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양이
루이제 린저.프란츠 카프카.요한 볼프강 폰 괴테 외 지음, 이관우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독일 대표단편선이다.
평소에 독일문학쪽을 대한다는 게 쉽지 않은 듯 하여 선택했던 책이었다.
루이제 린저,볼프강 보르헤르트,프란츠 카프카,아르투어 슈니츨러,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테오도르 슈토름,클레멘스 브렌타노,루트비히 티크,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라고 한다.
이 중에 내가 만난 작가가 몇이나 될까?
고작해야 루이제 린저나 프란츠 카프카나 괴테 정도?

10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문체가 상당히 섬세하다는 것과 사실적인 심리묘사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거다.
대체적으로 환타지나 SF적인 내용보다는 현실적이며 사실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섬세함속에서도 느껴지는 그 딱딱한 느낌이라니..
독일하면 뭔가 직선적이고 무뚝뚝하고 강인한 남성의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나만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2차대전 직후 폐허가 된 건물에서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사는 소년의 이야기 붉은 고양이는
사람의 내면적인 이기심과 그에 상반되는 동정심을 함께 그리고 있다.(루이제 린저)
사람 먹을 것도 없어 빵한조각으로 여러입을 채워야 하는 상황하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배고픈 고양이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어머니와 동생들.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내 동생들은 굶주리는데, 너는 살이 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어"
그리고는 고양이를 죽이고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너를 이해한다. 이제 그 일은 그만 생각해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붉은 짐승을 죽인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동물은 사실 결코 많은 양을 먹지는 않는데 말이다.

마지막 문장으로 나타낸 소년의 생각을 통해 작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우선인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돌린 작자의 심중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이 책속에서 만난 단편들은 한결같이 붉은 고양이처럼 인간의 내면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러나 이쪽도 될 수 있고 저쪽도 될 수 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하지만 그 이중성은 편하고 안락한 생활속에서는 잘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하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속성이니 말이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선로지기 틸이나 테오도를 슈토름의 임멘 호 같은 경우에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자극적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해 주는 책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사실 씁쓸하다.
아름답게만 보여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봐버린 탓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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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2 - 밥이 하늘이오
허수정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전에  유적지 탐방차 전라도지방에 내려갔던 적이 있었다.
전라도지역이라 하면 일단은 민란부터 생각나기도 하였고, 굳이 민란이 아니더라도
일제시대 수탈의 참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까닭이다.
전봉준 고택지를 둘러본 후에 봉기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모였던, 그래서 그곳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던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물었던 것 같다.
여기에 서니 그 옛날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고사한 상태인지 고사직전인지 모를 감나무 아래에 서서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우리가 느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차라리 외치고 싶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나는 차라리 묻고 싶었었다.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는거냐고.
전봉준의 흔적을 따라 하루를 꼬박 희생시키면서까지도 나는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단지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그시절의 암담한 현실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악의처럼 차올랐던 기억밖에는...

