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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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물어보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까, 사회 문제일까? 가난은 죄일까, 죄가 아닐까? 세상에는 정말이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눈에 환히 보여지는 것들,  조금만 어떻게 해보면 될 것 같은 그런일들이 의외로 참 많다. 여기 이 책속의 주인공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고 사회문제이기도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가난은 죄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라는 커다란 틀에 부합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을테니 말이다.

책속의 흐름은 두 줄기의 강물같다. 하나는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한때 주류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나 흑인차별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출신지인 빈민가로 돌아와서 갱단의 보스가 된 제이티이다. 그가 대학까지 나왔고 나름대로 전공했던 분야도 있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끌어가는 갱단내의 모든 상황들은 차분하다. 분노의 격정에 휘말려들것도 같은데 제이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또 하나는 빈민가 사람들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며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를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주민들이 서비스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기며 부정수익자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이는 또하나의 중간계층 베일리 부인이다. 그가 해결해주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내야 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다. 전기가 나갔다든지, 수도가 끊겼다든지, 대문이 떨어져 나갔다는지.. 그런데 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마져도 해결할수가 없는 것일까? 그들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 수디르는 그들을 향해 섣부른 동정도, 비판도 또한 미화도 하지 않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여론조사라는 게 있다. 통계라는 게 있다. 언론시상에서 대다수의 의견인양, 대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인양 떠들어대는 그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발표할 때는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주제에 대한 조사를 한다음 그 조사결과를 가지고 통계를 내거나 연구를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직접 발로 뛰어 그 주제속으로 들어가 알아내고 그것을 근거삼아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옳은 일일까? 일반적인 견해로 볼때 전자의 방법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어느한쪽만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듯 하다. 어떤 근거자료나 조사자료를 보고, 혹은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낸 자료를 모아 기획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다 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직접 연구대상을 만나고 그들의 삶속에 뛰어드는 후자를 선택했다. 잘한 일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수디르의 마음을 내가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정도는 충분히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생겨난다. 저명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그들의 사회정책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는 현저하게 동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했고 발표했던 사회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과 얼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 수디르는 자신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테두리안에 그들도 함께 머물렀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자경自警주의적 정의가 못내 안타까웠던 수디르는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점점 다른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얼마전에 읽었던《100℃》의 주인공 영호가 생각났다. 그가 처음에는 외면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점차 자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인정하였던 그 순간이. 거센 물결앞에서 저항하다가 끝내는 죽음마져도 불사했던 선배들의 그리고 동료들의 그 외침속으로 동화되어가던 영호의 모습. 거기에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정의가 존재하고 있는것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수디르 역시 많은 혼란과 마음의 갈피를 느꼈음에도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수디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좀더 접근법을 써서 말한다면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보다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세상사람들 중의 몇퍼센트만이라도 인정해주길 바랬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외면하고 있을뿐.. 사람은 누구나 내가 먼저라는 의식속에서 살아갈테니 말이다. 단 한사람이,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단지 연구과제를 풀기 위해서, 단지 학위논문의 자료로써 써먹을 요량으로 갱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필요성에 의하여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갱단 보스 제이티와 수디르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과의 접촉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던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앞에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태의 정의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겪어야 했을 혼란과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가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리라. 자신의 마음이 이편도 될 수 없고 저편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곳의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범위를 정해놓은 채 대화를 나누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의 위치와 환경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생활 자체를 충분히 즐기며 살아갈 뿐이고, 없는 사람들은 또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저마다의 잣대로만 상대를 평가하려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처럼 관심두기를 꺼려하는 일이 당연한 듯이 우리앞에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순과 아이러니가 비일비재하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들이 흘러넘친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없는 자들만이 죽어라고 자신들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어느것도 온전하게 옳다고 말 할 수 없는 세상..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어느것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서로를 향한 거짓과 위선을 제외한다면 단지 자신의 안녕과 평화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만 접촉을 허락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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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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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에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은 무엇일까? 밤이 오기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어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처음 《ZOO》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치밀하게 그려진 내면의 어둠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몇분간 내 곁에 있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었다. 나는 아마도 작가의 이름보다는 《ZOO》라는 작품을 먼저 생각하면서 《베일》의 책장을 열었을게다. 다시 그 오싹했던 밑바닥의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단지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을 뿐인데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품이다. 어쩌면 어둠은 인간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또하나의 어둠을 자궁삼아 잉태되는 모양이다. 야기와 교코의 시선을 서로 비켜가며 들려주는 첫번째 이야기 <천제요호>는 서글프게도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소년이 결국 악마에게 몸을 팔아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의 아기가 되어줘, 너의 몸을 나에게 줘, 그러면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께.. 보통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거래가 오고가는데 이 소년에게 악마가 요구한 것은 소년의 몸이었다.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하는 까닭이었을까?

