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파인더 - 인류 최초의 지혜로 미래를 구하다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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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과학기술과 진보를 향한 숭배에 내재하는

만인을 위한 단일한 문명이라는 이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고 불구가 된다.

세계관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문화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 옥타비오 파스(178쪽)

 

책을 읽는 내내 곁을 맴돌던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 이 내용을 책이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순간순간 느껴지던 공감의 강도나 깊이가 엄청났을거라고.... 부드럽지 않은 주제와 문체가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는 내 시선을 붙잡아주지 못해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굳이 인류 최초의 지혜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직까지는, 진정 아직까지는 살아남은 소수 민족만의 순수함은 이내 내 속을 파고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버텨주고 있기에 고마운 그들의 삶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읽는다는 건 결코 경이로운 일이 아니다. 세계화라거나 지구촌이라는 말로 언제부터인가 획일적이며 몰개성화되어져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현재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선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긴 자 혹은 힘있는 자들에 의해 쓰여진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적인 획일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種의 사라짐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화면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은 현재의 삶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 하나를 들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던 부시먼을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까지도 그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오직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양 거들먹거리며 유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던 문화의 틀이 깨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착오가 있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류 문화사에 진보의 단계는 없다던 말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부족만의 고유한 지식덕분에 초기 인류의 모습을 하고도 아프리카에 살아남았다는 산족. 야만이니 미개니 하는 말과 문명이라는 말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보게 된 말이다. 그런 말들은 과연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바다에 정착하여 멋진 삶을 이루어냈던 폴리네시안들에게도 분명 문명은 있었다. 정복되기 전의 그들에게 정복자보다 더 훌륭한 문화가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훌륭한 사회가 '야만인들'의 사회보다 유리한 점이 무엇일까를 종종 생각한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음은 왜일까?

 

계절을 견디고 바다를 읽으며 땅의 신성함을 믿는 동시에 우주와 공존할 줄 알았던 인류가 멸종으로 가는 21세기라는 이름의 전차를 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파괴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작금의 행태를 생각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지구는 맘껏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까닭이다. 숲을 숭배하도록 배운 아이와 숲을 베도록 배운 아이가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은 보지않고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확연하게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에. 어느쪽을 택할 것인지는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문화충돌의 본질은 미친 듯 날뀌는 권력에 있다는 말이 씁쓸하다. 결국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자만이 불러온 결과물일 터다. '한 사람의 가난은 모두의 수치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던 어느 부족처럼 모두의 안녕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는 있을까?

 

