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양록 -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9
강항 지음, 이을호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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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임진왜란 중 교섭이 결렬되는 바람에 두번째로 침입을 당한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그 긴 환란의 기간속에서 피폐해졌을 백성들의 삶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두번째 침략이니 저들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오라는 말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코를 잃어야 했고, 그 코가 산을 이루어 코무덤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대를 달리하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강항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일을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적은 것이 바로 '간양록'이다.  책의 원래 제목은 죄인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건차록巾車錄'이었다. '巾車錄'... 죄인이라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라고 하는데 효종때 이 책이 간행되면서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看羊錄'으로 바꾸었다. '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로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로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포로된 자신의 처지만을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그들의 군사적 상황까지 살펴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을지를 함께 적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잡혀가는 중에 가족들을 잃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다시 구출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중에도 두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일도 있다. 그래도 관직있는 자라하여 무지렁이 취급은 받지 않았던 듯 하다.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고, 일본승과 친하게 지내며 최초로 조선의 성리학을 전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게 왕을 향한 충정심으로 해석되어져 조금은 안타깝지만 말이다. '忠'에 무게를 두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까닭없이 억하심정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토록이나 멋진 인물이 많았는데도 조선의 시각은 어째서 열리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눈앞의 이익, 당장의 안일함만 좇으며 살고자 애를 썼던 것일까? 분연히 일어서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관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책을 읽을 때마다 의문점의 크기는 커지기만 한다.

 

목차를 크게 살펴보면 이렇다.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賊中奉疏] ,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俘人檄] ,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詣承政院啓辭] ,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과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부분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신이 엎드려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건대 평소에 인재를 기른 일도 없고, 백성을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긁어모아 싸움터로 몰아세우니, 그나마 권리나 있고 돈푼이나 있으면 뇌물을 먹이거나 권력을 떠세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다 내빼고,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만 싸움터로 내몰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군이랬자 제 직속군이 없고, 졸병들에게는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 고을 백성으로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하며, 한 졸병의 몸으로 아침에는 순찰사에게 붙었다가 저녁녘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졸이 자주 바뀌고 소나기처럼 내닫는 명령을 이루 다 받들기 어려운 판입니다. 이러니 누가 어른인지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워 적들의 목을 치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기관은 너무 많아서 정령이 한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아침에 남원 부사였다가 저녁에 나주 목사로 전출되고, 오늘 방어사였던 그가 내일 절도사가 된다는 것.... 이런 상황이라면 장량, 한신, 유비, 악비같은 명장들이 오늘에 다시 살아난다해도 삼십육계 동망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저 글을 쓰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싶다. 적군의 실생활을 여러모로 살펴본 후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충언중의 충언인 것이다. 적군의 실태와 비교하여 나온 생각이니 어찌보면 서글픈 일일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썩어버린 조선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이 드러나는 글이니 그가 환국한 후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았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아끼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짠해지기도 한다.

 

앞서 읽었던 <산성일기>를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살펴보면 조선이 선조대에 이르러 국력이 약해졌던 건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조짐을 보였다는 말이다. 4대 사화를 비롯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혼란은 이미 나라가 정상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버렸다. 비변사를 아무리 설치하면 뭐하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을. 남으로 왜의 침입을, 북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十萬養兵說'을 주장했던 이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가재정은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고, 사회기강은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 무대책이 대책이 되어버린 꼴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보니 느닷없이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작금의 상황이 바로 저 상황이 아닐까 싶어서. 지금의 상황이 딱 저 꼴이다. 당리당략에 빠져 백성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내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난무하니 이이의 '十萬養兵說'이 다시 돌아온다 한들 제대로 먹힐리가 없는 상황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그때와는 다르게 백성이 달라진 세상인데도 왜 저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역사는 알면 알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비생각

 

 

