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양록 -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9
강항 지음, 이을호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임진왜란 중 교섭이 결렬되는 바람에 두번째로 침입을 당한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그 긴 환란의 기간속에서 피폐해졌을 백성들의 삶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두번째 침략이니 저들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오라는 말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코를 잃어야 했고, 그 코가 산을 이루어 코무덤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대를 달리하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강항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일을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적은 것이 바로 '간양록'이다.  책의 원래 제목은 죄인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건차록巾車錄'이었다. '巾車錄'... 죄인이라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라고 하는데 효종때 이 책이 간행되면서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看羊錄'으로 바꾸었다. '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로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로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포로된 자신의 처지만을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세세히 기록하고, 그들의 군사적 상황까지 살펴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을지를 함께 적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잡혀가는 중에 가족들을 잃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다에 뛰어 들었지만 다시 구출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중에도 두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일도 있다. 그래도 관직있는 자라하여 무지렁이 취급은 받지 않았던 듯 하다.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고, 일본승과 친하게 지내며 최초로 조선의 성리학을 전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게 왕을 향한 충정심으로 해석되어져 조금은 안타깝지만 말이다. '忠'에 무게를 두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까닭없이 억하심정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토록이나 멋진 인물이 많았는데도 조선의 시각은 어째서 열리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눈앞의 이익, 당장의 안일함만 좇으며 살고자 애를 썼던 것일까? 분연히 일어서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관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책을 읽을 때마다 의문점의 크기는 커지기만 한다.

 

목차를 크게 살펴보면 이렇다.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賊中奉疏] ,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俘人檄] ,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詣承政院啓辭] ,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과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부분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신이 엎드려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건대 평소에 인재를 기른 일도 없고, 백성을 가르친 일도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을 긁어모아 싸움터로 몰아세우니, 그나마 권리나 있고 돈푼이나 있으면 뇌물을 먹이거나 권력을 떠세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다 내빼고, 헐벗고 힘없는 백성들만 싸움터로 내몰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군이랬자 제 직속군이 없고, 졸병들에게는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 고을 백성으로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하며, 한 졸병의 몸으로 아침에는 순찰사에게 붙었다가 저녁녘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졸이 자주 바뀌고 소나기처럼 내닫는 명령을 이루 다 받들기 어려운 판입니다. 이러니 누가 어른인지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워 적들의 목을 치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기관은 너무 많아서 정령이 한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아침에 남원 부사였다가 저녁에 나주 목사로 전출되고, 오늘 방어사였던 그가 내일 절도사가 된다는 것.... 이런 상황이라면 장량, 한신, 유비, 악비같은 명장들이 오늘에 다시 살아난다해도 삼십육계 동망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저 글을 쓰면서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싶다. 적군의 실생활을 여러모로 살펴본 후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충언중의 충언인 것이다. 적군의 실태와 비교하여 나온 생각이니 어찌보면 서글픈 일일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썩어버린 조선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이 드러나는 글이니 그가 환국한 후 관료들에게 미움을 받았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아끼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짠해지기도 한다.

 

앞서 읽었던 <산성일기>를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만히 살펴보면 조선이 선조대에 이르러 국력이 약해졌던 건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조짐을 보였다는 말이다. 4대 사화를 비롯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혼란은 이미 나라가 정상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버렸다. 비변사를 아무리 설치하면 뭐하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을. 남으로 왜의 침입을, 북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十萬養兵說'을 주장했던 이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가재정은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고, 사회기강은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 무대책이 대책이 되어버린 꼴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보니 느닷없이 가슴 한켠이 서늘해진다. 작금의 상황이 바로 저 상황이 아닐까 싶어서. 지금의 상황이 딱 저 꼴이다. 당리당략에 빠져 백성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내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난무하니 이이의 '十萬養兵說'이 다시 돌아온다 한들 제대로 먹힐리가 없는 상황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그때와는 다르게 백성이 달라진 세상인데도 왜 저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역사는 알면 알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비생각

 

 

강항 姜沆  1567~1618 .. 본관은 晋州, 호는 睡隱. 강희맹의 5대손으로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에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5년 교서관 박사, 다음해에 정6품 공조좌랑이 되고 형조좌랑이 되었다. 교서관은 태조때 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ㆍ印信(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597년 휴가를 얻어 고향 전라도 영광에 내려와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전라도의 군량 조달 임무를 맡은 참판 이광정 밑에 배속되어 남원 일대에서 군량 운반을 관리했다. 일본 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 교토 쇼코쿠지(相國寺) 妙壽院의 선승인 순수좌, 즉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의 과거 제도와 춘추 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해주었다. 후지와라는 강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經書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 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항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1600년 5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강항은 선조의 부름에 따라 한양으로 가서 편전 앞에서 술상을 받았다. 선조는 강항에게 일본 현지 상황에 관해 물었고 강항은 자신이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고향으로 내려 온 강항은 은거하면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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