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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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왠지 책속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했다. 어떤 폭력이 되었든 당하는 자도 그렇고 보는 자도 그렇고 모두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상에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적절한 상황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고 큰소리치던 책도 많았고, 우리 인간의 뒷모습을 투시하고 있다는 책도 많았지만 이번처럼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져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남은 여운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끝도없는 폭력의 가해자요 피해자였을테니 말이다. 원제가 '光'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검은 빛이라고 써야만 했을까, 생각했었던 나의 마음에 한가닥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책장을 넘기면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한정된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아주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비굴함과 비겁함, 그리고 이기심이 내재되어진 그 기억은 오래도록 현재가 되어 주인공들을 따라다녔다. 일전에도 말했던 기억이 있지만 일본소설이 주는 그 리얼함에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현재의 감각이 리얼하다는 말이다. 피해가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부딪히고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듯이. 이 작품 역시도 그랬다. 그 숱한 폭력의 겉면만을 핧을 줄 알았지 그것을 쪼개어 이렇다 보여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허울은 얼만큼이나 부풀어 오를 수 있을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하마섬.. 어두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물밀 파도소리와 밤의 숲에서 떨어져 쌓이는 동백꽃이라는 서두만 보더라도 그 섬의 끔찍한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 붉디 붉은 꽃송이가 떨어져내리는 장면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그려진다는 말이다. 바로 그곳에서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폭력은 잉태되어졌다. 하지만 그 폭력이라는 것이 미하마섬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하마섬을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곳에서도 그와 똑같은 폭력은 재현되어지는 까닭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해오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외면해버린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끼어들어서 얽히면 공연스레 귀찮아지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용납하기 싫은 까닭에..

아버지의 생에 대한 불협화음이 일구어낸 육체적인 폭력의 피해자였던 다스쿠는 어린시절부터 누군가의 절실한 관심을 그리워했다. 날마다 멍이 들었고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들지 않았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웠던 노부유키형에게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그런 다스쿠가 싫었던 노부유키는 그에게 한자락의 마음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어느날 밤 쓰나미가 밀려오고 모든 것을 휩쓸어갔던 그 쓰나미를 계기로 미하마섬의 폭력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기였을 뿐, 그들의 삶을 향한 폭력의 고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엮어지게 된다.

<도가니>라는 작품을 얼마전에 읽었었다. 보호해줄만한 울타리 하나 없던 곳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당하고만 있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조여가며 올무처럼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면 폭력일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과 그 육체적인 폭력에 맞서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또다른 폭력.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과 마음, 그것을 정신적인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렇다라고 단언을 하고 있다.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것은 분명 폭력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진행되어지는 폭력은 무수히 많다고.

