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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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으면서 정말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을 더듬는다. 우스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 뒤로 나는 정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얼만큼의 깊이를 갖는다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얼만큼을 알아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싶었다. 평생을 박물관사람으로 살았다던 사람이니 오죽할까 싶기도 하지만 그 느낌에 대한 부러움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혹시나하여 성북동 골목길을 더듬으며 찾아갔던 그가 살던 집은 내겐 그저 한사람이 살았던 옛집에 불과했다. 솔직히 특별하게 무엇을 바라고 간 건 아니었다. 역사의 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자그마치 10년동안이나 그의 작품이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내겐 너무 멀기만 했던 최순우의 심미안이 내안의 무언가를 흔들고 있을 때, 두번째로 답사열풍을 일으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읽고나니 한대 맞은듯 얼얼했다. 어떻게 이렇게나 유려한 글솜씨로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풀어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가장 기억나는 말이 '아는만큼 보인다'는 거였다. 그 이전에도 이미 들어왔던 말이었을텐데 유난스럽게 파고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맞는 말이다. 우선은 관심이 있어야 알려고 한다. 그리고 알면 그 아는만큼 보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찾아가는 곳마다 엉터리같은 안내판들이 그렇게 미웠었다. 도무지 자기들만의 잔치인양 되지도 않는 용어를 적어놓아 우리문화유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는 그들의 행태가 나는 정말 싫었었다. 지금은? 지금이라고 뭐 달라졌을까마는 아무래도 이전보다 우리문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다보니 신경을 쓰긴 쓰는 모양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우리에게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보게 해준 작품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연속적으로 인기있는 작품으로 선정되는 것만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닐 터다. 시작이 1990년대니 그다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가는 곳마다 나를 맞이하던 그많은 문화유산들은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는 진리가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다. 거죽만 보고오는 답사가 되지 않기를. 너무 큰 욕심을 앞장세운채 그곳에 가지 않기를.


살아있는 역사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들의 말과 글이 크나큰 목소리로 내게 울림을 전해주어 한창 되지도 않을 욕심에 끌려다니지만, 현장에서 그만큼의 느낌과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다는 건 정말 고수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책, 읽다보니 나를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  각장마다 보이던 부제들만으로도 나는 벅찼다. 어떻게든 글로 표현해야 했기에 붙여주었을 글귀였겠지만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는 한 줄의 글귀가, '광화문의 동상 속에는 충무공이 없다' 던 그의 말이 내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가 언제 어디를 찾아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바라보던 그 눈길과 마음길이 아프고 아련했다.  백흥암의 비구니 스님을 바라보았던 그의 눈길과 마음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무등산을 바라보며 평등을 생각했다던 그의 말은 꽂히듯이 내게로 달려왔다. 감히 뭐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의 글은 상당히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백마강에서 그가 했던 말, '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 이 말만큼은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졌으면 하는 욕심을 갖게 한다. 큰 나무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가슴속에 새긴다. 嗚呼痛哉라! 아직 한발자욱도 떼지 못한 나의 미욱함이 서글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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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터키 In the Blue 14
백승선 지음 / 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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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 불렸다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웠던 도시.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이스탄불이라 불리워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문화유산이 모인 곳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파기만하면 유물유적이 나온다는 경주와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문화가 한데 모인다는 건 그리 흔치않은 일일 것이다. 터키.. 정말 가고싶은 곳 중의 하나다. 여행은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여행길에 나서면 그 만남이 왜그리도 어려운지... 뜻하지 않은 만남이 좋은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을 게다.

