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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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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웅이나 위인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미화되었거나 신비감을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대단히 많이 보이곤 한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영웅들의 등장시기나 태어난 배경등도 역시 황당하다 싶은 내용들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 아마도 학창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오빠에게서 받았던 <영웅문>이란 책이 떠오른다. 시리즈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지는데 처음엔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에 이건 뭐지? 했다가 그만 영웅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기억.. 그 많던 책들을 너무 재미있어 두번은 읽었을 거란 생각에 베시시 웃음이 나온다. 한다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제각각의 특징을 보여주며 등장하던 배경들은 그야말로 통쾌했었다. 그 책으로 인하여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게만 보여지던 중국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면 더이상 할 말 없다. 그때당시 무척이나 유행을 했었던 <백발마녀전>이란 영화의 주인공 임청하란 배우를 아직도 기억하니 말이다.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던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영웅문에서 만났던 무림의 고수중 한명이었으니... 그 넓은 땅덩어리를 서로 차지하고자 수도없이 싸움을 했을 그들의 이야기는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삼국지><초한지><수호지>... 대략 읽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비슷한 면들도 많이 보여진다. 그들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또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 전해져 왔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형식으로 알고 있었던 <초한지>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무언가 끊어질 듯이 이어져가는 맥락이 잡혀질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통하여 과거로 되짚어가는 형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처음의 시작은 역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대를 이었으며 등등등... 그렇게해서 황제들이 이나라를 이어왔다는 식의 이야기전개이다.  왠지 그런식의 문장을 읽다보면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빠지지 않은 요순선양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보아도 참 멋지다. 많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성자를 찾아내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가 이 시대에도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우문을 한번 가져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걸 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속성이 그리 아름답기만 한것은 아닌가보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싯점이 진시황의 시대다. 진시황이란 칭호가 생겨나게 되는 유래를 읽다보니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유방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역시 신비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용안'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다던 유방의 일화를 보면서 승자였기에 미화되어질 수 있었으리란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진시황을 태어나게 해 주었던 등장배경(여불위라는 재상의 기치와 술수로 인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진시황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탐했던 여인이 여불위가 총애하던 애첩이었다는...)은 그리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은 것 같다. 아비가 누구인지를 모를 지경으로까지 몰아가니 말이다. 또한 그 어미의 문란한 사생활이나 추문을 왜 숨겨주지 않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뒤따라 온다. 경극을 빌어 다시 태어난 이야기지만 왠지 깊은 울림을 안고 있는 내용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걸보면 내게는 아주 강한 느낌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 초한지 1권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보려 하지 말지어다. 이 책은 단지 앞으로 우리가 기대감을 갖고 바라보며 만나야 할 영웅들의 등장배경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니... 또한 이 책은 내가 보건데 이야기 전개방식이 조금은 특이하다. 그냥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그저 술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면 어라? 하면서 되짚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해서 책의 흐름이 무자르듯이 싹둑 싹둑 잘려지지는 않는다. 교묘하게 연이어주는 맛이 또한 색다른 까닭이다.  책을 읽기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초한지>의 흐름에 관한 선입견을 버린다면 훨씬 유리할 듯 하다. 유방과 항우의 등장배경을 비교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는 흥미로웠다. 또한 두 영웅을 중심축으로 하여 모여들 수많은 호걸들의 등장배경도 볼 수 있었음이다.  