단지 사랑을 위해서 살인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이용하고 또한 배신을 한다. 노부유키에게 '살인자'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노부유키를 필요로 했던 미카의 존재. 순수와 영악이라는 단어로 이름을 바꿔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다스쿠의 역할이야말로 흔들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선을 칭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악과 거래를 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아버지의 폭력앞에서 길들여져 버린 다스쿠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자신이 헤쳐나오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기를 원하는 아이러니라니.. 하다보해 동정심만이라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그런 다스쿠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카는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하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안된다, 하지마라의 연속적인 반대와 부딪히면서도 우리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화려한 비상을 꿈꾼다. 두번째 살인을 하고 미카와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던 노부유키에게 미카는 이렇게 말했었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도 원하지마. 그날 밤부터 원해도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날 좀 내버려둬..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버리고 싶었던 노부유키의 꿈은 허상이었을까? 이미 지나간 기억을 붙잡고 살기엔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것도 어딘가 미심쩍은 것을 그것만은 아닐거라고 부정하는 일이 연이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겨운 일이다. 미카를 향한 노부유키의 마음과 노부유키를 향한 다스쿠의 마음이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꿈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과 현실의 인정과 안녕을 바라는 또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노부유키가 두번째 살인으로 다스쿠를 묻어버렸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역시 善 아니면 惡만 존재하는 거라는 섬뜩한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가슴속에 품은 것은 선일지라도 끝없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악의 존재감을 우리는 어쩌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필요악'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세상속에 떠도는 수많은 '필요악'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을게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일게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도 있을게다. 정말이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필요악'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서 가슴 쓰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아니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으나 우선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들.. 내가 아닌 남이 나서주기를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필요악'일 것이다. 참 잔인하다. 이렇게 속까지 파헤쳐야만 시원할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면과 마주한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속에 바람 한 점 넣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노부유키와 어떻게든 자신을 상승시켜보고 싶었던 미카와 힘겨운 현실속에서도 누군가의  따스한 접촉을 꿈꾸어왔던 다스쿠를 통해서 만나본 우리의 현실은 정말이지 검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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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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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만화책일까 소설책일까? 일단은 그것부터 물어야 할 것 같다. 만화책일거라고 생각했었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엔 아주 조금 억울한 면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건데 분명코 이건 만화책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고 싶었던 내가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그 두께에 놀랐고 만화책이 아니었다는 것에 또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은 이 작가의 전작에 대한 믿음으로 책장을 펼쳐보기로 한다. <사신치바>와 또다른 작품을 통해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속도감을 기대했다는 게 더 좋은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신치바>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없는 현실밖의 세계를 현실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작가의 글솜씨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모던 타임스..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찰리 채플린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속에서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나니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으며 미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과연 누가 내려주는 것일까? 이 이야기의 중심축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거짓된 면만을 보여주었던 것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면서부터 시작되어진다. 그 불편한 진실의 참된 얼굴을 보기 위하여 책속의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검색'이었다. 그 '검색'으로부터 우리의 주인공들은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단지 '검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단어 몇개를 인터넷이라는 바다속에 던져넣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인 상담. 이 세가지 단어를 입력하여 검색을 시작했던 책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일들을 당하게 된다. 주인공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고탄다, 오이시, 이사카 코타로, 오카모토 다케루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탄다와 오이시는 같은 회사의 선배와 후배로써 우연하게 맡게 된 일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얼핏보면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고 있는 듯도 보여지고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지금의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속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은 구석이 있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려내지도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만을 믿어버리고 마는 인터넷의 잘못된 속성에 대해서 일종의 경고성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작품속의 공간이 인터넷과 정보의 테두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반으로 내달리면서 어라? 이건 뭐지? 싶은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존재,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같이 보이는 와타나베의 부인 가요코부터가 그렇다. 불편한 진실을 안고 있는 하리마자키 중학교가 특수한(일종의 초능력과 같은) 학교였다는 설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가요코의 존재와 오가타의 존재감은 왠지 썰렁하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초능력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느닷없는 초능력의 황당함과 인터넷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만들어내는 황당함이 엇비슷하게 맞물리는 듯도 보여 씁쓸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내기에도 사실은 조금 벅찼다. 잘못하면 옆길로 샐 것만 같다는 느낌때문이기도 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노린 듯이 보여지는 만화들이 내 정신을 혼란속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차라리 저 그림들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게다. 흐름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림들이 살짝 얄밉기까지 했다. 이런 장르를 시험삼아 시도해본 거라면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익숙해지지 싶다. '그렇게 되어 있는' 시스템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밀어부치는 미약한 인간의 힘 대결.. 과연 누가 이겼을까?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그 시스템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 시스템에 이끌려 다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 어찌하겠는가!

