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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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었다. 리스트에 올려놓은지도 꽤 되었는데.. 루스 베네딕트라는 이름보다 먼저 다가왔던 책이었는데.. 문화인류학이라는 분류를 보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게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되어있는  문화라는 말의 정의가 너무 어렵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의 생활 역시 문화의 한 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겨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굳이 패턴이라는 말을 썼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왔던 의문점이었다.  그 말의 뜻처럼 어떤 유형이나 틀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제로 예를 들었던  푸에블로 부족, 도부족, 콰키우틀족.. 이들 세 부족의 삶의 형태를 보면서 그들만의 틀을 볼 수 있기도 했고,  왠지 지금의 현대인들이 그들의 틀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와 또다른 모습의 일상을 만들어 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인간은 본능이 아닌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만들어내는 관습들은 지금의 우리가 볼 때, 아니 책을 읽는 내가 볼 때에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자연과 하나된 채로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모습에서조차 내가 느끼는 이질감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원시부족이었을까? 하던 내 의구심에 작가는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단순한 문화의 객관적 사실들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파악하기 까다롭고 잘 증명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원시부족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전통적 관습의 영향 아래 개인적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 부족의 일상적인 면을 한번씩 훓어본다면 현대인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이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개인보다는 단체가 우선적으로 취급되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단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했고, 편파적이지 않은 중간을 택함으로써 그들 무리에 그 어떤 이상징후가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주술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약물이나 알코올 등에 의한 환각적인 쾌락 따위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이나 죽음, 장례식등을 치루면서도 그것에 의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이 오래가지 않도록 신경썼고, 그런 개인적인 감정들로 인해 단체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권력이나 폭력을 경멸했고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여 다스린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삶의 형태였다. 

두번째로 도부 족이다.  악의와 배신을 미덕으로 여긴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모든 것을 주술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였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적개심을 드러내야만 하는 생활패턴속에서 당신은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얌(고구마의 일종)을 심어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조차도 그랬다. 크고 실한 열매가 열린다해도, 신통찮게 열매가 열린다해도 그것은 모두가 다 남탓이었고 남의 주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 하여 죽은자와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비난이 돌아갔다면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말이다. 부부사이에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체면치레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 그들에게는 살인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번째로 밴쿠버 섬의 콰키우틀 족이다. 그들의 문명은 해안을 끼고 발달했다. 그들에게는 식인문명도 있었고 푸에블로 부족과는 정반대적인 입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경쟁하기를 좋아했고 목이 마를 정도의 자화자찬,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자랑 일삼기,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을 보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마는 그들의 생활형태를 보면서 나는 왜 지금의 현대인들을 생각해야 했는지...  나보다 나은 상대방과의 결혼을 통해서 귀족이 되고자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그들... 어쩌면 과시욕이야말로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부족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디오니소스적 인물과 아폴로적 인물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스 신화속의  디오니소스는 바카스라고도 하는 술의 신이다. 광란적인 의식으로 숭배되었다는 디오니소스..    국가의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한다는 신이 아폴론이다.  특히 아폴론은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주는 힘을 갖고 있는 신이라고 하니 어찌보면 디오니소스와는 반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속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과 이성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들 세 부족의 모습속에는 분명히 우리들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혹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나  문화의 형태를 그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 세 부족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상태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류학에 대한 설명속에서 다른 문화들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걸 보면서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사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 나 아니면 너,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오른쪽이 있으면 왼쪽도 있고, 바름이 있으면 어긋남도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는... 수도없이 많은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논리가 '나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너무 멀리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왠지 우리의 모습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스 신화속에 나오는 강도,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나가는 사람을 강제로 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길이가 맞도록 발을 잘라내거나 발을 잡아당겨 늘였다는..  따지고 보면 아폴로적인 삶의 형태로 예시되었던 푸에블로 부족이나, 디오니소스적인 형태로 예시되었던 도부족, 콰키우틀 족의 모습도 이상한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의 문화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뿐.  작가의 말처럼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고정된 타입은 없다.  사회적 상대성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교리 라는 소제목처럼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문화인류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루스 베네딕트의 작품 <국화와 칼>을 꼭 한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처럼 나에게는 생소하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테지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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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けんきですか...

