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 주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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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 지루하게 책과 싸웠던 시간이었다. 반복되어지는 말들이 너무나도 나를 힘겹게 했다. 과거의 성공에 얽매인 조직에겐 미래가 없다며 한국어판을 펴내게 된 이유를 설명하던 발행인의 말이 없었다면 용서되지 않을 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읽으면서 나는 일본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과거의 진화유형에 너무 적응해 버려도 적응능력이 사라져 죽어버린다는, 새롭게 변화를 추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기존의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는, 일본군의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진리를 이책에서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실패했던 군대조직이 기업조직으로 이름을 바꾸어 세상을 지배했다. 전후의 발전을 꾀했고 성공했지만 군사조직에서 실패했었던 이런 저런 점들이 고스란히 기업조직으로 넘어왔던 탓에 일본은 '잃어버린 십년'의 불황을 겪었다는 말이 왠지 섬뜩했다.

태평양 전쟁중에서 일어났던 여섯가지의 사례를 들어주고 있었다.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암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 그 하나씩의 사건과 작전마다 어느 부분의 실패였는지를 짚어주고 있음이다. 미드웨이 작전과 과달카날 작전을 통해 해전과 지상전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노몬한 사건은 실패의 서곡에 불과했다는..  지루하게 넘어가는 책장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할 만한 이런류의 책이 얼마나 있는가?  한사코 기존의 것을 버리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야했던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우매했던가를! 일본과 우리의 상황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렇게나마 우리를 돌아보게 해 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처음엔 실패의 사례를 연구했고 다음으로는  왜 실패했는가 실패의 본질을 파헤쳤으며 그 다음으로는 그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전시였음에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서로의 적이 달랐다. 육군은 소련이었지만 해군은 미국이었으니 서로의 의견이나 전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소통의 부재였음이다. 지극히 '일본인다운 집단주의' 라고는 했지만 인맥편중의 조직구도가 실패였다. 일본과 미국의 시스템이 똑같이 관료적이었지만 일본은 학력주의였고 미국은 능력주의였다. 인사권마져도 미국은 능력있는 자가 행세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어떤가? 아니 일본을 말하기전에 우리를 바라보아도 결론은 똑같다. 일본을 지적하기 이전에 상하관계만이 허락되어지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정보나 문제제기는 먹혀들지 않았고, 아이디어나 어떤 과정을 촉진하는 것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위로부터의 말에 거부를 할 것 같으면 바로 잘라내는 그런 식이었던 거다. 책속의 말처럼 '말을 빼앗긴 것이다'.. 말이 말을 억누르고 오직 말만이 살아 날뛰는 그런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지겹게 봐오지 않았던가!

일본이 과정이나 동기를 중시한 평가를 했던 반면 미군은 결과를 중시했다. 결과를 중시했다는 말에는 책임을 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군이 사실을 직시하고 정보와 전략에 의해 조직을 움직였다면 일본은 사실보다는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황을 전제로 움직였다. 정보를 가볍게 여겼고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아지려는 자세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패러다임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어떤 강력하고 일관된 '생각'에만 집중을 한 채 다른 것은 인정조차하지 않았으며 그 '생각'에 짜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역사속에서 많이 보아왔던 상황이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특정 패러다임의 틀로만 일원적으로 해석해 그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모조리 묵살해 버리는(-403쪽) ..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교적인 관념이 여기에 해당되는 하나의 예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군다나 상하 관계로 움직여지던 조직이었으니 위의 말만 있고 아래의 말은 없었다는 서러운 현실이 존재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읽었을 때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는 피신을 권하며 전쟁속으로 떠났던 장교의 입장이 이제사 이해가 되었다고 하면 억지일까?