동학이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던 차에 내게로 온 책이었기에 내심 기대가 컸었다.
무엇이 무지렁이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종교란 것이 무엇일까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만든 시간이었다.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것들을 그야말로 불가항력적인
것들을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것...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가장 힘겨운 것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일까? 아니면 현실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힘겨움일까?
대체로으로 볼 때 지금의 종교적인 모습을 보면 현재보다는 내세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나중에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함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동학은 종교가 아닌것 같다.
그들은 살아있는 지금을 더 중요시 했던 듯 하다.
그들은 살아가야 할 현실속에서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듯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내 마음이 곧 당신 마음이니 누가 되었든 사람을 귀히 여기라...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같이 여기면 귀하고 천함이 없어지나니...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변해야 한다고.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그래서 그들은 변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모든 것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집결이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토록 많은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허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게 말처럼, 혹은 이론처럼 다 이루어지고 다 보여질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해월... 그라고 해서 현실과 관념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도 역시 인간이었음을, 결코 신이 아니었음을 ...
세상 모든 일들이 마음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을
어느 한사람만이 고결한 뜻을 갖고 있다고해서 모든 세상이 고결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 한사람이라도 시천주한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는 이가 있다면,
타인과 자신의 마음 근본에 한울님을 인식하고만 있다면 결코 끝난게 아니라고.
단 한사람의 개벽..그건 곧 만인의 개벽이 된다고...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동학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종교의 모습처럼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 하나의 종교로써 자리를 잡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정말 살맛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았을까?
마음을 비운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쉽진 않다.
욕심을 버린다는 말 또한 그리 쉽진 않다.
모든 것을 그저 한울님의 뜻으로 여겨 오로지 순응하며 산다는 것 또한 쉽진 않을 것 같다.
사람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채 내세만은 중시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나와 이웃의 행복이었을 뿐.
"열석자 주문만 외우면 저놈들의 총구에서 총알이 아니라 물이 쏟아지고
 설혹 총알이 날아온다 하더라도우리 몸을 비껴갈 뿐인데,
 아, 이런 싸움이 뭐가 걱정이냐? 태평한 게 당연한 거여!"
시천주 조화정...소리는 허공속으로 힘없이 스러져 갔다.
"이,이럴수는 없는 겨. 왜, 총알이 비껴가지 않는 거야, 왜....!"
현실은 그렇게 그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토록 마음을 다해 의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을 따라 변할 수 밖에 없었던 동학의 모습.
시작은 그게 아니었지만 점차 그들에게 초심을 잃게 만드는 일들이 생겨나고
그 모습속에서 찾아낸 건 그들 모두가 살아가는 현실이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전봉준 또한 아버지의 죽음앞에서 앞서 달려가는 이가 되라는 채찍을 받았을 뿐이다.
변한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런가 싶다.
해월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선각자라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들은 앞날을 점칠 수 있었을 게다.
변해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배우고 익히게 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눈을 뜨라는 말이었을게다.
단 한사람만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는 이가 있다면 끝난 게 아니라던
해월의 탄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주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내게 남는 느낌표 하나가 있다면,그것은 안타까움!  이었다...
이어달리기라는 운동을 생각한다.
맨 처음에 달려야 할 사람의 마음과 두번째로 바톤을 이어받아 달리는 사람과,
세번째 혹은 맨 마지막을 달려야 할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가 다르다.
첫번째로 달려가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아 달릴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이미 끝난 게임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첫번째의 마음이 제대로 이어진다는 걸 보장할 수가 없으니..
그리하여 점차 달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수도 없이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으니..
첫마음이 마지막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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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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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란 작가의 책은 많이 봤지만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작가도 그리고 책제목도 어떤 끌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책소개글에서 문득 다가가고 싶은 글을 만났던 까닭이었다.
"그러니까,언젠가 깨어나리란 것을 믿고,지금은 푹 주무세요" -작가의 말중에서-
몽롱한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강함과 약함을 그리고 싶었다고,
구원해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그 말한마디가 강하게 와닿았는데...
알 수 없다.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갖은 사람들의 마음.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작가는 또다른 의미로 그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마음이 지치고 힘겨운 사람들 곁에서 잠만 같이 자줄뿐이라던 시오리의 말처럼
그런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도 놀라 깨어날 수 있는 거니까 그런때에
옆에 내가 있으니 괜찮다고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할 뿐이라던 시오리의 서글픔처럼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그런 위안과 위로를 꿈꾸면서 살아가는건지도 모를일이라고..

나는 가끔씩 영매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이 정말 살아있는 우리와 이미 없어져 돌아올 길 없는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처럼 그렇게 묶어줄 수 있는것인지 한번쯤은 만나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니 정말 그럴수만 있다면 나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때문이겠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죽음을 택해야만 했던 오빠를 보내놓고서
나는 몇날인지 모를 많은 시간속에서 그저 멍한 눈길로 살아야 했었다.
왜 그랬는지 나는 오빠를 보낼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미웠었는지 모른다.
꿈속이었을 게다. 그렇게 넋을 놓아버린 채 지내던 날 중에서 나를 찾아왔던 오빠의 모습.
하얗게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리고는 떠나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로.
그렇게 나는 다시 나의 넋을 되돌려 받았었던, 그런 때가 내게도 있었음이다.
세편의 이야기속에서 만나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차라리 강함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약함을 앞세운 강함으로 자신의 테두리를 지키려 애쓰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죽음을 택해야 했던 그들.
그들에게는 다른 이에게 전하지 못한 그들만의 아픔이 있었으리라.
서글프게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남아 있는 자들의 아픔을.
떠나는 자,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비웠겠지만
남아야 하는 자, 그래서 그가 버렸던 모든 것들을 주워담아야만 하는...
책을 읽는 내내 너무도 아련했다.
너무 멀리 돌아와 이미 되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가슴이 시렸었다.
죽음이란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바나나를 좋아해서 필명을 바나나로 지었다던 작가의 엉뚱함이 왠지 정겹게 다가왔다.
일본쪽 소설을 읽게 되면서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것은
하나의 풍경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이쁜 감촉들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만큼은 그렇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어렵지 않으나 가볍지 않게 느껴지는 손끝의 감촉이 참 좋다.
밝음보다는 맑음에 가깝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났던 문구.
외로운 사람은 사랑을 하고 있는 까닭이라던...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거라던 그 말의 아이러니를 이 책에서도 만나게 된다.