많이 회자되어지던 말이다. 일전에 모 방송프로에서 남자배우가 강 저편을 보며 외쳐대던 장면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일본영화에 대한 느낌이 참 좋아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나와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음 깊숙한 곳의 감성까지 찾아가 울림을 주는 그 느낌이 참 좋아서 보기 시작했던 일본영화는 책으로 본 것은 어지간하면 영화로 다시 보지 않는다는 나만의 규칙을 깨뜨리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만큼 다가오는 느낌들이 참 좋았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려내는 그 감각이 좋았던 영화도 있었고 사랑을 너무 몽환적으로 그려주지 않아 어쩌면 다가가기 편했던 영화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이 대부분 좋았기에 그에 못지않게 나의 기대감도 컸을 것이다.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가 눈속을 헤쳐나오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사랑보다는 그 사랑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는 구성인 듯 하다. 겨울 산에서 조난당해 죽어야 했던 약혼자를 못내 잊지 못하던 여자는 그의 추모식날 옛연인의 집 앨범속에서 그의 옛주소를 알게 되지만 지금은 국도가 되어버렸다는 말에 아쉬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그곳으로 편지를 보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예의같은 건 아니었을까?  이미 없어져버린 주소로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야 했던 그녀의 마음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하지만 우연처럼 답장이 온다. 옛연인과 같은 이름의 발신자로부터...

사랑이라는 건 어쩌면 지나가버린 시간속에 존재하는 흑백사진 같은 건 아닐까?  사랑에 대해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본다. 사진첩을 펼쳐볼 때마다 바로 어제의 일인양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으로 다가오는 지나버린 시간속의 일들은 참.... 허망하다.  눈물같다.  어느날 불현듯 내가 알지 못한 채, 느끼지 못한 채 흘러내리는 그런 눈물같은 게 사랑은 아닐까?  이 영화속의 주인공은 차라리 옛연인의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그 사랑을 영원토록 가슴속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을 테니까...  같은 이름을 가졌던 옛연인의 동창생과 자신이 너무도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고는 알 수 없는 절박함에 괴로워했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사랑해주는 선배와 함께 옛연인이 잠들어 있는 그 산을 향해 출발한다.

되새김질 할수록 사랑은 아픔으로 다가오는 건가보다. 어쩌면 잊을 수 있는 마음조차도 사랑이라는 듯이... 옛사랑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다가올 사랑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찾아갔던 곳에서 그녀가 이렇게 외쳤지...  おけんきですか...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외쳐대는 그녀의 속울음이 나는 너무도 슬펐다. 그 밖에 또 무슨 말을 할까? 결국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온전히 갖지 못했던 그녀의 지나간 시간들이 어쩌면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바라보았던 사랑도 눈치채지 못한 채 보내야 했던 또 하나의 사랑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주인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해 방황해야 했던 사랑이 이 영화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깜깜한 밤이 너무 어두워 차라리 흔들리며 빛을 내려보내는 가로등처럼 그렇게 허황하게 서 있다.  이 편지는 당신이 간직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옛연인과 같은 이름의 동창생에게 그동안 주고 받았던 편지를 돌려보내야 했던 그녀의 서글픔이 고스란히 눈처럼 그렇게 쌓여 있었다.  잘 지내시나요?... 나도 이제 당신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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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술
딘 R. 쿤츠 지음, 양혜윤 옮김 / 세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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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하다고?  물론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을 본다면 분명 식상할수도 있는 소재다. 하지만 그 식상함을 어떻게 녹일 수 있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은 달라진다. 그 흐름속에 독자를 얼만큼 끌여들여 함께 호흡할 수 있게 만드는가는 작가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만큼이나 호흡력이 강한 작가라고 생각했었던 까닭이다. 그의 작품을 정말 오랜만에 접해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나는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숨가쁘게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어느정도는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미혼모 크리스틴은 여섯살짜리 아들 조이와 함께 행복한 쇼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차장에서 그 노인과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조이와 함께 행복한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만약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초록색으로 휘감은 노인이 느닷없이 당신앞에 나타나 당신의 아들이 악마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에 그 지저분하고 괴상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나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단연코 내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틴과 조이에게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정신적인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엄연한 현실로 찾아오는 공포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가거나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 뿐... 그래서 그들은 찾아나섰고 또하나의 동행자와 만난다. 사립탐정 찰리..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모험의 길로 함께 따라나서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이미 그들이 어떠한 여정으로 접어들런지 조금은 아는 척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정해진 순서대로 그야말로 이미 예정되어진 그 길로 그들은 갈 것이기에.. 그 모험의 과정속에는 눈물나는 모정이 숨어 있을테고 엄마와 아이를 서로 묶어두었을 단단한 믿음의 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빠질 수 없는 것, 찰리와 크리스틴의 사랑.. 긴박한 순간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날수 밖에 없을테니까. 그것도 아주 깊은... 

