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 의심 많은 사람을 위한 생애 첫 번째 사회학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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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세상이 왜 이따위죠?"  昨今의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뱉었을 말이다. 그래, 맞아. 도대체 세상이 왜 이따위인거야? 하지만 그 말의 속을 들여다보면 다분히 이기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세상이 왜 '이따위 것' 이 되었는지를 한번 파헤쳐보자고 우리를 토론장으로 이끌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그 토론장으로 가볍게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피상적이다. 본질적인 것은 외면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것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 나는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책속에 '프로파간다' 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쉽게 말해 '선전'이란 의미인데 넓은 의미로 '글이나 말 또는 다른 모든 형식을 포함하여 여론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행해지는 커뮤니케이션' 을 뜻한다고 한다.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말할 필요없는 필요악일테니 결국 조작과 왜곡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말일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인간은 대개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는다"라는 명언처럼 사람들은 대개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익숙한 대로만 생각한다. 비판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 에서 더욱 낯설다. 한국은 '비판'과 '비난'을 동의어로 착각한다.  비판은 '합리적 의심'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반대를 위한 반대' 와 같은 '나쁜' 이미지로 이해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과잉 긍정주의'는 이를 부추긴다. (-151쪽)  위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비판과 비난은 엄연히 다름에도 동일시하고 있는 우리의 사회적인 문화현상을,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지나치게 신성시되어 있는 한국사회의 결속력이 비판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비판이 거세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에만 몰두한다는 말은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 불러온다. 저자의 말처럼 비판이 없으니 문제가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게 당연한 일이다. '공부하는 기계'로 사는 학생들, '돈버는 기계'로 사는 어른들에게서 무엇도 바랄 수 없는 게 바로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며 또한 문제라는 말도 공감하게 된다. 아이들의 교육에서조차 '평준화'만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주의일까?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경쟁이 있어야 하며 무언가에 대한 토론과 비판도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먹고 살기도 힘들어 사느라고 몰랐던 기성세대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의 교육현실을 본다면 이건 확실히 관료주의적인 정책의 악습일 뿐이다. 길들여진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악습에 길들여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스스로 길들여지고 있거나.

 

8장으로 나누어 커다란 주제를 붙여놓았는데 각장마다 보이는 부제들이 눈길을 끈다. '익명' 을 보장받는 순간 '짐승'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인간이 상황에 지배당한다는 것, 나에게 얽혀있는 사회라는 실타래, 포석정은 어쩌다 사적 1호가 되었을까?, 나의 가치판단은 사회적인 것이다, 주변이 당신의 관심을 결정한다, 우리는 왜 '이미지' 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숫자와 사회, 한국의 교육이 김기덕 평가에 미친 영향, 미술관에 걸리면 무조건 예술이 된다, 증오로 먹고사는 미디어,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등...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소제목들이다. 한줄의 문장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방면에서 우리의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학습되어지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불러오는 수많은 모순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자신이 믿었던 것이 틀렸는지 확인조차 하지않고 틀렸다는 걸 알았다해도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 모두가 똑같이 입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개성이라고 말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면 날을 세워 비난을 하는, 그러나 그런 모든 현상이 누구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외롭게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들을 파헤치고 있다. 불평불만이 아니라 다른 한쪽도 한번 보자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만 보지말고 보여주지 않는 다른 한쪽도 한번쯤은 보자고 말한다. 보고싶지 않은 것도 한번쯤은 돌아보자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회는 나와 이미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이다. '모두'가 사회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고민한다고 해서 그저 자동적으로 '좋은 사회'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물어놓고는 저런 말을 보여주는 저자의 의뭉스러움에 고개를 젓게 된다. 저 문장을 보면서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다. 지금 한창 들떠있는 영화 <1987>에서 여학생이 이렇게 물었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해아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비판적 시민'으로서 멋지게 살아보자는 제의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 같다. 비난이 아닌 비판하는 양심!으로. 결론은 이 한문장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애국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아이비생각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대안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자체가 상식적으로 변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책의 뒷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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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미드나잇 스릴러
로저먼드 럽튼 지음, 윤태이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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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안의 낯선 자들>, <올빼미의 울음>, <이토록 달콤한 고통>, <심연> 등등 한 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에 푹 빠졌었다. 그의 작품은 은근하게 조여오는 그 느낌이 일품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몰입도가 아주 강했었다. 촘촘한 그물처럼 엮인 짜임새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막힘없이 흘러갔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이 책에서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책의 소개글에 히치콕의 서늘함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치밀함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가받았다는 글이 보여서 하는 말이다. 그런 몰입도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맛깔난 조임은 찾아오지 않았다. 약간의 지루함마저 느껴졌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을테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는 말이다. 그냥 앞으로 쭈욱 뻗은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부분에 숨겨두었던 짧은 반전조차도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고 말았다. 뭐,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뉴욕에 사는 언니 비어트리스는 어느날 런던에서 살고 있던 동생 테스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런던으로 돌아온다. 테스의 모습으로 꾸민 채 실종자 찾기 방송에도 출연하지만 동생은 공원의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자살로 결론을 내린 경찰은 수사를 종료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그 와중에 동생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거라 생각했던 비어트리스는 죽은 동생의 집에 살면서 동생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 까닭인지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들락거린다. 미혼모였던 동생이 얼마나 힘겹게 삶과 싸웠는지, 가족이란 존재가 죽은 동생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비밀처럼 감춰져있던 사실들이 동생의 삶을 거꾸로 찾아나서는 언니앞에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여정속에서 자신조차도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고 있음을 느끼지만 어떻게든 동생이 살해되었음을 밝혀야한다고 생각하는 비어트리스에게는 그렇게 큰 위협감을 주지 못한다. 경찰조차 그녀에게 더이상의 행동은 묵인할 수 없다는 통보까지 하게 된다. 과연 그녀는 동생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이 책은 언니가 죽은 동생에게 쓰는 편지글로 회화체 형식이다. 언니가 동생에게 평소에 하던 말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한 전체적으로 언니가 누군가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증언을 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그래서인지 범인을 쫓아가는 범죄스릴러만의 긴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무덤덤하게 언니가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그래서 어쨌는데? 하고 반박하고 싶은 그런.  (끝내 언니 비어트리스는 동생이 죽은 그곳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여버리고 말았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두 자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성장해야만 했는지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의 마음속 상처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얼마나 큰 구멍을 만들어내는지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범죄스릴러만의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면, 글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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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사 1 -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1
일본역사학연구회 지음,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엮음, 방일권 외 옮김 / 채륜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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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하던 나의 생각이 너무 가벼웠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저 일본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우리의 근대사는 또 어디에서부터 그들과 얽히기 시작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처음 내 손에 들렸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역시 역사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서 역사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묻고 싶어지던 순간이었다. 책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주제도 무거웠지만 전쟁사를 다룬다기보다는 그 전쟁사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일본의 배경이 짙게 깔려 있었던 까닭이다. 어설프게 알던 일본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머리속에서 재정리되어야만 했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드러낸다는 것 역시 더더욱 어려운 일일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 여러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모여서 이론적인 분석을 한 내용이라는 말과,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은밀하게 열독하며 번뇌하게 만들었던 책이라는 말이 시선을 끌었다. 참회의 기록.... 그야말로 師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대한민국을 돌아보게 한다.

