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는 힘 - 우유부단한 당신을 위한 결정력 높이기 프로젝트
미타니 코지 지음, 고정아 옮김 / 영진미디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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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선택과 결정이 존재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일들이 선택을 요구할 것이며 또 그에 따르는 결정을 요구할 것이다. 그 많은 선택과 결정이 온전히 내 몫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섬뜩해지지는 기분이 앞서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선택과 결정중에서 잘했다고 생각되어졌던 경우는 과연 몇번이나 될까?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고 후회하지 않았을 선택과 결정이었다면 매번 그것을 돌이켜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미소를 짓기보다 후회를 더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도 그렇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면 늘 후회가 따라왔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나를 괴롭혔던 문제, 결정하는 힘에 대하여 한번쯤은 어드바이스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을 선택하고 읽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름대로는 다부진 성격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비켜 뒤돌아보니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봐 다부진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결정을 하면 뒤돌아보아 후회하지 않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결정하는 힘이 무엇이길래... 그렇다면 여기서 결정하는 힘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결정하는 것에는 스스로 하는 것과 타인과 논의해서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뭐 사실이 그렇긴 하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것과 논의해서 결정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 중요한가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부터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경험에 비추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한다고 한다. 아무리 강하게 필요성을 어필한다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거나 믿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상화 편견'이라는 함정이란다. 경험이나 감으로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식의 추측에 기대는 심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왜 함정이라고까지 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두번째로 타인과 논의를 해서 결정할 사항이라면 경청과 질의와 응답, 즉 회피하지 않고 듣고, 묻고, 대답하는 Q&A력을 필요로 한다.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중요한 것부터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질문받은 내용에 대해서는 똑바로 대답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제대로 듣고 제대로 물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되겠다. 항상 '그것은 중요한 것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질문자와 대답하는 자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 '그것은 중요한 것인가!'이다. 말하는 자와 듣든자 모두 서로에게 경청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엇나간 주제로 맞서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은 '습관'이라고. 익숙하지 않기 대문에 멋대로 말하고 멋대로 주제를 바꿔버린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문득문득 떠오른 생각을 가차없이 내뱉고 아무말이나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냥 입다물고 있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것들이 상대방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고.. 정말이지 무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한번쯤은 되새겨 볼 말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떠오른 말이 하나 있다. '3분 철학'.. 말하기 전에 혹은 행동하기 전에 3분씩만 먼저 생각하라던  말이 회자되어지던 때가 있었다. 3분동안 먼저 생각한다면 화를 낼 일이 있더라도 그 강도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3분이라는 시간속에는 '易地思之'의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결국은 상대방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분.. 3분의 힘 앞에 잠시 멈추어 나를 반추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책의 내용중에서 가장 먼저 배우고 싶었던 것은 '희사법喜捨法' 이었다. 결정한 일을 실행하는 단계에서 거쳐가야 할 부분이지만 제대로 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간단하게 보이질 않았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이다. 희사喜捨 라는 말은 원래 종교단어로 기부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강제성과 자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탓에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하지만 실천하기 쉬운 것, 자기 자신에게 잘 맞는 것부터 시도해보자는 말에는 백프로 공감한다.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깊은 뜻을 지닌 듯 하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다른 무언가를 버려야만 한다고 한다. 버리는 것에도 우선 순위를 정해서 실행한다면 필요없는 상실감 따위에 위축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와같이 이 책속에는 결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3단계로 구분지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일본인이다보니 예로 들어주었던 것들에 대한 무지함이 있었다. 스스로 결정하기, 타인과 논의해서 결정하기, 결정했으면 실행하기,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결정하는 힘을 넓히고 키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 직장이나 학교 또는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한번쯤은 체크해 보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딸아이에게 결정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여행을 제안했다던 부분은 나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귀한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던 옛말도 있지만 아까운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던 저자의 말이 나에게는 의미있게 다가왔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가족 모두에게 즐거움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했을 아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내 아이에게도 한번쯤은 적용시켜 볼 만한 제안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에 심부름이나 집안일 돕기를 잘했던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의견에 나도 찬성한다. 공부지상주의가 되기 보다는 집안일돕기 지상주의가 되었을 때 '올바르게 결정하는 힘'을 기른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은 집안일부터 돕자'와 '공부해라! 끝나면 잠시 게임해도 괜찮다' 중에서 나는 어떤 주의일까? 왠지 껄끄러운 느낌을 주며 다가왔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던 책이었다. 과연 나는 어떤 주의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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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에이브러햄 J. 트워스키 지음, 최한림 옮김, 찰스 M.슐츠 그림 / 미래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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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기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면서 숨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 한 줄의 말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문득 어린 시절 즐겨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술래가 멀리 떨어진 채 뒤돌아서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면 술래가 돌아보기 전에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그런 놀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술래에게 들키게 되면 그때부터는 들킨 아이가 술래가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생활이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내 자신을 숨기며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 사람들은 도덕적인 잣대에 너무 민감하다고 한다. 그만큼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산다는 말일게다. 왜 그럴까? 우리는 왜 그토록이나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삶의 법칙인양 인식되어져버린 많은 관념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이 살기좋은 곳으로 개선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은 물욕을 추구하면서도 막상 다른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것을 주문하기 때문"(-19쪽) 이라고 이 책은 아주 명쾌한 답을 내려주고 있다. 먼저 나 자신의 결점부터 고쳐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나 먼저 고치려고 노력하다보면 남의 결점은 눈에 들어올 시간도 없을것이라고.. 내 결점을 고치는 것조차도 남의 눈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이미 나의 삶이 아닐 것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돌아보는 술래에게 가끔씩은 들켜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듯 싶다.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도대체 좋은 일이 생기기는 하는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좋은 일'이란 것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다. 도대체가 '좋은 일'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 거지?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에게 좋은 일은 참 많았다. 우리를 스쳐갔던 모든 일들이 다 나쁘지만은 않았을테니 하는 말이다. 스쳐가는 모든 일들이 다 나쁘기만 하다면 정말이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왜 내게는 좋은 일이 안생기는 거지? 생각하곤 한다. 흔히 하는 말중에서 행복은 아주 작은 것들속에 머물며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가까운 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행복 또한 좋은 일처럼 쉽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살짝 미소를 짓게 한다.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되느냐고 묻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내 속에 들어있던 말을 대신 밖으로 끌어내 준 까닭이 아닐까 한다. 뭐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그렇듯이 이런 문제앞에서는 이렇게 행동하시오! 라는 행동지침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 행동지침이라는 것들을 만화를 앞세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약간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아마도 우리에게 부담없이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만화의 장점을 살려서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드스톡, 스누피, 찰리 브라운...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다. 스누피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 에이브러햄 J. 트위스키는 정신과의사인데 찰리 브라운이라는 인기 만화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오해와 착각에 대하여 정신과적인 차원으로 풀이를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치도 만화해설가처럼. 그렇지 않다면 저자의 글에 맞추어 그 유명한 스느피를 그렸던 만화가 찰스 M. 슐츠가 그림을 그려준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저자가 쓴글에 맞추어 만화가의 카툰을 실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만화와 글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좋은 일은 언제 시작될까? 하고 묻는다면 답은 이것이다. 좋은 일은 지금 바로 시작될 수 있다. 다만 그 전에 가장 먼저 나 자신에 대한 비뚤어진 이미지나 결점부터 고쳐야 한다. 좋은 일의 시작 역시 바로 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자신을 평가하고 현실을 바로 볼 줄 알며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 걱정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에 관한 것등등... 자신을 고쳐나가기 위한 해결책을 찰리 브라운이라는 만화속 주인공과 함께 잘 보여주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가 가장 으뜸인 듯 하다. 우산장수 아들과 소금장수 아들을 두었던 한 어머니의 걱정과 염려가 어느 순간부터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는 상황처럼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었다면 진짜 친구의 솔직한 평가와 그냥 아는 사람이 무심코 던지는 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였다. 사실이건 아니건, 좋건 싫건, 듣기좋은 말을 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양쪽 모두 흔히 말하는 '인사성 멘트' 에 익숙해져 있는 듯 하다. 진심어린 충고를 가려낼 줄 아는 그런 지혜가 필요한 듯 하다.