범인은 이미 밝혀져 있다. 단지 범인이라고 증명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 어쩌면 증거가 있어도 무형의 의미이기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만큼이나 허망한지, 사람의 마음이 얼만큼이나 간사하고 연약한지를 한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설정들이 가끔은 나를 서글프게도 하지만 신을 향한 사람의 오만함보다는 신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그 연약함이 그래도 나은 듯 싶은 것은 왜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영화 한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물론 겹쳐지는 영화의 장면들이 많기도 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오멘>이다. 악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던 그 어린 소년의 모습이 크로즈업 되어 와 이 소설속의 조이와 하나가 되어버린다. 딘 쿤츠라는 작가는 이 소설속의 작은 소년 조이에게 알 수 없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고 혹시? 하는 의문점을 남겨두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크리스틴과 찰리의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알 듯 모를 듯 묘하게 표현되어지는 조이에 대한 작가의 의구심을 모른척하고 넘어간다면 아마도 작가가 실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속에서도 잠깐 다루고 있지만 그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그들의 내면속에 들어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지마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주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쳐버릴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어불성설인 것만 같다. 사람의 내면속에는 자신도 미쳐 알아채지 못한 아픔과 그 아픔으로 인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가 들어와 그것을 어루만져 주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었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 책속의 크리스틴이나 찰리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의 기억들을 안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 기억의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며 아픔을 이겨내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참으로 놀라웠다. 섬뜩한 느낌마져 들었다. 어쩌면 이리도 표현을 잘했을까 싶었다. 황혼교단의 교주 그레이스만 보더라도 그렇다. 천년동안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기전에 악마의 씨를 말려야 한다던 그녀가 택한 것이 고작 여섯살의 어린아이였으니 더 말해 무얼할까?  그 여섯살의 어린아이를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그 깊은 내면속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딘. R. 쿤츠... 역시 멋지다. 빠른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그야말로 크게 심호흡 한번 할 시간도 없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와처스>나 <사이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동안  내심 즐겁기도 했다. 그렇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스릴러의 참맛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촉박한,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죽음의 상황에서 그야말로 기적처럼 살아나온 찰리가 묻고 있다. 혹시 조이가 초능력자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초능력자... 그레이스의 말대로 조이가 정말 악마라면?  어떤 쪽이 되었든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인가?  수많은 선택중에 우리가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그것이 항상 옳은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비생각

