물 시리즈에 이름이 올라 있다고 한다. 그토록이나 강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조차도 멸종될 기미가 보인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울리는 또하나의 경종이 아닐까 싶다.   잡초가 모두 죽는 날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쓸모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잡초가 잡초답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으랴, 고 말하던 지은이의 말도 그냥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말이다.

또 하나가 바로 아래 사진으로 소개하는 물달개비다. 영어 이름이 '워터 히아신스'다. 그만큼 히아신스를 꼭 닮았고 기품과 품격으로 가득 차 있는 꽃이라고 한다. 이 물달개비가 연못이나 도랑을 덮으면 다른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릴 만큼 무서운 꽃이기도 하다. 그런 꽃을 없애기 위해서 억 단위의 비용이 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조건만 좋으면 일주일 만에 배로 늘어날 수 있는 무서운 생명력... 그런데 희안한 것은 이 꽃이 깨끗한 물에서는 살 수 없다는 거다. 더러운 물이어야만 살 수 있다는데 생활하수나 공업용 배수가 흘러든 물 속에는 질소나 인산과 같은 영양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물달개비가 질소와 인산을 흡수하는 힘이 대단히 강해서 수질 정화에 이용하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는 걸 보면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물속의 오염물질을 자신의 체내에 받아들임으로써 물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꽃을 어찌할까? 
↖ 물달개비( - 책 속의 그림)


사실 나는 이 책을 보기전까지 물옥잠과 물달개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물속에서 피는 꽃이긴 하나 분명히 얼굴모양새도 달랐는데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꽃에게 너무 미안하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궁금하다고만 생각했었던 풀들에 대해 알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이 책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은 풀포기 하나마다 의인화해서 사람처럼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름은 있으나 불리워지지 못하고 이름없는 잡초로만 알고 있었던 작은 생명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지은이의 표현처럼 어쩌면 그리도 인간과 닮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들의 전략이 누구때문에 저렇게 지독스러워졌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때문이다. 인간이 저들을 저렇게 지독한 생활방식을 갖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동식물이 살 수 없는 세상은 인간도 살 수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싸아해진다. 옮긴이의 말이 또한 가슴을 울린다. 일본의 대학에서는 얼마전부터 잡초학이라는 학문이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연구를 했던 지은이가 그 성과를 책으로 풀어쓴 것이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잡초 50가지... 옮긴이의 말처럼 현대인의 삶은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책을 보면서도 에이, 뭐 이런 잡초를~~ 하며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옮긴이의 말을 남겨주고자 한다.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주기를... /아이비생각


"잡초는 지구의 건강에 긴급 사태가 생기면 달려가 처리하는 식물계의 적십자다. 다행히 지구가 위급한 상황을 넘기면 잡초는 성장 속도가 자기보다 느리지만 보다 크고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 알프레드 크로스비

"잡초는 가이아의 백혈구이자 부스럼 딱지이고 반창고이자 항생 물질이다." - 짐 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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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달력 -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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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어찌보면 꾸준하게 우리 곁을 맴도는 화제다. 그런데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 정말 오기는 올까?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다는 2012년의 세계종말론은 근거있는 이야기일까? 수도없이 많은 재난 영화를 보았다.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 그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은 자연앞에서 너무나도 작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작은 메세지를 전하고자하는 노력을 숨겨두었다. 종말론은 그것과는 본질 자체가 다른 것 같다. 2012년 12월 21일. 우리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만들어냈다던 마야인들의 달력에 적혀 있다는 그 날짜가 왜 하필이면 이 세계가 망하는 날로 해석되어졌을까?  우리보다 더 발달된 천문학의 세계와 과학관을 보여주고 있다는 오래전의 문명은 많다. 나스카 문명, 잉카문명, 아스텍문명... 그런데 그들은 왜 사라진 것일까?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겨두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왜곡된 사실과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한 까닭에 나처럼 아주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된 사람이라면 일견 당혹스러울수도 있겠다. 하지만 흥미롭다. 다 읽고나니 뭔가를 하나 얻었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해지기까지 한다. 온 인류를 지배할 수 밖에 없었 달력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책을 읽기 전에 정말 마야의 달력에 세계의 종말이 적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었다면 과감하게 버려라.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아하! 하는 느낌표를 바로 찍게 될테니까. 일전에 <앙코르와트>에 대한 다큐를 실감나게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작, 방송되었던 것인데 정말 놀라웠다. 우리가 지금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들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어지고 있다.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건축이나 구조물도 연구대상이기는 하겠지만 그 안에 새겨진 벽화나 부조(돋을새김)를 보게되면 더더욱 흥미로워진다. 그것들을 토대로 유추되는 고리들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했고 가볼 수도 없는 시대에 대한 밑그림이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조차 남겨지지 않았다면, 쉽게 흔적을 찾아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마야문명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착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끝까지 파헤쳐 작은 조각이라도 찾아내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니... 그런 단편적인 조각만으로 모든 걸 말 할 수 없는데도 마치 다 얻은 것처럼 수많은 오류들이 쏟아져나온다. 바로 그런 오류들에 대한 바로잡기쯤이라고나 할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우리네 속담을 한번 생각해보자. 어설프게 떠도는 많은 오류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는지.. 누군가는 숨겨놓은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 '만들어지는 것들' 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2012년의 종말론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을 다시한번 반추하게 된다.

