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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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사도세자.. 역사라는 틀에서 가장 서글픈 이름이 아닐까 싶다. 세자였으나 왕이 되지 못한. 그러나 그들이 왕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겨주는 이름이기에 하는 말이다. 흔히들 말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에 의해 기록되어진다고. 그리하여 역사는 이긴 자의 흔적이라고. 잘못되었거나 아팠던 흔적들은 지워진다. 살아남은 자에게 得보다 失을 안겨줄 이야기라면 없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사라진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발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 잡으려 시도하는 몇몇의 손길도 보인다. 바로 잡을 수 없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외치는 작은 목소리도 듣게 된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서로의 의견을 달리하여 시시비비를 가린다. 가끔 목소리만 크게 하여 외칠때도 있지만 요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따져 묻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소리없는 싸움을 벌일때도 있다. 오류는 바로잡아야 마땅하겠지만 판단은 내 몫이다. 그래서 그 새로운 시각에 호기심이 인다. 그런 사람, 이덕일의 작품이라기에 유혹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아니 장헌세자는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어떤 생각, 어떤 이념으로 살았을까?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들어가야만 했던 그의 상실감은 과연 얼만큼의 크기였을까?  많은 역사서를 찾아가며 내용을 정리했을 저자의 노력이 책속에 흥건하다.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 일전에 그녀의 작품 <한중록>을 읽었다.  한 여인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지는 글이라는 <한중룩>은 이 책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모두 4편으로 되어있다.  처음엔 혜경궁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져 오랜 세월동안 궁중에서 지냈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영조와 사도세자, 父子간의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다.  손자인 순조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뒷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자신의 친정과 얽힌 이야기들이다. 사실 그 책을 보면서 '泣血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애절한 슬픔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부분이 있었다. '閑中錄'이라는 제목이다. 그저 보이는대로만 해석한다면 '한가한 중에 남긴다'는 말인데, 그 제목을 보면서도 왜 나는 오로지 '恨'스러움이 느껴지는 말로만 생각했었을까?  사도세자가 살았던 영조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 많이 떠돈다. 그러니 더이상 말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책을 읽다보니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오버랩되어왔다. 그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분명코 바뀌었을 우리의 역사. 자식을 죽여야만 했던 아버지의 욕망이 살짝 비틀려져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 자체가 나는 씁쓸했다.

 

이책은 논란의 중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이기 위해 다시 쓰여진 책인 듯 하다. 앞서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붙여놓은 들어가는 글에서 보인다. 프롤로그에서 다루어주는 '노회한 정객, 혜경궁의 진실'은 이 책의 주장에 어느정도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어느정도는 개인적인 논리가 들어갔겠지만 사도세자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가고 있는 사실에 대한 반박을, 많은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하나씩 증명해가고 있는 까닭이다. 아울러 정조 독살설에 관한 의견까지 피력하고 있다. 일전에 역사강의를 듣다가 정조는 제 수명을 다 살고 간 것이라고 흘리듯 뱉어내던 강사의 목소리가 떠올라 흥미로운 대립이라는 생각에 살풋 웃어보기도 했다. 그런 대립이 있음으로해서 나같은 역사의 문외한은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니 하는 말이다. 반론을 제시할 수 있어 어쩌면 우리의 역사가 바로잡힐 수 있는 기회도 생겨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거나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했어도 내게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울러 생각치 못했던 사실들을 접하게 되어 고마운 부분도 많았다. 역사에 관한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리싸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사회는 서글프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간주하여 죽어야 했던 많은 이름을 떠올린다. '생각이 다르면 안쓰면 그만이지 죽이기까지 할 건 없지 않느냐'고 했다던 윤휴의 말이 떠오른다. 가장 슬픈 건 지금의 사회가 그토록이나 시끄러웠던 영조의 시대와 닮아있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또다른 희생양이 되어야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건 어리석은 일임에 분명하다.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은 역사속에 있다' 라는 말을 다시 또 되새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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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님, 저도 사도세자 완전 좋아해요.
헤경궁 홍씨와 그녀의 [한중록]도 무척이요.
그래서 더 멋진 리뷰 같은 걸요 ^^

아이비 2011-12-26 13:31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덕일님의 책을 흥미롭게 보고 있답니다.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올해 남은 시간도 알차게 마무리하시고, 기쁨 가득하시길요 ^^*
 
