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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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은 호기심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즐거운 사라>로 마광수 열풍이 불어댔을 때도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작가로써 표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는가 싶어 아주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 열풍은 식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종의 축복이라면 축복일테지만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장의 소개글에서  '제대로 읽어보고 평을 해달라'는 말처럼 나는 그의 작품을 한번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긴 장편의 소설이 아닌 그가 틈틈이 생각나는대로 옮겨 적었을 단편 모음이라는 말에 아마도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으리라. 꾸며진 글보다는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자신만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어리숙한 정의를 내려보면서 말이다.

<사라>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라라>를 만나본 후의 소감은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라>를 만나보고 싶다! 는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라>속에 <사라>가 어느정도는 살아 있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사라>의 그 무엇이 왜 그토록 세상을 달구었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라라>속의 <사라>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들어내지 말고 함부로 보여주지도 말라고 했던 그런 것들에 대해, 혹은 내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음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굳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중적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상황이었을거라고 지레 짐작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표를 찍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같은 세상속에서 性을 이야기한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리고 그 性을 표현함에 있어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문제가 된 거라면, 정말 단순히 그게 문제였다면 세상은 너무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그가 정말 性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살아왔든 그냥 상상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했든 간에 그것도 아니면 그가 꿈꾸는 性생활이 그랬든간에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거다. 이 책으로 인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굳이 이 책이 아니라해도 청소년들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책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말이다. 세상이 바뀌면 거기에 맞게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시기상조였을 거라는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말은 도대체 이건 뭐야? 했었다.  왜 이렇게 낯뜨거운 표현을 해야만 하는 거지? 하다가도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법이 조금 역겹기도 했었던 건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그 느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뭐랄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앞에서 일종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라라>의 발랄함이 읽혀지기보다는 <사라>를 잃었던 마광수라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사라>로 인해 그 자신에게 생겨났던 일들에 대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변호해주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지기도 했다. 책속의 글 중에서 '<슬픈 사라>를 쓴 죄' 나 '심각해씨의 비극' 같은 글을 통해 그리고 다른 몇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아닐까? 하다가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는 그런 안타까움 말이다. 그랬기에 <사라>를 다시 <라라>로 환생시킨 것일게다. 감시와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속에서 아직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이 느껴진다면 억지일까?  사실 말이지 지금의 젊은이들은 표현하는 데 있어서 참 대담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도 안다. 때로는 그 표현함이 너무 쉽고 가벼운 것만 같아 안스러울 때도 있을만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세대이기도 하니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한들 굳이 감시와 검열이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책 제목을 자세히 바라보면  '발랄한' 의 'ㄹ'이 뒤집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마음 한 켠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나는 책속에서 만날 수 있던 <라라>의 모습들을 여기에 다시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고 표현일테니 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가 말하는 유미주의적이라거나 탐미주의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조차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마치도 한편의 포르노라는 정의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무색하리만치. 그래서 그럴까?  나 역시 작가에게 반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왠지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며 살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굳이 직설적이여야만 제대로 된 '性的'표현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표현함에 있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살짝 감춰둠으로해서 더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도 많다. 어쩌면 너무나 가식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칼을 대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체면과 겉치레의 틀에 갇혀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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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클리닉 - 비뚤어진 조선사 상식 바로 세우기
김종성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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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던 이야기들 중에서 정말 그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그 시대로 찾아가 한번쯤 확인해 보고 싶은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장희빈처럼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어지는 여인도 없었을 것이다.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하니 강제로 입을 벌려 들어 부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항간에는 그 앙탈이 너무 심하고 어이없어 화가 난 숙종이 문짝을 뜯어내 장희빈을  깔려 죽게 했다는 말도 있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간 어린 단종에 얽힌 수많은 일화 역시 그 때마다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흐름과 맥락이 TV드라마의 사극으로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접했던 이야기 위주로 알려 주고자 하는 욕심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왠지 좀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얼마전에 화제가 되었던 <이산>이나 내시를 다루었다고 하는 <왕과 나>의 예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무심코 보았던 드라마의 허와 실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니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내시 김처선의 실제적인 성격은 이랬었다고 밝혀지는 부분이나 이산에게 칼을 들었던 화왕옹주와 정후겸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홍길동이 소설속의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적으로도 홍길동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는 새삼 놀랍기도 했고, 이산의 여인으로 나왔던 의빈 성씨에 관한 사실도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어느정도는 역사적인 사실을 모티브로 하여 그런 드라마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말이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왕조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우리의 백성들이 일본군을 내심 환영했다는 말은 정말 놀라웠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쉽게 침입을 했지만 짐승같이 추악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민심이 험악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하고, 전리품으로 멀쩡히 살아있는 조선사람들의 코를 베어갔다던 왜놈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서울가면 코 베간다는 말을 들어왔던 게 공연스러운 말은 아니었나보다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의 역사속을 여행하다보면 분통 터지는 일도 참 많다. 충분히 우리나라가 될 수도 있었던 대마도를 놓쳐버린 부분도 그렇고, 한 나라의 왕으로써 제가 지켜내야 할 백성과 나라를 고스란히 명에게 바칠 생각을 하며 저 하나의 안전만을 도모했던 못난 왕 선조의 이야기도 그렇고, 남의 힘을 빌어 제 집안을 다스리려 했던 고종의 처지 또한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를 역사의 허와 실을 밝혀내 제대로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책속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살주계'가 사실상으로도 존재했었다는 것,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많았던 비상시에 최하층인 노비가 구휼미로 2천석을 내놓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면천하기도 했었다는 것,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 <홍길동전>인줄로만 알았는데 채수라는 사람이 지은 <설공찬전>이 홍길동보다 앞섰다는 것 (하지만 이 소설은 최초의 금서이기도 했다는 것), 역사적으로 무능하게 표현되어지던 고종의 여우같은 속내를 조목조록 밝혀낸 부분들처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부분들도 참 많았다. 