사족... 책제목이 아무래도 맘에 걸린다. 이 책의 어디에도 살인의 기술은 없었다. 아주 단순한 의미로 선택되어진 제목이라면 왠지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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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
한호택 지음 / 달과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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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미완성이다. 1편에 이어 2편이 나올 확률이 많아 보인다. 어쩌면 상중하일수도 있겠고 시리즈물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 한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작가의 생각에 의해 더 많은 이야기가 창조될 수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뿐이다. 책을 읽고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戀書... 누구와 누구의 연서일까? 그리고 그 연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한권의 책만으로는 그 연서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미리 예고된대로 서동요를 모티브로 삼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이야기를 한참 건너 뛴 또다른 이야기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백제 위덕왕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장이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나 영웅이 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문득 <영웅문>을 생각했다. 처음 <영웅문>을 읽었을 때의 황홀함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방대한 중국땅을 배경으로  무예의 달인으로 성장해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은근한 깊이가 참 좋았었는데 이 책속에서 주인공 장이 성장해가는 과정의 은근한 깊이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내심 기대를 걸게 만들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선문답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메타포들이 내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위덕왕과 장의 어머니 수련에 얽힌 이야기나 그의 후비 해진과의 일화는 왠지 끼워맞춘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늘어지지 않는 스토리 전개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려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름대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생각했다면 어쩌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초석을 단단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는지 중반부를 달려가면서 두사람의 이야기가 얼핏 얼핏 보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라나 백제가 아닌 왜의 땅에서 대면하는 그들의 만남과 사랑이 또한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왠지 요즘의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팩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사랑을 그려내는 작가의 손길에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 사랑이 어떻게 그려질까?  만약 이 소설이 이 한권의 책으로 끝나는거라면 그들의 사랑 역시 미완성으로 끝날테지만...

"천하다 함은 어떤 뜻입니까?"
"돼지는 천하지 않다. 생긴 모습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천하다 함은 생긴 모습 그대로 살지 못함을 뜻한다." (94쪽)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빠뜨리지 않고 나오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 뿌리깊은 반상제도의 모순성을 이 책속에서도 만난다.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의 틀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 그런 대목을 보게 되면 어쩌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진실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억지스러운 위안을 앞세워보기도 한다.  한사람의 영웅으로 태어나기 위해 장이 만나야 하는 삶의 모습은 참 다양하다. 먼저 도자기 만들고 굽는 과정을 통해 나자신을 이겨내야 하는 훈련을 하였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를 통해 세상사람들을 알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그 과정속에서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은 이슈적인 느낌이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러면서도 결코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장이라는 인물 설정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보이지 않아도 중심이 없는 것은 없다. 움직이는 것의 중심은 변한다. 변해도 중심은 몸 안에 있다. 중심이 몸을 벗어나면 그것이 무엇이든 쓰러진다. 지고 싶지 않거든 중심을 몸 안에 두고, 이기려거든 상대의 중심을 빼앗아라" (68쪽)
영웅이기에 그토록 커다란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이 시대를 살면서도 누구나 영웅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나라와 사랑하는 자신의 여자를 위하여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위치, 자기 자신의 중심을 세울 줄 알았던 장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에게 필요한 한마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흔들림이 많은 세상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가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책을 읽다보니 책속의 장면들이 그림처럼 머리속에 그려진다. 스토리가 어렵지 않게 흘러가듯이 전개되어지는 까닭일까?  하지만 눈앞에 영화처럼 그려지는 그 장면들이 있어  책속 내용이 한결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꿔 말한다면 역사소설이면서도 그다지 무게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까? 어쩌면 서동요라는 이야기가 주었던 선입견이 작용했을수도 있겠고 우리에게 너무도 많이 다가왔던 하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묵직한 맛은 없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램이 있다면 이 한권의 책으로 마무리 되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나라를 구하고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를 넘긴 채 사랑하는 여자와 길을 떠났던 장. 하지만 나라가 위급해지자 다시 왜에 있는 장에게 배를 보냈다... 라는 말로 끝을 맺은 이 책의 마지막은 뭔가 아직 할말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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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행복을 꿈꾼다.  어떤 상황이던간에 그것이 행복으로 마무리 되기를 원한다. 그 행복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불행이 온다한들 나의 행복을 밀어낼 수 있을만큼의 용기는 없을 것이다.  여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렇다. 저마다 꿈꾸는 행복의 크기가 달랐고 저마다 생각했던 행복의 끝이 달랐다. 그래서 문제였다. 오직 나하나만을 생각했었던 행복이 그 행복으로 엮여져 있을 사람들에게는 아픔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서민기 (최민식)...  은행원이었지만 지금은 실직상태다. 아내도 있고 5개월 된 딸 서연이도 있다. 조금 불안하지만 헌책방의 구석진 자리에서 주인장의 구박을 받으며 연애소설을 읽는 재미도 괜찮다. 시간되면 맡긴 아이를 찾으러 가고 퇴근해서 오는 아내를 기다리면 된다.  이 남자를 보면서  쫓기듯 살았던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심리를 원하고 있었을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의 아내가 충분히 생활을 이끌어갈만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생활속에 서서히 젖어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날 아내의 불륜을 눈치채게 되고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 아내에게 그가 원했던 것은 아이에게 '좋은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좋은 아내'는 이미 포기했다는 말일수도 있겠다. 누구나 한번쯤은 부정하고 싶은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않다고 생각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가 꿈꾸어 왔고 지금의 그가 꿈꾸는 해피앤드는 무엇일까?  