책을 통해 나에게 다가왔던 말을 내세워 혼자만의 결론을 유추해본다면 이렇다. 첫째로는 요컨대 무리없이 씹어 삼킬 수 있을 만큼만 물어뜯자는 이야기.(-148쪽) 욕심이다. 제 먹을양만큼만 먹으면 될 것을 욕심을 부리니 모든 것이 비뚤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둘째로는 듣는 것은 은행에 예금하듯 지식을 흡수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은 돈을 인출하듯 지식을 나눠주는 것이다. 인출액이 예금액을 초과하면 부도가 날 것은 당연지사다.(-176쪽) 세상에서 어려운 일중에 하나가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나를 먼저 앞세우기 보다는 남을 먼저 존중해주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세째로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입보다 강하지는 않다 (찰리 브라운-172쪽) 입속의 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두번째 결론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지 싶다. 말과 얼킨 우리의 속담이 많은 것만 보아도 말한마디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는 황금률을 지키자 (-181쪽)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받는 것은 기분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그렇듯이 남들도 그러할 것이니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하면 될 일이다. 담아두고 되새김질하며 살아갈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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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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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일까? 진정 신화일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이순신의 이야기. 들어도 들어도 가슴을 먹먹하게 할 우리의 영웅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것일까? 그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제외하고서... 글자가 모여서 한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전이되어져오는 어떤 느낌에 전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가에게 요즘 흠뻑 빠져들고 있던 탓에  김 훈이라는 이름이 주는 유혹에 강한 끌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의 문자들이 전해주는 여운이 너무 길었던 까닭이다. 역시 그랬다. 책장을 넘기고 한 자 한 자 나의 눈속에 담아갈 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것만 같았다. 때로는 긴장감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분노로, 그리고 때로는 눈물로 그의 문장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조그만 주먹을 펼 때에야 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걸 인식할 뿐이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느껴졌다는 말일게다.