그런 중에도 역사 연도 계산에 오류가 숨어 있다는 부분은 나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음력보다는 양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역사적인 연도가 사실은 잘못되어졌다는 말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갑신정변이 발생한 연도가 1884년 12월 4일과 1884년 10월 17일 두가지로 교과서에 기술되어져 있는데, 정확한 발생 연월일이 갑신년 10월 17일이고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884년 12월 4일이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음력과 양력의 계산착오라는 건데 그런 오류가 생긴 이유가 역사 기록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데 반해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은 양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란다. 작가의 말처럼 개인도 아닌 사회가 그런 것조차 정확성을 기하지 못한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오류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는데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연대나 연호처럼 중요한 부분을 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극을 보면서 '저런 사건이 정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보는 사람이 얼만큼이나 될까?  TV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어쩌다 한번씩 보게 되는 드라마나 사극은  보면서도 그저 그냥 그  흐름만 눈여겨 볼 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거나 주변에서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野話 정도는 많다. 역사는 남아 있는자들에 의해 변한다고 했던가? 일단은 이기고 살아남은 자에 의해 각색되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 까닭에 양반이나 고위층의 입을 빌려 듣게 되는 이야기보다는 아주 일반적이고 소시민적인 野話나 說話쪽에 더 귀가 솔깃해지곤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던 것이 어쩌면 그런 시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 어리석음을 어이할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의 한 단면 또한 뒤에 남아 기록하는 자에 의해 많이 훼손되어졌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끝까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나의 우매함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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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병과 최루가스가 길거리위에서 엉겨붙어 싸우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생이라면 그런 시위 한번쯤은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념이 춤을 추고 그 너울거리던 춤사위에 숨이 막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던 사람들도 있었다.  행동을 하는 사람과 그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렇게 훌쩍 지나와버린 그 시간들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행동하는 사람들의 질서였다고나 할까?  아무리 이념만을 외쳐대고 그 이념속에 묻혀 사는 그들이었다고는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들만의 질서를 기억한다. 한쪽으로는 화염병을 던지며 한쪽으로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 화염병의 피해속에서 피신시키고자 했었던 그들의 질서...  눈 밑에 치약을 바르면 덜 따가울 거라며 교복입은 채 출입금지였던 다방안으로 피신했던 여학생에게 다방주인이 내밀던 그 치약을 기억한다.