강항 姜沆  1567~1618 .. 본관은 晋州, 호는 睡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5년 교서관 박사, 다음해에 정6품 공조좌랑이 되고 형조좌랑이 되었다. 교서관은 태조때 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ㆍ印信(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597년 휴가를 얻어 고향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전라도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은 참판 이광정 밑에 배속되어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일본 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 교토 쇼코쿠지(相國寺) 妙壽院의 선승인 순수좌, 즉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과거 제도와 춘추 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해주었다. 후지와라는 강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經書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 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항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1600년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에 따라 한양으로 가서 편전 앞에서 술상을 받았다. 선조는 강항에게 일본 현지 상황에 관해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고향으로 내려 온 강항은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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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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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노를 저어온 송파나루의 사공에게 김상헌이 물었다. " 지금 나를 따르겠느냐? "  사공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 .... 제게는 처와 아직 어린 딸자식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후에 늙은 사공은 김상헌의 칼날에 베였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휘돌아치던 장면이었다. 오래전 가슴 깊숙히 통증을 느끼게 해 주었던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그려진 문장들이다. 그 때 작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역사라는 걸 이야기하면서 가명을 쓴다는 것은 더 치졸하다. 역사는 당시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처럼 이렇게 먼 후대에 나타나는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인 까닭이다. 아마도 학계의 두런거림을 경계한 것이리라.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감싸는 테두리로써 존재했을 왕을 위해 그 왕을 있게 해 주는 백성을 외면했다는 것은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명분만을 내세웠던 사람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명분과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게는 김훈의 작품속에서 그 혼돈의 과정을 겪어냈던 서날쇠의 숨결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훗날에 적진을 뚫고 산성으로 들어왔던 뱃사공의 어린 딸 나루를 보면서 김상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가 죽인 사공의 어린 딸이 감내해야 할 그 삶의 무게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는 그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1636년 병자년의 겨울은 혹독했다. 산성을 에워싼 적병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말로써 전쟁을 이겨보고자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은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안개속의 미로같다.  그 때 그렇게 명분을 앞세워 말싸움만 하지 않았어도 어쩌면 왕이 땅바닥에 머리를 찧는 참혹한 광경까지 연출해내지 않아도 되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때 그렇게 사실상 맞서 싸웠다고도 할 수 없는 어이없는 대결만 없었어도 성 안의 백성이 그토록이나 힘겨운 삶의 무게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내 생각이니 말이다. 삼전도에 비를 세우기까지 50여일의 기록을 남긴 그는 누구였을까?  그는 도대체 이런 기록을 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편지를 찢던 김상헌이나 그 찢어진 편지를 다시 주워 붙이는 최명길이나, 그 때의 나라를 생각했던 마음의 깊이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어느쪽이 더 실리적이었는가는 따져 묻고 싶은 것이다. 백성이 없는 왕, 백성을 바라보지 못했던 왕이 존재했던 시대의 아픔이다. 왕의 앞에서 장막처럼 드리워진 관료들. 눈이 되고 귀가 되어주어야 할 그들이 왕을 가로 막고 눈멀고 귀멀게 했던...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썩은 냄새는 역사를 대할 때마다 역겹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지은 이를 유추해내는 부분은 정말 흥미로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을 지은 사람도 당시의 상황이 부끄러웠을거라고.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못했을 거라고.

 

청나라 황제와 주고 받았던 편지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당시 조선의 편협함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편지글뿐만 아니라 책속에서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나하나 주를 달아 세세한 설명을 해 준 것도 그렇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사진을 보여주고 있어 옛글이라 하여 어렵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이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뒷부분에서는 선조부터 인조, 효종까지의 선원록을 도표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지금까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았던 조선시대의 주요관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것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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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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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말이란다. 옛선조들은 무언가 이름을 지을 때 문서속에서 많이 따왔다. 문이나 집에 이름을 붙일때도 그랬다.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라고 이해를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여전하다. 각설하고, 오래된 책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이 책을 지어야만 했을 글쓴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지옥같은 전쟁을 겪어내고 거기에 대한 반성을 기록했다는 말은 충분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당시를 생각해 볼 때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게 그리 쉽진 않았을거라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명분에만 치우쳐 그저 저 잘난 맛으로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의미로 다가오는 전쟁중의 전쟁이다. 환란중에 겪어야만 했던 기록들이 낱낱이 보인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이 따라왔다.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사정, 즉 일본과의 외교적인 관계도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책의 구성은 징비록1권, 징비록2권, 녹후잡기로 되어 있다. 녹후잡기란 징비록을 작성한 후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때 이렇게 했다면 더 좋았을것이라는, 차후에라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그런 마음으로 쓴 글이니 글을 쓸 때 유성룡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에게 이런 역사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습관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세월만 잡아먹고 있는 듯 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쟁의 조짐은 진즉부터 있었다. 중종때인 1510년에 삼포에서 일본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삼포왜란이 있었고, 명종때인 1555년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을 한 을묘왜변이 있었다. 그것뿐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83년에는 병조판서로 있던 이율곡이 선조에게 <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쳐야 할 것은 결국 거치게 되어 있는 것인지....

