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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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화일까? 진정 신화일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이순신의 이야기. 들어도 들어도 가슴을 먹먹하게 할 우리의 영웅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것일까? 그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제외하고서... 글자가 모여서 한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전이되어져오는 어떤 느낌에 전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가에게 요즘 흠뻑 빠져들고 있던 탓에  김 훈이라는 이름이 주는 유혹에 강한 끌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의 문자들이 전해주는 여운이 너무 길었던 까닭이다. 역시 그랬다. 책장을 넘기고 한 자 한 자 나의 눈속에 담아갈 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것만 같았다. 때로는 긴장감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분노로, 그리고 때로는 눈물로 그의 문장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조그만 주먹을 펼 때에야 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걸 인식할 뿐이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느껴졌다는 말일게다.

난중일기를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변사람들을 실명으로 적었다던 그 난중일기속의 인물들. 그들이 있어 이순신이 있었을 것이기에 그 이름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김 훈의 글은 <남한산성>에서도 그랬듯이 내가 책속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책속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더 아픈 것일게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일게다. 그래서 더 많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을게다. 이 책 <칼의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새 나는 이순신이 되어 있다. 임금의 교서를 받고, 그래도 임금이라고 머리 조아리며 (마음과는 다른) 장계를 올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주리가 틀리는 모진 형벌을 받고.... 어여삐 보이는 백성들을 내치지 못하고 그들을 군선위로 끌어 올리는 아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단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호통칠 수 있었던 장군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백성에게, 그리고 부하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 게다. 그리하여 그가 의정부의 형틀앞으로 끌려갔을 때 아무런 힘없는 백성들이, 부하들이 임금의 문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를 살려 사직을 보존하소서...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196쪽)  적이 있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적이 있었기에 그의 몸이 고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금은 나를 살릴수도, 죽일수도 없었던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을 때 그는 알았다.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임금은 그의 이름 석자를 앞세워 그의 뒤에 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는 그 이름을 두려워했다. 형식적인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그를 의정부의 형틀에 묶이게 했던 권율마저도 끝내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었다. 무슨 방책이 없겠느냐고...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던 이순신의 마음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말쟁이들의 싸움속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진 고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어쩔 수 없이 거칠었다. 그가 머물며 상대해야 할 바다와도 같았을 것이다. 임금의 칼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한가닥 소망이 내게는 붉은 노을처럼 보였다. 붉게 타오르다 사그러드는 ...

..... 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 이() 올림 (-66쪽)

조선 역사를 많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는 것들속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이해하기 힘겨운 존재들 중 으뜸가는 이가 있다면 선조와 인조다. 가장 치욕드러운 과정을 겪어냈으면서도 가장 치욕스럽게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들이 원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내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했던가? 그랬기에, 어쩌면 정말 그랬기에 이 순신이라는 이름이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기를 바랄 뿐이라던 글쓴이의 바램과는 달리 내게는 이 소설이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지가 않았음이다. 장군이 아닌 한 사람으로써, 한 남자로써 겪어야 했을 수많은 감정의 기류들이 너무도 아픈 까닭이다.

그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 (-212쪽)  어디 그 때 한번 뿐이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무서운 것들이 어디 그것뿐이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판치던 그시절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말()이 살아 말()처럼 뛰어다니던 시절. 그 시절을 가엾어했고 또 무서워했던 이가 어디 이순신뿐이랴.  직접 눈으로 보려하지 않았고 제 발로 찾아나서 진위를 가려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말()의 유희들. 누구의 말이 더 찬란하게 빛났는가에 따라 순간적으로 서열이 뒤바뀌던 그 시절. 간혹 그  말()의 유희를 즐길대로 즐기면서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런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묻지 말자. 굳이 묻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으니... 지금의 말쟁이들 또한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저만 먼저 살아야겠다고 아우성인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환하게 보고 있으니... - 전하, 신들을 죽여주소서.- 툭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습관처럼 내뱉던 그들을 앞에 두었다면 -그래, 내 너희를 죽여 이 나라의 사직을 바로잡고자 하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나였다면 그러고 싶었다는 말이다. 진정 그랬으면 싶었다는 말이다.

