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의 복수 -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가 경고하는 인류 최악의 위기와 그 처방전
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처음 가이아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나는 지구를 생각했었다. 신화속의 여인 가이아가 누구인가? 바로 대지의 여신이다. 우리모두를 품어 주었던 대지의 여신.. 이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이아 이론이란 것이 지구 전체가 동물이 체온과 화학적 균형을 조절하는 것처럼 내부 환경을 조절하는 하나의 생물로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한다면 살아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그렇게 해왔던 존재라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치유해가며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 그런데 그 가이아가 지금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서 이제는 우리가 먼저 가이아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더이상은 품을 수 없을정도로 많아진 인구수와 그 인구들이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자신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일들이 가이아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파괴능력과 문명건설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에너지를 오용하고 인구 과잉 상태로 만든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속에서의 모든 움직임이 이산화탄소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올시다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가이아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매스컴이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어왔던 지구온난화라든가 환경문제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이아를 살아있는 존재로써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은 놀라웠다.  삶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자연'이라고 불리워지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시골'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음이다. 사실 나는 이 책속에 나와있는 열역학이니 양의 되먹임이니 음의 되먹임이니 하는 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어려운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내게 들려왔던 것들은 이랬다. 가이아가 복수를 하기 이전에 기후변화에 맞설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재생에너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는 그런 것들.. 그리고 더이상은 '자연'을 파괴하여 지구에게 이중으로 타격을 가해서는 안되는거라는... 그많은 재생에너지들을 논하면서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에너지를 선택했을 때의 장점에 대해 끝까지 열변을 토한다. 유기농이니 풍력에너지니 하는 말들은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시설들을 마련하기 위해 파괴되어지는 자연을 염려하면서 말이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상황을 예로 들어주면서도 핵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조속히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저 많은 인구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유기농식품이 아니라면 유기농식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농경지를 만드는 것도 중단해야하며 지구 온난화를 막아주는 숲을 파괴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휴대폰과 컴퓨터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저자의 변론에는 그렇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움직여야만 했다면 그것으로 인한 오염도가 훨씬 더 심해졌을거라는 말에 살풋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 자체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기 조절 능력에 의해 한번쯤은 뒤집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게 될 시기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말에도 나는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래도 인간이라는 종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그만큼 강하다는 말일까? 아니 어쩌면 그토록이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억지일까?   언젠가 너무도 놀라운 마음으로 보았던《마이크로 코스모스》라는 다큐영화에서처럼 인간도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한갖 미물임에 불과할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전에 보았던 《투모로우》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기후학자인 어느 박사가 지구의 기온 하락에 관한 연구발표를 하게 되고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결국 해류의 흐름이 변하게 된다는.. 지구 전체가 서서히 빙하로 뒤덮이는 재앙을 보여주었던 영화.. 도시 전체를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만들어가며 밀려들어오던 바닷물의 공포를 보면서 어쩌면 정말 저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섬뜩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었다. 이 책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지금 우리 모두가 가이아의  늙고 병듬을 믿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살길이 보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속에서처럼 이 책의 저자도 해수면에 맞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재앙이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예견한다. 언제였는지 일본이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도 난다. 