 

솔직하게 말해 우리의 역사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그 후의 대원군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왜 그들이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가를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물론 전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씁쓸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조선의 역사는 '아니되옵니다'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혹은 '통촉하시옵소서'란 말로 축약된다고. 오죽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명나라의 심유경이 당시의 우의정이었던 김명원에게 보냈다는 편지글이 보인다. 부끄럽게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당쟁을 일삼고 각자의 이득만을 챙기며 말싸움만 일삼던 재상들의 행태를 꼬집는 글이 보여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무슨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 쓰렸다. (김명원은 1589년에 鄭汝立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에 이어 팔도도원수가 되어 한강 및 임진강을 방어했으나, 적을 막지 못하고 적의 침공만을 지연시켰던 인물이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다. 병서와 弓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환란에 대처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나보다. 엊그제 읽었던 <격리>의 상황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전염병에 대처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과 전쟁에 대처하는 우리의 선조들에게서 단 한가지라도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어 읽는 내내 마음이 껄끄러웠다. 책표지의 뒷면에 이런 말이 보인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인데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그 당시에 일본 사신이 했다는 말이긴 하지만 작금의 우리를 돌아볼 때 따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되는 호초를 줍느라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잔칫상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펼져져 왠지 서늘해지기도 한다. 임진년이었던 작년 2012년에 유난스럽게 떠들던 말들이 떠오른다. 다시 임진년의 재앙이 생겨날 거라고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 말은 번지르르한데 이렇게까지 생생한 <징비록>을 놔두고도 유비무환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이 되지 않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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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 전염병에 맞서 싸운 한 도시의 기록 (1900-1910)
마릴린 체이스 지음, 어윤금 옮김 / 북키앙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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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맞서 싸운 한 도시의 기록- 이라는 소제목처럼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페스트와 싸운 샌프란시스코의 기록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을 지은이의 바쁜 발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가감없이 사실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10년이라는 시간속에서 잉태되어졌던 수많은 아픔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듯 싶다. 인간이 살아가는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토록이나 심한 열병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까지도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는 페스트와의 전쟁이라는 말은 살짝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유령처럼 느슨해져가는 우리의 불감증을 꼬집기라도 하듯이. 물론 그때와 지금의 주변환경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분화되어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졌거나 못가졌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깨끗하거나 불결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도외시하는 두려운 현실말이다.

 

정치라는 틀에 갇혀 자신들의 이득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난 세월속에서 그랬듯이, 아마 오랜세월이 지난 먼 미래속에서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가진자들의 탐욕 또한 마찬가지일터다. 오죽했으면 아흔아홉개를 가진 사람이 나머지 한개를 탐한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말이다. 자신의 힘과 부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움직임은 뻔하다. 힘이 있는 자는 그 힘을 잃게 될까 가슴을 졸일 것이고, 부를 가진 자는 하나라도 놓치게 될까 안절부절할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으로 하나둘씩 사람이 죽어갈 때 그들은 현실을 외면했다. 그런 결과로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염병의 확산이었다. 그런 결과로 인해 도시는 격리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한 사람만의 힘으로 그렇게 큰 재난을 막아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였는지 후반부에서 말했던 '피리부는 사나이' 를 잊지 않았다는 말은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든다.