그러고는 외로워서 미칠 듯한 기분이 된다.
왜, 이 사람과 있으면 이렇듯 외로운 것일까.
둘 사이에 있는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고,
내가 우리 둘의 관계에 좋아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분명한 감정을.
다만 한가지, 이 사랑이 외로움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내내 알고 있었다.
빛처럼 고독한 이 어둠속에서 둘이 말없이,
저릿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밤의 끝이다. <16쪽>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던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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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실행활에 도움 됨은 귤과 같고

 번드르르하게 겉치레로 꾸미는 것은 향기와 같사오니,

 향기가 귤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어찌 귤이 향기로 인해 생기는 일이 있겠습니까?"

- <한국철학 스케치> : 193쪽 박영효의 사상중에서 -


책을 읽다보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가끔씩은 눈물도 흘려보고,
가끔씩은 씩씩거리며 감정을 노출시키기도 하고,
가끔씩은 휴우~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이 책은 유교적인 관념을 싫어하는 나에게 또다른 부채질을 하고 갔다.
겉치레와 형식에 치우쳐진 삶의 모습 또한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내면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무시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실이 있고 지금 현재가 있기에 또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변할지도 모를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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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스케치 2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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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잘알고 또한 자주 쓰고 있는 스케치 Sketch가 어떤 뜻일까?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모를 간략하게 적는 것,
또는 문학적으로 줄거리나 내용에 작위성이 없는 단편,
미술적으로 말하면 실재하는 사물을 보고 모양을  간추려서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나온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제목안에 왜 스케치라는 말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목조목 그림을 그려주듯하는 설명을 따라 시대를 가로질러 가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친절한 안내인을 만난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철학이란 건 또 무엇일까?
철학의 형식적 정의를 따져보자면 철학에는 일정한 대상도 일정한 방법도 없거니와,
철학이 무엇이라는 것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엇을 연구해도 거기에는 철학이 담길수가 있단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근원적인 문제와
대결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 한국철학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길래 나는 유교를 떠올렸었다.
아마 나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책의 말미쯤에 어떤 집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집한채를 두고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립적인 구도를 그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그냥 조금만 수리를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아버지는 겉은 한옥으로 놔둔채 안은 양식으로 바꾸자한다.
어머니는 물론 겉과 안을 모두 양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밀려드는 변화의 물결에 대처하는 우리네의 모습같기도 하고.

늘상 유교적인 우리네 생활습성이 너무 완고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나는 그런 삶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었다.
변화가 오고 그 변화를 따라야 한다면 굳이 옛것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적어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면서 나의 것을 지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집아닌 아집속에 묻혀살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닌 까닭이다.
책속에서 만나지는 우리의 의식과 관념조차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중심점에는 현실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늘 현실과 함께 하고 모두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녹아져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성을 앞세운 생명력있는 철학 혹은 생각들은
내면보다는 형식과 허식에 치우친 유교적인 철학에 밀리고 만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우리나라의 역사속을 되짚어 올라가게 되면 유교, 불교, 도교를 만나게 된다.
유교는 사회여러계층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는 종교과 예술 방면에,
그리고 도교는 천문학등 과학적인 쪽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불교와 도교가 유교의 힘에 눌려야 했을까?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었던 문제가 아닐까 싶어 긴장감을 느끼며 글자를 따라갔다.
백성이 주된 나라가 아니었기에, 깨어있는 백성이 아니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중에 조금씩이나마 백성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니 과연 민중봉기도 일어나고
민중속에서 생겨나는 종교나 학문도 생겨난다.
어느책에선가 고집스런 양반님께서 독백으로 뱉어내던 문구가 생각이 났다.
백성이 글을 깨우치게 되면 말이 많아지고 세상이 시끄러우니 백성은 그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일이라던 말이..

철학이나 사상이라는 것이 그때 그때의 사회상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특별히 이것이다,라고 내세운 주제가 아닌 다음에는 변하는 것이 어쩌면 옳은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배부른 자들의 말놀이쯤이라고나 해두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이나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 장면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종교든 철학이든  제것만이 옳다고 우겨대며 한치의 양보조차 없는  세상속에서조차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논쟁모습은 진정 아름답게 보였다.

역사책에서 그저 피상적인 낱말로만 다가왔던 말들이 아하! 이런 뜻도 숨어있었던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오래된 옛날부터 시작하여 근대적인 시기까지 우리곁을 맴돌며 우리의 생각속에 머물렀던
수많은 것들의 진정한 존재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볼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사실 우리가 살아왔던 혹은 살아가는 삶속에서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들은 많지가 않다.
껍질을 까보지 않았는데 그 속을 어찌 알까?
살아가면서 모든 것들의 껍질을 까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 하다.
또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조차도 갖고 있지 않음을 부정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 책은 나에게 아주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해 주었다.
약간은 늘어지는 대목도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해도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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