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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평점 :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었다. 리스트에 올려놓은지도 꽤 되었는데.. 루스 베네딕트라는 이름보다 먼저 다가왔던 책이었는데.. 문화인류학이라는 분류를 보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게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되어있는 문화라는 말의 정의가 너무 어렵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의 생활 역시 문화의 한 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겨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굳이 패턴이라는 말을 썼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왔던 의문점이었다. 그 말의 뜻처럼 어떤 유형이나 틀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제로 예를 들었던 푸에블로 부족, 도부족, 콰키우틀족.. 이들 세 부족의 삶의 형태를 보면서 그들만의 틀을 볼 수 있기도 했고, 왠지 지금의 현대인들이 그들의 틀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와 또다른 모습의 일상을 만들어 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인간은 본능이 아닌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만들어내는 관습들은 지금의 우리가 볼 때, 아니 책을 읽는 내가 볼 때에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자연과 하나된 채로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모습에서조차 내가 느끼는 이질감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원시부족이었을까? 하던 내 의구심에 작가는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단순한 문화의 객관적 사실들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파악하기 까다롭고 잘 증명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원시부족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전통적 관습의 영향 아래 개인적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 부족의 일상적인 면을 한번씩 훓어본다면 현대인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이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개인보다는 단체가 우선적으로 취급되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단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했고, 편파적이지 않은 중간을 택함으로써 그들 무리에 그 어떤 이상징후가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주술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약물이나 알코올 등에 의한 환각적인 쾌락 따위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이나 죽음, 장례식등을 치루면서도 그것에 의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이 오래가지 않도록 신경썼고, 그런 개인적인 감정들로 인해 단체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권력이나 폭력을 경멸했고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여 다스린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삶의 형태였다.
두번째로 도부 족이다. 악의와 배신을 미덕으로 여긴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모든 것을 주술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였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적개심을 드러내야만 하는 생활패턴속에서 당신은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얌(고구마의 일종)을 심어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조차도 그랬다. 크고 실한 열매가 열린다해도, 신통찮게 열매가 열린다해도 그것은 모두가 다 남탓이었고 남의 주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 하여 죽은자와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비난이 돌아갔다면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말이다. 부부사이에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체면치레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 그들에게는 살인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번째로 밴쿠버 섬의 콰키우틀 족이다. 그들의 문명은 해안을 끼고 발달했다. 그들에게는 식인문명도 있었고 푸에블로 부족과는 정반대적인 입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경쟁하기를 좋아했고 목이 마를 정도의 자화자찬,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자랑 일삼기,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을 보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마는 그들의 생활형태를 보면서 나는 왜 지금의 현대인들을 생각해야 했는지... 나보다 나은 상대방과의 결혼을 통해서 귀족이 되고자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그들... 어쩌면 과시욕이야말로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부족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디오니소스적 인물과 아폴로적 인물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스 신화속의 디오니소스는 바카스라고도 하는 술의 신이다. 광란적인 의식으로 숭배되었다는 디오니소스.. 국가의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한다는 신이 아폴론이다. 특히 아폴론은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주는 힘을 갖고 있는 신이라고 하니 어찌보면 디오니소스와는 반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속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과 이성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들 세 부족의 모습속에는 분명히 우리들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혹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나 문화의 형태를 그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 세 부족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상태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류학에 대한 설명속에서 다른 문화들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걸 보면서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사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 나 아니면 너,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오른쪽이 있으면 왼쪽도 있고, 바름이 있으면 어긋남도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는... 수도없이 많은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논리가 '나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너무 멀리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왠지 우리의 모습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스 신화속에 나오는 강도,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나가는 사람을 강제로 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길이가 맞도록 발을 잘라내거나 발을 잡아당겨 늘였다는.. 따지고 보면 아폴로적인 삶의 형태로 예시되었던 푸에블로 부족이나, 디오니소스적인 형태로 예시되었던 도부족, 콰키우틀 족의 모습도 이상한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의 문화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뿐. 작가의 말처럼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고정된 타입은 없다. 사회적 상대성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교리 라는 소제목처럼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문화인류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루스 베네딕트의 작품 <국화와 칼>을 꼭 한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처럼 나에게는 생소하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테지만)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