 

쥐들을 통해 퍼져나갔던 페스트는 다람쥐에게로 전이되었다. 설치류를 통해 병균을 실어나르는 벼룩들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다. 부정과 외면에서 인정과 협조로 변하는 과정이 눈물겹다. 페스트를 이겨내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쳤던 덕분에 지금의 샌프란시스코가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짊어져야만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가혹했다.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그려내는 문장들은 긴장감이 느껴지게 한다. 인종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의 냄새나는 모습은 역시 껄끄럽다.  반면에 자신의 민족을 위해 하나로 뭉쳐지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도 중국은 이민자들을 위한 모든 조치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나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한편으로는 부러움까지 자아내게 한다. 페스트로 인해 겪었던 10년이라는 세월이 참 많은 것을 알게 하고, 보게 하고, 느끼게 해 주었다. 전염병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계속적으로 이름을 바꾸며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지침서가 되길 바란다는 말은 묵직하게 느껴진다. 전염병에 대처하는 자세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바뀌지 않는 한 반복되어질 수 밖에 없는 일인 까닭이다. 인류의 역사상 부끄럽지 않은 10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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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체성 -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박석희 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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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 답사를 가게 되면  그곳에 상주하는 해설사를 찾게 된다. ( 요즘엔 어딜가나 상주하는 해설사가 있다! ) 물론 찾아가는 곳의 자료를 꼼꼼하게 준비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해설사와 동행하는 쪽이 훨씬 이해하기 편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한번은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해설사가 없어 혼자 보아야 했는데 나오는 길에 해설사와 마주쳐 다시한번 돌아봤던 경험도 있다. 당연히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해설사가 자리에 없으면 자료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감함이 앞선다. 그만큼 우리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일터다. 그런데 해설사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그 사람만의 특징이 있다. 재미있게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역사책을 읽어주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나름대로의 생각이 담겨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 해설해주는 쪽에 마음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은 그 두가지 해설의 장점을 모두 갖춘 듯 하다. 도심에 살면서 경복궁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굳이 답사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부담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마 경복궁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 경복궁을 배경으로 우리문화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미 범했던 잘못된 정보에 대한 오류는 지금도 많이 수정되어지고 있는 단계지만 이 책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경복궁에 몇 번은 더 가봐야겠다고..

 

입장권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손에 쥘 수 있는 안내자료가 보인다. 많이 꼼꼼해지고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그 안내자료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느정도는 해설사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내가 늘 느끼는 안타까움이지만 이 책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경복궁을 찾는 이들의 자세다. ( 어디 경복궁뿐일까? ) 체험학습을 이유로 경복궁을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준다면 참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너무나 크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되돌아 생각해보면 내 나라의 문화유적에 대해 우리가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찾아오는 외국인들 역시 우리문화유적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책속의 내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싶다. 경복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느 곳에서 바라보면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찾아보아야 하는지 세세하게 안내를 해 주고 있다. 요소요소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잘못된 정보의 오류를 바로 잡아주기도 하고, 가끔씩은 관리하는 쪽과 관람하는 쪽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슬며시 보여주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하루만에 경복궁을 다 보려고 하지 말라는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시간에 쫓기면서 다 보려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두세번 들러보기를 권하는 그 마음이 어느정도는 이해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여러번을 갔어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곳이 내게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아쉬운 마음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책속의 말처럼 닫혀진 공간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굳이 저렇게 문을 닫아놓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문화를 바라보고 찾는 이의 마음, 관람하는 자세가 변하지 않는 한 그런 곳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듯이 그렇게 번듯하게 축하의 분위기를 띄우며 왕이 되었던 이가 바로 세종이다. 거기다 태평성대라는 말과 함께 성군이며 대왕이라는 호칭으로 우리에게 불리워지는 분이니 그를 통해 조선의 정체성을 찾아보자고 한 의도를 조금은 가늠해보게 된다. 곳곳에서 세종대왕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보인다. 여러방면으로 마음을 쓰셨던 분이니 그만한 업적은 당연하다 싶다. 법궁이었으나 270여년간을 비워두어야 했던 경복궁.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 했으나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야만 했던 경복궁. 그 경복궁이 법궁이었을 때 조선은 태평성대였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지금도 복원중인 경복궁이 온전히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지... 경복궁에서 찾고자 했던 조선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무언가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결코 만만찮은 일임에 분명하다. 하물며 우리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책표지에 적힌 글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 儉而不陋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나 사치하지 말라!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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