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만다라
Carlton Books 엮음 / 담앤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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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Mandala는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 크리스트에서 '원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근 'manda'는 '참' 또는 '본질'을 의미하고, 접미사 'la'는 '소유' 또는 '성취'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변한다'는 의미로 말하기도 한다. 본질이 여러가지 조건에 의해 변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 하나의 불화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만다라의 어원은 인도의 고대어에서 유래되었으나 상징으로서의 만다라는 기독교의 십자가, 원불교의 일원상, 불교사찰의 표시인 만(卍)자 외에도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정신 속에 있는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들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원상을 통하여 우리 정신속의 여러 차원과 합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으로써 지혜를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다라의 정의는 중심과 본질을 얻는 것, 마음속에 참됨을 갖게 함을 원만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주 오래전에 TV를 통해 티베트 승려들이 만다라를 만드는 장면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었다. 색색의 모래를 채우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색의 아름다움이 신비롭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에 집중하는 승려들의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었다. 몇년 전, 내 안의 또다른 나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만다라를 통한 심리치료를 배운 적이 있었다. 만다라를 미술치료에 적용하는 목적은 만다라를 통하여 분열된 자신을 통합하고 자신의 내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을 집중함과 동시에 이완을 할 수 있으며, 불안이 사라지고 긴장이 완화되는 효과를 갖게 된다. 소란하고 산만한 외부 세계를 떠날 수 있게 해 주고, 한계를 받아들이고 필요한 것을 수용하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는 말이 참 좋았다.

 

승려들에게는 예술이 아닌 수행의 과정으로 보는 까닭에 며칠이 걸릴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수도 있다는 만다라. 이 책속에서 보여주는 만다라 문양 중에는 작고 복잡한 것도 많고 단순한 것도 있다. 오랜만에 만다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정성을 다해 힘겹게 만든 모래 만다라를 스스로 없앰으로써 세상 모든 존재가 영원불변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심오한 것까지 바랄 수는 없겠으나 잠시의 평온을 느끼기에는 그만이다.

색을 칠할 때 안에서부터 시작되면 에너지의 확산을, 밖에서부터 시작되면 에너지의 죽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단, 처음의 방법이 안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면 그 방법을 지속하는 것이 좋다고 배웠다. 문양이나 색이 상징하는 바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만다라에 분홍을 사용하는 것은 섬세한 감정과 강한 보호욕구를 나타내는 것이라거나, 밝은 파랑은 사랑과 보살핌이 긍정적으로 반영된 것이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것까지 신경써가며 만다라를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그저 예전에 배울 때가 생각나서 해보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만다라에 빠져있다. 그저 느껴지는대로 색을 칠하며 만다라를 만드는 시간만큼은 이 세상에 오로지 나하나뿐이다.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형상을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잠자기전 조금씩 만다라를 만들어가는 짧은 시간이 참 좋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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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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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The Countess 백작부인' 이다. 그런데 앞에 쓰인 '피'라는 말때문인지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하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여인. 그런데 우연인지 얼마전 TV에서 이 여인에 관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처녀들을 죽여 피로 목욕을 했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가, 를 묻고 있었다. 어쩌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여인은 아니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이쪽의 지역일까? 드라큘라 백작도 그렇고 바토리 백작부인도 그렇고... 무엇이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지금도 중세의 모습과 19세기 말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대도시의 모습과 시골도시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부다페스트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었을 당시 헝가리는 터키의 지배 지역과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지역,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공국 지역으로 국토가 분열되어 있었다. 터키지역은 이슬람이었고 합스부르크가 지역은 카톨릭이었던 까닭에 개신교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 책속에서도 종교간의 갈등이 살짝 언급되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주세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심히 지나쳐갔던 중세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전쟁의 풍랑속에 모든 것을 맡겨야 했던 당시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삶을.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은밀한 거래속에서 사랑과 배신이 난무하고 승리과 패배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각설하고 바토리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거짓이라고 본다. 실존했던 여인의 이야기이면서 끔찍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보니 살인마로써 부각되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훨씬 더 클 것이다. 백작부인이 체이테 성의 탑에 갇힌 채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부드럽게 잘 읽힌다. 어느 한군데 걸림돌이 없어 읽는 느낌이 참 좋았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던 당시 여인들의 삶은 고달팠다. 더구나 외세의 침략으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던 귀족이란 신분은 가진 것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함마져 느끼게 한다. 작고 순수한 소녀에서 잔혹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실감난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지켜야만 했을 사랑과 자신의 가문을 위해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는 당위성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하인들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절박함이 때로는 하인들의 목숨마저 빼앗게 된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거라는 가정교육도 그렇지만 하인을 다루는 그 당시의 처벌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 책속의 체이테 성에르체베트 바토리 백작 부인의 집으로,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1575년 육군 사령관이었던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로부터 결혼 선물로 이 성을 받았다. 남편이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에르체베트가 영지를 관리했다. 에르체베트에게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초기에는 성에 고용되어 일하던 지역 농부의 딸이었지만 나중에는 상류층 집안의 딸들이었다는 말이 보인다. 남편이 죽은 후에 더욱 심해진 그녀의 광기가 마침내 사회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티아스 황제가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귀족 신분과 가문 간의 유대를 생각해서 에르체베트는 처형되지 않는 대신 자택 감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4년 후에 성에서 죽었다. 체이테 성은 헝가리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약탈당해 쇠락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죽인 희생자들의 수다. 36명이라는 사람도 있고 많게는 650명이라고도 말한다. 과연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정말로 희대의 살인마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주장하는 대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희생양이었을까? 책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faction 이니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이비생각