호걸들이 자신을 알아줄 주인을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처럼 개인적으로는 <삼국지>의 유비를 도왔던 제갈량과 비교되었던 인물, 장량에 관한 이야기에 많은 유혹을 느낀다. 그가 유방을 도와 세상을 평정하고자 했었던 일들은 과연 어떠했을지... 또한 '토사구팽'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한신과 유방의 관계는 어떠했을지... 흔히 알고 있는 유방과 항우에 관한 일화보다는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났을 소소한 일들, 많이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니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때를 기다리는 사내들'이란 소제목으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이문열의 <초한지>가 열권으로 태어난다니 그 열권속에 녹아내릴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초한지>의 목마름을 채워보고 싶다. <삼국지>의 영웅호걸들과 비교해보며 읽어간다면 몇배의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건 그냥 여담이지만  신문지상에 연재되어질 때 꼬박꼬박 읽어둘 걸 그랬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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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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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던가?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는 사실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 싫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간혹 읽으면서 뭉클해지고 읽고나서 눈물 고여지는 그런 책이 있다. 그런 책을 만난다는 건 행운일까?  사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도 나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자기계발서라는 말자체가 안고 있는 의미가 너무 뻔하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내세웠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내 눈앞에 보여지던 이 책의 표지그림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작은 아이가 커다란 어른에게 우산을 내밀고 있는 그림...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 작은 우산을 내밀고 있는 아이의 마음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어른의 마음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른은... 과연 저 작은 우산을 받아 들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뒷표지 그림에서 그 궁금증이 해결된다. 아이를 업은채 그 작은 우산으로 아이를 받쳐주는 어른의 그림.. 참 따뜻하다. 아마도 작가는 우산을 내미는 아이의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 들여 아이를 업은채 우산을 받쳐주던 어른의 마음, 이 두가지 모두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뒷표지의 그림이 생겨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잔잔한 마음의 여운을 내게도 전해주고 싶었는지 모를일이다.

근간을 뒤져보아 가장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던 <뜨거운 관심>이란 계발서가 생각났다. 얼마나 선전을 해댔는지 내 주변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책을 다 읽었을게다. 자기 계발서의 종착역은 항상 같다. 아무리 칸 수가 많은 자기계발행 기차를 탔다고 해도 늘 종착역은 같다는 말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관심과 배려이다.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과 믿음과 사랑에 대한 설명들..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눈에 짓물나도록 읽고 보았을 그런 문장들이 숲을 이루는 나무처럼 빼곡하다. 어떤 형식을 띠고 있느냐의 차이점일 뿐이다. 이 책속의 세상은 우리가 날마다 살아내고 있는 현재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일상과 마주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뜨거운 관심>이 가족의 테두리안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이 책은 사회적인 테두리안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 가정으로, 가족으로 돌아오게 한다. 주인공 이름과 주변인물들의 이름이 참 재미있다. 위차장, 공자왈부장, 조구라, 직업조문객, 요술공주, 명함수집가... 설정된 이름만 보아도 그들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게다.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는 부서이름이 프로젝트 1팀의 특수사업섹터다. 

책속의 인도자가 말해주었던 아스퍼거와 사스퍼거의 이야기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주인공 위차장을 서서히 변하게 해 주었던 두 단어의 위력앞에서 나 역시 작아져 가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자기 세계 속에만 갇혀서 아예 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킨다는 아스퍼거(Asperger) 라는 장애,  자폐증보다도 더 무서운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사스퍼거(Social Asperger)’라는 개념까지 보여주고 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눌 줄 모르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들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 즉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속에 너무 많다는 거다. 문득 떠올랐다. 몇 해전이었는지 여의도 광장을 택시로 질주하던 사건이 있었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각박해진 탓이라고도 말하지만 그 각박함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참 어려운 난제이다.