답답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신화의 끝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나는 그 이순신의 탈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그냥 그의 아픔을 잠시 더 느껴보고 싶었다. 사실과 소설이 어울어진 이야기 하나를 떨쳐내기가 이리도 어려운가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두어번 아산 현충사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지난 겨울이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한참 공사중이었다.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무엇을 찾아냈을까? 현시대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옛시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면서 나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생각했다. 존재의 의미는 모두 버리고서 오롯이 덩치만 부풀린 채 어딘가에서 실려와 내려놓아진... 그 생뚱맞은 자리... 왠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잠시 머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그 날의 느낌이 그 곳 현충사에서는 되살아나지 않기를 빌었다. 쉽게 털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찾아가 보리라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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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 2012 마야력부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까지
실비아 브라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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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2년 12월 21일... 마야인의 달력을 참고 삼았다던 2012년 12월 21일... 정말로 세상의 종말이 오기는 올까? 어째서 사람들은 저토록이나 종말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던지듯이 세상이 망한다는 거에 한표씩 보태주는 것만 같은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는다. 가끔씩 세상이 나를 너무 힘겹게 할 때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져 버려라! 화를 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종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할지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렇다면 나는? 가끔씩 재미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내일 세상이 망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다지 할 일도 없다. 그저 오늘을 사는 것과 같이 내일도 똑같이 살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다들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반응이다. 아니 그럼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는데?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무엇을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래서인지 나의 모토는 항상 지금, 바로 이순간이 가장 중요하다이다.

왠지 흥미로울 것만 같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외쳐대는 종말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선입견이 맞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이 대세다. 우리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기독교, 유대교, 카톨릭,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물론이고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조로아스터교, 오순절교, 침례교도 있다.  바하이교, 자이나교, 라스파리안교와 같은 낯선 이름들도 보인다. 종교, 참 많기도 하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찾아보면 정말 많은 종교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종교들이 모두가 제각각인 종말론을 들고 나온다. 참 대단하다. 기독교의 요한묵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가장 접하기 쉬운 문헌이기도 하지만 카톨릭계를 통해 알려졌던 파티마 예언, 성흔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던 파드레 비오의 이야기나 마리아 에스페란자와 같은 경우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의 예언들도 한 몫하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 아이작 뉴턴, 그리고리 라스푸틴, 아서 코난 도일 등 수많은 예언가들의 이름이 이 책속에서 거론되어진다. 과학자도 있고, 작가도 있는 걸 보면서 종말론이 어느 특정집단만의 광기라고 보기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종말론,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토록까지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종말론을 예견할 수 있다는 지금의 대표적인 현상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지구온난화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현상을 겪고 있는 지금의 현상만 보더라도 이의를 제기하기엔 좀 껄끄럽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리고 또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단순히 기상이변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세계의 정상들이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내지 못했다는 건 아직까지 우리는 인간본위의 세상을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토록 많은 종말론의 근거와 예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포칼립스가 세상의 자연적인 종말, 즉 어둠과 불화의 시대인 칼리시대를 의미한다는 것은 흥미로웠다. 힌두교의 예언을 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 질서와 정의가 약해지고 말다툼이나 역병, 불치병, 기아, 가뭄, 참사가 일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사악하고 분노로 가득하며 거짓되고 탐욕스럽다. 잘못된 교육, 검은 거래, 더러운 돈이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지식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손쉽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예언들중에서 그래도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호피족이나 나바호족, 수우족, 라코타족, 체로키족과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예언을 다루었던 부분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갔던 그들에게조차 세상의 종말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들이 불러들인 종말이 아니라 문명을 앞세웠던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자연을 무시한채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이익만을 위해 밀어부치는 문명의 힘앞에서 그들이 무너져갔듯이 우리조차 그 문명이라는 이름의 괴물에 의해 멸망을 자초할 것이라는 말에는 나도 한표 던지고 싶다. 종말은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우리가 인간본위의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큰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다. 종교계에서 흔히들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저자는 무관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악마가 득세한다"고. 지구를 오염시키고 동식물을 학대하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무관심. 그 무관심이 결국 우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사이비종교도 많았지만 그들에 의해 집단으로 목숨을 끊었거나 희생되어진 생명도 참 많았다. 그 참담한 죽음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끝난다. 쾅 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라 훌쩍거림으로.. -T.S 앨리엇의 말이다.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저자가 들려준 이 한마디는 정말이지 나의 시선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들려주었던 잉카 케로족의 축복 기도를 나도 소개해주고 싶다. 당신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가십시오. 강과 나무와 바위에서 배우십시오. 예수와 부처와 형제자매를 공경하십시오. 어머니 대지와 위대한 영혼을 공경하십시오. 당신 자신과 삼라만상을 찬양하십시오.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본질에 다가가십시오.... 여러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가슴 찡함을 느끼게 해 주었던 축복의 기도. 요즘 인기있는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며 했던 'I see you - 나는 당신을 봅니다' 라는 말 때문에 종교계에서 시끄러웠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알라와 코란을 믿는다는 이슬람교의 무슬림조차도 예수를 존경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이라는 말로 경의를 표한다는 저자의 소개글을 읽으며 나는 저으기 놀랐다. 종교는 필요악이라고 단정짓곤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할 때 진정한 평화와 마음의 평온이 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저자가 소개해 주었던 축복기도속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한줄 한줄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깊이 와닿는다. 자연과 하나되는 삶,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종말론이라는 말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종말론은 우리 스스로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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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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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이라는 책의 제목만 보면 얼핏 이념을 떠올리게 된다. 이념싸움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왠걸 은근하게 깔리는 사랑의 심리묘사가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일까? 이미 지나쳐온 과거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환생하는 듯 하다. 시대적인 풍습들을 보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답습하는 현세대를 보게 되니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본성 그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죽은 뒤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지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면서 끌어안아야 할 숙제는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각자의 몫이라는 거다. 자신의 관점보다는 타인의 잣대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때로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삶의 일부분조차도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온전한 내 몫!