실패한 사례를 보여주며 왜 실패했는가 본질을 따져묻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본을 위해서.. 책을 읽으면서 장로체제라는 말이 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상하관계를 중히 여기다보니 횡적으로 인맥형성이 되지 않았다. 또 거기에 인정주의까지 겹쳐 그놈이 그놈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변화를 꽤한다거나 상황에 맞춰 진화를 해야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위의 사람이 사라져야만 그 아래사람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상황은 정말 모순이 아닐수가 없다. 잘못이 있어도 추궁해봐야 허점만 드러날 뿐이니 상명하복의 형태에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미국의 최고 경영진과 비교해볼 때 일본은 나이가 너무 많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왠일인지 내게는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가?"
"반드시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꼭 이긴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281쪽)
정보도, 첩보도, 수색도, 학습도 경시하며 오로지 정신력에만 의존했다던 일본군 조직속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건 지금도 의문이다. '승리할 확률이 우리쪽이 많을지라도..' 같은 따위의 말이 나왔다는 건 정신력 자체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전쟁과 같은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미군과 같이 성공할 것인가? 일본군처럼 실패할 것인가? 라는 말을 책표지에서 볼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것인가? 일본이 되었든 다른 나라가 되었든 성공할 수 있다면 배울 건 배워야 한다. 과거에 얽매인 채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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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원
니콜라스 스파크스 지음, 김진주 옮김 / 퍼플레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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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공책 혹은 일기장을 뜻한다는 <노트북>.. 그 영화를 보면 참 느리다. 너무나 일상적일수도 있겠고 그다지 이렇다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특별하게 그리고 커다란 느낌을 전해주었던 영화였었다. 노년의 신사가 같은 양로원에 있는 한 여인(할머니)에게 낡은 공책속에 담겨진 오래된 사랑이야기를 정기적으로 읽어주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잠시 뿐..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다는 것을 그 여인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 노년의 신사이야기가 실화였다는 것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렇게 소설같은 사랑이야기가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얼마전에 '하이디'라는 소녀가 실제적인 인물이었고 목동과의 사랑을 가슴속에 깊이 묻은 채 살았다는 기사를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단지 <노트북>을 쓴 작가라는 말 한마디에 선택했던 작품 <럭키 원>에는 <노트북>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잔잔한 사랑에 대한 것을 되찾을 수 있어 좋았다.

부적이라는 게 있다. 사랑의 부적이라면 그 사랑에 좋은 일만 있어 달라는 마음속의 주문이 들어 있을테고 일상적인 부적이라면 내 삶속에 나쁜 일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고 있을 것이다. 미신이라고 해도 어딘가에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움직이지 않게 붙잡아놓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전쟁중에 모래밭속에서 주웠던 사진 한장이 그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아니 그에게가 아니라 그의 주변이 그것을 그의 부적처럼 여기며 전쟁중의 힘겨움을 버텨냈다. 함께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들었던 유일한 친구 빅터에게서 운명적인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도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정말 우연히 찾은 한 장의 사진은 그에게 부적이었을까? 그 사진속의 한 여인은 그에게 정말 운명적인 사랑이었을까? 타고 있던 배를 보트가 달려와 두동강 내버리고 같은 배에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 살아남게 된 로건 타이볼트는 결국 친구 빅터의 죽음과 함께 그 운명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머나먼 여정.. 어딘가에서 분명히 자신과 만날 수 밖에 없을거라 믿어지는 한 여인을 향해서..

모든 죽음의 상황속에서 그에게 행운처럼 삶을 선사했던 한장의 사진과 그 사진속의 여인은 과연 그와 만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작가는 처음부터 이미 다 보여주면서 시작할 낌새다. 로건 타이볼트의 과거와 현재, 그녀가 찾아가고 있는 여인 엘리자베스의 현재와 과거를 겹치기로 보여주면서 느낌은 당신의 몫이라고 떠넘기고 있다. 읽다보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건 정말이지 당연하다.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들만이 책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까닭에.. 하지만 이 책의 부제에서처럼 '찾아가는 운명' 로건 타이볼트와 '다가오는 사랑'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은근한 속살거림으로 나에게 찾아온다. 아무것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이 찾아오는 그들의 사랑이 정말 운명적인 사랑이었을까?