검색, 정보, 시스템, 사이트, 인터넷, 엔지니어..라는 말만으로도 이 소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대시스템의 흐름앞에서 만들어진 진실에 대한 도전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 도전의 댓가가 너무 참혹한 까닭이다. 21세기 코믹잔혹이라고는 하지만 호러물도 아닌 것이기에 약간의 반감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뒷면을 다시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인터넷의 댓글로 인한 피해가 그와같지 않을까 하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정보에 의해 (여기서 말하는 정보라는 것은 네티즌이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의 소행이기도 하다. 앞뒤 가릴 것없이 너나없이 퍼 나르고 그 퍼나르는 과정에서 나쁜 이야기들은 덧붙여지고 하는 그런 악순환을 말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행위들이 남을 파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 이 책속에도 등장한다. 과연 인터넷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우리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가 다시한번 되짚어 생각해 볼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편이다. 왠만하면 우리 스스로가 정화되어진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정보는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하면서 타인의 정보는 굳이 없는 것까지 만들어가며 캐내려고 드는 의식이 문제일 뿐이지만 내가 있듯이 남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짧아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작품속에서 인터넷의 댓글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던 만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한테는 자기를 보여주려는 욕구와 창작욕, 이 두가지가 있겠지만 전자를 버리고 나면 이해해주는 독자수가 한사람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325쪽) 그리고 또 한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요즘 세상에 독재자는 없다던.. 그 사람 하나만 소멸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던.. 세상의 황폐도, 증오도, 누구 한 사람이나 어떤 단체 탓이라고 꼭 꼬집을 수 없다는 거(-328쪽) 라는 말은 곱씹어 되새겨 볼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던 것들에 대한 새로움이었다고나 할까? 단순히 소설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다.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첫머리에 나왔다던 말을 앞에 두고서 한참을 바라다 본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배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318쪽) 어쩌면 정보라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것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지배하기보다는 우리를 도와주는 정보와 인터넷이라는 말은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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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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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하다. 쫓고 쫓긴다. 죽고 죽인다. 그리고 피... 추리소설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스릴러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호러물같은 얼굴을 하기도 한다. 짧지만 단단하게 조여드는 문체. 미사여구를 섞지 않은채 그야말로 걸러내지 않겠다는 듯 직설적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는 욱,하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의 작품 <핏빛 자오선>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가 그의 작품 배경이다. 전쟁이 끝난 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 소설의 배경들은 정말이지 참혹하다. 어쩌면 더이상은 어쩌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모습이었을텐데 뚝뚝 끊어먹는 그의 말투때문에 책속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벅찼다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된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작품속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꽤나 강한 집중을 요한다.  그런데 화가나는 것은 그렇게 강하게 집중을 요구해놓고는 너무나도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마치 너의 내면에도 이런 면이 있으니 두 눈 크게 뜨고 보라는 듯이..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국경의 이야기는 그의 삶일까? 그를 대표하는 소설로 국경 삼부작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수한 소문속에서 이 작품의 제목을 듣게 되었고 책장속에 모셔놓은지가 오래였다. 

책을 펼치면 이 작품의 원제 'No Country for Old Men' 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시를 읽게된다. 왠지 읽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석에 끌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늙은 사람은 한갓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니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썩어 갈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갑짜기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느 구절에서부터 이 작품속에 녹아들었을까?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다. 처음의 출발은 탈출이다. 무엇을 위한 탈출인지는 그를 따가가야만 알 수 있다. 그의 탈출이 있었으니 그의 탈출동기가 또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준다. 그런데 문제는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이 장난을 건다는데 있다. 탈출범이자 암살자인 시거와 희생양이면서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모스, 그리고 그 탈출범을 쫓는 동시에 모스를 보호해주고자 노력하는 보안관 벨, 이렇게 작품속의 시선은 세갈래로 나뉜다.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그 범인을 따라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고 있다는 듯이.. 그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아마도 이 소설의 끝이리라.  모스를 중간에 두고 벨과 시거의 내면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처럼 보여지지만 왠지 모르게 선보다는 악이 더 강해보인다. 어쩌면 시거와 대응하고 있던 모스가 자신도 모르게 거래와 타협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거의 입을 통해 한번 내뱉어진 말은 곧 운명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어진 순간에도 버젓하게 일어나는 살인의 정당성을 보면 운명은 거부한다고 비켜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경분쟁도 그렇지만 이 작품속에서 얼핏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보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서로에게 총을 쏴대고 죽고 죽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 현장속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선과 악을 대신한다는 보안관 벨과 암살자 시거는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선택은 자신의 의지였다는 말일까? 같이 겪었음에도 나중의 길은 너무나도 다른 걸 보면서 내가 하는 말일 뿐이지만 그것조차도 운명일 거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냉철함과 잔혹함이 시거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흔들림과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벨의 내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용부호를 잘 쓰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한다. 왠지 군더더기를 제외한 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꾸미지 않은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우리의 문단에도 그런 작가는 있다. 그런데 어떤 배경으로 작품을 끌어가느냐에 따라 나의 내면에 젖어드는 강도가 다르다. 코맥 맥카시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도 인용부호를 만나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너무 강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읽는 나는 가끔씩 역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철저하게 작품속으로 들어가보라는 말일까?  따라가며 호흡하기에도 바쁘니 책을 읽고 있는 나만의 사적인 생각을 접목시킬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한번쯤 더 만나볼까 했던 생각을 접는다. 이제 더 이상은 그런 강렬함속에 나를 내팽개쳐두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예이츠의 시를 다시한번 읽는다. 다시 또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떤 부분이 이 작품에 제목을 불러오게 했을까? 문득 떠오른 책속의 문구..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내다보는 창인지 나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또다른 시각,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으니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일을 겪고 말았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12쪽) ..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첫장부터 보안관 벨의 입을 통해 들려주었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모든 인간들은 영혼을 모험에 걸기를 원하기도 하고, 그 모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또한 그러고 싶어한다. 모스가 피해갈수도 있었던 운명앞에서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졌던 결말을 벨은 알고 있었다.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밖의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될거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모험을 할때 영혼을 걸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모험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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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터를 찾아보니 참 많기도 하다. 배우 하나하나를 클로즈업 시켜서 보여주는 포스터도 있고, 배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전체적인 설정만 보여주는 포스터도 있고.. 그런데 나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포스터를 선택한다. 왜일까? 포스터 하나를 보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비록 배우였을 뿐이지만 그들에게도 나는 포스터와 같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당신도 국가대표입니다!' 이런 영화에 함께 동참하게 된 배우들 당신도 국가대표입니다!.. 정말 멋진 영화였다. 아웃사이더들의 서글픈 승리였다. 없는 자들의, 사회의 구석진 곳을 채워주던 자들의 애끓는 절규였다. 우리 사회의 모진 부분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던 설정이 참으로 좋았다. 친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온 입양아 차헌태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와 약간 모자란 동생을 두고서 군대에 갈 수 없었던 강칠구, 한때는 그래도 꿈이 있었으나 이제는 꿈을 버린 채 되는데로 살아가는 일회성 인생의 최흥철이, 그리고 아버지의 그늘밑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삭혀야 했던 마재복... 이들에게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던 방코치조차도, 피라미드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어쩌지 못하는 삶을 살아내던 방코치의 딸 수연이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였다. 그랬던 그들에게 단지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잠깐의 국가대표 제안은 정말이지 떨쳐버릴 수 없었던 악마와의 거래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못하는, 아니 아무것도 계산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절박한 현실이 있었기에.