 

파시즘이라고?  천황제와 파시즘, 제국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필연적인 패망의 역사를 가져왔다는 말을 보면서 파시즘에 대해 찾아보았다. 무솔리니나 독일의 나치 정권을 대표적인 파시즘이라고 한다는데, 그 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역사적인 혼란과 세계공황이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국주의 또는 민족주의가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이 파시즘이다. 때로는 인종주의를 추종하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 과격해지면 자기민족을 위한 생존권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정당화하기도 한다는 말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독일과 일본을 떠올렸다면 무리수일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약칭, 그것이 바로 나치스다. 극히 소규모의 국수주의 단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나치스의 힘이 커진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들의 말에 현혹되기 시작했던 계층을 보면 주로 노동자층이었다. 노동자가 설 수 있는 곳이 없었다면 당연히 먹고 사는 문제도 힘겨웠을 것이다. 중국통일에 성공했던 장제스 체재에서 일반민중은 정식으로 내야 할 세금외에도 갓 태어난 아이의 '출생세', 죽은 자의 '관통세', 밭의 '비료세', 각 집마다 있는 '굴뚝세'등을 내야하는 것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노동자의 임금은 하락하고 소작료는 상승하고 심지어 그걸 미리 떼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그런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세력이 생겨나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 예는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어떤 것을 원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노동자당이 생겨났을 거라는 말이다. 그 후의 모습이 어찌되었든. 그런데 씁쓸한 것은 그들은 그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나라로 눈길을 돌렸다는 대목이었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이 좁은 땅덩어리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기만 했을 뿐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조선의 혼란기를 되짚어보게 된다. 그렇다고해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자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무거웠던 주제만큼이나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이 이런 분석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 이 책을 끝까지 놓지않게 만들었다. '틀림'만이 있고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이 나라의 현실. 일반민중의 삶속에서 행복이란 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린 이 나라의 현실.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도 혹시 참회의 기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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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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盈虧...가득참과 이지러짐, 또는 가득함과 빔.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똑같은 달인데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내게 돌아온다면 어떨까?  이미 방영이 끝났는데도 지금까지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드라마가 있다. '환생'을 다루고 있던 그 드라마의 주제가 꽤나 이채롭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 문득 내가 질문했었다.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다시 태어난다면 행복할까? 그 드라마에서처럼 이루어지지 못해 절절한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 오로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사람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생의 시간속에서 만난 주변 사람들과 상대역을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곤혹스러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드리마에서도 이렇게 말했지. 모두 잊혀질거라고. 그 잊혀짐이 신의 배려라고.