책속의 배경은 왕정복고 시대다. 귀족사회 즉 계급사회의 모습은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일삼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뜻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끌리다시피 한계단을 밟고 올라선 주인공 쥘리앵. 쥘리앵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특출난 외모와 심성으로 자만심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깨닫게 된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미움을 낳는다는 것을.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부터 책읽기와 사색을 좋아했던 까닭에 아버지와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지만 그것때문에 그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자신의 출신계급을 뛰어넘으며 한계단씩 밟고 올라서는 그에게 그 자만심은 일종의 힘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한번 맛본 것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다.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역시 차츰 마음속에 욕망을 품게 되고,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지만 상류사회의 권태나 속물스러움을 알게되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사랑이라고 느꼈던 마틸드에 대한 감정조차도 하나의 도구처럼 쓰여지게 되는 상류사회의 메마름을 이해하기에 쥘리앵은 너무 여렸다. 일개 무명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을 정복한 뒤 누구나 장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꿈을 젊은이들에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쥘리앵은 나폴레옹을 하나의 멘토로 삼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망한 귀족들이 다시 집권했던 시기였으니 시대적으로는 불안한 때였다. 교육을 잘 받은 하류계층의 젊은이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감을 쥘리앵은 알지 못했다. 후에 처형을 당하기 전 법정에서 그가 말했던 '계급사회의 영예'라는 말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출세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어진 쥘리앵의 삶.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져가던 그의 삶속에서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하층계급의 용기를 꺾어버렸다는,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보인다고 법정에서 말하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살펴보아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던 책을 이제서야 만난다. 읽는 내내 책의 흐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다지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장을 덮을때까지 이상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또하나의 책이 있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였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그 소녀가 바라보면 느꼈던 어른들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무언가 비틀어지고 속됨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어른들만의 세계. 흑인을 변호하게 된 백인 아버지의 일정을 바라보면서, 또 그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한편으로 용기를 주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시대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앵무새 죽이기>처럼 이 책속에서도 쥘리앵이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속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어둡고 습한 단면이 많이 보여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단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눈길에 안스러움과 애처로움이 함께 했고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흑과 백, 적과 흑. 그 구분을 누가 지었는가.