최보라 (전도연)... 아마도 영어학원 원장이지 싶다. 여자로써는 나름대로 커리어 우먼이다.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대학시절 애인이었던 남자와 우연하게 재회를 하게 되고 그들의 불륜은 시작된다. 아니 이건 순전히 세상속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불륜이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결코 불륜이라는 말이 용납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고 5개월 된 딸이 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떠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게다. 단지 옛사랑의 그림자에 푹 빠졌을 뿐이다. 단지 옛사랑이 전해주는 그 달콤함이 좋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렇게 즐길 수 있다는 순간 자체가 그녀에게는 일탈의 기쁨쯤으로 느껴졌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남편에게서 그녀의 불륜에 대한 낌새를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안스럽다. 이미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거, 생각처럼 그렇게 쉽진 않을테니까. 그녀는 왜 그런 사랑을 꿈꾸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그렸던 사랑의 해피앤드는 어떤 것이었을까?

김일범 (주진모)... 오피스텔에서 혼자 산다. 우연히 만난 대학시절의 애인에게 모든 걸 올인했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무엇이라도 줄 것같은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그는 나름대로의 일상을 만들어 간다. 그녀의 물건을 사고 그녀의 아이를 맞아 들일 준비도 하면서.. 착각일까? 아니면 집착일까?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착각도 아니고 집착도 아니라고. 오직 순수한 사랑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어찌보면 착각과 집착을 만들어내는 게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겠다는 걸 불륜의 남자와 여자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려고 하는 애인을 바라보면서 그는 아마도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보일리가 없다. 결국 선을 넘었고 그녀의 아파트까지 찾아가고 말았다. 그는 단지 옛사랑을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꿈꾸었던 해피앤드가 너무 슬프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해피앤드...  서로 다른 해피앤드는 이미 끝났다. 아픈 아이를 안고 돌아오던 남편 서민기는 아파트 복도에서 포옹하고 있던 두사람을 보면서도 '좋은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을 것이다. 아주 간절하게.. 하지만 김일범은 끝내 그녀 최보라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론은 죽음이다.  두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남편 서민기는 살인을 계획하고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살인현장에서 발견되는 김일범의 체모... 이 모든 게 사랑했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면 모순일까?  홀로 남은 남편 서민기가 욕실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던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사랑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한 남자의 해피앤드만 남았다. 그의 해피앤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최민식... 그가 하는 연기는 참 능청맞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에게는 《올드보이》의 이미지가 너무 깊게 각인되어진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 아내를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올드보이속의 최민식을 떠올린다. 특별히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닌데 그저 그가 채워주고 있는 장면들은 꽉 차 보인다. 이렇다하게  돌출되어진  장면도 없어보이는데 그가 그 영화속에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드신... 파격적이다. 전도연과 주진모의 배드신은 단 두 번뿐이었던 것 같은데 상당히 인상깊다. 대역배우를 썼든 직접 연기를 했든 그건 상관없다. 밀회를 즐기는 그들만의 환희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애인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했던 그녀의 질투심, 그녀의 질투심이 불러 일으킨 그 남자의 착각과 집착 또한 잘 그려져 있다. 세 배우의 연기... 정말 멋졌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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