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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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중에서 <임꺽정>과 <장길산>이 있다. 모두가 소설속의 주인공이었지만 인기투표를 하면 꽤나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는 인물들이다.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이었으며 장길산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광대였다. 그야말로 천민중의 천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 두 사람을 그려보라한다면 꽤나 믿음직스럽고 용맹스러운 이미지를 그릴 것이다. 천민중의 천민이었다던 그들이 그토록이나 힘겨운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것처럼 <제중원>을 이끌어가던 핵심인물 황정 역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오갈데없는 천민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조선최고의 의사로써 거듭난다. 가장 관심을 끌던 대목이었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의사이자 최고의 의사가 되었다는 그 말이...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했던 조선말기는 그야말로 혼돈기가 아니었나 싶다. 흥선대원군의 그 철통(?)같았던 쇄국정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들이 조선이라는 조그만 나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 변화의 물결이라는 것은 막는다고 막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깨어있기를 원했다는 말도 될 것 같다. 유교의 그늘밑에서 변화를 막아보고자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만을 살폈다. 그 말도 안되는 형식과 허울을 뒤집어 쓴 채 오로지 '아니되옵니다!' 만을 외쳐대며 깨어나고자 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찬물을 끼얹기에만 급급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도 사람의 목숨을 앞에 두고서 양의원을 찾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진료를 했다는 이유로 병을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결을 하고 말았던 정승대감의 딸은 일찌기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유학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왠지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황정.. 그가 왕으로부터 제대로 된 성과 이름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단지 천민이었다는 이유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시대적인 아픔이었다고만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도 우리를 뼈저린 회한속에 젖어들게 한다. 이 책속에서 펼쳐지는 황정이란 남자의 일정을 따라가다보면 참으로 가슴 저미는 과거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매함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그 과거사의 고통들.. 좀 더 일찍 깨었더라면 어땠을까? 황정이나 황정과 라이벌의식을 가져야 했던 양반자제 백도양처럼 젊은이들이 좀 더 일찍 깨어 이 나라를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백도양이란 남자를 통해 보여주었던 양반이라는 허울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왔으나 의술을 펼치게 되는 알렌과 헤론의 사고관념 차이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무조건적으로 변화의 물결을 타야한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마시라! 그들에게도 남북전쟁이라는 아픔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뜻하지않게 사람을 해부하게 되고 뱃속의 내장들을 하나 하나씩 꺼내어 보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가야 할 길이 거기에 있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약간의 허구가 섞여들어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팩션이라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부인하고 싶지가 않으니 또 왠일일까? 그만큼 황정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의술과 인술의 묘미가 이 책속에서 펼쳐지고 있음이다. 이미 오래전 <허준>이 그랬고 <이제마>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혹은 자신의 실력향상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아픔이 마치도 자신의 것인양 치료를 했던 황정의 인술.. 양반자제 백도양의 뛰어난 의술속에서조차 단 하나의 결점으로 존재했던 인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이요, 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情을 담은 따스함으로 환자를 대했던 황정이 의병을 치료하게 되고 그 의병장을 매개체로하여 마지막엔 독립군 군의가 되어 만주로 떠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장을 덮기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논란의 여지부분이다. <제중원>이라는 최초의 병원에 대한 서울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사이의 뿌리논쟁이었다.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어져 나중에 선교부로 이관되었으니 연세대 의대의 뿌리라고 하는 쪽과 고종이 설립한 조선 정부 소속의 왕립 병원이었으니 당연히 서울대 병원으로 이어지는 국립 병원의 뿌리가 되어야 옳다고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는 말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했다. 과연 조선의 후예답다. 어디에서나 편가르기에 목마른 조선의 후예들.. 씁쓸하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어느 쪽의 편도 들어주고 싶지 않다. 어느쪽이 되었든 무슨 상관일까?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그렇게 훌륭한 병원이 시작되어졌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황정이라는 인물을 따라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은 참 많았다. 특별하게 튀거나 요동치는 듯한 장면은 없었을지라도 잔잔하게 읽어가기엔 꽤나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중원>.. 또하나의 배움으로 다가왔던 책!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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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타락천사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A. M. 젠킨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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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전제로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내용의 글은 많이 보아왔다. 파울로 코엘료의 <악마와 미스프랭>에서도 미스 프랭을 찾아와 거래를 하자던 악마가 있었고, 흔히 알고 있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나온다. 그들은 기가 막히게도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낸다. 하긴 타락천사도 천사긴 천사이니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게도 그런 악마가 찾아와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나는 당연히 악마와 거래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지만 아마도 나는 정말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의 천사와 악마는 누가 규정지을까? 당연히 나다! 내가 어떤 쪽으로 마음을 더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냥 천사가 되느냐 타락천사가 되느냐가 갈려지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니..