 

오늘날 체이테 성은 폐허가 되어 남아 있으나 이 언덕에 희귀한 식물이 많기 때문에 주변은 국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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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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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내게 무언가를 찾아 읽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을 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처럼 되어버린 것, 詩 한편 읽기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두 편도 좋고 세 편도 좋다. 익히 알고 있었던 시인의 이름이나 시의 제목이라도 눈에 들어오게 되면 가끔 들어오는 지하철을 무시할 때도 있다. 그냥 그 시를 읽는 순간이 좋아서. 왜 좋으냐고? 그냥 좋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느낌이라서 뭐라고 말해 줄 수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좋아서. 그날의 상태에 따라 같은 시라도 느낌이 강한 날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앞에 머물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한 편의 시가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그림은 또 어떨까? 그림 역시 다르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해 그림을 모른다. 한마디로 그림 볼 줄을 모른다는 말도 될게다. 언젠가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던 선생님과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전시된 작품들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를 몰라 그 작품들에 대해 선생님께 물었던 기억이 있다. 무엇이 느껴지길 원해요? 그냥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정답일거예요... 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오래도록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린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다. 그림은 볼 줄 모르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이 한없음에 놀랐던 작품이기도 하다. 채워지지 않았으나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그림이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의 형식은 진경산수화쪽인 듯 하다. 자신만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의도를 숨겨놓은 그림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깔끔한 그림형식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추상화라는 개념은 아무런 느낌조차 전해주질 못한다. 다행인지 이 책속에서는 추상화가 보이지 않는다.

 