눈 앞에 시련이 닥쳐와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라는 저자의 말이 왠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그런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전문적인 해설을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1 장에서 늙고 병든 지구의 현재상태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이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동안 가이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이아의 생활사라는 구분으로 이해를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의미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저자가 예로 들어주었던 21세기에 관한 예측이라거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원에 관한 이야기들은 환경론이나 지구라는 의미에 대해 언어적인 의미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에게조차 왠지 조바심을 느끼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동식물과 많은 미생물들이 더이상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이아는 뜨거워질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철저한 파국이 찾아올 것이라는 작자의 의도를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저 끔찍한 책의 제목처럼 가이아의 복수가 시작되어진건 아닐까?  더이상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세계속의 이슈들이 모두 기후조건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니는 커다란 홍수의 물결을 봐도 그렇고, 폭설에 의한 재앙소식도 우리를 두렵게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진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처참한 모습들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볼 때 전해져오던 그 전율들은 그저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속에서 은근히 비추어내던 지구의 예견된 앞날이 바로 저런 모습은 아닐런지... 무언가로 한대 맞은듯한 기분이다. /아이비생각

가이아도 그렇다. 자기 삶의 처음 오랜 세월 동안 세균만 있었고, 중년 막바지에야 최초의 다양한 동물상과 후생동물이 출현했다. 80년대에 들어서야 행성에 최초의 지적동물이 등장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가이아가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주에서 행성 전체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이아의 노년을 흡족하게 한 것이 분명하다. 불행히도 우리는 정신분열증 경향을 보이는 종이다. 그렇기에 파괴적인 성향이 점점 늘어나는 십대 무리와 한 집을 쓰는 할머니처럼 가이아는 점점 화가 나고 있으며, 그들의 행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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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모월 모일.. 나는 죽었다> ... 어린 영혼의 독백으로 시작되어지는 이 애니는 가슴절임을 안고 있다. 전쟁속에서 공습을 피해 반공호로 숨어 들었던 엄마는 피격을 당해 화상으로 죽고 어린 남매는 살아 남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도 장교였던 것 같다. 부족함없이 자라던 이들 남매에게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정말이지 참담하다. 그 극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들은 어느 영화,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느낌이 비슷하게 다가온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으나 아직까지도 깊은 감동의 선율을 떨쳐내지 못하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아버지 로베르토 베니니가 아들 죠슈아에게 보여주었던 놀이로써의 전쟁이미지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 온다. 잡혀가는 아버지를 숨어서 지켜보던 아들 죠슈아.. 어린 죠슈아가 행여 밖으로 나올까봐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그 순간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남매가 겪어내야 할 전쟁의 참상보다는 이웃들의 정에 관해 포커스가 맞춰진 듯한 이 영화는 내내 안타까움에 가슴 조이게 한다. 엄마를 화장시키고 그 뼈를 담은 항아리를 숨겨둔 채 숙모의 집으로 들어가던 세이타의 모습은 서글프다. 어린 남매를 떠맡고 이미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숙모.. 단순히 양식을 얻기 위해서 그 아이들에게 남은 유품을 팔아야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숙모와 어린 남매의 관계는 거짓됨과 과장됨없이 처리된 듯하여 보기에 안스럽기까지 하다. 엄마의 기모노에 베인 엄마의 냄새를 잃어버리기 싫어 굳이 엄마의 기모노만큼은 가져가지 말라고 울며 떼를 쓰던 세츠코.. 아직 어린 세츠코의 가슴속에서 얼만큼의 시간동안 그 엄마는 살아줄까? 아마도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날마다 얼굴을 마주쳐야 할 이웃이라는 이유보다도, 같은 피붙이라는 이유보다도 더 간절했던 것은 내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을게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이 온다한들 확실하게 드러나는 그 진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남매의 힘겨운 여정보다는 살아야 한다는 저마다의 의식이 너무도 서글펐다. 어린 동생 세츠코를 위하여 공습 경보가 울리는 마을을 향해 달려가던 세이타와 그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마을을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되던 장면속에는 삶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숨어 있었다. 그 선택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동생의 배고픔뿐이었을까? 세이타는 자신의 배고픔조차도 힘겨웠을 것이다. 남의 밭에 들어가 훔치다가 주인에게 잡혀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일본 순사에게로 끌려가는 세이타의 뒤를 따르는 어린 동생 세츠코.. 이 영화를 만든 작가는 아마도 그런 마음을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훔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이 아이에게 행한 폭력은 어찌할 것이냐고 되묻던 일본 순사의 말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그 비장함이라니... 굶주림으로 죽은 동생 세츠코를 불에 태우고 그 뼈를 사탕통에 담아 간직했던 세이타도 고베시의 한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저 많은 죽음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오래전 친척과 이웃의 질시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굴로 피신해왔을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해 병속에 담았던 반딧불.. 아침이 되어 그 반딧불들의 묘를 동굴앞에 만들어 주었던 세츠코.. 돌아갔을까? 세츠코도 세이타도 그 반딧불이 되어 자신이 가야할  길고 되돌아 간 것일까?