난중일기를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변사람들을 실명으로 적었다던 그 난중일기속의 인물들. 그들이 있어 이순신이 있었을 것이기에 그 이름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김 훈의 글은 <남한산성>에서도 그랬듯이 내가 책속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책속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더 아픈 것일게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일게다. 그래서 더 많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을게다. 이 책 <칼의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새 나는 이순신이 되어 있다. 임금의 교서를 받고, 그래도 임금이라고 머리 조아리며 (마음과는 다른) 장계를 올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주리가 틀리는 모진 형벌을 받고.... 어여삐 보이는 백성들을 내치지 못하고 그들을 군선위로 끌어 올리는 아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단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호통칠 수 있었던 장군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백성에게, 그리고 부하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 게다. 그리하여 그가 의정부의 형틀앞으로 끌려갔을 때 아무런 힘없는 백성들이, 부하들이 임금의 문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를 살려 사직을 보존하소서...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196쪽)  적이 있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적이 있었기에 그의 몸이 고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금은 나를 살릴수도, 죽일수도 없었던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을 때 그는 알았다.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임금은 그의 이름 석자를 앞세워 그의 뒤에 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는 그 이름을 두려워했다. 형식적인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그를 의정부의 형틀에 묶이게 했던 권율마저도 끝내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었다. 무슨 방책이 없겠느냐고...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던 이순신의 마음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말쟁이들의 싸움속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진 고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어쩔 수 없이 거칠었다. 그가 머물며 상대해야 할 바다와도 같았을 것이다. 임금의 칼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한가닥 소망이 내게는 붉은 노을처럼 보였다. 붉게 타오르다 사그러드는 ...

..... 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 이() 올림 (-66쪽)

조선 역사를 많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는 것들속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이해하기 힘겨운 존재들 중 으뜸가는 이가 있다면 선조와 인조다. 가장 치욕드러운 과정을 겪어냈으면서도 가장 치욕스럽게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들이 원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내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했던가? 그랬기에, 어쩌면 정말 그랬기에 이 순신이라는 이름이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기를 바랄 뿐이라던 글쓴이의 바램과는 달리 내게는 이 소설이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지가 않았음이다. 장군이 아닌 한 사람으로써, 한 남자로써 겪어야 했을 수많은 감정의 기류들이 너무도 아픈 까닭이다.

그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 (-212쪽)  어디 그 때 한번 뿐이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무서운 것들이 어디 그것뿐이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판치던 그시절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말()이 살아 말()처럼 뛰어다니던 시절. 그 시절을 가엾어했고 또 무서워했던 이가 어디 이순신뿐이랴.  직접 눈으로 보려하지 않았고 제 발로 찾아나서 진위를 가려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말()의 유희들. 누구의 말이 더 찬란하게 빛났는가에 따라 순간적으로 서열이 뒤바뀌던 그 시절. 간혹 그  말()의 유희를 즐길대로 즐기면서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런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묻지 말자. 굳이 묻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으니... 지금의 말쟁이들 또한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저만 먼저 살아야겠다고 아우성인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환하게 보고 있으니... - 전하, 신들을 죽여주소서.- 툭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습관처럼 내뱉던 그들을 앞에 두었다면 -그래, 내 너희를 죽여 이 나라의 사직을 바로잡고자 하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나였다면 그러고 싶었다는 말이다. 진정 그랬으면 싶었다는 말이다.