순간적인 찰나를 이용하여 인간의 육체를 빌린 타락천사 키리엘.. 그가 잠시 빌린 육체는 십대소년의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왜 십대소년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답을 찾아냈다. 이런 저런 이유와 조건을 나름대로 열거했지만 어쩌면 순수함이 정답이었을거라고.  아무래도 거친 세상을 살아내면서 닳아빠진 어른보다는, 머리 굴리는 계산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른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순수함이 남아 있을 십대의 육체를 선택했을 거라고. 그리고 그 타락천사는 인간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정신적인 느낌과 육체적인 느낌을 함께 만족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마음먹은대로 다 되는 일은 아니니 하나쯤은 조금 포기해도 괜찮았다.

먼저 말했던 <악마와 미스프랭>이나 <파우스트>속의 악마는 분명한 거래조건을 제시했었다. 마치 인간을 실험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주인공 타락천사 키리엘은 그렇지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보고 싶었으며 자신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차지했었던 그 육체를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창조주의 피조물로써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에게 딱 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어찌보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전혀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형식만 빌렸을 뿐이다. 우리의 십대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정말 솔직하게 잘 그려주고 있음이다. 대단히 소설적인 이야기지만 현실적으로도 있음직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내용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숀이라는 외로운 소년의 육체를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모습은 정말 외롭고 아팠다. 이혼한 엄마의 마음도,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닫아 걸어버린 동생 제이슨의 퉁명함도 모두가 아픔이었다. 가슴 깊숙이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타락천사 키리엘의 느낌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이해받고 싶은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54쪽) 던 키리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아픔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어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주변을 감싸는 다른 실, 그러니까 애정과 믿음의 실이 있어서 그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던 키리엘의 생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닌 그 믿음과 애정의 실이 점점 가늘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가슴아프게도.. 

그래서 타락천사 키리엘은 생각했다. 이곳에 왔다갔다는 흔적 하나쯤 남겨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지옥에서 영혼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사소한 것들때문이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깨우져주고 싶다고... 그리고 작가는 그 타락천사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게다.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 되었고, 또 둘째날이 되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천사 하나엘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포를 기다린다. 죽음의 공포를. 처음 자신이 숀의 육체를 트럭에 치이던 순간 낚아챘던 것처럼 육체를 다시 트럭에 치이게 하여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을 아파하면서.. 그리고 키리엘처럼 우리도 죽음을 기다리며 산다!