장난같은 게임속에서 마법의 힘은 발휘된다. 코쿠리상.. 초혼술의 일종으로 영혼을 불러 질문하고 대답을 얻는 놀이라고 해석되어져 있다.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도 심심찮게 한다는 '분신사바'같은 종류의 게임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루함과 따분함을 이겨내지 못해 코쿠리상을 하게 되는 소년.. 누구 있어요? 라고 묻는 소년앞에 사나에라는 영혼의 대답이 보여지고 소년의 삶속에 예견이라는 형식을 빌려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한다. 친구의 죽음을 말했던 사나에의 예견대로 친구는 죽고 앞으로 사년 뒤 괴로워하며 죽을거라던 자신의 죽음예견에 소년은 그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 때 사나에가 말했지. 몸을 나에게 넘겨. 인간의 몸이야. 대신 더 튼튼한 몸을 줄게. 나이도 먹지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거래는 끝났다. 그리고 소년 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늘 그렇듯이 악마와 대적해야 하는 사람은 마음이 곱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야말로 악마와 대적하기엔 최적의 대상이다. 그러니 야기를 만나는 교코 역시 그렇다. 어둠의 분위기,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정체모를 불길함, 전쟁터를 헤쳐나온 것처럼 지저분한, 거기에 온몸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하지만 교코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 올려졌을 때 공포와 두려움, 슬픔따위의 복잡한 표정을 보여주었던 남자와 한공간에서 머물게 된 교코가 이상하리만치 그 남자 야기에게 끌렸던 것은 어쩌면 교코의 내면 깊숙이에 감춰두었던 어린시절의 어두운 면 때문이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어둠에 대하여 야기에게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꼈던 교코의 마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숨기려고만 하는 내면의 어둠을 보게 된다.

야기가 교코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따라가다보면 야기가 악마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절절하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 따스했던 가족과 멀어져야 했고, 짧았던 순간의 선택으로 인하여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어둠의 저편으로 몰아내버린 야기의 고통.. 서서히 동물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팔지않은 영혼마져도 육체에 잠식당해가는 그 과정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교코를 통해 알게되는 처절하고도 끔찍스러운 야기의 서러움을 어찌할까..

두번째 이야기 'A MASKED BALL- 그리고 화장실의‘담배' 씨 나타났다 사라지다' 에서 보여주는 어둠의 동기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낙서'다. 낙서하지 마시오. 그렇게 쓴 당신의 말이 낙서입니다. 장난처럼 시작되어지는 화장실의 낙서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지만 그 비극을 불러들이는 주인공 역시 어둠 저편의 존재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한편의 학교괴담 시리즈같다고나 할까?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을법한 사소한 비밀따위가 남들앞에 드러날 때는 또하나의 약점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결코 가벼운 이야기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이중의 얼굴, 가면을 쓴 채 살아가야 하는 삶의 테두리.. 그것이 우리에게는 알지못하는 사이에 하나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보다는 거짓이 우선인 이 사회의 아이러니일까?