마야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과거라는 시간속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들은 다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달력이 나오고 시간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원인도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방책에 불과했다. 떠돌이 생활이 정착생활로 바뀌면서 그것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을 것이다. 옛날에는 해보다 달을 더 큰 의미로 보았다고 한다. 달력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달을 연구하기 위해 천문학이 발달했고 그러다보니 시간에 관한 이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클레오파트라라는 여인보다 그곳의 문화에 더 매료되었으며 그곳의 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는 내게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무지한 스페인의 병사들이 신의 이름을 내세워 마야인들을 파괴시킨 것은 기독교가 지독한 편견에 휩싸인 오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음을 대변한다. 그런데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 오만의 극치가 현재까지도 한치의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유럽이나 서구위주로 편향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없이 편집되어졌던 세계사의 줄거리가 하나씩 그 잘못된 베일을 벗어던지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도 고삐 풀린 가속화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시간과 속도전쟁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속도앞에서 나 역시 불안함과 뜻모를 거부감이 생겨나고 더 심하면 화가 나기까지 한다. '속도의 독재정치'라는 말에 완전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도 중시 문화가 전세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과 같은 속도전쟁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캐나다의 이누이트족의 언어에는 시간이라는 말이 없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오직 자연의 현상으로만 시간을 읽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인류의 조상이었기에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기준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달력... 그 달력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주기적으로 변해가는 자연현상을 기록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아주 오래된 종교의 역사가 가미되었다. 인류의 조상들이 모셨던 신들이 모두 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도 그렇게 자연신을 우러르며 살아가고 있는 종족은 많다. 지금까지 인류의 달력 역사와 시간개념을 살펴보았지만 고도로 발달된 마야인의 달력이 종교와 정치, 장기적인 시간의 구성요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때문이야. 그자들이 나타나면 그걸로 끝이야.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신을 다스릴 기회를 주거든. 진심으로 깨닫지 못한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어. 마치 눈먼 사람에게 무지개가 의미없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귀머거리에게 소용없듯이"... 이 멋진 말은 마지막 장에서 들려주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속에 나오는 대사다. 마야의 달력이야기와 함께 들려주는 모모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모모효과에 비교한 마야력의 의미가 가슴 깊숙히 각인되어진다. 시간도둑인 회색도당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모모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졌던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도움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제 결론을 말한다면 2012년의 종말론은 호사가들의 말이라는 거다. 거기다가 종교적인 의미가 깊숙이 파고들어 가속도를 내고 있다. 이게 오직 나만의 결론에 불과한 말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이야기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라면 더할 나위없이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변을 떠도는 말들을 살펴보면 사실이 그렇다. 정의보다는 이념이, 진실보다는 거짓이 저만큼 앞서가고있는 경기에서 결승선 안으로 누가 먼저 발을 들여놓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현재진행형이다. 기이한 것은 그 경기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앞서가는 존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마음은 그게 아닌데, 생각은 그렇지가 않은데 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그 경기를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빌어 말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은 따끔하다. 