세계적으로 에너지와 물자의 소비를 서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현재 인구 추계상 2100년까지 지구 네 개 행성만큼의 자원이 필요하다. 하나뿐인 지구로 그 자원을 대려면 지구라는 행성은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생물권이 훼손될 게 뻔하다. 물론 국제사회의 결정을 움직이는 가치들이 있는 한, 당장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211쪽)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화의 물결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꿰뚫고 있는 말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았을 그런 황폐한 지구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걸 우리는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최선일까?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한 부족들이 지금도 자신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투쟁하고 있다고 한다. 티베트인과 산족, 아르와코족, 위와족과 코기족, 카이오와족, 바라사나족, 마쿠나족, 프난족, 렌딜레족, 탈탄족, 기트산족, 웨추웨튼족, 하이다족, 이누이트족 그리고 폴리네시아 부족 (책에 나와 있는 부족들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유는 그다지 많지않은 소수민족의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형을 미치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 의 이름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것은 분명 인류의 위기이며 지구의 위기다. 책을 덮으니 뒷표지에 이런 말이 보인다. " 전 세계인이 같은 언어를 쓰면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멋진 생각이군요. 그럼 하이다족이나 요루바족 혹은 이누이트족이나 산족의 언어를 세계 공통어로 삼아 볼까요?" 어느 민족이 더 우월하고 어느 민족이 더 열등한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잣대일 뿐일테니.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보다 배려와 관심으로 만들어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도 하루라는 시간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아픔을 느껴야만 한다. 이 책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현재의 우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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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산이 있었다 - 한국 등산 교육의 산증인 이용대 교장의 산과 인생 이야기
이용대 지음 / 해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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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때 산이 좋아서 오로지 산만 바라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무슨 해외원정을 갔던 건 아니다. 기껏해야 1000미터도 안되는 산을 올랐을 뿐이다. 모순되게도 건강 때문에 산을 찾기 시작했는데 다시 건강을 핑게로 산과 멀어져야 했지만 그런 내게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산을 오르느냐고 묻곤 했었다. 왜 그렇게 산에 올랐을까? 누구는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아서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산에 동화되어지는 내가 좋았던 것 같다. 한동안 산엘 가지 않았으니 지금은 산행풍경이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경쟁적으로 누가 더 많은 정상을 찍는지 내기를 하는 것처럼 이 산 저산을 바쁘게 오가던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산은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산을 오르며 숨한번 고를 때마다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 사이로 펼쳐지던 파란 하늘이 좋았다. 산길을 걸으며 두팔 벌려 맞이하는 바람이 좋았었다. 사람소리보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같은 자연의 숨소리가 좋았었다. 산을 오르며 내 무릎 아래에서 살포시 고개 들고 웃어주는 작은 꽃한송이의 웃음이 좋았었다. 그러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 야생화도감을 하나 사서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녔었다. 아주 작은 그 웃음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절로 미소가 번진다. 마음쉼을 위한 산행이라면 자연을 그렇게 느끼는 거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어느정도는 현실도피성을 담고 있었다해도 오롯이 산과 함께 어울어지는 그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소중했었다. 같은 길을 몇번씩이나 찾아가도 갈 때마다 다른 표정과 느낌으로 나를 맞이해주던 산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전에 읽었던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에서 공감과 치유의 산행 에세이라는 말이 참 좋았었다. 작가 김별아가 백두대간을 완주하는 여정을 담았지만 그 여정속에서 들여다보았던 단상들은 의외로 깊은 울림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산을 하나의 영적 대상으로 여겨 오른다(登山) 하지 않고 든다(入山) 라고 표현했다던 동양적 사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라면 적어도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쉽게 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산을 찾는 것조차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움직이고 있다. 우스개소리로 유명한 등산복을 만드는 나라에 가면 그 등산복을 입은 사람이 없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는 말이 안타깝다. 高山에서나 입을 수 있는 등산복을 우리는 약수터에만 가도 볼 수 있단다. 너도 나도 자존감없이 남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책속에서 보여지던 등로주의란 말은 왠지 껄끄럽게 다가왔다. 너도나도 그 방식을 택한다면 우리나라의 산이 몸살을 앓을 것임은 뻔한 일이다. 등로주의와 같은 것은 그야말로 산에 오르는 것에 대해 진정한 가치를 논하는 사람들만이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나는 사람을 구분할 때 산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 산에 가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글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책속에 있는 말이다. 이 글귀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 보았다. 멋지다! 산은 인생의 학교다, 라고 먼저 글을 시작했던 것에 공감하게 된다. 백두대간이란 명칭의 역사적 배경을 이제사 알게 되어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하다. 1769년 조선조 후기에 발간된 지리서 <산경표>에서 그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5개로 분류하고 있다고 하는데,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여 거기에 땅 위의 산들을 억지로 꿰맞추다보니, 땅 위의 산줄기에 물길이 포함되기도 하고 산맥이 강을 건너는 말도 안되는 모순을 볼 수 있어, 근본적으로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배웠던 체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우리 산에 자생하는 풀꽃을 기억하라 는 당부는 정말로 잊어서는 안되는 주제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식물은 4,200여 종으로 이 가운데 우리 땅에서만 자라는 것이 400여 종이다. 종류가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효용가치로 볼 때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가 우리의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식물자원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미스킴 라일락이나 정향나무와 같이 우리나라가 원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역수입되어 들어오는 식물자원이 많은 까닭이다.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인식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어리석음을 식물자원에서 또다시 번복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책속에는 등산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등산학교, 등산교육, 산서읽기, 빙벽, 세계의 여러 산을 정복했던 우리의 산악인들, 월간 <산>이나 <사람과 산>과 같은 잡지 이야기, 지금은 들을 수 없는 메아리 이야기, 비박, 여성 산악인.... 그 중에서도 책, 산을 오르는 또 하나의 길이라던가 비싼 등산복에 기죽은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이야기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고산과 암벽, 빙벽만을 오르는 것이 등산은 아니라며 자연환경, 생태, 문학, 역사등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게 탐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산에 오르자던 글쓴이의 말은 새겨들을 만 하다. 건강을 도모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수단도 좋지만 단순히 오르는 행위만을 생각하지 말고 탐구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 역시 공감한다.