책표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인지 일꺠워주는 작품"이라는.. 인정한다.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의 문체만 봐도 알 수 있는 말이다.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왜 자꾸만 죄를 짓는가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는 재미는 그렇게 키리엘만의 재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그리고 공감하게 되는 책이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볍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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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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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작품은 두번째다.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으려니 했었다. 담담하게 그려내는 옛시절의 풍경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생생했던 까닭이었다. 자신의 가족 혹은 그 시절의 가족사를 빌려 보여주던 사회적인 단면을 통하여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를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듯이... 그래서 이번 작품도 주저없이 선택했다. 처음엔 그저 학생들 교육용으로만 제작되어졌다는 이 작품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대하기에 역사책속의 한구절처럼 보여지겠구나 싶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그랬었나보다 하는 그런 것.. 화염병이 난무하고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종로를 기억한다. 지나가는 지하철을 세워버리며 데모를 했던 그 시절의 학생들을 기억한다. 그 당시였다면 나도 한창때의 나이였건만 나는 솔직하게 말해 아웃사이더였다. 그 언저리에서 바라보며 눈밑에 치약이나 바르고 있었으니...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부러 아들녀석을 데리고 그 영화를 보러 갔었다. 실제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였기에 책으로만 혹은 글자로만 보여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싶은 욕심이 앞선 까닭이었다. 물론 영화였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도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로 흐름을 읽어내던 아들녀석이 참으로 고마웠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미 늙어버렸다고 100℃의 그 뜨거움도 같이 늙어버린 것은 아닐게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에야 알았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가 있다는 것도..  '탁'치니 '억'하더라, 하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던 그 시절의 아픔이 이 작품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그림을 보면서 어느 순간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고, 어느 순간 왈칵! 쏟아져내릴 것 같은 눈물이 고여지는 걸 아이들은 알 수 있을까?

그 뜨거움으로 한시대의 민주주의를 되살려내기 위해 죽음이라는 휘장으로 가리워지던 젊은이들은 많았다. 열사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젊은이들도 많았다. '고문'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던 그 시절. 남영동 시커먼 건물 어딘가에서 젊은이들이 수도없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풍문은 이미 세상속에 흥건했었다. 하지만 삶의 고리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그 뜨거운 열기를 지우라고 말한다. 사는 게 코앞에 있지 않느냐고.. 허울좋은 민주주의니 하는 말 따위와 너의 현실을 바꿀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잊혀진다. 그래서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금의 우리도 잊혀질 것이다. 그 시절의 그 뜨거움이 그랬듯이.. 치고 받고 때리고 부수는 저 국회의사당의 추태와 만행조차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상실증을 아는 탓에 저들이 저렇게 더 기고만장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의 끝머리에 부록으로 붙여준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더없이 고맙다는 것이.. 나 역시도 낱말자체로서만 와닿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말이었기에, 내 앞의 현실보다는 먼 의미가 바로 그 민주주의였기에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참 좋았던 부분이었다.

우리시대의 어머니들은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고 그 시절을 젊음으로 살아냈던 시대 (우리가 흔히 386세대라고 부르는) 를 우리는 또 '낀세대'라는 말로 부른다. 목이 터지고 살이 터지며 살아냈던 그들만의 시대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 힘겨운 세상속을 그들은 아마도 다시한번 가슴속 응어리를 어루만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남은 것은 백지한장 뿐이라던 작가의 마무리처럼 우리가 그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나 싶다. 지금은 99도다!라는 책띠의 한마디가 그 시절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싸아해진다. 100도씨를 향해 민주주의는 다시 끓어올라야 한다는 그 말한마디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얼만큼의 파장을 일으킬 수 있으려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잊지 말자고 이렇게 외쳐대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해서라도 잊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또다른 희망일런지도 모르겠다.

젊은 작가의 지난시절 이야기는 어찌보면 아이러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품속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빌려 세상속에 나온 이야기들, 한시대를 만들어냈던 사실들이 자신의 손을 통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졌을 때 작가는 어떤 느낌을 전해받았을까? 힘든 결정이었다던 그의 목소리를 작가의 말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다시한번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어진다. 어렵겠지만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를 다시한번 더 읽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역사속으로 밀리기엔 아직은 이른, 잊혀지지 말아야 할 한귀퉁이의 이야기들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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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9-08-0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님, 축하드려요. :)

