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로 떠나는 테마 여행 - 지금은 전철 시대 빠르고 간편하게 강원도 충청도까지
박민정.이요석 지음 / 예조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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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 정말 바쁘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도 모르면서 엄청나게 바쁜 사람들이다. 물어보면 하나같이 글쎄, 뭐 그렇게 바쁠것도 없는데 바쁘네요..라고 말하며 베시시 웃는다. 그 웃음속에서 느껴지는 허함이 왠지 안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일탈을 꿈꾼다. 잠깐이라도 여기서 벗어나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디로? 글쎄요... 어디로 가야할지는 아직... 그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감나는 표정일 것이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방향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갈 곳은 많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다. 내가 오기를 기다려주는 곳도 찾아보면 참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갈 곳을 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가봐야 맨날 그게 그거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이다. 거기다가 막히는 길은 망설임을 더 극대화시킨다. 와아, 길이 저렇게 막히는데 가긴 어딜간다고? 하면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던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저 눈으로만 즐기는 여행, 오직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기 위한 생각에 쌓여있었던 까닭에 그만 발길을 돌렸던 것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나로부터 떠나 모든 것을 자연속에 맡기고 싶어하면서 오직 나만을 위한 여행을 꿈꾸니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음 한 곳을 비워보자. 꽉 채워져 이제는 무엇도 더 채우지 못할 것 같은 마음 한구석을 조금만 시간에게 양보해 보는 거다. 나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시간에게 나를 맡겨보는 것이다. 그러자면 눈으로 보는 여행이 아니어야 한다. 온전히 그 시간속에서 마음의 펀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꼭 무엇을 보아야만 하고, 누군가에게 나 거기 가보았다고 말해 줄 근거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한가지 테마를 정해서 오롯이 그곳에 녹아들 수 있는 여행이라면 짧아도 참 좋았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만 주변을 살펴본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곳을 콕 집어주는 단거리 여행책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가까운 거리인지라 굳이 자동차를 타고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책장을 넘기다보면 책마다 소개된 곳이 모두가 한결같다는 걸 금방 눈치챌 수가 있다. 목록부터 주변의 상황까지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은지.. 서로가 서로의 책을 베껴놓은 것같은 착각마져도 생길 때가 있다. 그럴때는 나의 안목으로 골라야만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볼 일이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선택했을 때 나에게 가장 많은 즐거움과 편안함을 선사해 줄만한 코스가 담겨 있는지, 소개하고 있는 곳에 대한 설명이 알찬지, 얼만큼이나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교통정보를 소개해 주고 있는지 뭐 그런 것들을 살펴보게 된다.  작은 책속에 많은 것을 담고싶어하는 욕심을 부린 책에게는 절대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렇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아홉가지 테마로 여행의 코스를 잡아주었는데 나름대로는 정리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史) 역사 유적 탐방,  (學) 체험 학습 여행, (村) 테마 거리, 마을 순례, (休) 마음을 풀어놓는 곳, (色) 도심 속의 자연, (靑) 청춘 스케치, (遊) 즐거운 놀이마당, (場) 행복한 쇼핑 코스, (味) 맛있는 전철 여행 ... 부모라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아갈 만한 곳도 있고, 연인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잡은 손끝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는 곳도 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맛있는 곳을 소개해주기도 하지만 명심하시라, 이것조차도 각자의 느낌이라는 것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좋았다고 하여 나도 좋을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단지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는 말이다. 어느곳에 있든, 무엇을 먹든 그것을 선택한 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물론 역사 유적 탐방은 필수적이겠지만 어느곳을 가더라도 그곳에 대한 사전정보는 익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곳에 갈지라도 그곳에 대한 유래나 그곳에 얽힌 이야기 하나쯤 가슴에 품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틀림없이 무언가 다른 느낌을 나에게 선사해 줄 것이다.

책 좀 읽으시나요? 물으면 하나같이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닐진대도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짬짬이 책을 읽어내는 사람들은 많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가지? 거기가면 뭐가 있는데? 에이, 뭐 그런데를 간다고...라고 말하기 이전에 일단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거기가면 뭐가 있는데?라고 물으며 나도 갔다왔다,는 증명서를 발부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명서를 발부해주는 곳이라야 뻔할 뻔자다. 당신이 에이, 뭐 그런데를? 했던 곳에서 정말 멋진 여행의 맛을 찾아내는 보통의 사람도 많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묻지말고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먼저 따져보자. 어느곳엘 가더라도 온전히 나 자신의 시간을 맡길 수 있는 여행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일탈, 어렵지 않다.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것이 일탈이다. 어디로 가든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여행인 것이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동남아로 가고, 남미로 가고, 유럽으로 가는 것만이 여행은 아닌 것이다. 크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못 떠날 것도 없다. 늘 가던길에서 옆길로 살짝 돌아가보는 것이 여행이고 일탈일테니 말이다. /아이비생각 