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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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자형이니 'ㄷ'자형이니 'ㄴ'자형이니 하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는 건 우리의 옛집을 말할 때다. 개인적으로 나는 'ㅁ'자형의 집이 참 좋다. 높지않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그 아늑함이 좋고, 크진 않아도 가운데 떡 하니 들어앉은 마당과 그 마당안에 들여놓은 하늘이 좋아서다. 들어서면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참 좋았다. 닫힌 듯 하면서도 열려있는, 막힌 듯 하면서도 막히지 않은 그 분위기는 내게 항상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옛집에 대해 어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번도 그런 옛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하게 찾았던 고택에서의 그 안온함을 나는 잊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들 우리의 옛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설혹 약간의 거스름이 있었다해도 그 안에 나무를 심거나 물길을 냄으로써 자연을 들여놓았다는 말도 한다. 많이는 찾아보지 않았으나 그간에 찾아보았던 옛집들은 정말 그랬다.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아산 외암마을의 송화댁과 건재고택이다. 송화댁 담장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탄성을 질렀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 작은 물길하며 자연속에 조용한 움직임으로 오롯이 들어앉은 두 안채의 어울어짐은 신비롭기까지했다. 그런가하면 건재고택의 정원은 정말 끝내준다. 하나의 이상향처럼 꾸며져있는 그 모습에서 경건함마저 느껴졌다면 거짓일까? 하나 하나의 가옥이 저마다의 특징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전체의 분위기가 참으로 포근했었다는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니 하는 말이다.

 