 

'두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이란 말이 참 좋았다. 지은이의 발걸음을 따라 이스탄불, 파묵칼레, 보드룸, 쉬린제, 에페소스, 카파도키아를 여행한다. 황홀하다. 말과 글만으로 따라가는 여행조차 이렇게 황홀한데 그 길을 직접 걸어보는 이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보드룸에 들러 지중해의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의 언덕에 올라보고 싶다. 낡은 풍차처럼 그 바람을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다. 우리나라의 산동네같다는 쉬린제는 사진만으로도 가슴이 푸근해져온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 할머니와 나도 반갑게 웃으며 인사나누고 싶어진다. 어제 본 얼굴인듯 별 일 없으셨느냐고 손한번 잡아보고 싶어진다. 여행은 그렇게 '쉼'의 현장일테니.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부분에서 여행자의 발길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배려가 괜찮았다. 가고자하는 곳에 대해, 아니면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인 까닭이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니 그 속에는 아마 미래도 함께 머물것이다. 과거를 만들어내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방인임에도 이방인이 아닌 듯 그 도시를 걸었던 여행자의 발걸음마다 즐거움이 묻어났다. 덕분에 나조차도 가벼운 발걸음이 된다. 겨우 10%만을 보여준다는 에페소스의 유적들은 상당히 매혹적인 느낌으로 나를 유혹했다. 열기구를 타고 내려다보는 카파도키아의 풍경은 사진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내가 만약 터키에 간다면 카파도키아의 모형만큼은 꼭 사고 말테야... 멋진 사진이 많아서 하나하나 감상하느라 책장을 덮기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유려하지않은(?) 말솜씨가 정겹게 다가와서 사진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참 멋진 여행이었다. 대리만족이라는 말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되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사진을 보면 셀레는 가슴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는다. 언제쯤이면 나도 저안에서 또하나의 그림으로 남겨질까? 세상에는 정말 오묘한 것들이 많다. 세상에는 정말 신비로운 것들도 많다. 여기만큼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욕심부리게 되는 곳은 왜 그렇게나 많은지... 여행은 어쩌면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게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어긋나지 않고 자연속에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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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쉬운 한 그릇 요리 - 간편해서 좋아
함지영 지음 / 시공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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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운 여름, 가스불을 켠다는 사실부터가 나를 끔찍하게 만든다. 불을 켜는 순간부터 요리가 다 끝날때까지 완전 찜통이다. 그렇다고 뭐 그렇게 새로운 걸 해먹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밥상과의 전쟁. 시장엘 가서 두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이렇다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다. 그게 그거다. 하기사 일년삼백육십오일을 날마다 새로운 걸 해 먹을 수는 없는 일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뭘 해먹지? 뭐가 맛있을까? 고민하는 게 주부의 특권인양 그렇게 먹는것과의 전쟁은 끝이 없다. 더구나 나처럼 요리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시할 수 없는 고민중의 고민일 터. 먹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아내와 엄마를 만나 못얻어먹고 산다는 말 듣게 될까봐 나는 안먹어도 우리집 두남자에게 식성을 맞춰 밥상을 차리다보니 내게는 정말이지 고약한(?)이 아닐수가 없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이 내게 주는 유혹의 기대치가 얼마나 컸을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밥, 반찬, 국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오직 한 그릇에 부려담아 제법 그럴싸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라고?  정말? 어떻게? 기대반 의심반으로 책을 펼친다. 와~~ 많다. 정말 많은 종류의 요리가 펼쳐진다. 잠시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나는 뭘 해먹었을까? 남편을 위해서 혹은 아들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것은 무엇이 있을까?   父子가 같은 식성인지라 해주는 요리는 뭐든 잘 먹어 그 맛에 나도 요리를 하지만 문득 그동안 뭘 해먹고 살았나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저것 하기 싫을 때 가장 만만하게 해먹는게 볶음밥이고 비빔밥이다. 냉장고에 있는 신김치랑 감자랑 양파랑 그 밖의 채소들을 송송 썰어 볶음밥을 해 먹거나, 나물 서너가지 무쳐서 들기름 살짝 둘러 그 위에 달걀후라이 하나 얹어주면 두말없이 잘 먹는 까닭이다.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면 남편이 좋아하는 비빔국수, 아들이 좋아하는 들깨수제비, 그리고 아들녀석과 내가 함께 잘 먹는 스파게티쯤이랄까?