                                                                                성북동 -길상사-에서 잠시 머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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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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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책의 제목이 상당히 詩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서울... 나는 서울이라는 곳을 얼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를 오가면서 서울을 얼만큼이나 안다고 생각할까?  모르긴해도 서울의 거리이름이나 어디에 가면 어떤 이름을 가진 빌딩이 있다는 것쯤은 왠만한 사람은 다 알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서울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옛숨결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나마 종로구에서 북촌을 살려내 북촌이나 가회동의 골목길들이 유명해지긴 했다.  가끔씩 들러보는 남산골 한옥마을에서조차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양 행세하는 그 모습이 조금은 서글프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나마 보존되어질 수 있었던 가옥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나마도 천만다행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울하면 왜 경복궁을 떠올리는 것일까? 이 책속에서조차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서울과 경복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게 맞는 말일 것도 같은데... 아마도 광화문이 거기에 있음으로해서 그런 현상이 생겨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창덕궁이라는 이름보다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불리워지게 된 또하나의 궁궐도 그렇다. 

서울에 존재하는 옛숨결을 찾아 한동안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녔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내심 놀라웠던 것은 내국인보다 많이 마주쳤던 외국인들의 모습이었다. 한번 가 보시라,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북촌의 골목길을 거닐다 사진기를 내밀던 그 노랑머리의 여인이 포즈를 취했던 곳은 아담한 한옥도 아니었고, 그 한옥을 감싸안고 있던 우리의 옛담장도 아니었다. 어느  다세대주택의 출입문에 양각되어진 십장생이 그녀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던 모양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의 것이 아닌듯 서걱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서울속의 옛숨결들.. 무슨 까닭일까 생각하다가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일기도 했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것을 제대로 알고자 노력하지 않으니 당연히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것을 홍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자체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는 말이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우리세대의 부모님들은 문화라는 것 자체에 마음 쓸 틈이 없었다. 살아내야 한다는 각박한 현실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제 와 멀리 밀쳐 두었던 우리의 문화를 끌어당길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생겨났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제대로 자리잡히는 과정이 되었음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게 된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얼마전 정동길을 찾아나서며 옆에 해설사 한분이 함께 해 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까닭이다. 정동길은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덕수궁돌담길이다.  유행가의 가사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정동길이다. 그 곳이 한때는 경운궁이었다는 것도, 경희궁과 나란히 했던 곳이라는 것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정동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중명전도 경운궁의 도서관이었다는 걸,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참 좋은 일일텐데... 하지만 답사를 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참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안내판에 써 있는 글을 읽어보아도 그곳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부족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도대체 연도와 전문용어는 왜 그렇게 빠짐없이 나열해놓는 것인지...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편한 말로 써놓으면 안내판의 격이 떨어지는 것일까? 더군다나 요즘 보이는 안내판은 보기좋으라고 바꾸어놓는 것 같은데 빛이 반사되어 그마저도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책 속에서도 언급되어진 그 많은 표지석들은 지나칠때마다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고, 느닷없이 어울리지 않게 우뚝 서 있는 많은 동상들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왜 이곳에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하기를 몇 번인지 모른다. 간혹 그 사람의 이름을 딴 공원에 들러 주인공의 동상을 보게되면 왜 그리도 반가웠던지... 

기대했던 것보다 알찬 내용에 놀랐다.  그림도 그림이거니와 그 그림과 함께 곁들인 우리문화에 대한 설명글이 너무나 좋았다. 세세하게 살펴보며 그 곳이 어떤 곳인가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뒤에 참고했다는 책들을 살펴보면서 참 많이도 정성을 기울인 책이구나 싶었다. 그 자신 역시 서울의 시간을 온몸으로 느껴가며 발품을 팔았겠구나 싶어 고마웠다. 서울? 에이, 서울에 뭐 볼 것 있다고..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서 조금은 부끄러워질 것 같다. 그만큼 서울속에서 느낄 수 있는 옛시간들은  많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계신 분들과 한마디 한마디 주고 받았을 저자의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나도 저런 마음으로 답사를 다녔던 것일까? 다시한번 되묻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스쳐지나며 미처 보지 못했던 곳들을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눈으로만 보고 왔던 곳에  다시 한번 찾아가 보리라 한다. 알고자 하는만큼 알게 되고, 보고자 하는만큼 보게 된다는 말을 떠올린다. 