답답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신화의 끝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나는 그 이순신의 탈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그냥 그의 아픔을 잠시 더 느껴보고 싶었다. 사실과 소설이 어울어진 이야기 하나를 떨쳐내기가 이리도 어려운가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두어번 아산 현충사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지난 겨울이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한참 공사중이었다.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무엇을 찾아냈을까? 현시대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옛시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면서 나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생각했다. 존재의 의미는 모두 버리고서 오롯이 덩치만 부풀린 채 어딘가에서 실려와 내려놓아진... 그 생뚱맞은 자리... 왠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잠시 머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그 날의 느낌이 그 곳 현충사에서는 되살아나지 않기를 빌었다. 쉽게 털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찾아가 보리라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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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 2012 마야력부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까지
실비아 브라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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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1일... 마야인의 달력을 참고 삼았다던 2012년 12월 21일... 정말로 세상의 종말이 오기는 올까? 어째서 사람들은 저토록이나 종말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던지듯이 세상이 망한다는 거에 한표씩 보태주는 것만 같은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는다. 가끔씩 세상이 나를 너무 힘겹게 할 때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져 버려라! 화를 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종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할지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렇다면 나는? 가끔씩 재미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내일 세상이 망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다지 할 일도 없다. 그저 오늘을 사는 것과 같이 내일도 똑같이 살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면 다들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반응이다. 아니 그럼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무엇을 할 수 있는데?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무엇을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래서인지 나의 모토는 항상 지금, 바로 이순간이 가장 중요하다이다.

왠지 흥미로울 것만 같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외쳐대는 종말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선입견이 맞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이 대세다. 우리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기독교, 유대교, 카톨릭,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는 물론이고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조로아스터교, 오순절교, 침례교도 있다.  바하이교, 자이나교, 라스파리안교와 같은 낯선 이름들도 보인다. 종교, 참 많기도 하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찾아보면 정말 많은 종교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종교들이 모두가 제각각인 종말론을 들고 나온다. 참 대단하다. 기독교의 요한묵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가장 접하기 쉬운 문헌이기도 하지만 카톨릭계를 통해 알려졌던 파티마 예언, 성흔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던 파드레 비오의 이야기나 마리아 에스페란자와 같은 경우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의 예언들도 한 몫하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 아이작 뉴턴, 그리고리 라스푸틴, 아서 코난 도일 등 수많은 예언가들의 이름이 이 책속에서 거론되어진다. 과학자도 있고, 작가도 있는 걸 보면서 종말론이 어느 특정집단만의 광기라고 보기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종말론,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토록까지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종말론을 예견할 수 있다는 지금의 대표적인 현상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지구온난화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현상을 겪고 있는 지금의 현상만 보더라도 이의를 제기하기엔 좀 껄끄럽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리고 또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단순히 기상이변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세계의 정상들이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내지 못했다는 건 아직까지 우리는 인간본위의 세상을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토록 많은 종말론의 근거와 예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포칼립스가 세상의 자연적인 종말, 즉 어둠과 불화의 시대인 칼리시대를 의미한다는 것은 흥미로웠다. 힌두교의 예언을 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 질서와 정의가 약해지고 말다툼이나 역병, 불치병, 기아, 가뭄, 참사가 일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사악하고 분노로 가득하며 거짓되고 탐욕스럽다. 잘못된 교육, 검은 거래, 더러운 돈이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지식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손쉽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토록이나 많은 예언들중에서 그래도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호피족이나 나바호족, 수우족, 라코타족, 체로키족과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예언을 다루었던 부분이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갔던 그들에게조차 세상의 종말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들이 불러들인 종말이 아니라 문명을 앞세웠던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자연을 무시한채 오로지 인간의 편리와 이익만을 위해 밀어부치는 문명의 힘앞에서 그들이 무너져갔듯이 우리조차 그 문명이라는 이름의 괴물에 의해 멸망을 자초할 것이라는 말에는 나도 한표 던지고 싶다. 종말은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우리가 인간본위의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큰 소리를 내지 않을 것 같다. 종교계에서 흔히들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저자는 무관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악마가 득세한다"고. 지구를 오염시키고 동식물을 학대하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무관심. 그 무관심이 결국 우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사이비종교도 많았지만 그들에 의해 집단으로 목숨을 끊었거나 희생되어진 생명도 참 많았다. 그 참담한 죽음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끝난다. 쾅 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라 훌쩍거림으로.. -T.S 앨리엇의 말이다.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저자가 들려준 이 한마디는 정말이지 나의 시선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들려주었던 잉카 케로족의 축복 기도를 나도 소개해주고 싶다. 당신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가십시오. 강과 나무와 바위에서 배우십시오. 예수와 부처와 형제자매를 공경하십시오. 어머니 대지와 위대한 영혼을 공경하십시오. 당신 자신과 삼라만상을 찬양하십시오.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본질에 다가가십시오.... 여러번을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가슴 찡함을 느끼게 해 주었던 축복의 기도. 요즘 인기있는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며 했던 'I see you - 나는 당신을 봅니다' 라는 말 때문에 종교계에서 시끄러웠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알라와 코란을 믿는다는 이슬람교의 무슬림조차도 예수를 존경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반드시 '그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이라는 말로 경의를 표한다는 저자의 소개글을 읽으며 나는 저으기 놀랐다. 종교는 필요악이라고 단정짓곤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할 때 진정한 평화와 마음의 평온이 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저자가 소개해 주었던 축복기도속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한줄 한줄 읽을 때마다 가슴속에 깊이 와닿는다. 자연과 하나되는 삶,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종말론이라는 말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종말론은 우리 스스로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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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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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이라는 책의 제목만 보면 얼핏 이념을 떠올리게 된다. 이념싸움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왠걸 은근하게 깔리는 사랑의 심리묘사가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일까? 이미 지나쳐온 과거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환생하는 듯 하다. 시대적인 풍습들을 보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답습하는 현세대를 보게 되니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본성 그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죽은 뒤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지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면서 끌어안아야 할 숙제는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각자의 몫이라는 거다. 자신의 관점보다는 타인의 잣대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때로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삶의 일부분조차도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온전한 내 몫!