삶의 굴곡과 현실의 바퀴는 정말 모질었다. 모질고 모질어 내 어머니를 찾았으나 부르지 못하게 하였고, 모질고 모질어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와 모자란 동생을 위해 곁에 있어줄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파트는, 군입대 면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실함이었을 게다. 그들처럼 그들에게 다가서야 했던 방코치의 새로운 삶의 도약조차도 어쩌면 허상이었을게다.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는 꿈에 대한 허상.. 우리가 매일처럼 바라보고 쫓아가야만 하는 것도 어쩌면 허상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부분부분마다 나는 크게 박수쳐주지 못한 것을 지금에야 후회한다. 관객의 눈치를 보면서 내 가슴속의 열기같았던 성원의 박수를 한두번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 순간이 나는 너무도 미웠다. 

눈물을 짜내자고 만든 영화도 아니었고, 이런 것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는 그런 영화도 아니었다. 단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묻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속삭여 주었다. 그 영화 괜찮다고, 그 영화 볼 만하다고.. 정말 괜찮았다. 그리고 정말 볼 만했다. 크게 떠들지 않아도 이렇게 가슴 한켠을 싸아하게 만드는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 영화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지만 허울과 형식에만 치우치는 우리의 사회를 보는 것만 같아 떨떠름했다.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뒷모습만큼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게 된다. 내면에 충실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이 영화속에 압축되어져 있는것만 같아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전반적으로 골고루 스토리라인이 잘 설정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제작과정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노고가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실제 선수들과 합숙훈련을 했다는 배우들의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칠구의 모자란 동생으로 나왔던 봉구가 실제로도 그렇게 선수명단에 올랐었는지는 모르겠다. 극의 흐름을 위해서 설정된 거였다면 조금은 아쉬웠던 부분이다. 꼴찌를 하고도 애국가를 부르던 그들의 모습이, 애국가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서로 묻던 그들의 가슴속 열정이, 영화였지만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들이 진정 국가대표였다고... 스치는 재미와 일상의 가벼움만을 느끼고 싶어하는 세대들에게는 그다지 재미없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가벼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가끔씩은 이렇게 가슴 밑바닥까지 젖어드는 영화를 만나보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스크린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한 줄의 글귀가 참으로 아팠다. 현재 우리나라의 스키선수로 등록되어져 있는 사람은 5명뿐이다... 골프붐이 일고 있는 스포츠계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유행어를 빌어 한마디 하자면 이렇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제는 하나를 진행시키더라도 내면으로부터 차오르는 그 무엇인가가를 가슴속에 키워야 한다고. 내가 살고 있는 안양시에는 세계대회를 치루었던 인라인 스케이트장이 있다. 덕분에 궉채이라는 선수의 이름도 우리가 알게 되었던.. 그리하여 한때는 인라인 스케이트 붐이 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스케이트장에는 바람만이 머물고 있다. 단 한번을 위해서 그렇게해야 했던 것일까? 힘겹게 시작했으나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된다. 뒷심부족이 너무 허탈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일면이기도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다면 좋을텐데...