오현우...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격인 인물설정으로 보여진다. 자신 스스로가 판사앞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요' 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그의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솟아올랐던 그것은 '잠시만이라도 나만 바라봐주면 안되겠느냐' 던 그녀의 눈길조차도 외면해야 했다.  수배자.. 그리고 피신.. 외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정되어지지 않았던 동거는 또다른 이름의 삶을 잉태한다. 함께 있음으로 평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사치였을까?  그의 살갗에 내려와 앉던 그녀의 사랑이 어쩌면 그에게는 바늘처럼 따가운 고통으로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고통이 다시금  지나왔던 그 길을 바라보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수감되고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용서할 수 없었던 남자는 결국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빗속에서의 이별.. 어쩌면 그들이 흘려야 했던 눈물이 비로 승화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그런데 왜가니?  하던 여자의 독백이 빗속에 묻혀버리길 바랬는데 그 목소리가, 그 눈길이 빗속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겨버린다.  수감.. 그리고 17년.. 모진 고문속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간간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그림속 아이가 그에게는 무슨 말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세월은 참 무심하다. 이념도 행동도 그 세월속에서 무디어지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런게 아니라 그 세월이 무디어지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세월일테니 말이다.

한윤희...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을 껴안을 수 밖에 없다. 어느 날 찾아 든 한 남자에게 그녀는 말했었다. 이불이 하나밖에 없지만 머물러도 좋다고. 그리고 그들은 한이불속에서 머문다. 그 시간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찾아왔다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떠남'을 전제로 해야했던 그 남자에게는 그녀의 행복조차 펌프물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리고 말지.. 된장국을 끓이고 두개의 밥그릇에 밥을 담고 상추쌈을 싸서 함께 먹고 싶다는 그 소박함조차도 현실은 인정해주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오래가지 못할 그녀의 삶을 이유로 그 남자를 떠나보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방황끝에 다시 외진곳의 추억속으로 되돌아와 그림속에 자신의 시간을 덧칠해 버렸을 때 그녀의 삶은 시한부였다. 그와 그녀를 닮은 아이를 키워주던 그녀의 엄마는 아마도 시간의 그림자였을 게다. 그 시간이 커가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엄마의 생명과 아버지의 고통을 받아 먹으며 달려가고 있다.  그녀의 죽음.. 그 남자의 출소.. 다시 찾은 그곳.. 그리고 회상..

회상... 잊을 수 없었던 그녀의 여운을 찾아 되돌아 온 그들만의 정원. 너무도 오래된 정원속에서 그는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그녀의 시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들이 아픔이었지만 결국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다는 것을.  오직 당신밖에 사랑하지 못했노라던 그 목소리가 환영처럼 만들어낸 그녀의 영혼.. 그녀가 그의 어머니가 있는 집을 찾았을 때 가져왔던 오래된 그의 사진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삶을 놓아버려야 하는 민머리 그녀곁에 나란히 서서. 그렇게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고 다시 둘이 되어야 했던 그들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다시 둘이 될 수는 없었노라고.. 사랑은 그렇게 그녀의 가슴속에서 우물같은 깊이로 머물렀었나 보다.  그 남자, 오현우는 그녀가 남긴 두레박으로 회상속의 사랑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버린 그 회한의 시간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은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훌쩍 커버려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그 때의 나이로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알아버렸다.  그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것은 사랑이었노라고. 그리고 이제는 그 두레박의 끈을 놓칠 수 없다고.

오래된 정원... 이 영화는 사실 너무 깊지 않았나 싶다. 보여주는 장면속에 깔아놓은 복선의 흐름이 너무 가파르다. 회상과 현실속으로 건너가는 돌다리를 건널 때 주의깊게 살펴봐야만 한다. 건너야 할 돌의 넓이와 돌과 돌사이의 간격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물 속에 빠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이념과 타협하지 못한 자가 겪어내야 했던 삶도, 이념과 타협하며 살아냈던 자의 삶도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없다. 어느것도 옳다 말할 수 없으며 그르다 말할 수 없을테니.  영화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해주고자 하는 것조차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은 온전히 속울음일 뿐이다.  시대가 만들어낸 이념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변화는 우리가 겪어내야 할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함을 떠나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단지 여자는 아주 작은 행복 한자락만을 붙잡고 싶어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남자, 홀연히 떠나야 했을 뿐이라고...

