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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왜 이렇게 느닷없이 김 훈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는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이나 강한 여운으로 내게 남겨지는 것일까? 세상이 알아주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은 사실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그것도 아니라면 행여라도 하는 마음으로 <남한산성>이라는 작품을 집어들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흔한 베스트셀러 작품이라는 걸 읽어봤다는 내색을 하고 싶었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남한산성>을 대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관리들의 시점을 또 만나겠거니 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던 내게 보여진 작품속의 세상은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간결하면서도 옹골진 작가의 문체가 너무나 좋았다. 그 문체들이 뱉어내는 한숨들이 내 살처럼 녹아들때에야 나는 가슴 서늘한 편견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책 <현의 노래>를 고른 것은 역사속에서 아주 짧게만 기록되어져 있을 한사람의 악사를 어찌 그렸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악사와 악기를 보여주며 그의 삶속에서 녹여낼 또하나의 세상이 궁금했다. 그리고 가슴 깊이 울렸던 그의 강렬함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가야의 금.. 울림속에 담겨지는 많은 사연들이 소리를 통해 표현되어지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 우륵의 세상 역시 소리낼 수 없는 소리로 존재한다는 건 하나의 환상처럼 다가왔다. 한쪽으로 비켜선 채 하나의 환타지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도 되겠다. 박물관의 유리상자속에서 잠든 하나의 악기를 바라보면서 작가의 머리와 가슴을 수도없이 떠다녔을 낱말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념이 있었을까? 우륵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세상속에는 왕이라는 의미로써 존재하는 하나의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무너짐이 있었고 그 나라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태어남이 있었고 그 나라와는 이심동체같았던 그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어남과 무너짐의 사이에 흐름이 있었다. 세상의 흐름은 힘과 권력으로 결정지어졌다. 세상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었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은 저나름대로 그 흐름을 탈 줄 알아 처세라는 걸 할 줄 알았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저 자연이 주는 양식을 입으로 먹었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의 흐름을 조금 안다는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그저 먹어라 하면 먹을 수 있는 또다른 양식을 몸으로 먹었다.
소리를 찾으며 또다른 한편으로 쇠를 다루어 세상의 흐름을 읽게해 준 작가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할 때 우륵은 이미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같은 쇠였지만 담금질을 하기에 따라 소리가 달랐으며 거기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졌고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또한 달라졌다. 농부가 쓰면 농장기요 군사가 쓰면 병장기가 되는 쇠에게 따로이 주인이 없다던 대장장이 야로의 말과 소리 또한 비어있는 곳에서부터 생겨나 왔던 곳으로 다시 소멸되어져 간다는 우륵의 말은 삶의 화두처럼 내게 들려왔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이냐? 바르고 가지런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입니다. 번잡이란 무엇이냐? 거칠고 급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2-353쪽)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그러니 아정과 번잡은 너희들의 것이다..라던 우륵이 무너져가던 고을의 소리를 열두줄에 담은 채 가야에 속해있던 자신의 육신을 먼저 신라에게 의탁했고 가야의 금 또한 신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던 그 많은 소리와 울림과 사연도 함께 죽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나는 제자 니문의 지게위에서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매한가지로 흔들리던 우륵의 다리를 만져주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게.
왕이 죽을 때 함께 무덤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지밀시녀 아라는 왕의 무덤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생생한 삶을 안고 있었다. 재첩국을 흘려넣던 시커먼 왕의 입속처럼 생긴 왕의 죽음속으로 멀쩡하게 들어가긴 싫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두려웠을 게다. 산채로 그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도망친 아라를 안아주지 않았다. 미묘한 삶의 이치만을 아주 짧게 전해주었을 뿐이다. 소리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이치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뒤 바뀐 왕의 뒤를 따라 모시던 왕의 죽음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 흐름을 누가 막을까? 열두줄의 현이 만들어지던 그 사연들은 제각각의 울림이 달랐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울림과도 같았다. 사람사는 이치, 세상의 이치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지는 역사는 흥미롭다. 그것이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혹은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엮어지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 흥미롭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아서일까? 그들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쩌면 나 역시도 그들처럼 무지몽매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고 만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김훈의 소설은 좀 난해함을 품고 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속에 너무나도 깊고 단호한 것들을 숨겨두고 있는 탓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간결함이 좋고 그 간결함속에 숨겨진 단호함이 좋았다. 길게 쉬는 한숨이 아니라 들숨 날숨을 번갈아 쉬게 해주는 문장의 흐름도 나는 좋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또다른 그의 작품에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이.. <칼의 노래>를 마저 읽어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가 내민 화두를 다시한번 기억의 서랍장 깊숙이에 밀어넣는다. /아이비생각
니문은 엄지로 한 줄을 튕겨 올렸다. 소리가 솟구치더니 긴 떨림을 이끌고 잦아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사는 일과 같다. 목숨이란 곧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리는 동안만이 사는 것이다. 금수나 초목이 다 그와 같다.
하오면 어째서 새 울음소리는 곱게 들리고 말 울음소리는 추하게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