아이비 2009-08-06 01:22   좋아요 0 | URL
오늘에야 알았네요. 고맙습니다 ^^*
 
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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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왜 이렇게 느닷없이 김 훈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는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이나 강한 여운으로 내게 남겨지는 것일까?  세상이 알아주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은 사실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그것도 아니라면 행여라도 하는 마음으로 <남한산성>이라는 작품을 집어들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흔한 베스트셀러 작품이라는 걸 읽어봤다는 내색을 하고 싶었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남한산성>을 대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관리들의 시점을 또 만나겠거니 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던 내게 보여진 작품속의 세상은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간결하면서도 옹골진 작가의 문체가 너무나 좋았다. 그 문체들이 뱉어내는 한숨들이 내 살처럼 녹아들때에야 나는 가슴 서늘한 편견의 늪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책 <현의 노래>를 고른 것은 역사속에서 아주 짧게만 기록되어져 있을 한사람의 악사를 어찌 그렸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악사와 악기를 보여주며 그의 삶속에서 녹여낼 또하나의 세상이 궁금했다. 그리고  가슴 깊이 울렸던 그의 강렬함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가야의 금.. 울림속에 담겨지는 많은 사연들이 소리를 통해 표현되어지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 우륵의 세상 역시 소리낼 수 없는 소리로 존재한다는 건 하나의 환상처럼 다가왔다. 한쪽으로 비켜선 채 하나의 환타지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말도 되겠다. 박물관의 유리상자속에서 잠든 하나의 악기를 바라보면서 작가의 머리와 가슴을 수도없이 떠다녔을 낱말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념이 있었을까? 우륵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세상속에는 왕이라는 의미로써 존재하는 하나의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무너짐이 있었고 그 나라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태어남이 있었고 그 나라와는 이심동체같았던 그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어남과 무너짐의 사이에 흐름이 있었다. 세상의 흐름은 힘과 권력으로 결정지어졌다. 세상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었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은 저나름대로 그 흐름을 탈 줄 알아 처세라는 걸 할 줄 알았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그저 자연이 주는 양식을 입으로 먹었고 아는 것이 없으므로 세상의 흐름을 조금 안다는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그저 먹어라 하면 먹을 수 있는 또다른 양식을 몸으로 먹었다. 

소리를 찾으며 또다른 한편으로 쇠를 다루어 세상의 흐름을 읽게해 준 작가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할 때 우륵은 이미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같은 쇠였지만 담금질을 하기에 따라 소리가 달랐으며 거기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졌고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손길에 의해 또한 달라졌다. 농부가 쓰면 농장기요 군사가 쓰면 병장기가 되는 쇠에게 따로이 주인이 없다던 대장장이 야로의 말과 소리 또한 비어있는 곳에서부터 생겨나 왔던 곳으로 다시 소멸되어져 간다는 우륵의 말은 삶의 화두처럼 내게 들려왔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이냐? 바르고 가지런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입니다. 번잡이란 무엇이냐? 거칠고 급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2-353쪽)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 그러니 아정과 번잡은 너희들의 것이다..라던 우륵이 무너져가던 고을의 소리를 열두줄에 담은 채 가야에 속해있던 자신의 육신을 먼저 신라에게 의탁했고 가야의 금 또한 신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던 그 많은 소리와 울림과 사연도 함께 죽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나는 제자 니문의 지게위에서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매한가지로 흔들리던 우륵의 다리를 만져주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게.

왕이 죽을 때 함께 무덤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지밀시녀 아라는 왕의 무덤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생생한 삶을 안고 있었다. 재첩국을 흘려넣던 시커먼 왕의 입속처럼 생긴 왕의 죽음속으로 멀쩡하게 들어가긴 싫었을 게다. 아니 어쩌면 두려웠을 게다. 산채로 그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도망친 아라를 안아주지 않았다. 미묘한 삶의 이치만을 아주 짧게 전해주었을 뿐이다. 소리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이치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뒤 바뀐 왕의 뒤를 따라 모시던 왕의 죽음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 흐름을 누가 막을까?  열두줄의 현이 만들어지던 그 사연들은 제각각의 울림이 달랐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울림과도 같았다. 사람사는 이치, 세상의 이치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지는 역사는 흥미롭다. 그것이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혹은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엮어지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 흥미롭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아서일까? 그들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쩌면 나 역시도 그들처럼 무지몽매한 탓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고 만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김훈의 소설은 좀 난해함을 품고 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속에 너무나도 깊고 단호한 것들을 숨겨두고 있는 탓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간결함이 좋고 그 간결함속에 숨겨진 단호함이 좋았다. 길게 쉬는 한숨이 아니라 들숨 날숨을 번갈아 쉬게 해주는 문장의 흐름도 나는 좋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또다른 그의 작품에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이.. <칼의 노래>를 마저 읽어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그가 내민 화두를 다시한번 기억의 서랍장 깊숙이에 밀어넣는다. /아이비생각


