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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말이란다. 옛선조들은 무언가 이름을 지을 때 문서속에서 많이 따왔다. 문이나 집에 이름을 붙일때도 그랬다.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라고 이해를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여전하다. 각설하고, 오래된 책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이 책을 지어야만 했을 글쓴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했다. 지옥같은 전쟁을 겪어내고 거기에 대한 반성을 기록했다는 말은 충분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당시를 생각해 볼 때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게 그리 쉽진 않았을거라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명분에만 치우쳐 그저 저 잘난 맛으로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의미로 다가오는 전쟁중의 전쟁이다. 환란중에 겪어야만 했던 기록들이 낱낱이 보인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이 따라왔다.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사정, 즉 일본과의 외교적인 관계도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책의 구성은 징비록1권, 징비록2권, 녹후잡기로 되어 있다. 녹후잡기란 징비록을 작성한 후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때 이렇게 했다면 더 좋았을것이라는, 차후에라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그런 마음으로 쓴 글이니 글을 쓸 때 유성룡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에게 이런 역사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습관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세월만 잡아먹고 있는 듯 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쟁의 조짐은 진즉부터 있었다. 중종때인 1510년에 삼포에서 일본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삼포왜란이 있었고, 명종때인 1555년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을 한 을묘왜변이 있었다. 그것뿐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83년에는 병조판서로 있던 이율곡이 선조에게 <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쳐야 할 것은 결국 거치게 되어 있는 것인지....
솔직하게 말해 우리의 역사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그 후의 대원군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왜 그들이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가를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물론 전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씁쓸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조선의 역사는 '아니되옵니다'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혹은 '통촉하시옵소서'란 말로 축약된다고. 오죽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명나라의 심유경이 당시의 우의정이었던 김명원에게 보냈다는 편지글이 보인다. 부끄럽게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당쟁을 일삼고 각자의 이득만을 챙기며 말싸움만 일삼던 재상들의 행태를 꼬집는 글이 보여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무슨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 쓰렸다. (김명원은 1589년에 鄭汝立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에 이어 팔도도원수가 되어 한강 및 임진강을 방어했으나, 적을 막지 못하고 적의 침공만을 지연시켰던 인물이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다. 병서와 弓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환란에 대처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나보다. 엊그제 읽었던 <격리>의 상황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전염병에 대처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과 전쟁에 대처하는 우리의 선조들에게서 단 한가지라도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어 읽는 내내 마음이 껄끄러웠다. 책표지의 뒷면에 이런 말이 보인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인데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그 당시에 일본 사신이 했다는 말이긴 하지만 작금의 우리를 돌아볼 때 따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되는 호초를 줍느라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잔칫상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펼져져 왠지 서늘해지기도 한다. 임진년이었던 작년 2012년에 유난스럽게 떠들던 말들이 떠오른다. 다시 임진년의 재앙이 생겨날 거라고 떠들어대던 그 목소리... 말은 번지르르한데 이렇게까지 생생한 <징비록>을 놔두고도 유비무환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이 되지 않기를....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