그렇게 느낌이 좋아 찾아가던 옛집을 이제는 철학을 담아 느껴 보라 한다. 아직 그 건축물의 생김새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 철학까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옛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어떤 철학을 담아두었을까?  나같은 문외한이 그런 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뻔한 이친데도 욕심을 부려보았다. 내가 찾아갔거나 아직은 방문예정인 그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철학은 무엇일까? 문득 알고 싶어진거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 옛집이 안고있던 분위기만 되새겨 생각났을 뿐이다. 안타까움에 내내 속을 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 진리를 다시 받아들여야 했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게 또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이 책에 감사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옛집을 통해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보게 해 주었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집을 대했는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지난번 <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라는 이용재님의 책을 보면서 이 곳만큼은 꼭 가보리라 했던 집을 다시 보게 된다. 獨樂堂이다. 대청에 앉아서도 시냇물을 볼 수 있게 담장에 창을 냈다던 그 집... 주변의 바위마다 澄心臺, 濯瓔臺, 詠歸臺, 觀魚臺, 洗心臺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그 말속에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철학의 꼬투리를 하나쯤 잡아본다면 억지일까?  마음을 맑게 해주니 징심대요, 바람을 즐기니 탁영대요, 돌아감을 노래하니 영귀대, 물고기 노는 것을 바라보니 관어대, 마음을 깨끗이 해주는 세심대라는 풀이가 정말 그럴듯 하게 느껴진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속에서 修身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까닭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켕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느 한부분일테지만 禮學이라는 큰 틀만으로 바라본 옛집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그런지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책을 통해서 옛집의 안온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따라가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다. 옛집을 찾아가면서까지 복잡한 정치나 권력을 쫓는 인간의 욕심을 봐야한다면 옛집을 찾는 답사길이 무척이나 더디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가 다르니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인 것이다. 그러니 옛집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을 내가 빌려보았다는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문득 양동마을 풍경이 떠오른다. 좀 더 높은 구릉으로 올라앉았던 양반의 저택과 그 저택에 숨겨진 집안의 알력... 그나저나 나는 獨樂堂에 언제나 갈꼬?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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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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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럴 것이다. 유홍준이라는 이름 석자만으로도 우리는 문화유산을 떠올리게 되는... 아는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던 날이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많은 사람이 답사라는 말을 어색해하지 않는 듯 하다.  '人生到處有上手' 라는 말로도 유명해졌다.  인생길에서 숨어있는 고수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라는데, 저 글을 볼 때마다 엉뚱하게도 나는  '三人之行 必有我師' 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다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學問의 이치일터다. 답사를 하면서 내가 배웠던, 지독히도 아프게 다가왔던 화두중의 하나다.  정말 그랬다. 아는 만큼 보였고, 내가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만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경계했다. 수많은 답사기를 보면서 그가 느꼈던 것에 나의 감정을 일치시켜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저자의 말처럼 세상에는 많은 上手들이 있어 그들이 주는 느낌 또한 각각이다. 그러니 단지 참고할 뿐이다. 저렇게 앞서 나가는 발길이 있고  먼저 느끼는 시선과 가슴이 있어 그 느낌이 내게도 전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건 어쩌면 행복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답사 초보자다보니 기존의 정보에 많은 의지를 하게 된다.  알고가야 보이는 까닭이다. 알고가야 하나라도 더 찾아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언제쯤이면 저 高手들의 경지를 이해하게 될까?  우연한 기회에 나를 찾아온 이 책은 나에게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의 답사에 대한 일종의 회상형식처럼 보여 다가서기가 쉬웠다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답사의 高手도 이렇게 여러 각도로 보는구나 싶었다.  그의 일상에서 볼 수 있었던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 참 좋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또다른 욕심을 볼 수 있었다.  욕심이란 게 사랑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찾아가  시선 마주치고 가끔은 만져도 보고 근처에 흩어져 있던 이야기도 하나쯤 들어보고... 그러고 싶은 곳이 너무나도 많다. 아주 작은 것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나만의 욕심인데 늘 아쉬움만 남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답사기는 꾸미지 않아 좋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굳이 멋지게 보이려하지 않았는데도 멋지다. 자신이 해왔던 일,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 얼만큼이나 진행되어졌는지 궁금한 일, 이렇게라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되던 일, 끝내는 하지 못해 미련을 남겨두게 된 일... 소소한 그의 생각과 일상을 이 책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뜬금없지는 않다. 말의 의미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것과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곳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많다.  저자의 말처럼上手나 高手는 유명하지 않아도 된다 . 이것이다 콕짚어 말하지 않았어도, 세상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퍼뜨리지 않았어도 내게 전해주는 느낌은 분명 다를테다. 유명해서 오히려 손해보는 곳도 사실은 많다. 제 나름대로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꾸며진 모습만으로 찾아오는 사람에게 보여지는 그런 곳들 말이다. 이름이 나지 않아 제 실속을 챙길 수 있었던 경우도 종종 있다. 가끔 그런 곳엘 들르는 기회가 오면 횡재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은 유명해지기 위해 땅을 헤집어 흠집을 내고 생뚱맞은 옷으로 갈아입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진정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이 부러웠다. 갈 길이 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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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락 - 즐기고(樂), 배우고(學), 통(通)하다
윤승일 지음 / 중앙위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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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고 조금은 뜨악한 마음이 앞섰다. 이 책, 너무 딱딱한 거 아니야? 싶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樂' 이라는 딱 한 글자만으로도 이렇게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구나...했다.  간단하게 즐기고(樂), 배우고(學), 통(通)하다 라는 문장을 앞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사실 '古典' 이란 말은 오래된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래서 왠지 머리 아플 것 같고, 그래서 왠지 가까이 가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이 책, 복잡한 설명 다 집어치웠다.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삶속에 흥건하게 젖어들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풀어놓고 있다. 漢字가  어려울까봐 친절하게 글자마다 풀이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사자성어라고 말하는 고사성어는 주로 중국의 古事에서 유래된 내용들이다. 그 짧은 말속에 사람의 상황이나 감정, 또는 심리와 같은 것들을 숨겨놓았다. 그래서인지 대화중에 이런 고사성어를 잘 버무려 말하는 사람이 달리 보이는 것도 이유가 있다. 책을 펼쳐 목차를 훑어내리다가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책속에 담긴 古事가 340여개나 된단다.  얼핏 생각하면 따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자기계발서의 뻔한 말에 비하면 一石二鳥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라면 장점일게다.

생겨난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들을 말하는 게 '古典' 이라고 한다. 문학도 있고 예술도 있다. 오랜기간동아 꾸준하게 팔린다는 'steadyseller' 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 나라마다 내세우는 고전도 있을 것이고, 동서양의 고전이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전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무슨 통과의례처럼 읽어야했던 세계고전소설도 있긴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학생들이 읽어야 한다는 한국고전소설도 만만치않게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는 그야말로 '故事成語', 즉 중국의 古事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漢字가 따분하고 관심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풀이하는 내용을 옛날 이야기 삼아 들어준다면 좋을 듯 하다.