니문은 엄지로 한 줄을 튕겨 올렸다. 소리가 솟구치더니 긴 떨림을 이끌고 잦아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사는 일과 같다. 목숨이란 곧 흔들리는 것 아니겠느냐.
흔들리는 동안만이 사는 것이다. 금수나 초목이 다 그와 같다.
하오면 어째서 새 울음소리는 곱게 들리고 말 울음소리는 추하게 들리는 것입니까?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 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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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 사람들처럼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극단적인 대처상황을 우리는 보고 또 보고 질리도록 보면서 산다. 작금의 우리 현실을 둘러보아도 사방이 대치하는 중이다. 그리곤 묻지, 너는 어느쪽이냐고.. 우리편이 아니라면 너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할퀴고 상처내는 게 마치도 진실처럼 혹은 진리처럼 굳어져가는 세상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항상 질퍽거린다. 진흙탕속에서 발을 빼낸다해도 어디선가 누군가 튕기고 지나가는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마다의 이익 때문이리라. 없는 자들은 없어서 있는 자들은 그나마 가진것을 놓기 싫어서.. 함께 할 수 없다면 따로 또 같이 라는 말도 있지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선뜻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남한산성>이라는 하나의 작품속에서 보여지던 작가의 날카로움에 한번 더 베이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했었다는 말도 되겠다.

누군가의 사적인 생각을 읽는다는 게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그 사람을 온전히 히해할 수 없기에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가 써놓은 낱말들이 하나의 줄로, 하나의 문장으로, 한 권의 책으로 불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찰나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는 어느쪽이냐는 물음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단 한번도 그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는 끝없이 선택을 하고 끝없이 편을 가른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니편 내편 가르며 서로가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을까? 사회적 편견이나 종교적 편견이 가시처럼 우리의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올 때 그 아픔으로 인하여 눈물 흘려보지 않은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자기 자신의 피부를 찌르며 아프다, 아프다 하는 꼴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愚問일테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낱말들은 생각대로 날카롭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말하기도 하고  그 세상과 타협하기를 슬쩍 내비치기도 하고 이런 세상이 나는 참 좋다고 우리의 시선속에서 비켜간 또다른 형태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아주 작은 것들속에서 그는 커다란 의미를 찾아내고 있었다. 너무 주관적인 개념으로 다가올까봐 솔직히 마음 단단히 먹었었다. 그렇게 비수같은 주관적 개념은 내게 또하나의 실망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하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지는 않았다. 세상속에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무겁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어 좋았다. 특별하지 않은 조금은 평범한 그래서 누구나 한번쯤 해봄직한 그의 생각들이 의외였다고나 할까? 여자라는 것에 관하여, 나이듦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관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낱말들이 책을 읽는 내게는 결코 아프지않은 날카로움이었다. 지금은 작가보다는 자전거 레이서로 불리워지기를 원한다는 작가의 모습을 다시한번 바라보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굳이 니편 내편 가려가며 살 필요도 없지 않을까?  굳이 너는 어느쪽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다름을 인정하고 세상을 함께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다. 작가가 즐기는 자전거바퀴처럼 그렇게 서로 같이 가면 되는 게 세상인 것이다. 한편의 글로 참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한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리 많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리하여 읽게 된 그의 글속에서 나 역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그 역시도 나는 어느쪽!이라고 결정지어놓고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결정으로 인하여 남이 아프면 안되는거라고 속살거리고 있는 것 같다. (어찌보면 표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참 복잡한 세상을 참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안에서 낱말로 분해되어져 있다. 나 또한 그 안에 머무르고 있으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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