악마와 거래를 해야하는 순간은 누구나에게 찾아온다. 그것도 자신의 욕심, 과한 감정상태일 때 찾아오는 것이 악마일게다. 그러니 참 어렵다. 내 자신을 다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경우가 더 많은 까닭이다. 베일 저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만들어진 내 모습에 더 익숙해져서 내 안의 참모습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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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신화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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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화속을 들여다보자면 황당한 이야기도 많지만 왠지 가슴 깊숙히 다가오는 이야기도 꽤나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많이 회자되어지는 이야기는 뭐니 뭐니해도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프시케와 에로스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북유럽 신화속에서 만났던 브룬힐데와 시구르드의 사랑이야기에 야릇한 기분을 느꼈었다. 지옥의 문을 빠져나가기 한발전에 뒤를 돌아다 본 오르페우스는 그만 에우리디케를 다시 저승으로 보내버리고 말지.. 그리고 괴로워하다가 그도 죽는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 그런 안타까움을 또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다. 일본신화속에서 보았던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이야기다. 먼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찾아갔던 이자나기에게 이자나미는 자신을 돌아다보지 말라는 부탁을 하지만 이자나기는 그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돌아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자나미의 얼굴이?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동양의 신화가 서양의 신화보다는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신화.. 정말 멋지고 매혹적이다. 학창시절에 그리스 로마신화에 빠져 있다가 성인이 되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만났을 때의 황홀감이라니.. 그리고 나서 북유럽신화쪽에 눈길을 돌렸던 것 같다. 사실 이렇게 저렇게 비교해보면 신화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세신화라는 게 그렇고 저마다 내세우는 각각의 신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을 전해준다. 하기사 자연속에서 잉태되어진 이야기이니 어디로 간들 달라질까?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여러나라의 신화들 또한 비슷하게 다가왔지만 이집트 신화나 인도 신화, 마야, 아즈텍, 잉카의 신들을 다루어주었던 중남미신화는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토록 많은 신들을 다루었으니 책의 분량이 이렇게 두꺼워질 수 밖에 없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양을 다루다보니 읽는 동안 약간의 지루함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냥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원래는 그리스의 신화였지만 로마에게 점령당하면서부터 로마쪽으로 역전되었다던 그리스 로마신화나 세계 신화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집트 신화는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라 살풋 웃음짓기도 했었다. 특히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이 이집트 신화를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웠다. 이집트 사랑의 여신 하토르가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로, 아누비스는 헤르메스로, 악의 신 세트는 티폰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신화를 그토록이나 좋아하면서도 이런 지식을 놓치고 있었다니 참으로 짧은 나의 지식을 한탄하게 한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신화의 증거물들을 보면 신화가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닌듯 싶기도 하고.. 그 많은 증거물들을 가진 나라가 이집트라고 하니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선다.

몽고가 맞을까, 몽골이 맞을까? 이 책속의 몽골신화를 읽다보니 정답을 알겠다. 몽고라는 이름은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 전쟁에 시달려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故'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원래는 '용감한'이란 뜻을 가진 부족이 몽골부족이었다고 한다. 그 몽골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칭기스칸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몽골부족이 우리와 너무나도 흡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세시풍속이나 관혼상제에 관한 풍속들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하니 이곳 또한 한번 가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이런, 아무래도 세계여행을 해야 할 듯 하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으니...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윤회를 말하고자 하는 신화가 있는가 하면 삶과 죽음은 어차피 다른 것이라는 말을 하는 신화도 있었고, 인간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환상적인 신의 세계를 그린 신화도 있었던 반면 인간과 함께 어울어지던 신들의 모습을 그린 신화도 있었다. 또한 그들의 역사가 하나의 신화로 둔갑되어져 버린 이야기도 있었으며 신화 자체가 그들의 역사로 치부되어져버린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각각의 상황에 맞게 다루어져 꾸며지고 달라졌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신화를 문화의 밑바탕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만든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신화의 기초는 자연이 아닐까 싶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깊은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북미신화속에 나오는 크리족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온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이 사라진 뒤에야, 그때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671쪽) ..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따스함과 자연의 안락함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자연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부대에서 낙오된 병사가 늑대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쫓기던 인디언들은 그에게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었다. 마지막엔 그이름을 달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인디언부족에게 섞여 들어갔던 남자주인공의 이야기가 오늘 문득 각인되듯이 떠오른다. 이름하나까지도 자연속에서 찾아낼 줄 알았던 그들의 지혜,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 어울어져 하나가 된 듯이 살아가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내 가슴속에 울림을 전해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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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도 두고두고 질리지 않을 이야기
    from 감똘나라님의 서재 2010-03-24 17:31 
    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와 비교해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와 달리 구성이 창세부터 건국까지 진행되도록 하였으며 알기 쉽게 정리했다.  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에 없는 우리 신화와 몽골신화,오세아니아 신화가 들어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신화를 잊어가는것 같아 아쉽다.하지만 이 책은 동남아시아 신화를 뺀 것이 아쉽다.하지만 중국신화나 일본신화를 더 쉽게 시간이 흐르듯 구성되었고 몽골신화의 경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 주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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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 지루하게 책과 싸웠던 시간이었다. 반복되어지는 말들이 너무나도 나를 힘겹게 했다. 과거의 성공에 얽매인 조직에겐 미래가 없다며 한국어판을 펴내게 된 이유를 설명하던 발행인의 말이 없었다면 용서되지 않을 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는 일본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과거의 진화유형에 너무 적응해 버려도 적응능력이 사라져 죽어버린다는, 새롭게 변화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기존의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는, 일본군의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진리를 이책에서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실패했던 군대조직이 기업조직으로 이름을 바꾸어 세상을 지배했다. 전후의 발전을 꾀했고 성공했지만 군사조직에서 실패했었던 이런 저런 점들이 고스란히 기업조직으로 넘어왔던 탓에 일본은 '잃어버린 십년'의 불황을 겪었다는 말이 왠지 섬뜩했다.