모를 일이다. 사랑이 왜 그렇게 엇박자를 좋아했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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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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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 재미있다. 후련하다. 그리고 속시원하다. 그야말로 유쾌, 상쾌, 통쾌다. 무엇이 그토록 재미있고 후련하고 속시원한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안겨주는 책이다. 뭐, 그렇다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들이 지나쳐왔던, 그러나 어쩌면 외면하고 싶을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슬쩍 깔아주는 그 묘미가 참 좋다.  우리네 어른들이 살아냈던 그 배경을 뒤에 업고 제 할말은 다하고 사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그려냈다는 것도 또한 별미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새벽까지 잠 못들게 만들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 책이 풍겨주는 느낌은 일전에 읽었던 <완득이>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완득이와 열일곱살의 털, 송일호는 확실히 다르다. 그 주변을 천천히 보여주며 삶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완득이>와는 달리 자아찾기에 도전하는 고등학교 1학년 송일호의 모습속에는 그 세월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나도 그랬었지... 하는 공감의 부분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불러내고 있음이다.  우리 나이에  한 때 반항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채 살았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생활에 치여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탓에 '애어른'처럼 살았다할지라도 그 속까지야 어른이 될 수는 없었을테다.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와 몹시도 힘들게 했었던 그 시절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처럼 이 책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참 많았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집에 오는 길에  친구가 사준 오방떡을 길에서 먹는다는 게 부끄러워 차마 먹지 못한 채 가방에 넣어 두었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방떡은 완전히 납작떡이 되어버렸고 그 때 그일을 친구는 두고두고 울궈먹었었다. 내가 입학했던 여학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학교와 붙어 있었다.  남학생은 위아래 까만색 교복을 입었고 여학생은 까만 치마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어야 했었다. 교복자율화니 두발자율화니 하는 말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까까머리에 모자를 썼고, 단발머리 혹은 종종 땋아내린 머리를 가지런히 해야했던 그 시절.. 아침 등교길이면 학생주임과 교련선생이 어김없이 교문앞에 서서 지각단속과 함께 두발, 복장 단속을 했었다. 그리고 하교길이면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며 쑥덕거렸다.  하얗게 고속도로가 나버린 남학생의 머리는 모자를 써도 가려지지 않았고, 귀밑 1cm를 넘기면 어김없이 짝짝이 머리를 해야 했던 여학생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어쩌랴... 그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볼 밖에. 그랬어도 그 시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짧았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어른들이 우리들을 길들이려고 하듯,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길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208쪽)

우리의 주인공 송일호.. 단지 머리가 학교규정에서 약간 어긋났다고 하여 너무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옆반 친구를 대신하여 감히 선생에게 항거를 했던 그 순간부터 범생이 일호는 가슴속에서 불현듯 일어서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건 아니지.. 하는 일호의 의지를 보면서 그건 진정 반항이 아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이라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아로 몰아가는 상황이 왠지 뻔뻔스러운 우리의 삶과 일치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니가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쉬지?...  관심을 끌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도 틀에 박힌 어른들의 잣대가 싫었고, 그것에 길들여진다는 그 자체에 항의했을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규칙과 약속을 다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렇다고 그 많은 것들을 모른 척 외면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너무 기성세대적인 시선으로만 우리의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훤히 알고 있는 그것들을 내가 편하기 위해 일부러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작금의 교육현실을 바라볼 때 개탄해마지 않을 일이다.

"송일호, 너는 방망이로 때리면 어디서 튀어 오를지 모르는 두더지 오락기 같아. 자극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지"
"사람에게 빛깔이 있다.... 아마 그 빛깔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215쪽)

자유를 달라고? 그건 아니었다. 자유가 아닌 자유스러움의 특성을 요구했을 뿐이다. 머리털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인격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그런 현실말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 특성을 아주 조금만 인정해 달라는거였다. 결국 제 편이 되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송일호는 승리를 했다.  두발규제에 그토록 강경하게 굴었던 교장선생 앞에서 이발사였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옛날에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린 한 학생이 이발소에 찾아와 별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고. 그래서 그 학생의 뒷꼭지에는 별이 그려졌다고. 그리고 그 학생은 절대로 내 자식의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하지는 않을거라는 말을 했었다고.  누구나 똑같이 겪어내야 했던 그 시절의 번민과  고뇌를 이미 지나쳐간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반목과 결렬만이 있을 뿐이라는 교훈을 슬쩍 내던지던 대목이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많은 별들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시절에 가장 부러운 것이 무엇일까? 두말 할 필요없이 빨리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는거다. 이 지긋지긋한 규율의 늪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는 거다.  맘대로 머리기르고 사복입고 가고 싶은데 눈치보지 않고 가는거... 그 시절에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었다. 공부하기가 그렇게 힘드냐? 지나고 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 때가 가장 속편하고 좋았다 이눔아... 지금 늬덜이 무슨 걱정이 있다고... 그랬다. 정말 지나고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때가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 때는 모르지. 현실의 무게는 누구나에게 무겁게 느껴질테니까. 나 역시도 그 시절의 현실은 너무나 무거웠었다.