사랑에는 참 많은 길과 종류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빠른 사랑도 있고 지독한 사랑도 있고 집착하는 사랑도 있고 오래도록 기억되어지는 사랑도 있고.. 그중에서도 처음 사랑, 첫사랑에 대한 것만큼은 우리에게 정말 관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면서.. 친구와 연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차이점은 얼만큼이나 되는 것인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같은 공간속에서 살아도,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해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상태는 존재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게 참 묘한 감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너무 크게 다가오는 사랑앞에서는 나 역시도 왠지 주춤거릴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로건 타이볼트와 엘리자베스가 서로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이런 느낌, 어디선가 강하게 내게 다가왔던 것만 같다는.. 아주 잔잔하게 그러나 지독하게 찾아왔던 짧은 사랑이 있었는데, 짧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아주 오래도록 가슴속에 살아남아 가슴 벅찬 사랑의 아픔을 선사해주었던 또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기억한다. 중년의 사내와 여인이 아주 짧은 동안 지독한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영화였었다는 걸 이내 찾아냈다. 오랜동안 그 사랑의 여운이 머리속에서,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그 이야기의 여운을 <럭키 원>이라는 작품속에서 만난 로건 타이볼트와 엘리자베스가 전해주고 있었던 거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그들의 사랑이 왜 그토록 크게 보였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저편에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가 이해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속성을 갖고 살아가는 탓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편안함, 그 편안함속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불평없이 안아줄거라는 믿음,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랑의 속성은 아닐까?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것이 첫사랑이 아니어도 좋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편안함과 믿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첫눈에 불꽃튀는 사랑이 아니었다해도 말이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좋게 결실이 맺어졌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희생되어야 할 그 무엇도 있었을게다. 어찌보면 진부하고도 지루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봤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잔잔하게 남는 그 느낌이 좋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포장되어지지 않아도 서로에게 아름답게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이면 나는 괜찮을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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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 못생긴 나에게 안녕을 어글리 시리즈 1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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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생각해보기로 한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전신성형수술을 해 드릴까요? 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바로 그 순간의 마음, 아니 평소에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었던 것들이 얽혀들어 대단히 복잡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냥 이대로 살아? 그냥 한번 확 뜯어 고쳐봐? 하지만 어느쪽을 택한다해도 무언가 마음속에 미진한 것이 남을 것만 같다는 결정이 내려진다. YES냐 NO냐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애착을 얼만큼이나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다. 누구나에게 빈틈은 있다. 빈틈없이 완벽하다면 신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우리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나 역시 조금은 더 예뻐지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미인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다. 이렇다하는 거리를 하루만 걸어보라. 방금 지나간 듯한 사람들이 내 앞을 수도없이 지나가고 있음을 착시현상처럼 느끼게 될테니.. 어떻게 된 일인지 요즘은 패션 또한 비슷하다. 요즘은 남자 여자 구분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개성을 창조하고 또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리패션 역시도 뭔가 모르지만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그게 그거라는 말이다. 얼굴도 옷도 거리를 같은 패턴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미녀라던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밝혀지면서 그들이 전혀 미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예쁨보다는 그들이 안고 있었던 내면의 지혜였다.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꽃들과 만나 그려내는 자연을 앞에 두고서 '예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시기적절한 '아름다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글리>라는 커다란 제목 아래 '못생긴 나에게 안녕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바비인형의 얼굴이 있었다. 단순히 성형에 관한 이야기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정말 기발한 상상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인도하는 책속세상은 이미 우리의 현실을 앞서나가 먼 미래속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이 아주 멀리에서 과거 혹은 역사로 기억되어지고 있는 세계.. 그 세계속에서는 열여섯살이 되면 누구나 똑같은 기준으로써의 '예쁜이'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못난이'세계에서 받았던 불평등 대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탤리도 열여섯살이 되는 날만 기다렸다. '예쁜이'수술을 받은 후 모든 것을 즐기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세상이었지만 이미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탤리에게는 그런 것을 인식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오랜동안 함께 해왔던 친구 패리스가 '예쁜이'수술을 받고 그녀곁을 떠나버렸을 때 셰이는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을 가지고.. '못난이'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곳. 굳이 '예쁜이'수술을 받지 않아도 하나의 주체로써 살아갈 수 있다는 곳. 그런 곳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탤리에게 잠재되어져 있던 것들을 하나씩 깨워놓는다. 모험심, 자신감, 확실성, 도전, 성취욕, 만족따위의 감정들을.. 그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스모키라는 곳이 있다는 것도. 그런 곳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어찌되었든 먼저 떠나간 셰이의 쪽지를 따라 탤리는 스모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예쁜이' 수술을 통하여 예뻐진다는 것은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방식까지도 바꿔버린다는 것을. 그리하여 논쟁도, 의견 차이도,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없어져 버린 채 그저 미소만 짓는 예쁜이 대중과 세상을 운영하는 몇 명정도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리고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방식속에서 탤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 '못난이'들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어찌 되었을까? 흥미진진한 탤리의 여정이 책을 읽는 내내 속도감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속에 자신을 맞추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의 가치기준에 멋지게 한방 날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가까이 다가온 우리의 미래를 보고 있다는 공감까지도!  '예쁜이'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일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빠른 반응을 요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분쟁과 위험을 다루는 사람들이었고, 도전에 직면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웠다. 이미 우리가 기계들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상황을 다시한번 체크해봐야 할 것 같다는 경고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복잡한 것들을 싫어하고 순간적인 즐거움만을 탐닉한다는 말,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어보는 말일테니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기발한 상상의 글도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정말 기막힌 상상이 아닐수가 없다.  은근한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책장을 넘겨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슬픈 일일수도 있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는 것을!