태평양 전쟁중에서 일어났던 여섯가지의 사례를 들어주고 있었다.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암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 그 하나씩의 사건과 작전마다 어느 부분의 실패였는지를 짚어주고 있음이다. 미드웨이 작전과 과달카날 작전을 통해 해전과 지상전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노몬한 사건은 실패의 서곡에 불과했다는..  지루하게 넘어가는 책장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할 만한 이런류의 책이 얼마나 있는가?  한사코 기존의 것을 버리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야했던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우매했던가를! 일본과 우리의 상황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렇게나마 우리를 돌아보게 해 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처음엔 실패의 사례를 연구했고 다음으로는  왜 실패했는가 실패의 본질을 파헤쳤으며 그 다음으로는 그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전시였음에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서로의 적이 달랐다. 육군은 소련이었지만 해군은 미국이었으니 서로의 의견이나 전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소통의 부재였음이다. 지극히 '일본인다운 집단주의' 라고는 했지만 인맥편중의 조직구도가 실패였다. 일본과 미국의 시스템이 똑같이 관료적이었지만 일본은 학력주의였고 미국은 능력주의였다. 인사권마져도 미국은 능력있는 자가 행세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어떤가? 아니 일본을 말하기전에 우리를 바라보아도 결론은 똑같다. 일본을 지적하기 이전에 상하관계만이 허락되어지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정보나 문제제기는 먹혀들지 않았고, 아이디어나 어떤 과정을 촉진하는 것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위로부터의 말에 거부를 할 것 같으면 바로 잘라내는 그런 식이었던 거다. 책속의 말처럼 '말을 빼앗긴 것이다'.. 말이 말을 억누르고 오직 말만이 살아 날뛰는 그런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지겹게 봐오지 않았던가!

일본이 과정이나 동기를 중시한 평가를 했던 반면 미군은 결과를 중시했다. 결과를 중시했다는 말에는 책임을 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군이 사실을 직시하고 정보와 전략에 의해 조직을 움직였다면 일본은 사실보다는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황을 전제로 움직였다. 정보를 가볍게 여겼고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아지려는 자세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패러다임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어떤 강력하고 일관된 '생각'에만 집중을 한 채 다른 것은 인정조차하지 않았으며 그 '생각'에 짜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역사속에서 많이 보아왔던 상황이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특정 패러다임의 틀로만 일원적으로 해석해 그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모조리 묵살해 버리는(-403쪽) ..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교적인 관념이 여기에 해당되는 하나의 예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군다나 상하 관계로 움직여지던 조직이었으니 위의 말만 있고 아래의 말은 없었다는 서러운 현실이 존재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읽었을 때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는 피신을 권하며 전쟁속으로 떠났던 장교의 입장이 이제사 이해가 되었다고 하면 억지일까?

실패한 사례를 보여주며 왜 실패했는가 본질을 따져묻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본을 위해서.. 책을 읽으면서 장로체제라는 말이 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상하관계를 중히 여기다보니 횡적으로 인맥형성이 되지 않았다. 또 거기에 인정주의까지 겹쳐 그놈이 그놈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변화를 꽤한다거나 상황에 맞춰 진화를 해야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위의 사람이 사라져야만 그 아래사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상황은 정말 모순이 아닐수가 없다. 잘못이 있어도 추궁해봐야 허점만 드러날 뿐이니 상명하복의 형태에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미국의 최고 경영진과 비교해볼 때 일본은 나이가 너무 많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왠일인지 내게는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가?"
"반드시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꼭 이긴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281쪽)
정보도, 첩보도, 수색도, 학습도 경시하며 오로지 정신력에만 의존했다던 일본군 조직속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건 지금도 의문이다. '승리할 확률이 우리쪽이 많을지라도..' 같은 따위의 말이 나왔다는 건 정신력 자체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전쟁과 같은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미군과 같이 성공할 것인가? 일본군처럼 실패할 것인가? 라는 말을 책표지에서 볼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것인가? 일본이 되었든 다른 나라가 되었든 성공할 수 있다면 배울 건 배워야 한다. 과거에 얽매인 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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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원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김진주 옮김 / 퍼플레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낡은 공책 혹은 일기장을 뜻한다는 <노트북>.. 그 영화를 보면 참 느리다. 너무나 일상적일수도 있겠고 그다지 이렇다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특별하게 그리고 커다란 느낌을 전해주었던 영화였었다. 노년의 신사가 같은 양로원에 있는 한 여인(할머니)에게 낡은 공책속에 담겨진 오래된 사랑이야기를 정기적으로 읽어주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잠시 뿐..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다는 것을 그 여인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 노년의 신사이야기가 실화였다는 것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렇게 소설같은 사랑이야기가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얼마전에 '하이디'라는 소녀가 실제적인 인물이었고 목동과의 사랑을 가슴속에 깊이 묻은 채 살았다는 기사를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단지 <노트북>을 쓴 작가라는 말 한마디에 선택했던 작품 <럭키 원>에는 <노트북>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잔잔한 사랑에 대한 것을 되찾을 수 있어 좋았다.