어찌되었든 이 영화는 나도 지금 전달중이다. 아주 조용히. 그 영화 괜찮아, 그 영화 볼 만 해.. 거기 나오는 배우들이 연기도 정말 잘하더라.. 영화를 보다가 혹시라도 박수를 치고 싶은 생각이 들면 크게 박수를 쳐주고 와.. 나처럼 눈치보지 말고.. 아주 쬐끔 슬픈 장면도 있긴 한데 그렇다고 그들을 동정하지는 마.. 측은지심만으로 마무리하기엔 좀 그렇거든.. 마음을 열고 보면 더 좋을거야.. /아이비생각

<이미지는 네이버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저작권법에 위배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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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보급판 문고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글쓴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지금 살펴보면 아마도 그가 <신한국인>이라는 작품을 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 한국인을 말한다'라는 제목을 내세워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가 각인되듯이 내게 다가왔던 까닭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도 힘찬 메세지를 전해줄 수 있었는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은근히 글쓴이의 작품에 유혹을 느꼈던 것이.. 개인적으로 쓸데없이 말줄임을 하는 표현들을 싫어했던 터라 처음 digital 과 analog 가 하나로 합쳐져 Digilog가 되었다는 말 자체에는 약간의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컴퓨터와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접지 못했다. 그렇게 만난 <디지로그Digilog 선언>은 역시 글쓴이의 역량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처음 디지로그Digilog란 말을 들었을 때 도대체 뭐지? 했었다. 디지털digital 이면 디지털digital 이고 아나로그analog면 아나로그analog지 도대체 디지로그Digilog가 뭐야? 아나로그analog인가 디지털digital 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을 살면서, 아니 이제는 모두가 디지털digital 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회의 흐름속에서 아나로그analog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디카가 좋아 모두 디카를 들이대지만 언제고 원하면 볼 수 있는 사진, 그리고 어느곳에서나 공유하고 싶어하는 함께 했던 흔적들을 컴퓨터라는 장치속에만 묶어두기엔 우리의 감성이 너무나도 아쉬웠을 게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인화하기를 원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해야만 할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의 젓가락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도 쓰고 일본도 쓰는 젓가락문화가 무에 그리 새삼스럽다고? 했었던 사람들이 그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우리의 젓가락 문화를 다시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안에 담겨진 것이 더 크고 더 깊기 때문은 아닐런지.. 그것에 대한 답을 아주 명쾌하게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IT(정보기술)를 RT(Relation Technology 관계기술)로 바꿔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누가? 젓가락 문화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이! 도대체 젓가락 문화가 어떤 것이길래?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情)과 믿음(信)의 힘..이란 저자의  말에 어쩌면 고개를 갸웃거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아주 대단하게 들려온다. 저자의 말처럼 하찮은 젓가락에 무슨 그렇게 대단한, 거창한 철학이나 의미를 부여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근조근 설명해가는 말을 듣다보면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디지로그Digilog가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참 많았던 것 같다.  천리밖의 모습도 볼 수 있었던 천리안으로 공주의 병을 알게 된 왕자, 그러자 천리마를 가진 왕자는 둘을 태우고 공주가 있는 성으로 달려갔고, 불사의 약초를 가지고 있던 왕자는 그 약초를 공주에게 먹여 공주를 살려냈다는 '세 왕자의 수수께끼' 와, 돈많고 못생긴 동쪽 남자와 가난했으나 얼굴이 잘생긴 서쪽 남자의 청혼을 받게 된 한 처녀의 '동가숙서가식' 에 얽힌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일례로 들려주던 그 이야기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숙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 보였다.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것 모두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현실속의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라는 말에도 일단은 공감한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말의 겹침 현상이 또하나의 기술로 보여지게 되는 겹치기 기술.. 우리의 저력.. 타지인에게는 청룡열차를 타는 사람들로 비유되었다는 우리의 극단적인 모습 또한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대단함으로 평가해버리고마는 저자의 말에는 역시 힘이 들어가 있다. 비관보다는 희망을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저자만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기호에 대한 풀이도 흥미롭다. 각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는 @기호..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호를 '달팽이'라고 부르며 독일 사람들은 '원숭이 꼬리', 폴란드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작은 원숭이', 터키에서는 '귀'라고 부르기도 하고,  핀란드로 가면 '원숭이 꼬리'가 '고양이 꼬리'로 바뀌게 되고, 러시아로 가면 '개(소바카)'로 둔갑하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어떨까? 중국 사람들은 쥐에다 노자를 붙여 '라오수', 일본은 '나루토(소용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아무리 봐도 달팽이나 원숭이 꼬리로는 보이지 않으니 각 나라마다의 문화적 차이라는 게 참 신기하기까지 하다. 스웨덴에서는 '코끼리 몸통'이라고까지 부른다고 하니 왜 아니 신기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부를까? '골뱅이'다. 그 '골뱅이'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음식문화와 디지로그Digilog를 겹쳐 보이게 하는 저자의 생각이 놀랍기까지 하다. 먹는 문화와 정보문화를 대표하는 인터넷문화는 딱히 연결되는 것이 없어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저자의 그 관념의 크기에 놀랄뿐이다. 그 생각을 말함에 있어 강하고 다부진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 듣기를 즐겨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려운 것들도 저자의 목소리로 표현되어져 나올 때 내게는 쉽고 편안한 느낌으로 전해진다는 것이 저자만의 강점이기도 하다.