 

쭈욱 살펴본다. 사진만 봐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있고 이렇게도 해 먹는구나 싶은 요리도 눈에 띈다. 집에서 쉽게 만드는 기본 육수와 양념은 나도 한번 도전해봐야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책에 나와 있는 요리들이 말처럼 쉬운 요리로 보여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뭐든 전문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과 초보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에는 묘한 차이가 있는 게 분명한 까닭이다. 많이 해 본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더 많다. 그러니 나처럼 요리 못하는 주부가 도전하기엔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고 결코 간편한 식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딱 20년차 주부다. 대충대충 요리실력이다보니 계량컵을 사용하기보다는 이정도면 되겠거니 하는 짐작으로 요리를 한다. 딱히 요리를 잘해서가 아니라 날마다 특별한 음식을 해 먹지 않아서일것이다. 그럼에도 뭔가 새로운 걸 해먹이고 싶은 마음이 이 책을 펼치게 만들었을텐데 왠지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내겐 그렇게 쉬운 한그릇 요리로 보여지지가 않아서.

 

오늘은 뭐 해먹을까? 우리집 두 남자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제발 묻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해 줘. 처음엔 그래도 먹고 싶은 걸 말하더니 며칠 못가 아예 묻지도 말란다. 가끔씩은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보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가끔일 뿐이다. 그 가끔하는 도전에 성공하게 되면 자주 해먹는 요리목록에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일주일 내내 그것만 해먹는 건 아니다 ^___^. 다시한번 책을 펴본다. 일단 메뉴가 많으니 좋긴 좋다. 이거, 내가 한번씩은 다 해먹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또 모르지, 아들녀석이 해달라고 한다면... 갑짜기 팥칼국수가 먹고 싶어진다. 이 더운 날씨에 웬 팥칼국수? 남이 해주는 요리는 뭐든 맛있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나 다시 웃는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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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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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죽비를 드신 스님이 참선인의 어깨를 내리치며 하는 소리,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소리... 喝, 이 글자속에는 큰소리로 나무란다는 뜻이 담겨있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던 스님의 죽비소리를 들으면 내 어깨를 내리치는 것만 같아서 뜨끔하기도 했지만 문득문득 참 좋구나, 생각을 했었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 때에 이 소리를 한다고 한다. 어려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낯설지 않은 말이다. 지인의 소개로 <길없는 길>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불교신자가 아님에도 굳이 禪僧의 발길을 쫓은 작가의 마음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어 시간이 허락된다면 한번 더 정독을 해 보자고 벼르고 있던 참인데 여태 읽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 책은 게으른 내 어깨위에 죽비를 내리치시는 스님의 목소리와도 같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책은 <길없는 길>에서처럼 나를 헤매게 하진 않았다. 오히려 전작에서 헤맸던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법명이 '惺牛: 깨우친 소' 이신 鏡虛스님의 삼대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개의 달로 표현되어지는  滿空, 慧月, 水月 님에 대한 자취를 더듬어가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궁금하기도 했던 차였다. 이 글을 쓴 작가처럼 나도 불자가 아닌데 굳이 이 책에 빠져들게 된 연유는 따져보고 싶지 않다. 그 알 수 없는 느낌에 어떠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싫은 까닭이다. <길없는 길>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새록새록 솟아나 다시 내 곁으로 왔다. 다시 읽어야지 했던 그 마음을 질책이라도 하려는듯이.

 

無碍行의 상징처럼 표현된다는 鏡虛스님은  의 생활화로 근대 한국불교를 중흥시켰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분께서 행하신 無碍行의 일화들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삼대제자의 흔적 또한 만만치않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먹먹함으로 다가왔던 짧은 이야기가 제법 무겁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중광스님이 생각났다. 세속에서는 걸레스님이라느니, 미치광이 중이라느니 했다지만 어찌보면 그 분들이야말로 제대로 수행하신 게 아닌가 하는 객쩍은 생각까지 든다. 물이 불어 내를 건너지 못하는 처자를 업어 건네준 스님에게 제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니 "너는 어째서 그 처자를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여태 업고 있느냐?" 했다던 불교설화 한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그 無碍行이라는 것도 섣부른 깨침만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게 분명할 터다.