이건 뭐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외치고 있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내가 뱉어낸 말이다. 그랬구나..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속마음은 따로 있었구나 싶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도 피해잡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왜지? 영화를 같이 보았던 내 엄마가 한말씀 하신다. 우리는 더했다, 이놈덜아.. 나는 엄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쟁의 참상을 겪지 못한 세대였기에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면 억지스러울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똑같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도 어디나 똑같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너무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이 영화를 통해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떠들어대는 그 속마음이야 알아챘던 말건, 어찌되었든 우리는 주변의 무관심속에서 사라져가는 그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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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기획했다는 것 하나.. 물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가 기획에 참여했다면 남겨지는 여운이 많을거라는 기대감때문이었다. 사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은 많다. 하지만 어떤 작품을 선택할 때의 기준점은 나만의 몫일테니까 망설임없이 선택했고 또한 평들이 참 좋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접근했던 작품이라는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랬던 까닭인지는 몰라도 애니메이션속에서 안개처럼 다가오는 환상적인 묘미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너무 사실적인 드라마였다는 말도 될테지만 말이다. 인간들의 택지개발로 인하여 없어져가는 자연의 공간들.. 그 공간들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너구리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무지막지한 개발을 막아낼 수 있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들의 숲에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TV였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재미있는 발상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매스컴 혹은 정보의 포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그 순간을 즐길 줄 알았던 너구리들이 트랙터를 앞세운 채 자신들의 영역을 갉아먹는 인간들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너구리중에서도 가장 경험이 많을 것 같은 할머니와 스님을 선두로 그들은 회의끝에 정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변신술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변신술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이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변신술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변신술의 과정에서나 너구리들의 습성을 보여주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아주 지극히 일본다운 맛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간혹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캐릭터들이 보여 웃음을 짓게도 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각인되어진 일본적이라는 느낌은 바로 현실적이라는 거였다. 그들은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해도 결코 자신들이 발ㄹ을 붙이고 있는 이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너구리가 너구리만의 생각보다는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점이다. 그들만의 전쟁이 시작되어졌다.

누가, 왜 저들을 그토록까지 화나게 했는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평화롭게 살아간 저들에게 왜 그토록이나 힘겨운 전쟁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점은 이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일이다. 삶의 터전이 좁아지고 먹을 것이 없어진 너구리들이 택할 수 있었던 차선책은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인간들의 몫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실속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동물이 맘놓고 지나갈 수 없게 도로를 만들어놓고 동물길을 따로이 만들어 주었다고 큰소리친들, 동물이 살아가던 땅을 파헤쳐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놓은 채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작은 공원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들 그런 것들이 저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은 너구리들이 늘어났고, 굶주림에 쫓겨 인간이 버리는 음식쓰레기를 먹기 시작한 그들에게 진정 어떤 것이 행복한 길인가는 그들보다도 우리가 먼저 아는 정답인 것이다.