앞마당과 뒷마당으로 나뉘어 펼쳐지는 저자의 무대는 꽉 차보인다. 앞마당에서 디지로그Digilog가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선언했다면 뒷마당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한껏 풀어 헤쳐놓은 듯 하다. 특히나 우리에게 실패보다는 성공의 신화로 알려져 있는 에디슨의 실패담은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성공을 위해서는 겪어야 했을 실패가 있다. 그랬기에 에디슨의 실패담은 의외였다. 그리고 그 실패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많아보였다.

 저자와의 대담에서 말했던 디지로그 증후군이란 말이 떠오른다. 숫자의 세계인 디지털digital 과 말의 세계인 아나로그analog의 동거가 가능하냐고 생각하냐던 기자의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숫자속에서 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라거나 자격증번호 따위의 나를 대신하는 그 많은 숫자들.. 그러나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언어로 전환시켜 이육사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시인이 있었듯이, 386세대라는 말을 기존의 숫자적 의미와 달리 3.1절과 8.15와 6.25를 모르는 세대라는 정치 패러디로, 9.11 역시 점을 빼버리면 911 미국의 구급 비상전화번호가 되며, 그것을 다시 뒤집으면 119 한국의 비상전화로 바뀐다는 것..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11을 뒤집은 119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라는 사실.. 이렇게 아무런 뜻도 없는 숫자에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부가했을 생겨나는 의외성.. 언어를 숫자화하는 것이 디지털 문화라면 숫자를 언어로 전환시켜 우연성을 높이는 것이 바로 디지로그Digilog의 증후군이라던 저자의 대답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듯 보였다. 관점의 차이..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으니 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도 될테다. 젓가락문화의 훌륭함이 몸에 베인 한국인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던 희망찬 메세지를 이 책을 통해 만나보았던 시간이었다. 정말 뿌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러기에게 배워야 한다던 저자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에게는 따로이 대장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짐승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것은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V자 대형으로 날면 길도 잃지 않고 힘도 아낄 수 있으니... 앞선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대열에서는 앞장서려고 싸우거나 꼴찌라고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단다. 힘의 법칙이 아니라 순환하는 협력의 질서에 의해 멀리 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에게는 정말 부끄러운 진실이 아닐 수가 없다. 같이 간 두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물고 그런 다음에야 다른 기러기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잡는다고 한다. 정말이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함께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는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디지로그.. Digilog.. 새롭게 다가왔던 언어, 더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에, 컴퓨터와 정보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는 세상을 사는 우리이기에 한번쯤은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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