책을 읽으면서 범생이 일호가 단단해지기 위해 치뤄내는 일종의 수련과정들이 밉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그랬든, 현실도피적인 일탈이 되었든 오랜동안 집을 떠나있었던 아버지의 귀가는 일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게 해 주었다. 거기에 손자와 할아버지를 묶어주었던 믿음의 끈과 아버지와 아들을 묶었던 그 질긴 가족간의 情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만큼 강하게 다가왔다. 일호와 정진의 우정도 옹골지다. 그리고 멋지다. 믿어준다는 것, 그리고 한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말만으로도 참 좋다. 그 느낌만으로도 푸근하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장을 덮으며 아쉬웠던 한가지가 있다면 왠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아버지의 가출과 귀가에 대한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혀졌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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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09-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님, 축하드려요. :)
 
언어없는 생활
둥시 지음, 강경이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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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다리가 없는 친구가 있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다리없는 친구를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가 업고 다녔다. 그렇게 상대방의 눈이 되고 발이  되어주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책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전래동화속의 그 따뜻함은 보이지 않는다.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렸다. 과연 어느쪽이 장애인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면 억지일까?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 칡넝쿨처럼 그렇게 얽혀 살아가는 모습에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이 책을 보면서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와 <눈 뜬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온갖 사회의 부조리에 얽힌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려주었다는 생각에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 <언어없는 생활>을 읽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한다는 건 그들에게는 정말 지옥 같았을 것이다. 세상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너무 만연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누구의 탓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속에는 다섯편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따라오던 그 느낌의 여운은 너무나도 길고 깊었다.

'언어 없는 생활' -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들, 그리고 나중에 한 식구가 되는 벙어리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들리지 않는 자신의 귀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스스로 잘라내 버리던 아들의 모습과  단지 벙어리라는 이유로 다른사람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해야 했던 여자.. 그들에게도 마침내 아이가 생겨난다. 하지만 아이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조차도 귀와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마을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채 채 완성되지도 못한 개울건너의 집으로 짐을 옮겨가던 날은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왔다. 

소아마비로 인하여 한쪽 다리를 저는 한 아이의 성장과정속에서 드러나는 열망과 차별에 의한 열등감을 다룬 '느리게 성장하기' 는 성공을 향한 삐뚤어진 심리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바르게 가지 못했으니 그 성공이 제대로 자리 잡을리가 없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성공이 가슴 아팠다.
'살인자의 동굴' 은 이웃남자를 살해하고 동굴로 숨어든 살인자 아들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모정을 이야기한다. 제 몸 하나야 어찌되었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아들만큼은 살려내고 싶어하던 어머니의 마음. 저 하나만의 안위를 위하여 모두가 버린 아들을 지켜내고자 하던 모정은 정말 눈물겨웠다.

그리고 욕정에 시달리는 창녀촌을 고향으로 둔 한 남자의 이야기 '음란한 마을' 속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욕정의 사슬을 끝내 끊어내지 못한 한 남자의 절규가 담겨져 있다. 그것을 피해 달아났건만 다시 되돌아온 원점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 한 사람의 여정을 아주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술과 게으름으로 아내와 아들을 돌보지 않는 뻔뻔한 가장의 예를 들려주던 '시선을 멀리 던지다' 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주변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야말로 가난이 죄가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한...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보면서 중국의 서민층이 살아가는 모습에 참 낯설고 생소하다는 느낌을 가졌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너무 차갑고 냉정한 모습만 그려준 것 같아 '산다'는 말의 의미앞에서 잠시 서늘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들이 그렇게 느끼게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을 끄집어내어 우리의 정서에 대해 한번쯤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너무도 어려웠던 그들에게 과연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만큼이나 있었을까? 그들의 슬픔, 그들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일본소설이 난무하는 요즘 출판계의 흐름속에서 중국문학을 만났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기회가 되는대로 중국문학을 만나 볼 요량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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