누가 저들에게 저 평화로운 숲을 되돌려주어 저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그들은 변신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세상속에 묻혀 살아가게 되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아픔이 남겨질 것이다. 그들은 묻고 있었다.  둔갑술에 능한 여우나 너구리들은 변신술로 살아남았지만 하얀 토기와 족제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사라진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아마도 그 해답은 인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주 심각한 상황을 해학적으로 그리려다보니 다소 무리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는 현실적인 우리의 일상과 겹쳐져 보고 싶지 않아도 확실하게 보인다.  애니메이션이지만 볼거리가 많았다. 단편적이었지만 일본의 한 면을 다양한 터치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까지도 돈으로 보인다는 인간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순간에도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동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아이비생각

<이미지는 영화포스터에서 빌려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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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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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계절은 사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저마다의 독특한 색으로 우리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는 또하나의 계절이 있다. 천둥의 계절, 신의 계절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 찾아오는 짧은 계절을 신계神季, 혹은 뇌계雷季라 불러 봄과 겨울과는 확연하게 구분지었다는 온穩의 사람들... 이름 그대로 천둥계절인 그 때가 오면 온의 세상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그 짧은 계절속에서는 그동안 어긋났던 일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둥계절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관계없이 그들은 그 천둥계절에 모든 것들이 정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천둥계절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어져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하계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신神일까? 아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 단지 살아가는 모습이 약간 다를 뿐...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 《야시》가 출간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했다. 그 흔한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호러물 혹은 환상소설이라 불리워졌던 책들이 나에게 안겨 준 느낌이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환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었고,가끔씩 이런 설정은 너무 찜찜하다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되어지는 대목들이 내게는 마치도 기어가는 벌레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 《천둥계절》은 판타지물임에도 불구하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책속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고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참.. 맑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읽게 된 책이다. 온의 세상에서 살게 된 하계의 소년 겐야를 따라가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지지만 어쩌면 그 소년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되어져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나와 그 현실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가상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내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는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나는 각 나라의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북유럽신화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이 사는 하계와 신들이 사는 천상, 그 사이 중간세계.. 소설속의 온은 어쩌면 바로 그 중간쯤인 세상일 것이다. 중간중간에 느껴졌던 일본의 무속신앙에 대한 것들은 차라리 정겹게 다가왔다. 어느 나라든 그나라만의 무속신앙은 존재한다.  특히나 아주 작은 것들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의미를 갖게해주는 일본의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볼  때마다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 무속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런 것들이 내게는 가끔씩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穩은 어쩌면 우리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의식은 바로 영혼일게다. 정신이 추구하는 바는 끝도 없이 넓고 깊지만 육신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아마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매달려 사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내가 찾아 헤매이던 그 꿈과 이상이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 아무런 근심과 고통없는 평온을 꿈꾸는 그곳.. 바로 그곳이 이 소설속의 온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면서 힘들지 않을때가 있을까? 오로지 평온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질까?  삶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기에 신의 존재도 필요할지 모른다. 힘겨울 때, 넘어져서 울고 싶을 때 생각지도 않게 신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종교관을 떠나서이다. 정말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는 새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원할때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원만할 때 신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나약하고 그만큼 미미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소년 겐야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불행의 씨앗.. 그것은 진정 불행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저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동기가 되어주는 것은 많다. 소년 겐야에게로 바람의 새가 날아들었던 것도 자신이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절실한 마음으로 원했던 까닭이리라.