부적이라는 게 있다. 사랑의 부적이라면 그 사랑에 좋은 일만 있어 달라는 마음속의 주문이 들어 있을테고 일상적인 부적이라면 내 삶속에 나쁜 일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고 있을 것이다. 미신이라고 해도 어딘가에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움직이지 않게 붙잡아놓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전쟁중에 모래밭속에서 주웠던 사진 한장이 그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아니 그에게가 아니라 그의 주변이 그것을 그의 부적처럼 여기며 전쟁중의 힘겨움을 버텨냈다. 함께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들었던 유일한 친구 빅터에게서 운명적인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도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정말 우연히 찾은 한 장의 사진은 그에게 부적이었을까? 그 사진속의 한 여인은 그에게 정말 운명적인 사랑이었을까? 타고 있던 배를 보트가 달려와 두동강 내버리고 같은 배에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 살아남게 된 로건 타이볼트는 결국 친구 빅터의 죽음과 함께 그 운명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머나먼 여정.. 어딘가에서 분명히 자신과 만날 수 밖에 없을거라 믿어지는 한 여인을 향해서..

모든 죽음의 상황속에서 그에게 행운처럼 삶을 선사했던 한장의 사진과 그 사진속의 여인은 과연 그와 만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작가는 처음부터 이미 다 보여주면서 시작할 낌새다. 로건 타이볼트의 과거와 현재, 그녀가 찾아가고 있는 여인 엘리자베스의 현재와 과거를 겹치기로 보여주면서 느낌은 당신의 몫이라고 떠넘기고 있다. 읽다보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건 정말이지 당연하다.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들만이 책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까닭에.. 하지만 이 책의 부제에서처럼 '찾아가는 운명' 로건 타이볼트와 '다가오는 사랑'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은근한 속살거림으로 나에게 찾아온다.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이 찾아오는 그들의 사랑이 정말 운명적인 사랑이었을까?

사랑에는 참 많은 길과 종류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빠른 사랑도 있고 지독한 사랑도 있고 집착하는 사랑도 있고 오래도록 기억되어지는 사랑도 있고.. 그중에서도 처음 사랑, 첫사랑에 대한 것만큼은 우리에게 정말 관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면서.. 친구와 연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차이점은 얼만큼이나 되는 것인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같은 공간속에서 살아도,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해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상태는 존재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게 참 묘한 감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너무 크게 다가오는 사랑앞에서는 나 역시도 왠지 주춤거릴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로건 타이볼트와 엘리자베스가 서로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이런 느낌, 어디선가 강하게 내게 다가왔던 것만 같다는.. 아주 잔잔하게 그러나 지독하게 찾아왔던 짧은 사랑이 있었는데, 짧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아주 오래도록 가슴속에 살아남아 가슴 벅찬 사랑의 아픔을 선사해주었던 또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기억한다. 중년의 사내와 여인이 아주 짧은 동안 지독한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영화였었다는 걸 이내 찾아냈다. 오랜동안 그 사랑의 여운이 머리속에서,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그 이야기의 여운을 <럭키 원>이라는 작품속에서 만난 로건 타이볼트와 엘리자베스가 전해주고 있었던 거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그들의 사랑이 왜 그토록 크게 보였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저편에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가 이해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속성을 갖고 살아가는 탓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편안함, 그 편안함속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불평없이 안아줄거라는 믿음,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랑의 속성은 아닐까?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것이 첫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편안함과 믿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첫눈에 불꽃튀는 사랑이 아니었다해도 말이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좋게 결실이 맺어졌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희생되어야 할 그 무엇도 있었을게다. 어찌보면 진부하고도 지루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봤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잔잔하게 남는 그 느낌이 좋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포장되어지지 않아도 서로에게 아름답게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이면 나는 괜찮을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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