 

이 책의 주제는 '환생'이다. 같은 존재이면서 시간에 따라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 오직 한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촘촘한 짜임새때문인지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빠져들었다. 잠시나마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남자 아키히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죽었을 것이다, 그녀 루리는. 그런 까닭인지 그녀는 달이 차고 기울듯이 너에게로 다시 올거야, 라고 말챘던 것처럼 모습을 바꾸며 아키히코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한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여자를 그렇게 떠나보냈던 남자 아키히코는 그때로부터 20년도 훌쩍 넘어 50이 넘은 중년에 와서야 그녀의 환생과 마주하게 되지만... 역시 전생의 기억을 안고 현생의 삶을 산다는 건 안되는거였다. 우리에게 정말로 환생이 있다면 말이다. 상당히 이기적인 집착이라고밖에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은 오사나이 쓰요시라는 남자부터다. 그의 딸 '루리'를 시작으로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루리'의 존재는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왠지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불러온다. 모든 이야기가 마치 루리와 아키히코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여지지만 결국엔 시작했던 오사나이 쓰요시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자신의 딸 루리와 또하나의 루리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작은 소녀 루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사랑의 깊이가 조건이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다" 라고.  사랑의 깊이라는 말이 잠시 나를 붙잡았었다. 그 사랑의 깊이라는 건 주관적일까, 객관적일까?  그래서 사랑은 다분히 주관적인 이기심 덩어리인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별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별 것 아닌 것들'이라는 말때문에 우리는 그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지 못하지. 루리가 아키히코에게 마음을 주게 된 것도 참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관심과 배려는 그만큼 무겁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심과 배려야말로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게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외면당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관심과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은 채 등장인물에 따라 몇 개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있는 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은 묘하게 서로 엉켜있다. 복잡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해속도가 빠르고 몰입도가 상당하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거나 들었음직한 이야기인데도 처음처럼 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처음 가 본 곳인데도 마치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책을 덮기전 옮긴이의 말을 보니 이런 말이 보인다. 두 번 읽으면 더 좋을 책, 이라고. 어찌되었든 나는 이 책을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 느낌이 좋아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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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방정 귀신 퇴치법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책고래마을 19
김상균 지음 / 책고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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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라는 게 있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 어렸을 적에는 꽃상여도 간간히 볼 수 있기는 했다. 사람이 죽으면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갔는데 그 뒤를 유족들이 곡을 하며 따라갔었다. 그 상여의 앞에서 무서운 얼굴로 행렬을 인도하던 탈이 방상씨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다루고 있지만 방상씨의 역할은 나쁜 기운을 막아내는 것이다. 탈을 쓰고 악귀를 막아낸다는 의식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꽤나 오랜된 일이다. 방상씨 가면을 보면 눈이 네 개인데 윗쪽에 있는 눈은 이승을, 아랫쪽에 있는 눈은 저승을 바라본다고 한다. 문득 어쩌면 죽은자를 편히 보내고싶어하는 남은 사람들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만 보면 우리가 무서워하는 귀신을 막아내기 위한 어떤 처치법이라도 있을 것 같았는데 나의 짐작이 살짝 빗나갔다. 그럼에도 이 책의 소재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간단명료하다는 점이다. 조금만 더 살을 붙여 이야기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그렇게 했다면 너무 전래동화같았을까? 어찌되었든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오히려 무서운 귀신을 형상화 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책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귀신들은 우리나라의 설화나 전설속에 등장했던 존재들이다. 일종의 신화라고나 할까? 하긴 우리나라의 신화를 읽어보면 그 많은 신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기도 할만큼 많다. 뭐, 다른 나라의 신화를 읽어봐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한때 경복궁앞의 해치가 궁으로 들어오는 관악산의 '火氣'를 막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었다. 실제적으로 궁 안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드므' 역시 물을 담아놓는 그릇으로 '火氣'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火魔'의 모습을 얼마나 흉하게 생각을 했으면 들어오던 '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되돌아가라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다. 궁궐을 답사하면 그 입구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신수이야기 역시 아주 좋은 예다. 지금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 비과학적이라고 웃을 일이지만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에도 귀신은 끝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존재였다. 그러니 그런 귀신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처치법을 내놓았겠는가 말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 귀신들을 퇴지하기 방법들이다. 전통가옥을 들여다보면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 많이 보인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게 귀면상이지만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것도 그 한 예이고, 부적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한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는 것도 그 한 예였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 금줄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워져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뿐인 우리의 민속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제가 너무 반갑고 고맙다. 잊혀져가는 우리의 민속을 찾아내는 것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일테니.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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