책속의 배경은 왕정복고 시대다. 귀족사회 즉 계급사회의 모습은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일삼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뜻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끌리다시피 한계단을 밟고 올라선 주인공 쥘리앵. 쥘리앵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특출난 외모와 심성으로 자만심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깨닫게 된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미움을 낳는다는 것을.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부터 책읽기와 사색을 좋아했던 까닭에 아버지와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지만 그것때문에 그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자신의 출신계급을 뛰어넘으며 한계단씩 밟고 올라서는 그에게 그 자만심은 일종의 힘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한번 맛본 것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다.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역시 차츰 마음속에 욕망을 품게 되고,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지만 상류사회의 권태나 속물스러움을 알게되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사랑이라고 느꼈던 마틸드에 대한 감정조차도 하나의 도구처럼 쓰여지게 되는 상류사회의 메마름을 이해하기에 쥘리앵은 너무 여렸다. 일개 무명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을 정복한 뒤 누구나 장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꿈을 젊은이들에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쥘리앵은 나폴레옹을 하나의 멘토로 삼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망한 귀족들이 다시 집권했던 시기였으니 시대적으로는 불안한 때였다. 교육을 잘 받은 하류계층의 젊은이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감을 쥘리앵은 알지 못했다. 후에 처형을 당하기 전 법정에서 그가 말했던 '계급사회의 영예'라는 말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출세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어진 쥘리앵의 삶.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져가던 그의 삶속에서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하층계급의 용기를 꺾어버렸다는,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보인다고 법정에서 말하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살펴보아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던 책을 이제서야 만난다. 읽는 내내 책의 흐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다지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장을 덮을때까지 이상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또하나의 책이 있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였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그 소녀가 바라보면 느꼈던 어른들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무언가 비틀어지고 속됨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어른들만의 세계. 흑인을 변호하게 된 백인 아버지의 일정을 바라보면서, 또 그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한편으로 용기를 주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시대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앵무새 죽이기>처럼 이 책속에서도 쥘리앵이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속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어둡고 습한 단면이 많이 보여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단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눈길에 안스러움과 애처로움이 함께 했고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흑과 백, 적과 흑. 그 구분을 누가 지었는가.

"나의 이 이상적인 생활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많든 적든 내게 불쾌감을 주는 당신들의 그 시시한 험담과 현실생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릴 거요.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죽어요. 그러니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이오. '남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오? 그 '남들'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갑자기 끊어져버릴 거요. 제발 더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 마요." (-399쪽)  감옥에 갇혀있던 쥘리앵의 이 말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만 같아 서늘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내 삶의 방식이 '남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도대체 그 '남들'의 삶을 왜 내 삶속에 끌여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감옥에 갇힌 다음에야 진실로 평온한 삶을 얻게 되었던 쥘리앵에게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 평온함속에서 찾아냈던 진실한 자신의 사랑앞에서 절규하던 쥘리앵의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레날부인에게 마틸드의 존재를 "표면상으로만 사실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던 쥘리앵의 고백. 어쩌면 우리는 모두 '표면상으로만 보여지는 사실'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마음까지도 '도구화'되어져가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벅차다. 쥘리앵조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동했던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타인들이 심어놓은 가치를 좇아가는 것, 타인의 욕망을 나도 욕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이다. 이 책을 통하여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한번 뒤돌아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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