저만의 주장에 맞춰 모든 것을 각색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그리 보기 좋은 건 아니다. 당시에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으로 보여질지는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포장지가 뜯겨져나가면 원래의 모습보다 더 추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 당장의 만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말론 역시 그런게 아니었을까?  지금보다도 더 과학적이었다던 마야인들의 문화가 든든한 뒷배경으로 깔려주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혹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대로 확인 된 것이 너무도 적어 아직까지도 확언할 수 없다는 마야문명.. 온갖 의문점을 불러오게 된 그들의 문명을 통해 세상 바로보기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 책속에 담아놓은 것 같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그리고 한번쯤은 우리의 삶에 대해 되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2년이 정말로 세계의 종말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80%정도나 된다. 그렇다고 내가 뭐 어떤 종교에 심취해서도 아니고 염세주의라서 그런것도 아니다. 한번쯤은 확 뒤집혀져서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상이 다시 시작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오만한 인류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이라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아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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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발견 - 내 안에 잠재된 기질.성격.재능에 관한 비밀
제롬 케이건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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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는 얼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대체적으로 저런 질문을 받으면 곧잘 대답하는 말이 내성적이라거나 외향적이라거나 명랑하다거나 조용하다거나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격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을 하는 것일까? 성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각각의 성질이나 품성이라고 나온다. 성격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살펴보자고 들면 역시 좀 전에 대답했었던 그런 말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말은 주로 보여지는 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낙천적이라거나 가식적이라거나 저 사람은 정말 고리타분하다거나 집중력이 좋고 매사에 철저하니 완벽한 사람이라거나, 대개가 이런식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 그사람하고 같이 살아봤어? 라는 말을 가끔 하게 되는데 그만큼 남에게 보여지는 것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까이에서 느끼는 성격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는 모양이다. 우습게도 살아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마~ 라는 유행어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기질'이라는 낱말과 마주치게 된다.  '기질'은 또 무엇인가?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나 정서적 반응을 보여주는 각자의 성격적 소질이라고 나온다. 성격적 소질이라고?  내친김에 비슷한 말을 한번 더 찾아보기로 한다. 성질 : 각자가 지닌 마음의 본바탕, 성품 : 각자의 성질이나 됨됨이, 됨됨이 : 사람이나 물건의 생긴 품, 인격 : 사람으로서의 품격 등... 찾아보았던 말을 통해서 한번 짚어보자면 겉으로 보여지는 뜻도 있지만 보여지지 않는 내면을 말하는 의미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격이라는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것도 같다. 성격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을 정의내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일단은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해 볼 때는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성격은 어떻게 형성될까? 책을 펼쳐들면서 나에게 궁금증을 만들어주었던 질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을 풀어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했던 말이 바로 '기질'이었다. 자극에 대한 반응 따위를 이야기한다는 '기질' 은 유전적일까? 라는 것부터 파고든다. 유전자에 의해 '기질'이 좌우되기도 하지만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도 '기질'은 좌우된다는 거였다. 태교 역시 '기질'을 생각해볼 때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말하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 '기질'이라는 게 살아가는 사회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역설적이게도 '성격'속에 '기질' 숨어있다는 말처럼 들려 조금은 놀랍기도 했지만 예를 들어주며 이해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유전적인 '기질'이 어떤 '성격'을 만들어내는가는 그 부모의 교육태도나 성향에 따라서, 혹은  그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가정과 사회의 환경속에 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남자인가 여자인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규칙화되어버린 사회적인 규제에 따라 그 '성격'의 유형이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리가 흔하게 이야기하는 MBTI라는 성격의 유형도 어느정도는 이미 만들어진 일례에 불과할 뿐이다. 이 사회라는 거대한 흐름은 어쩌면 이미 만들어놓은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는 형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남자답기를 바라고, 여자답기를 바라는 가정이나 사회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어지는 계급이나 서열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 모든 요구조건에 맞추어지는 것이 '성격'이라는 말이 아닐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같은 형제지간에서도 첫째냐 둘째냐 혹은 막내냐에 따라 성격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생존본능일테니까. 첫째나 막내에 비해 둘째는 사랑에 목말라 한다는 말을 이 책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첫째는 첫째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더 이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을테니까. 그러니 둘째는 지독해질 수 밖에 없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제 몫을 챙기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좀 더 악착같아야 강해질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내 시선을 잡아끄는 한 문장 때문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경험이 기질을 바꿀 수 있는가?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대답을 하고 싶다.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 바로 인간인 까닭이다. 그 밖에도 남자와 여자가 왜 다른지, 성격이나 기질이 과연 민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불안감과 우울은 왜 생기는 것인지에 대한 글이 장황하게 펼쳐진다. 하다못해 지리적인 요인까지도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세상에 똑같은 성격은 단 하나도 없으며 사회라는 틀에 의해 성격은 만들어진다는 거다. 남자와 여자는 같을 수가 없으며 시대나 문화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가 있다는 거다. 인간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격을 '본성'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기질'과 통하는 것일까? '본성'이라는 말을 '천성'이라고도 한다는 데 이쯤에서 나는 또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본디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물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처음부터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잣대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있다. 그만큼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형성된다는 말일테다. 사실 나는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속에는 답이 없는 듯 하다. 그냥 그럴 것이다, 라는 주장만을 보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늘 가슴속에 품고 사는 우화 한토막을 꺼내본다. 너의 마음속에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같이 살고 있단다. 그 놈들은 네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지. 어떤 녀석에게 먹이를 줄 것인지는 너의 선택이야. 너의 먹이를 받아먹은 놈이 덩치를 키울테니까 말이다. 자, 너는 어떤 녀석에게 먹이를 주겠느냐?.....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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