 

어려서도 산이 좋았네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뒷산에 올라가 하늘을 보면 나도 몰래 신바람났네
젊어서도 산이 좋아라 시냇물에 발을 적시고
앞산에 훨훨 단풍이 타면 산이 좋아 떠날수 없네
보면 볼수록 정 깊은 산이 좋아서 하루 또 하루 지나도 산에서 사네
늙어서도 산이 좋아라 말없이 정다운 친구 온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린 날
나는 나는 산이 될테야 나는 나는 산이 될테야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어 그것을 찾아 들으니 너무 좋다. 저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텐데.... /아이비생각

 

오늘날의 우리 산에는 많은 인파가 북적이다 보니 훼손과 오염이 늘고 등산객들의 고성방가에 차량 접근까지 더해 소음 공해마저 겹치고 있는 실정이다. 산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요, 본래의 주인은 등산객이 아니라 산에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이다. 그들은 사람보다 먼저 산에 깃들어 오래도록 살아온 존재들이다. 혹여나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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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 여행작가 조정연이 들려주는 제3세계 친구들 이야기, 개정판
조정연 지음, 이경석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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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났던 책이 있다. 탤런트 김혜자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수필집이다. 민간구호단체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세계 여러나라의 버려진 아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도운 체험을 직접 쓴 책인데 대단한 공감을 불러왔던 책이었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입하나 덜겠다고 딸을 보낸 부모나 일자리를 찾아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고 정든 곳을 떠났던 아이들의 참상을 그린 현대판 하녀 아미나타, 겨우 네살이었을 때 어른의 손에 이끌려 인신매매를 당하고 두바이에서 가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낙타몰이꾼으로 살아가게 된 알스하드의 몸은 일곱살임에도 불구하고 네살박이 모습 그대로였다! 부모의 빚때문에 어린 나이에 팔려가 엄마가 되고 학대를 당하며 또다시 팔려가기도 하는 소녀들,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는 어린 동생과 아픈 할머니를 부양하며 쓰레기더미 위에서 살아가는 소피아, 검은 연기에 갇힌 라타, 집없이 길거리에서 생활해야 하는 인도의 작은 소녀 찬드라, 부모를 모두 잃고 피바람이란 이름으로 잔인함을 먼저 배워야 했던 소년병 모하메드, 학교에 가지만 수업은 제쳐두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하루종일 목화를 따는 아이들, 나라와 기업의 외면속에서 달콤한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노동력을 찾취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쓰디쓴 이야기.... 이 책은 개정판이다. 이미 8년전에 이 책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8년의 시간동안 그 아이들의 모습은 얼만큼이나 달라졌을까? 미루어 짐작하건데 아마도 그다지 많은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나의 광고가 얼마나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밥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부리는 아이에게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고,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아이들을 보여주면서 작으나마 후원을 하기로 했다는 광고를 본 기억이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일까?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느냐고. 우습게도 열대과일이 많이 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바나나 하나를 맘놓고 먹을 수 없다던 어느 나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국민의 힘겨움보다는 자신들의 안녕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관료층의 부패가 그런 모순을 낳고 있지만 그들은 전혀 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역시 이 책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나라에서도 그런 웃지못할 모순은 존재했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가진자들은 너무 많아 흥청망청 버리고 없는 자들은 그것이라도 받아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게 서글프다. 자본주의의 씁쓸한 뒷모습이다. 어떻게 된 게 세상은 인권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인권이 무시되는 것만 같다. 소중하다고 하면 할수록 더 우습게 여기는 것만 같다. 피폐해져만 가는 인류의 모습에 가슴 한켠이 아리다.

 

제3세계 친구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富益富貧益貧 의 사회현상을 어찌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인류가 이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버린 탓이다. 이타주의따위는 이론일 뿐이다. 그럼에도 작은 배려와 관심의 풀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 풀뿌리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 하나의 커다란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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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1 - 오늘을 위한 성찰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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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혜서란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역사는 지나간 과거일뿐인데 왜 그토록이나 역사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역사속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어떻게 배우는 가는 상당히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현재 역사라는 학문분야를 볼 때 나같은 무지렁이가 봐도 상당히 보수적이지 않나 싶을 때가 많다. 기존의 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이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학설이 나와 그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래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며 등장하는 신진세력들은 자리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터다. 하지만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칭 마니아라고 평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어느 신문지상에 연재되었던 저자의 칼럼이다. 그 때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말이 바로 역사지혜서였는데 현재의 문제를 역사속의 단면과 빗대어 어쩌면 그리도 멋지게 해결방법을 제시하는지 놀라웠을 뿐이다. 사람사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의 질만 약간의 차이를 둘 뿐이다. 그러니 지금을 사는 우리네가 어떻게 하면 옛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지나간 일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예나 지금이나 통하는 의는 같다.