솔직히 나는 중국고전을 그다지 많이 읽지 못했다. 겨우 몇 권쯤? 그것도 쉽게 풀이해 놓았다는 책만을 보았을 뿐이다. 숱한 책중에 <논어>, <사기>, <후한서>, <장자>, <삼국지>등에서 추려냈다고는 하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는 있다.  <삼국지>나 <초한지>와 같이 소설로 다가왔던 책만큼 쉽지 않다는 게 맞는 말일 게다. 그 많은 고전이 우리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주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술을 가르쳐준다해도 그 뜻을 음미하고 새기지 않는 한 내 것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더딘 시간이었지만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렇게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 실감나게 옛날이야기 하듯이 구수하게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피식 웃어보기도 했다. 

"옛날 옛날에~~" 처럼 비록 정감어린 말투로 시작되지는 않지만 새길수록 멋진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까? 그리고 그 문제의 몇 퍼센트쯤을 해결하며 살아왔을까?  예정에도 없었던 문제와 선택앞에서 얼마나 많이 갈등하고 아파하고 눈물흘리며 가슴을 쥐어 뜯었을까?  그런 순간들을 얼마나 원망했었는지... 그럴때마다  무언가 하나쯤 위안 삼을 수 있는 게 필요했을테다. 그럴 때 이런 책속의 말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면 그것도 괜찮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漢字와 가까이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 글자의 유래를 알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地名에 얽힌 배경을 알게되면 그 곳에 대한 생각과 시선이 달라지듯이 평소 귀로만 들어왔던 많은 부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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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황제 -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도쿄 방문기
박영규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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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도 일본처럼 왕실이 살아남았다면 어땠을까?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서 존재할지, 아니면 그 옛날처럼 실세의 존재로 서있을지... 황제를 위한 나라와 백성을 위한 나라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도 생각해본다. 어느날엔가 역사강의를 들으면서 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대한帝國에서 대한民國으로 탈바꿈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상황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던...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렇게 우리의 상황은 급변하는 물살 위에서 늘 위태로웠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텨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또 무엇일까?  가끔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 물음표중의 하나다. 이 책을 보고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황제였지만 한 번도 황제였던 적이 없는 사람, 궁궐에 살았지만 한 번도 군림해본 적이 없는 사람 이었다는, 어찌 들으면 너무나도 나약하기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은 작가의 첫마디가 이상하리만치 강한 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으며 이유없는 상실감에 빠지게 했던 그였기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었던 작가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한줄기 위안의 빛으로 사그라들 수 있는 어둠속의 과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져버리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그랬기에 그럴수도 있었을거라고 가끔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사실이 아닌 환상일지라도.

건청궁을 찾았던 답사길의 먹먹함을 되새김한다. 지금은 乙未事變으로 불리워지는  明成皇后弑害事件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곳이었지만 넓지 않은 공간속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 전해져오던 그 절절함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 넓은 경복궁을 앞에 두고 작은 건청궁을 따로 지어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가고 싶었을 한 가정을 떠올려 보았었다. 명성황후가 머물던  옥호루에 나도 마음으로 올라서 보았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왕과 왕세자가 머물던 坤寧閤이 바로 옆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속에서 마치 변명처럼 들려오던 순종의 정신적인 충격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단 몇 초면 건너갈 수 있는 거리... 겨우 그 거리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가슴 태우며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던 父子의 소리없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아 다시 생각해도 이렇게 마음 한쪽이 시려온다. 왕이었으나 평민이기를 바랬다던 그 아픔, 그러나 평민이 될 수도 없었던 허울뿐인 황제.. 어쩌면 황제라는 틀이 하나의 올가미가 되었을 한 남자의 시간들을 우리가 모른척 외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시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

머리말중에 이런 말이 보이긴 한다. 그를 기피하고,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했던 나 같은 이들에게 그를 이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그 문장을 바라보면서 어쭙잖은 생각을 하나 한다.  내게도 말할 수 없이 심한 상실감을 안겨주었던 역사속의 이름 하나, '선조'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나서서 이렇게 변명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말이다. 시대적인 배경이 다르다할지라도 고집스럽게 그를 한 사람의 남자로 보고싶어하지 않는 나의 치우친 마음이 안타까워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주제였지만 나름대로 말하고자하는 바를 읽을 수 있어 괜찮았다. 누가 되었든 어떻게 보느냐,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그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유길(영친왕)과 평길(의친왕)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순종, 그의 이름은 길 위의 황제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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