"나의 이 이상적인 생활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많든 적든 내게 불쾌감을 주는 당신들의 그 시시한 험담과 현실생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릴 거요.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죽어요. 그러니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이오. '남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오? 그 '남들'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갑자기 끊어져버릴 거요. 제발 더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 마요." (-399쪽)  감옥에 갇혀있던 쥘리앵의 이 말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만 같아 서늘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내 삶의 방식이 '남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도대체 그 '남들'의 삶을 왜 내 삶속에 끌여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감옥에 갇힌 다음에야 진실로 평온한 삶을 얻게 되었던 쥘리앵에게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 평온함속에서 찾아냈던 진실한 자신의 사랑앞에서 절규하던 쥘리앵의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레날부인에게 마틸드의 존재를 "표면상으로만 사실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던 쥘리앵의 고백. 어쩌면 우리는 모두 '표면상으로만 보여지는 사실'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마음까지도 '도구화'되어져가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벅차다. 쥘리앵조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동했던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타인들이 심어놓은 가치를 좇아가는 것, 타인의 욕망을 나도 욕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이다. 이 책을 통하여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한번 뒤돌아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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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 - 진보의 시선으로 바라본 2010 한국사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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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과연 선진국일까? 선진국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GDP/GNP, 사회지표, 국민총행복, OECE사회지표, GPI, 삶의 질... 따위의 복잡한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우리가 처한 삶에 얼마나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물론 각자의 만족도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의 미래에 얼만큼의 관심과 얼만큼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단순하다. 간단하게 말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일에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진 내 삶의 모습에 한번쯤은 채찍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유행어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속에서 내가 이렇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개천에서 용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극화 현상이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현실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인양 흘러가고 있는 이 사회의 모순이 싫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더 마음만 타들어간다.