 

영조 재위 20년, 병이 들자 신하들이 영조의 침실에 들어가 영조의 생활을 본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검소했다고 한다. 여러 신하가 물러나와 임금의 검소를 찬탄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정조의 밥상에 반찬이 두세 그릇에 지나지 않았고 그릇에 흠이 있었던 이유는 신하들이 일상으로 쓰는 도자기를 모두 사옹원 분원에서 만든 특제 도자기를 쓴다는 말을 듣고는 보통으로 구워 만든 그릇도 쓸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법이나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하기에 자신의 허물을 먼저 없앴다는 이야기다. 지금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다. 물가 상승이나 주택 문제등으로 수많은 서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조대의 도체찰사 유성룡의 예를 든 것은 새겨들을 만 하다. 복지 논쟁이 계속되는 작금의 현실속에서 사궁민四窮民을 생각해야 한다는 옛날의 문헌이 예사롭지 않다. 四窮民이란 환과고독으로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을 일컫는다. 鰥寡孤獨... 즉 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사람이나 자식없는 사람을 말한다.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맹자도 말했단다.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라고... 지금의 복지논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싶어지는 이유다. 흑산도로 유배를 갔던 정약전의 이야기를 통해 전교조에 휘둘리는 작금의 교육현실을 보게 된다. 귀한 신분이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섬마을 선생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복성재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니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다면 정약전의 교육정신을 본받아 마땅한 일이다. 많은 교사가 전교조라는 작은 소란때문에 진정한 교사의 모습으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를 허투루 볼 수 없다. 역사속에는 오래되어 향이 나는 교훈이 너무나도 많다. 직설적인 화법때문인지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가슴속에 날아든다. 이렇게 많은 해결책들이 역사속에 감춰져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알아도 모른 척, 들어도 못들은 척이라면 더 할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편익만을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술자를 천시했던 역사가 무엇을 불러왔는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교육의 질에 변화를 추구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국민교육헌장에서 말하듯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소리지만 역사는 이미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역사를 바로 알아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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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 사랑, 관계, 불안, 벗어날 수 없는 나와 가족의 심리 연대기
산드라 콘라트 지음, 박규호 옮김 / 북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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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도대체 '아는 사람'이라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참 애매한 구분이 아닐수가 없다. 한두번 인사를 나눈 사람도 '아는 사람'이다. 그저 얼굴만 아는 사람도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그나마 이름 석자 서로 나눈 사람이라면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을 게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아는 사람'의 힘을 어느정도는 맹신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아는 사람'과 '이웃 사촌'은 또 어떻게 다를까?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웃사촌이 낫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냥 '아는 사람'보다는 '이웃 사촌'이 더 가까운 의미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모두 '아는 사람'이나 '이웃 사촌'의 범주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가족'이라는 말이다. '가족'....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존재. 내가 눈물 흘릴 때 눈물 닦아주며 등 두드려주는 존재.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왜 그런걸까?

 

나의 상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라는 말은 내 가슴과 머리를 떠나지 않던 주제였기에 반가웠다.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말속에서 나는 어떤 위안을 찾고 싶었던 건지 다시 물어야 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내 안의 나와 타협하고 싶어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라는 책 표지의 말에 가슴 한켠이 아렸다. 우리의 상처 대부분이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에 공감한다.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는 바람이 언제부턴가 불기 시작했던 것 같다. 늘 함께 있고, 늘 그자리에 있으니 소중한 줄 몰랐던 가족. 내 투정과 불평을 두말없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함부로 대했던 가족. 그랬기에 나로 인해 받는 상처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가족.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존재이기에 더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야만 하는 거라고,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한 존재가 가족인 거라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나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 삶의 여러 층위들은 서로 아주 밀접하게 겹쳐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 것에서 언제나 예전 것을 만나게 된다.

해결되고 처리된 것으로서가 아닌 현재로서,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으로서 말이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이 책은 가족이라는 의미가 안고 있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을 어떻게 지었느냐를 시작으로 부모로써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그러나 이렇다하게 새로운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 늘 들어왔으나 늘 스쳐지났던 주제들을 다시 만나고 또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짧은 순간과 마주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과 실수는 정말 많았다. 되풀이되는 가족사의 아픔도 그렇고 부담이 되는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도 그렇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알아야 했다. 일도, 사랑도, 관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답은 가족에게 있다는 말이 헛되이 들리진 않는다. 책속에서 잠시 언급했던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가 인상깊다.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레고르 잠자는 결국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하게 되지만 끝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어떤 의미였는지.... "인간은 조상의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인생의 절반을 쓰고, 자녀에게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는 데 나머지 절반을 쓴다" 는 윈스턴 처칠 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일전에 지나가는 말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는 엄마보다 "아들~~~"하고 부르는 엄마가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이야기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가슴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굳게 닫힌 방과도 같고 완전히 낯선 언어로 쓰인 책과도 같은 물음들.

 모든 걸 살아보아야 한다. 그 물음들을 살아가노라면

 차츰 저도 모르는 사이 어느 낯선 날 대답 안에서 살고 있으리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결국 세월이 약이라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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