저자가 찾아갔던 곳은 많았다.  경복궁, 광화문 광장, 종로, 청계천, 정동, 혜화동 등....(저런데서 뭐 볼게 있겠느냐고 말하지는 말 것!) 그림으로 보여지던 경교장의 모습은 정말 안타까웠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있고, 설마~ 하면서 그냥 지나쳤던 곳도 보인다.  하지만 인사동은 이제 가고 싶지 않은 곳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인사동길에 들어서면 우리것의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내가 서울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저것을 뭉뚱그려놓은 시장에 와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조차 힘겨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우리의 색을 잃어버린 채 우리의 길이라고 간판만 붙여놓은 꼴이다. 이곳저곳에서 덩치만 크고 실속은 없어보이는 우리의 것을 만날 때가 좋종 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런 곳에 우리나라를 알고 싶어하고,
느끼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많다는 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책장을 덮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책을 읽으면서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우연히 드리우게 된 낚시줄에 대어가 걸린 듯한 느낌을 주었던 책이다.  이 책을 들고 서촌을 한번 찾아가 볼 요량이다. 요즘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많은 말이 오고간다는 그 곳으로.. 그리고 잊지말고 찾아가 보리라 한다. 저자가 소개해 주었던 그 곳, 딜쿠샤를... 미루어 둔 채 목록에만 올라있던 곳을 생각한다. 마음이 바빠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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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박지원 원작, 허경진 글, 이현식 사진 / 현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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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시절에 싫도록 외워야했던 부분이기도 하니.. 하지만 시험문제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열하일기>를 만나보려 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다시 대하게 된 <열하일기>였으니 하는 말이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정조때 중국을 기행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허생전>이나 <호질>도 이 책속에서 만날 수가 있다.  우리의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책으로 나와있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허생전>의 경우 사실 박지원의 글은 아니다. 그가 듣고 정리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을 마치 박지원이 지은 글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은 좀 그렇다. 그것도 옛날이야기 형식으로 남의 말을 빌려 적었던 글일뿐이다.  양반을 혼내주는 호랑이 이야기 <호질> 역시 남의 집에 걸린 문장 한 편을 보고  베껴와 지은 글이다. 베낀 부분에 잘못된 곳이 수없이 많았고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 문맥이 맞지 않았지만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하여 글 한 편을 만들었다,는 말이 이 책에서 보인다.

흔히 우리는 박지원을 실학자라 칭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중국여행을 하면서도 그가 유심히 보았던 것은 중국의 멋진 경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집을 짓을 때 벽돌을 쌓는 방법이라거나, 중국의 구들을 보고 우리나라 온돌과의 차이점을 생각해냈던 사람이 박지원이었다. 아궁이를 내는 것부터 시작하여 굴뚝을 내는 것까지 세심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백성들에게 좀 더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다는 말도 될테지만 그가 돌아와 이 책을 지은 후의 파장은 대단히 컸다. 정조때 그 유명한 '문제반정'을 몰고오는 계기가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문체반정'은 사실상 글줄이나 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의 두려움이었다. 백성이 깨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 당시의 사대부정신을 알게 해 주기도 한다. 정조 역시도 그런 점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책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박지원은 한갓 글만 읽을 뿐이니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이런류의 말은 허생전에서도 볼 수가 있다) 새롭게 변해가는 시대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사람들이 실학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변화속에 적응해나가야 하고 새로움에 대처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옛날만을 고집하며 살았던 그들이 바로 사대부였던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 것인지 영웅이 시대를 낳는 것인지 다시한번 짚어볼 일이다.