소설속의 바람와이와이는 정령이다. 어떤 책에선가 본 것 같다. 아주 맑고 흔들림없는 영혼의 소유자에게 정령이 찾아온다고.. 소년 겐야에게 찾아와 자리잡은 바람의 새가 말했었다. 이 아이의 샘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순수純粹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화적인 의미로 볼 때 신과 인간의 세상을 넘나들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정령이 새의 모습으로 소년에게 찾아와 잃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길에 동행해주지만, 바람의 새 역시도 그 소년을 통하여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절대로 자신의 힘을 거저 주지 않는 모양이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난 후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 온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어쩌면 그 천둥계절이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순간들이 머물렀던 시공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럿의 화자들은 서로 씨줄 날줄처럼 엮여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면 서로의 기억속을 더듬어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사실 뒷부분에서 약간은 뒤엉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탓에 나는 화자들의 기억속을 여러번 들랑거려야만 했었다)  소년 겐야가 살아내야 했을 그 천둥계절속의 시간들은 내게 참으로 신선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소설속에서 무시무시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도바 무네키의 전설.. 그 도바 무네키가 안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힘겨운 장애물일수도 있고,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채 짊어지고 가야할 등짐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바 무네키는 자신이 점찍은 사람에게는 기어코 찾아가 절망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바람와이와이가 내게 있어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길을 잃어 지쳐 있을 때 절망을 알게 해주는 귀신조 도바 무네키가 나에게도  찾아오겠지.. 그런 때 나도 바람와이와이를 외쳐 불러보고 싶다. 나에게 내려와 줘...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그런 바람의 새가 내게도 날아와 줄까?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그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는가?  묻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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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서커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진주귀고리 소녀》에 반해서 《버진 블루》를 읽었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자의 글재주에 푹 빠져들었었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다음 작품이 기대되었던 것은 전작들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황홀한 것들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우연하게 《진주귀고리 소녀》를 영화로 보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했던지... 항상 그렇다. 글이 주는 그 묘한 매력을 영화속에서 온전하게 찾는다는 게 무리라는 걸... 이 책이 나왔다는 소개글을 보았으면서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작가의 작품이 주는 유혹감을 좀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책을 손에 쥐고 내가 느꼈던 설레임은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 설레임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전작들에 비해 긴장감도 덜하고 녹아있는 감동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지식과 감동을 함께 전해 줄 수 있는 작가라는 말에 적극 동의를 표하던 나의 기대에 못미치는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1792년 3월 런던으로 이사오는 토머스 켈러웨이 가족의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그의 아내 앤 켈러웨이와 딸 메이지, 그리고 아들 젬... 이렇게 네명의 가족이 엮어 갈 런던이야기.  그 이야기속에는 내가 읽어보았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주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 역사적인 배경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면 그것 역시 그다지 밝게 혹은 분명하게 조명처리가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차라리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인 풍자를 읽어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 것 같다.  내가 읽어보았던 작품들에 비해 촘촘하게 느껴지는 그런 긴장감(손에서 책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그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책장을 덮고 다시한번 제목에 눈을 돌려 보았다. 시인이라면 윌리엄 블레이크를 말할 것이고 서커스라면 필립 애스틀리를 말하는 걸거라는 생각을 한다. 책속에서 느껴지는 두사람의 정신세계는 어딘가 모르게 같으면서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글속에서도 말했듯이 무형의 그 어떤 것에 꿈과 이상과 환상을 불어넣어 그 시대의 군중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써 그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 설정처럼 보여졌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활속에서 두개의 쳇바퀴처럼 달라붙어 굴러가는 아이들 젬과 매기..  세상에 대한, 이성에 대한, 그리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한컷 부풀대로 부푼 나이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살아내고 있을 현실속의 시간들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인과 그 아이들이 나누는 선문답같은 대화속에서 얼핏 얼핏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경험에 의해 버려지는 순수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경험으로 인하여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만의 순수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올라왔던 젬과 메이지가 도시속에 동화되어가며 잃어버리고 있던 것들이 오히려 도시에서만 자란 매기에게는 어떤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되어지는 것 같다.

" 강 이편과 저편 사이, 강 한복판에는 뭐가 있냐고 물으셨죠? 그 답은 세상이에요. 두 극단 사이에 놓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 바로 그거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있게 하는 거란다. 우리 인간은 어떤 한가지 측면만이 아니라 그 반대 측면까지 갖고 있는 거야. 그 두가지 상극이 우리의 내면에서 섞이고 부딪치고 불꽃을 일으키지.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있는거야. 평화만 있는 게 아니라 갈등도 있고. 순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도 있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삶의 교훈이란다. 그래야만 꽃한송이 속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을 테니까."(247쪽)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어쩌면 처해진 현실을 버리고 무시할 수 없기에 꿈을 꾸고 그것에 대한 환상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젬과 매기처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느껴가면서 그렇게 이 한세상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며 옮긴이의 말속에서 찾아낸 슈발리에의 말.. " 젬은 경험을 얻었고, 메이지는 순수를 잃었으며,매기는 순수를 되찾았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했다는 이 짧은 말속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삶을 조명했다던 말은 끝내 부정하고 말았다. 단지 이쪽(어른)도 아니고 저쪽(아이)도 아닌 채 육체와 정신의 모순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과 고민을 해야만 했을 청소년기의 이야기였다고만 기억되어질 것 같다. 시인의 말처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할 젬과 매기, 그리고 메이지의 미래가 밝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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