변해가는 세계정세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한국경제의 탈출구가 무엇이 되었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듯 하여 하는 말이기도 하다. 단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것, 체감온도로 나를 바짝 죄어오는 것, 예를 들자면 고용위기라거나 가계부채라거나 교육개혁에 관한 대안은 있는가, 내가 나이든 후에라도 살 만한 세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회복지는 어떻게 변화되어져야 하는가..라는 점들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망치를 들고 문을 때려부수고 하는 지금의 정치만 보더라도 그들이 이끌어내야 할 많은 것들을 차라리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2010년, 올해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노인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측되어진 일이고,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물밀듯이 밀려와 많은 문제가 발생될 것이라는 것 또한 이미 예측되어졌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없는 듯 하다.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나 부양해야 할 몫이 1인당 6명정도가 될 것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예측과 통계만 있을 뿐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온갖 말들만 풍선처럼 떠다니는 세상속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무조건 소비를 줄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이 다 오르는데 남편 월급과 아이 성적만 오르지 않는다는 우스개소리가 단지 우스개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살림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된다해도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을 것 같다. 나조차도 가장 먼저 냉혹하게 와닿는 교육비 문제가 장난이 아닌 까닭이다. 사교육비를 없앤다고 내놓는 정책마다 오히려 사교육을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고 있으니 말해 무얼할까? 요즘 한참 시끄러운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만 보더라도 단순히 정치적인 이론일 뿐이라는 말에 나는 공감한다. 미래의 빚쟁이들만 무작위로 쏟아낼 것이다. 지금도 심각한 고용문제는 그때가면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질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저 하나도 살기 힘들텐데 결혼은 생각도 못할 것이고 설사 결혼한다해도 사는 일에 치여 아이는 당연히 뒷전일 것이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교육비의 희생양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해도 현실적으로 변화되지 않는한, 그리고 지속적인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그들 귀에는 소 귀에 경읽기가 될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로써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나는 싫다. 말 많았던 일제고사의 결과를 보면서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전국등수... 과연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숫자일지...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먼 느낌으로 다가설 것이다. 요즘 말로 나는 낀세대에 속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 줄에 내가 서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노후가 엄청나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고, 남편과 나는 늙어 힘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막막하기조차 하다. 몇 개의 보험을 들어둔다 한들, 몇 푼의 저축을 하고 있다한들 오래 살기만을 지향하는 지금의 세태에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내용도 없이 창의적인 교육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조금더 실용적인 교육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이라는 공룡에게 의미없이 아이들을 제물로 갖다 바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살려 공부할 아이에게는 좀 더 깊이 공부할 수 있게, 사회에 일찍 진출 할 아이에게는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다. 흔한 말로 발에 치이는 게 대학생이고 그 덕에 등골 휘는 건 부모들이다. 무슨 공장의 물품마냥 쏟아져나오는 대졸자들은 그야말로 갈 곳이 없다.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고학력자들을 양성했으면 그 역량을 살 곳도 마련되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국민질서의식 수준이 조사했던 30개국중에서 우리나라가 27위였다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말뿐인 고학력, 말뿐인 교육개정이 아닐수가 없다. 우리보다 나은 나라들조차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개혁을 추진중이라 한다. 하물며 인적자원 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야 말로 가장 시급하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 교육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가계부채는 단지 최근 몇 년 사이의 추세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근원적 문제라는 말이 깊이 와 닿는다. 사실 사회정책에 있어 이런저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핵심을 피해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것처럼 보여진다는 거다. 고용문제나 여성의 사회진출, 육아문제, 교육비지출등 무엇이 문제인지를 그들이 몰라서 안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것이다.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장경제의 원칙에만 매달리다보니 겉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는 대안들만 내세우며 뒤로 숨기에만 급급하다.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저라는 말이 안고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많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에는 양만 많이 주면 좋아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맛을 따지는 세상으로 변했다. 아무리 많은 양을 줘도 맛없으면 안먹는다는 말이다. 양적수준보다는 질적수준에 더 많은 의의를 두는 세상으로, 보여지는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충실한 세상으로 하루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 경제성장률이나 국민소득이라는 거창한 말로 우리의 실생활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답답해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했다. 이 책에서 다루어주었던 것처럼 2010년 지방선거는 한국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회의적으로 보여지던 책속의 말처럼 정치를 모르는 나의 느낌도 회의적이다. 실속없는 정책들이 날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 빚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쉴새없이 들려오는 광고의 외침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게 쓸 돈이 없어서라는 말도 되겠지만 이제 우리의 의식도 어느정도는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사회의 흐름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일테니 말이다. 책의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읽긴 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겠지만 이렇게 우리의 실생활속에 파고드는 경제지침서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싫은 소리도 과감하게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용기있는 외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말로 내세우는 이론을 근거로 예측하기 보다, 단순한 통계지수를 내세우기 보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제지침서가 필요한 듯 하다. 무슨 경제학 박사가 될 것도 아닌데... 나 살기도 바빠 그런데 신경쓸 시간도 없는데... 싶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가장 먼저 나부터 달라져야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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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매튜 메이 지음, 박세연 옮김 / 살림Biz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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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한 남자의 재킷을 열고 옷깃속에 얼굴을 감춘다. 그리고 잠시 뒤에 살짝 얼굴을 내밀어 달콤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행복한 여자의 미소만 보여줄 뿐이다. 말도 필요없다. 어떤 말이나 글로도 여자의 달콤한 행복을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여자의 머리결을 어루만지며 지나갈 때 딱 한마디 할 뿐이다. 00쵸코렛...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광고중에서 가장 멋드러진 광고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쵸코렛 광고를 선택할 것이다. 쵸코렛의 달콤함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또한 느끼게끔 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거기에는 생략의 묘미가 있었고 여백의 미가 있었다. 적어도 광고라면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끔은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은채 온통 다 보여주며 당신은 그저 이런게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식의 광고가 먹힐 때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삼성의 광고를 참 좋아한다. 그리고 참 잘 만들어진 이미라고 후한 점수를 준다. 상투적인 인기 배우들을 쓰지 않고, 뻔한 문구와 대사를 넣지않아도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것이 참 괜찮다. 그런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한쪽이 따스해져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또하나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생뚱맞게 왠 광고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책의 제목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광고를 생각했었다.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끝도없이 머리띠를 졸라 맬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했었다는 말이다.