작은 책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단순한 기행의 형식만을 띠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왠지 부끄럽기도 했다. 기행문의 형식을 빌려왔을 뿐 이 책을 통해 박지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 하다. 무엇보다도 <허생전>과 <호질>의 배경을 알 수 있었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쓸데없는 명분을 내세웠던 성리학이 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를 따라왔던 인물이 있었는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인조의 아들 소헌세자였다. 그 역시 변해가는 세상을 읽을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후에 효종이 되는 동생과는 달랐다. 만약에 그가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안타깝게도 그에 따르른 댓가가 너무나도 컸지만 우리 역사속에도 그런 인물은 많았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실학에 눈을 떴다면 어땠을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왠지 서글퍼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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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천국의 세계 - 신화, 전설, 경전을 통해 천국의 신비한 이야기를 듣는다
구사노 다쿠미 지음, 박은희 옮김, 서영철 그림 / 삼양미디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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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정말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사후세계라는 곳이 있어 그 곳으로 가는 것일까? 옛날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도 왕이 죽으면 생전에 그가 입던 옷을 들고 지붕위로 올라가 휘휘저었다고 한다. 아직 가지 않았다면 이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뜻으로.. 신화나 전설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후의 세계는 지극히 평온하거나 지독히도 힘겨운 고통을 보여준다. 연인이었던 에우리디케를 못잊어 산사람은 갈 수 없다던 명계의 문을 들어섰던 오르페우스는 그토록 험한 길을 갔다왔음에도 연인을 되찾지 못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버렸던 부모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다는 서천서역국으로 간 바리데기가 있다. 그들이 다녀왔던 곳이 정말 죽음 후의 세상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죽음뒤에 있을 세상에 대하여 믿지않기에 그다지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궁금한 것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종교적인 의미로써의 사후세계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똑같은 현상인데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죽은 자의 육신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그를 위해 염원하는 모습이 각기 다르니 하는 말이다. 영혼은 정말 존재할까? 나는 죽음 뒤에 올 세계는 부정하지만 영혼의 존재만큼은 어느정도 인정하고 싶다. 물론 그 영혼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의 의식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의식(지극한 염원을 빙자한-) 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를 보내면서 내게 찾아왔던 그 두려웠던 경험을 잊을수가 없으니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묘한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정말 사후세계는 있는 것일까? 있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순장이라는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있다고 믿었기에 진시황릉과 같이 호화로운 무덤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죽은 뒤에 행복했을까?

그리스 신화속의 명계를 지키는 하데스. 죽은자가 그에게로 가 심판을 받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비통의 강 아케론, 증오의 강 스틱스, 불의 강 플레게톤, 망각의 강 레테, 통곡의 강 코키토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다섯 개의 강을 건너는 죽은자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비통과 증오의 강을 건너고, 블의 강을 건넌 후 모든 것을 잊는다는 레테강마저 건넌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 나라마다 혹은 신화마다 다루고 있는 사후세계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윤회를 한다와 그렇지 않다로 나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의하면 사후세계가 밝고 행복한 세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천상과 지하로 나뉘어 행복과 고통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으니 흥미롭기는 하다. 또한 고통을 안고 있는 지하세계 역시 살아 있을 때의 죄과에 따라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 다르며 그 기준을 정하는 방법 또한 다르게 표현되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표현으로 보여준다고는 해도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은 아니다. 약간의 형식만 달라질 뿐이다. 책에 의하면 그 지역의 샤먼형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인데, 수직방향으로 나뉘는 세로형과 수평방향으로 나뉘는 가로형이 있다. 샤먼이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보았던 사후세계가 세로형이라면 의식이 없어져버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어딘가의 장소라고만 칭하는 것이 가로형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근대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혼'과 넋'이라는 두 종류의 영혼이 흥미로웠다. 죽은 뒤에 각각의 길을 떠난다는 이 두개의 영혼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치루던 제례를 생각하게 된다. 사당에 모셔진 위패가 바로 '혼'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반우주적 사상이라 한다는 그노시스파는 육신자체를 지옥으로 보았다. 육체안에 '령'을 감싸고 있는 '혼'이 있어 영혼 모두 육체에 갇혀 있다고 본 것이다. '령'을 가둔 '혼'과 '육체'를 물질적 세계로 보았다는 점이 왠지 마음 한구석을 일렁이게 한다. 많은 나라와 많은 신화들이 예로 등장했지만 사후세계는 그 나라의 생활상과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 달리 그려진 듯 하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이 보여지기도 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저 단순히 죽어 천국이나 지옥을 가거나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다루거나가 아닐까 싶다.