배려... 늘 가슴속에 살아 있으면서도 그림자만 밟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해 주고 있는 혹은 해 줄수 있는 관심과 배려는 몇 퍼센트쯤이나 될까 자문해 본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큼 이 세상의 흐름을 바꿔놓는 것은 없다고 늘 소망하면서도 그 사람관계를 원활히 하지 못하는... 적어도 나만큼은 남을 힘들게 하지는 말자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나로 인하여 아파하며 힘들어했을 가슴들은 분명 있었을게다.  간단하고 명료한 배움앞에서는 늘 선선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내 마음의 부재를 탓해본다. 어리석음이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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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
서명수 지음 / 아르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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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바이싱, 우리말로 하면 일반서민쯤? 하지만 일반 서민으로는 라오바이싱이란 단어에 담긴 역사성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다. 중국어 사전에 의거, 군인 및 공무원과 구별되는 주민이라는데 공산주의 성격이 더 강한 중국에서 군인과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라오바이싱일 것이다. 화자의 말처럼 고위 공직자와 당 고급간부를 제외한 모두가 라오바이싱이라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보았고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이란 제목에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내가 뭐 저명한 지식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업을 하는 기업인도 아닌데 무슨 두려움을 그리도 크게 느낄 수 있을까마는 딴은 이렇다. 변해가는 중국의 모습, 아니 이것은 분명하게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과 체제가 가랑비에 옷젖듯이 그렇게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전에 읽었던 <중국사의 수수께끼>에서는 그들이 왜 변하려고 하는가를 보았다면 여기 이 책에서는 이제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였다. 내가 두려운 건 아니다. 앞으로 그들과 맞서야 할 우리의 아이가 겪어야 할 시대가 두렵다는 거다. 왜일까?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아줌마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중국 정부가 무엇을 하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에게는 나와 가족밖에 없다. 가족이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국가는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공산당과 국가는 존경하는 아버지를 빼앗아 갔을 뿐 우리 가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 책표지에 있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참 무서운 말이 아닐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아니라 그 땅덩어리위를 걸어다니며 그 위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그들의 생활이었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것에서부터 이제는 개인을 위한, 개인의 것으로 변화하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는 그들의 모습. 과감하게 탈이념화를 향해 달려가기로 작정한듯이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 이 책속에는 그들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그렇게 변해가는 그들이 만들어낼 그들의 미래가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단순히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그들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화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속깊은 내면까지 짚어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안타까움이 보여지던 순간들도 군데군데 보여지고 있음이다. 

간혹 경제면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중국이란 나라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본다. 내게 중국이란 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산업현장을 한번쯤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와 너무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의 생활사를 보면서 탄식하기도 했다. 아직도 거론되어지는, 도무지 없어질 것 같지 않은 지역감정의 병을 저들도 앓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상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면서 이미 내면으로부터 곪기 시작한 것들은 말만으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들이 농촌을 살리기 위해 우리의 새마을 운동을 카피하여 저들에게 맞게끔 수정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움이었다.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에서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왠지 저들이라면 해내고야 말 것이란 생각이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니 왠일인가!  인구억제정책으로 인하여 황제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저들의 아이들이 짊어져야 할 미래.. 부모들이 1명의 자녀를 낳고, 그 외아들 외동딸이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외아들과 외동딸은 결국 양가의 부모를 포함, 6명의 노인을 부야해야 하는 결과(185쪽).. 라는 말은 정말이지 뜨끔하다. 그래서 중국의 1자녀 정책이 수정되거나 완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말은 그냥 그 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는 그들이 그래서 움직이는 변화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문제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애써 외면하느냐의 차이점일 뿐이다. 노령화를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다시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 2006년에 이미 700만대 이상을 생산하여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대 자동차 생산 대국에 진입했다는 말도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럼 우리는? 5위다. 중국... 참 놀랍게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것 같다. 경제발전이 아니라 대장금이란 드라마에서 보여주듯 중국이 잃어버린 유교와 가족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어서 참 좋다"... 화자가 여행중에 만난 노교수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늘 이 유교적인 문화라는 말앞에만 서면 은근짜로 화가 치민다. 유교를 전해주었던 그들도 이제는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할정도라니... 경제발전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다, 내게만큼은 이제는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 나갈 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저력있는 민족이란 말은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우습게도. 이념이든 체제든 그것이 확고하든 변화를 하든, 현실과 현재는 배고프다. 그래서 변화에 대해 흘끔거리며 가까이 다가가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장감 있는 인터뷰내용과 곁들여진 사진이 중국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화자의 강의를 내실있게 받쳐주었던 것 같다. 한바탕, 그야말로 긴장하면서 특강을 듣고난 기분이다. 멋진 특강이었다. 너무 딱딱하게 경직되어진 내용이 아닐까 우려되어 좀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특강이라면 한번쯤 더 신청해 볼 만하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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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조인간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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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심코 걸어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아이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떼찌, 떼찌 왜 우리 아가를 울리는거냐 응? 떼찌!" ..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누가 옳을까? 아니 누가 아이이고 누가 어른일까? ..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세계에서, 어느날 지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곰 발바닥 같은 산부인과 의사의 손에 붙잡혀 어머니의 자궁 밖 세계로 끌려나오면서 나의 세상은 시작되어진다. 우리 부모와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첫아이였음으로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시안에다가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여학생이 나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 때 몸을 뒤로 뺄수 있을만큼의 심미안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나와 비슷한 것이 생겨난 것을 알았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나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나를 아주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양인가 보다.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생각하며 박장대소를 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하나 둘씩 세상이 나의 의식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아쿠마 카즈히도야?"