첫 작품으로 소개해 준 '장밋빛 인생'이란 그림이 참 좋았다. 보자마자 새콤달콤한 맛이 떠오르는 그림이라는 글쓴이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전체적인 색감이 다소 유치해보일 수 있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리도 상큼함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을 위한 그림으로는 제격이다.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림은 고전파, 낭만파, 야수파, 인상파... 장르도 여러가지다. 작품마다 붙여준 화가에 대한 짧은 소개글쓴이가 부록처럼 껴넣은 미술사조를 한번 더 보게 된다. 특별하지 않은 글쓴이의 일상이 하나의 작품과 만나는 순간처럼 너무 멀지 않은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명화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글, 같은 그림일지라도 사람마다 느낌은 다르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날의 상태에 따라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 정말 명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앙리 마티스의 '노을지는 창가의 젊은 여인'과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이름도 어려워라!)의 '창가의 여자', 알프레드 스티븐스의 '은하수' 라는 세 점의 그림을 다시한번 찾아서 보았다. 세 그림 모두 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마티스의 그림은 제목처럼 노을지는 풍경이 창 밖으로 보이고,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는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창 밖 풍경이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티븐스의 그림속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창 밖의 풍경은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듯한 밤바다의 풍경이다. 살풋 웃음이 난다. 이 세 점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명화로 일상을 사유하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책표지의 글이 부럽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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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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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이름이 창힐과 허신이 아닐까 싶다. 창힐과 허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찾아보니 창힐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황제의 신하로 모래에 새겨진 새나 동물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람이고, 허신은 <설문해자>라는 책의 저자였다. <설문해자>는 말 그대로 문자를 풀어서 해석했다는 뜻이다. 창힐은 도교사상에서 네 개의 눈을 가진 신으로 표현되는데, 눈이 네 개여서인지 사물을 보면 순식간에 그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문창제국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설문해자>는 한자 하나하나에 대해 본래의 글자 모양과 뜻, 그리고 발음을 종합적으로 해설한 책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양이나 뜻, 그리고 그것을 읽는 소리에 대해 해설한 책으로 중국 최초의 字典이라고 한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약 4천 자 정도의 한자를 알고 있어야 무리없이 신문을 읽을 수 있으며, 고전을 읽으려면 최소한 7천 자 이상의 한자를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렇다면 지금 우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의 기원은? 문자의 종류는? ... 문득 궁금해진다. 문자는 초기의 그림문자(반구대암각화와 같은)를 시작으로 으미를 가진 단어를 표현하는 표의문자와 소리를 표현하는 표음문자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표의문자는 보통 그림문자와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 만든 상형문자를 말한다. 한글이나 로마자의 경우에는 표음문자에 속하고, 한자는 대표적인 표의문자다. 이 책은 아마도 허신의 <설문해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자면 일단 갑골문자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중국 은나라때 점치는 데 사용했다는 귀갑수골문자라고도 한다는 갑골문자가 거북이 등딱지나 짐승의 뼈를 이용한 점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하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오직 은나라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 문자의 수가 3천자 정도인데 그 중에서 해독된 것은 절반정도라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제사나 군사, 농경이나 왕의 거둥, 안부에 관한 것이 많이 보여서 은나라 시기의 정치나 사회문화를 알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니 아직 해독되지 않은 절반의 문자가 앞으로 들려줄 수많은 이야기가 기대된다.

 

책표지에서 보이는 그림문자처럼 책을 펼치면 만날 수 있는 상형문자가 볼수록 신기하다. 지금까지 접해왔던 한자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담아낸 그림같은 문자들의 생김새가 이채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글자의 원형이었던 그림문자들을 보면서 하나씩 상상해가는 맛도 꽤나 좋았다. 더구나 이 책속에서는 처음의 문자에 담았다는 인간의 심리적인 면이나 사회상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림 혹은 문자속에 사랑이나 미움을 담기도 했으며 귀하고 천함을 담기도 했다. 성애의 표현이나 죄를 응징하는 벌의 표현까지 너무나도 다양했다. '醢' 자는 육장 '해'자다. 젓갈이나 형벌이름이란 뜻도 있지만 절이다, 삶다라는 뜻도 있는 글자이다. 하지만 갑골문에서 보면 음식이 아니라 혹형의 의미였다. 옛글자의 형태를 살펴보면 큰 절구 안에 죄수를 넣어놓고 회자수가 산 채로 사람을 절굿공이로 내리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이 보인다. 얼마나 무서운 글자인지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走' 자와, '奔' 자는 똑같이 달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약간 서두를 때는 '走'자를 쓰고, 속도를 높여 미칠듯이 달릴 때는 '奔'자를 쓴다고 한다. 옛글자의 형태를 봐도 '走'자에서는 사람의 발을 하나만 표현했지만, '奔'자를 보면 양손을 크게 휘두르며 달리는 사람의 발이 세 개로 표현되었으니 지금봐도 그 뜻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밖에도 정말 많은 그림문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을 읽던 중에 이 책의 이해를 돕지 않을까 싶어 한자의 조자() 원리라는 六書에 대해 찾아보았다. 六書는 한자를 만들고 실제로 응용하는 지사(), 상형(), 형성(), 회의(), 전주(), 가차() 등을 가리킨다. 지사()는 추상개념을 점과 선을 이용하여 도형화한 것이다. 상형()은 물건의 형태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림이 근본이 되며, 하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글자를 쪼개는 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 상형자는 나중에 복잡한 뜻을 가지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구성요소로, 일반적으로 부수로 사용된다. 획수가 비교적 많은 부수는 거의 대부분이 상형자다. 형성()은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한쪽이 뜻을 나타내고 다른 한쪽이 소리를 나타낸다. 의미를 나타내는 부분과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여러 가지 한자를 만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한자에서 형성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회의()는 같은 글자나 서로 다른 글자를 합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전주()는 한 글자의 뜻을 다른 뜻으로도 쓰는 방법으로, 쓰기는 같은 글자를 쓰되 다르게 읽고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가차()는 말로는 존재하나 문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글자를 문자로 나타내기 위해 소리가 같은 글자의 글자꼴을 빌려쓰는 것을 말한다. 이 책속에서도 六書에 관한 말들이 많이 보인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앞서 말했던 <설문해자>의 형식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랬다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자를 쉽게 풀이해놓았다는 책을 보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약간의 맛을 보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설문해자>를 접해보고 싶다. 이런 저런 사설없이 온전히 한자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연습장을 펴고 글자를 써가며 다시한번 읽어봐야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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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엮음 / 채륜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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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무심결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모던보이'나 '모던걸'이란 말이다. 아마 영화제목도 있을 것이다. 'modern' 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현대의, 근대의, 현대적인' 과 같은 의미로 나온다. 당시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최신식을 좇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터다.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것에 심취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의 바램은 시대가 아무리 바뀐다해도 변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전통이란 것이 그저 구태의연한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다. 모든 지나난 것들은 역사가 된다고 했다. 그 역사를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일테니 막연하게나마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근대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대한제국의 시기다. 마치 옛날이야기 하듯 들려오는 그 시대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세상이 아니었던 까닭에 당시 신문물에 대한 의식은 상당히 놀랍고도 괴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급변하는 역사의 흐름을 겪어냈다는 말일 터다. 어쩌면 수면 아래 잠겨있던 격동기의 폐해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척결해야 한다고 일어났던 중국의 '문화대혁명'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 우리도 격동기를 거쳐왔음이다.