책장을 덮으며 조금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의 신화나 전설이 안고있는 사후세계에 관한 글이 보이지 않다는 거였다.  그나마도 맨 마지막 부분에서 잠시 다루어주고 있는  무속신앙의 사후세계가 있어 다행이다. 어찌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이승과 저승의 관념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우리의 신화나 전설도 잠깐 다루어주었으면 더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신화속에 나타난 신들의 모습도 그리스신화나 타신화에 못지않게 괜찮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서정오가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신화>라는 책을 펼쳐보면 우리신화의 배경도가 나오는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스신화나 북유럽신화의 배경 못지 않은 까닭이다. 이승과 저승은 물론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리는 천지왕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천지왕의 첫째아들로써 저승을 다스리는 저승신 대별왕, 천지왕의 둘째아들로써 이승을 다스리는 이승신 소별왕의 이야기는 제우스의 형제이야기 못지 않게 재미있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 용왕과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꽃을 지키는 신으로 서천꽃밭 꽃감관과 감은장아기라는 운명신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들은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과 모이라이와 같은 존재다. 그런가하면 아들 일곱형제가 어머니를 위해 새벽에 돌다리를 놓았다는 설화는 익히 알면서 별의 신으로 칠성님과 옥녀부인이 존재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또 몇이나 될까?  염라대왕이 저승신의 우두머리라는 것은 알면서 저승길로 인도하는 저승차사가 있으며, 저승길을 지키는 저승길신도 있고, 죽은 사람을 저승길로 이끌어주는 오구신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단순히 무속이라고 치부되기에는 왠지 껄끄러운 점이 없지않아 있는 듯 하다. 우리에게도 가이아와 같은 대지의 여신이 있으며, 테메레르와 같은 곡식의 신이 있으며, 아테나와 같은 전쟁의 신도 있다.
우리도 이렇게 멋진 신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고하여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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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탐정 정약용
강영수 지음 / 문이당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정약용이 명탐정으로 나섰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끝내주는 탐정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이 한국을 대표할 만한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던 정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그의 고난은  인물사를 읽다보면 마음 한켠을 아리게도 한다. 하기사 정조가 살아있을 때에도 그의 길은 가시밭길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천주교도라 하여 박해를 받기도 했던 정약용. 하지만 그가 외로웠던 유배지에서 친구삼아 자주 찾아갔던 이는 승려 혜장이었다. 진정 그는 마음속에 무엇을 품어야 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리라. 그런 그를 탐정으로 앞세운 책이 기대가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혹은 이 책속에 역사적인 사실이 얼만큼이나 담겨있을지 나는 그것이 더 궁금했었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 대상이지만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정한 관심이나 가치 판단에 근거해 과거의 사실로 구성되기도 한다,고... 이 책은 정약용이 정조의 특별한 지시로 잠행했던 기록을 우리앞에  펼쳐주고 있다. 조선의 뒷골목을 거닐었던 정약용의 기록을 전하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이 싱그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조선의 왕중에서 과연 누가 얼마만큼의 왕권을 다질 수 있었는가?  제대로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라고 해서 왕권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사람이라해서 왕권을 다잡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왕이었으나 왕이 아닌 자들이 제 한몸 추스리기에도 힘겨웠던 시절이 조선이라는 테두리였으니 제 뜻을 온전히 펼 수 있는 여건이 조선이라는 시대속에는 없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황하에서도 왕들의 곁에는 누군가 한명은 머물러 마음을 나누는 역할을 해주기도 했으니 바로 정약용과 같은 이가 아닐까?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숨어지낼수도, 밖으로 당당하게 나타낼수도 없었을 그들의 처지를 바로 알아 은밀한 만남속에서 회포를 풀기도 했을 것이다. 이 소설속에서도 역시 그런 왕과 신하의 틀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솔직하게 말해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단편을 짜맞춘듯한 이야기 형식이 껄끄러웠던 까닭이다. 사건마다 하나씩의 제목이 붙여져 마치도 그 사건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끝나 새로운 사건이 다시 만들어진 듯 보여지는 느낌이 그랬다. 사건과 사건끼리의 연관성을 알기까지는  그다지 깊은 울림도 없었고, 긴장감이나 조바심따위의 요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런 사건이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만이 찾아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건들의 배경은 정말이지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아주 오래도록 사랑을 받았던 '전설의 고향' 이나 '전설따라 삼천리' 와 같은 글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게도 했다. 무속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역사적인 사실이라 내세울만큼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집중할 수 있는 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되고, 그제서야 앞선 사건들에 대한 이해가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말하게 된다. 이거였어?

의학서? 추리물? 그것도 아니라면 역사소설? 잘 모르겠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어떤 근거에 맞춰 짜집기한 듯한 이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거기에 살짝 양념치듯이 추리극의 형태를 가미했다. 그런다음에는 그 음식이 어떤 맛을 내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먹어봤으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한 그런 것..... 사람이 죽은 뒤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대목들은 왠지 생뚱맞다. 칼에 베인 채 죽었으면 이러이러하고,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면 이러이러하다는 등, 장황한 이야기속에서 검시관들이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들을 정약용이 찾아낼 뿐이다. 신기한 것은 모든 사건의 실마리가 꿈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꿈과 사건의 연결고리도 왠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책속에서 정약용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정조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조차 맥을 잡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책을 접으며 순간 생각한다. 이 책은 그냥 썩을대로 썩은 그 시절의 사대부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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