가장 최근에 배꼽을 잡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졌던 광고를 생각해본다면  show가 아닐까 싶다. 난데없이 사람들 앞에서 웃기는 모양새로 그야말로 쇼를 하던 그 장면을 보면서 저건 뭐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그 광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몇 번을 반복하여 보여준 뒤에 나는 누구입니다,하면서 나타나는 기법도 꽤나 괜찮게 다가오는 광고의 기법인 듯 하다. 숨겨진 것을 찾아내기 위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디어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우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아한 아이디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사전에서 찾아보자면 우아하다는 말은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다는 뜻으로 나온다. 그 말 자체도 참 난해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라 아이디어, 즉 생각이 우아함을 품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더 얼만큼이나 사람들의 감성속에 혹은 이성속에 머물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크게 나누어진 장을 만날 때마다 눈길을 끄는 그림이 보인다. 2/3만 보이는 나비인데 그 나머지는 뒷쪽에 숨겨져 있다. 나비 그림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이 책속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아한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법칙이 필요한 것일까?  첫째가 대칭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가 여백의 유혹이고 세번째가 생략의 법칙이라고 나온다. 두번째 여백의 유혹이나 세번째 생략의 법칙이 안겨주는 의미는 내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실제적으로도 내가 끌리는 아이디어 또한 그런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는'것이 '하지않는' 것보다 중요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27쪽) 는 책속의 말에 백프로 공감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해야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처럼 복잡하게 살아가다보니 '비어있는 듯한', 조금은 '덜 채워진 듯한' 이라는 컨셉이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들의 뇌 자체가 너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논피니토 기법이나 스푸마토 기법만 보더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불확실성과 애매호모함의 효과를 극적으로 활용해 보는이로 하여금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기법.. 사람들에게 '안개처럼 사라지는' 느낌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윤곽을 없애는 방법'을 구사해야한다는 정의를 보면서 내 짧은 소견으로는 이런 가정을 하게 된다. 인간은 채워진 것보다는 자신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완벽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열심히 외치고 있는 '내려놓음'이나 '비움'의 정의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책속에서 마주쳤던 '축복받은 무지의 효과'라는 말이 참 흥미롭게 다가온다.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던 제품보다도 약간의 정보만을 주었던 제품에 대하여 사람들이 좀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실험결과는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호기심! 호기심은 인간에게 있어 알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그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한다면 많은 정보를 주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채워넣기'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려놓음'이나 '비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win-win 전략인 셈이다.

결국 말만 '우아'하게 했을 뿐이지 사람들의 헛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전략이라는 말과 다를게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글의 맥락을 찾아내지 못하고 글자만 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을 넘기면서 이내 책속으로 빠져들었다. 성공한 사람들, 화가나 예술가 혹은 스포츠선수들의 예를 들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방법속에서 '우아'하다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사람들이나 거기에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필요한 것이 '채워넣기'위한 '내려놓음'이나 '비움'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고리가 아닌가 싶다. 순환의 고리! 이 책에서는 말한다. 우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복잡함을 버려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당신에게는 숙제라고. 오래 고민하기 보다는 즉시 반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기억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책을 다 읽고나니 한 권의 심리학을 읽고 난 기분이다. 자신이 '믿는'대로만 '본다'는 사람들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파헤져진 그런 느낌이랄까? 마음 다스리기가 필요하다는 말로써 결론을 맺는 것이 왠지 생뚱맞기는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 결론에서 말하고 있는 명상수련이나 뉴로피드백 훈련 역시 마음 다스리기가 관점인 것만 보더라도 책속에서 말했던 '그만두기'는 곧 '내려놓음'이나 '비움'과 일맥상통하지 싶다.

우아해지고 싶다면 여유의 유혹에 넘어가고 생략의 법칙에 충실하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 이 책은 옮긴이의 말처럼 한마디로 이런 책이다,라고 단정짓기 힘들것 같다. 입구는 하나인데 출구는 많은 그런 동굴속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심리학 같기도 하고, 철학 같기도 하고, 자기계발서 같기도 하고, 경영에 관한 글처럼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느끼는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그런데 자꾸만 책의 제목이 내용과 동떨어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나는 되묻는다. 도대체 우아하다는 게 뭐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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