"카즈히도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야"
"아빠와 엄마가 없어도,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져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어린이가 되었으면 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부모의 욕망은 똑같은건가? 세상 어디를 간다고 해도?
나의 이름은 아쿠마 카즈히도.. 불행하게도 나의 이름중 아쿠마는 악마惡魔 와 같은 발음이다. 그리고 카즈히도는 一人이다. 결국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마인 것이다.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엔 그래도 괜찮았다.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 아쿠마 카즈히도는 부모의 그 심오한 뜻과는 다르게 惡魔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진정 악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곧이어 행동으로 옮겨 요주의인물이 되기로 한다. 만지면 부풀어오르던 고추를 가지고 장난을 하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나외의 '나'가 더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나외의 '나'와 모든 시간을 함께 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그림자같은 나의 내면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사실조차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도 내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며 한 사건을 두고도 '예스'와 '노'를 동시에 외쳐대는 아이러니를 겪는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책속에서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나는 '책속의 나'가 아닌 '책을 읽는 나'일수도 있다. 어쩌면 그리도 내속을 박박 긁어대는지... 현실이란 건 어디서 마주쳐도 두려운 존재인 것 같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가오는 세상이란 굴레는 나의 덩치만큼씩 함께 커져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안에서 내가 찾아 헤매야 하는 것들은 비슷비슷하다. 사랑도 있을테고, 우정도 있을테고, 믿음도 있을테고, 배신도 있을테고, 행복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불행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는 내면속에는 그저 되는대로 막살고 싶다는 욕망도 함께 자리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택하고 남은 것들이 또다른 나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나의 그림자로 나와 똑같이 살아간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든 늘 나와 함께일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인간이 머리만으로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버리고, 쾌락도 고통도 모두 상상의 세계에서 맛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논리의 미로에 빠져들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피드백 장치가 없으면, 파멸하게 되어 있다. 한편 육체만으로 살아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사람은 그런 광인과 짐승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40쪽)

참 무섭다. 머리만으로도, 그렇다고 육체만으로도 살아서는 안되는 인간이라는 동물.. 포유류중에서 가장 고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에게 있어 진화라는 것은 단지 자신의 삶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일뿐이라던 어떤 영화속의 자막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내가 보기엔 육체만으로 살아가던 시대를 벗어나 머리만으로 살아가는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태어나는 인간 모두에게도 바코드를 찍어야 할지 모른다는 말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두명의 아쿠마 카즈히도처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쪽에 머물러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 올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보통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보통사람의 범주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씀이야, 인간은 모두 미완성의 모조품이지. 옛날 사람들의 패러디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나도 그래. 나는 누군가의 패러디다.(199쪽)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와 마주치기 위해,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성인이 된 아쿠마 카즈히도는 암벽을 타기로 한다. 그렇다고 내가 끝내주는 클라이머일 것이라는 생각은 마시라... 두 개의 칸테(암벽이 튀어올라온 부분)를 넘어서고 릿지를 오르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죽음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도 고독이란 놈이 찾아와 나는 나자신과 끝도 없이 싸움을 한다. 여전히 나를 비웃고 있는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 과거를 일순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299쪽)... 하지만 나는 살았다. 죽음 5초전까지 체험하면서.. 그 순간 나는 아쿠마 카즈히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버리게 된다. 결국 내가 또다른 나를 이기는 순간이다.  이 책속의 아쿠마 카즈히도는 책을 읽는 모두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불현듯 신화속의 남자가 떠오른다. 시지프스.. 무거운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올라야만 하는 우리의 시지프스.. 다 올랐다싶으면 다시 떨어져 내리는 바윗돌.. 우리에게는 우리가 올라야 할 정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정상을 향해 서로 짓밟고 짓밟히며 올라야 하는 애벌레탑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말해주고 있는 (그게 아니라면 정말 끝내주는 번역가의 말일수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한번 곱씹어 보면서 나는 책장을 덮기로 한다. 아쿠마 카즈히도의 여운이 길---게 내게 남아 있을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지만... /아이비생각