 

한사람은 북쪽을, 한사람은 남쪽을, 그리고 한사람은 그 사이를 비추는 달이 되자고 했다는 세 분 스님. 그리하여 水月 스님은 북으로 갔고, 慧月스님은 남으로 갔으며, 滿空은 중간에 남았다. 끝없는 자비심으로 세속에 머물렀다던 水月스님의 흔적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세상을 대했다던 慧月스님의 행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나마 막내제자인 滿空스님의 기억으로 인해 생전의 모습과 같은 스승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분 스님의 행적을 따라가는 여정이 힘들지 않았다. 다시 <길없는 길>을 펼쳐 볼 때가 된 듯 하다. 내 어깨에 죽비를 내리쳐본다. 喝!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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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웃긴 사진관 - 아잔 브람 인생 축복 에세이
아잔 브람 지음, 각산 엮음 / 김영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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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노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지옥과 극락이 정말로 있습니까?  노스님께서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다. 저는 만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장군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내가 보기에 당신은 백명의 부하도 못거느리게 생겼습니다, 했다.  화가난 그 사람이 총을 들이대며 말했다. 내가 누군줄 알고 함부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요?  그 모습을 보던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 어허! 지옥문이 열렸습니다. 말을 듣고 난 사람이 자세를 고치며 스님께 사과를 했다. 제가 성격이 너무 급해서 스님께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며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는 극락문이 열렸습니다... 책을 읽다가 생각난 이야기다. 이것말고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없이 많다.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느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일게다. 슬픈데 웃음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하면 웃기는데 눈물이 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삶의 힘겨움을 견제하기라도 하는 말인양 머피의 법칙이니 샐리의 법칙이니 하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도 내 마음 하나만으로도 바뀔 수 있는 진리임에는 분명할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고달프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스님 중 한 명이 쓰신 인생축복에세이.... 처음 대했을 때 제목이 주는 느낌은 참 좋았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인생축복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계발서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스님의 이력이 대단하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했다던 스님. 웃음과 행복이 불교의 최종 목표라는 걸 깨닫고 남반구에서 최초로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 특유의 유머와 통찰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말을 보니 한번쯤은 육성으로 그의 법문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 굳이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을테니 하는 말이다. 지구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삶의 고난속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는 진실을 전하고 다닌다는 스님. 그런데 문득 묻고 싶어진다, 스님께서도 진정 행복하냐고. 세상 어느 것도, 세상의 그 어떤 목소리도 삶을 순식간에 슬픔에서 축복으로 바꿔주지는 못한다고 나는 생각하기에.

  

서른여덟 편의 인생이야기가 담긴 책.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숱하게 마주쳤을 그런 이야기. 우리는 항상 그렇다.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믿어버리는 우매함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러다가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를 외치며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리곤 말한다.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다고. 다시한번 아잔 브람 스님의 이력을 찾아보니 세계적인 명상 스승이라는 말이 보인다.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발군의 실력(?)과 효과로 생겨나고 있다는 명상센터들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종교불문, 나이불문이다. 역시 자기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그러니 누군가가 바꿔줄 수 없고 대신 해줄수 없다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 불쾌한 사진들은 기억에서 다 없애버리고 행복한 사진만 간직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과거의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보다는 우울해지고 화가 날 뿐이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놓아버리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존재가 끝없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말씀 역시 틀리지 않는 듯 하다. 삐딱한 나의 심중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말씀이 있다. 인생앨범의 행복한 순간들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진으로 남겨놓는 인생의 한 순간들은 결코 나쁘지 않다. 괴롭고 아픈 순간에 사진기를 들이대며 그것을 남겨두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 행복한 사진으로 남겨진 순간들을 기억하라는 말씀에 왠지 가슴 한쪽이 찡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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