 

책의 서문을 보니 전통문화가 변화하여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과정, 그 장면을 포착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라는 말이 보인다. 첫번째로는 서양식 의복과 화장술의 유입으로 외모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두번째로 아이들의 놀이문화와 더불어 어른들의 놀이문화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세번째로 지금 우리에게 당연시되는 일상의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재미있는 사진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만들어진 전통>이란 책이 생각났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왔던 그 '전통'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커다란 허상이었는지를 밝혀냈던 책이었는데,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말이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었다. 집단적으로 행하는 기념 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말은 정말 놀라웠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풍속 중에서 애나 어른이나 모두 같이 즐겼던 연날리기를 통해 당시 아이들의 모습과 지금의 아이들 모습을 비교하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족끼리 혹은 친구와 연을 만들고, 아무리 추워도 동네 언덕에 모여 함께 웃고 떠들며 연을 날리던 아이들이 자연과 함께 하며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소통의 부재'라는 말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어떤가. 방안에 틀어 박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놀이문화속에 빠져 있다. 바깥 세상과의 소통보다는 자신만의 생활을 선호하는 지금의 아이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 것이 옳은지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제대로 이름을 찾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동물원으로 격이 추락했던 창경궁의 역사를 보게 된다. 나 어릴적에도 '창경원 밤벚꽃놀이'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던 것 같다. 한때 벚나무를 일제의 잔재라 하여 닥치는대로 베어내기도 했지만,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진해에 심어진 벚나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서 신혼여행이 보편화된 시기가 1970년대 이후라는 말이 이채롭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혼례식을 마치면 남산을 한 바퀴 돌거나 가까운 곳에 가서 1박 하는 정도가 전부였단다. 1970년대에 예식장에서의 결혼이 일반화되면서 경주나 설악산, 혹은 제주도등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전통 혼례에는 없는 의식이 신혼여행이었다는 말이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서구에서도 신혼여행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말도 놀라웠는데,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 유입된 문화의 한 단면이 신혼여행이었다는 말은 더 놀랍다. 여기저기에서 일제 식민 정책에 의해 생겨난 문화의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어도 우리 근대문화를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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