 '나'는 유전자나 단백질의 번역기계, 유기적인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조인간은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이며, '나'의 의식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타인들의 환상이다. 인간은 이 두가지 부분이 꼬여 있기 때문에 이상해지는 것이다.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들은 '나'의 의식속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환상작용 없이는 활동하지 않고,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은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의 활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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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요정이었던가?  가난한 노부부 앞에 나타나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그래서 그 노부부는 세가지 소원을 말했었다. 배가 고프니 우선 소세지나 좀 먹게 해 달라고, 그까짓 소세지를 소원으로 말해? 당신 코에나 붙어버려! 이제 소원은 한가지만 남았다. 노부부는 고민을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그 소세지가 코에서 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누구나 꿈꾸는 소망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 그 소망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가? 물론 그 사람이 처해있는 현실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또한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다.  동화속이건 우화속이건 이야기속에서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일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착한 일을 한 댓가로 받는 소원풀이는 그야말로 멋진 환상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의아했다. 이렇게 황당할수가!  정말 황당했다. 운명을 바꾸고자 과거로 돌아갔다던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어지기도 했고, 시간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 또한 많이 들어왔던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황당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이상하리만치 억지스러웠던 이 느낌들을 어이할까나.

예순살의 엘리엇은 평생 사랑했으나 자신의 미욱함으로 인하여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과거를 잊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캄보디아에서의 의료활동이 끝나던 날 차마 떨쳐내지 못했던 작은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끝내 돌아가지 못한채 선행을 하게 되었던 엘리엇에게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꼭 해보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고. 그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노인에게서 받은 황금색 알약 10개... 그 황금색 알약은 과거의 자신에게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예순이 되어버린 엘리엇이 서른의 엘리엇을 만나러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운명은 거스를수가 없다고, 감히 운명을 거스르려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엘리엇은 정말 기가막히게도 운명을 거스른다. 자신의 운명을 되바꿔 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 전개과정은 정말이지 나에게 어설픈 억측처럼만 들려왔다. 그것도 타인이 나의 운명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과 먼 과거속으로 들어간 타인의 손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는 설정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그 잘못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내는 그런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차라리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신경과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살얼음을 밟고 살아가는 듯 했다던 엘리엇의 어두운 성장과정이야기가  그 이야기속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그 기대와는 너무 어긋나버린 이야기전개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안타까움을, 그 아련함을 어쩌지 못한채 차마 떠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픔일게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한점의 슬픔조차도 느끼질 못했다. 모르겠다. 기욤 뮈소라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던 동기는 내가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와 만나게 된 것과 비슷했다. 신문지면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지면의 반쪽을,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들어나는 그 광고를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만 할까?   책장을 덮으니 책표지가 내 앞에 우뚝 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시간의 반대방향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그림. 그리고 책 제목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사랑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련함을 전해주는 애달픈 이야기도 아니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예순이었던 엘리엇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는 서른의 엘리엇이었던 그 설정이 나에게 주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목만큼이나 나를 서글프게 했던 책이었다. /아이비생각

당신의 은신처는 당신 자신이다.
다른 곳은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당신 자신만 구월할 수 있을 뿐이다.
-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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