즐거운 상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런 세상이 정말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섬뜩하기도 했다. 지금처럼만 변함없이 살아간다면 아마도 정말 그런 세상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못생긴 나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 아니라 못생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개성과 자신만의 특별함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키워나간다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전신성형수술을 해 드릴까요? 누군가 다가와 다시 한번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확실하다. NO!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생각없는 세상속에서 그저 예쁜 미소만 지으며 살아가야 할테니 말이다. '예쁨'과 '아름다움'의 차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아름다워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간다면 그것 또한 정말 멋진 일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작가가 준비하고 있는 책이 두권 더 있다고 책표지에서 예고한다. 아마도 탤리가 만나는 세상이야기일 것이다. 1편 <어글리>를 정리하며 결국 '예쁜이'수술을 받게 되는 탤리를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여주었으니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탤리가 살아내야 할 세상은 많을 것이다.  아마도 '예쁜이'로써 살아가는 탤리와 그것으로부터 다시한번 탈출을 시도하는 탤리의 모습은 아닐까 미리 상상해보기도 한다. 어떤 상상을 자극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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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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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중에서 <임꺽정>과 <장길산>이 있다. 모두가 소설속의 주인공이었지만 인기투표를 하면 꽤나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는 인물들이다.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이었으며 장길산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광대였다. 그야말로 천민중의 천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 두 사람을 그려보라한다면 꽤나 믿음직스럽고 용맹스러운 이미지를 그릴 것이다. 천민중의 천민이었다던 그들이 그토록이나 힘겨운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것처럼 <제중원>을 이끌어가던 핵심인물 황정 역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오갈데없는 천민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조선최고의 의사로써 거듭난다. 가장 관심을 끌던 대목이었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의사이자 최고의 의사가 되었다는 그 말이...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했던 조선말기는 그야말로 혼돈기가 아니었나 싶다. 흥선대원군의 그 철통(?)같았던 쇄국정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들이 조선이라는 조그만 나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 변화의 물결이라는 것은 막는다고 막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깨어있기를 원했다는 말도 될 것 같다. 유교의 그늘밑에서 변화를 막아보고자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만을 살폈다. 그 말도 안되는 형식과 허울을 뒤집어 쓴 채 오로지 '아니되옵니다!' 만을 외쳐대며 깨어나고자 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찬물을 끼얹기에만 급급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도 사람의 목숨을 앞에 두고서 양의원을 찾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진료를 했다는 이유로 병을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결을 하고 말았던 정승대감의 딸은 일찌기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유학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왠지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황정.. 그가 왕으로부터 제대로 된 성과 이름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단지 천민이었다는 이유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시대적인 아픔이었다고만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도 우리를 뼈저린 회한속에 젖어들게 한다. 이 책속에서 펼쳐지는 황정이란 남자의 일정을 따라가다보면 참으로 가슴 저미는 과거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매함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그 과거사의 고통들.. 좀 더 일찍 깨었더라면 어땠을까? 황정이나 황정과 라이벌의식을 가져야 했던 양반자제 백도양처럼 젊은이들이 좀 더 일찍 깨어 이 나라를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백도양이란 남자를 통해 보여주었던 양반이라는 허울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왔으나 의술을 펼치게 되는 알렌과 헤론의 사고관념 차이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무조건적으로 변화의 물결을 타야한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마시라! 그들에게도 남북전쟁이라는 아픔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뜻하지않게 사람을 해부하게 되고 뱃속의 내장들을 하나 하나씩 꺼내어 보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가야 할 길이 거기에 있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약간의 허구가 섞여들어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팩션이라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부인하고 싶지가 않으니 또 왠일일까? 그만큼 황정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의술과 인술의 묘미가 이 책속에서 펼쳐지고 있음이다. 이미 오래전 <허준>이 그랬고 <이제마>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혹은 자신의 실력향상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아픔이 마치도 자신의 것인양 치료를 했던 황정의 인술.. 양반자제 백도양의 뛰어난 의술속에서조차 단 하나의 결점으로 존재했던 인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이요, 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情을 담은 따스함으로 환자를 대했던 황정이 의병을 치료하게 되고 그 의병장을 매개체로하여 마지막엔 독립군 군의가 되어 만주로 떠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장을 덮기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논란의 여지부분이다. <제중원>이라는 최초의 병원에 대한 서울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사이의 뿌리논쟁이었다.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어져 나중에 선교부로 이관되었으니 연세대 의대의 뿌리라고 하는 쪽과 고종이 설립한 조선 정부 소속의 왕립 병원이었으니 당연히 서울대 병원으로 이어지는 국립 병원의 뿌리가 되어야 옳다고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는 말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했다. 과연 조선의 후예답다. 어디에서나 편가르기에 목마른 조선의 후예들.. 씁쓸하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어느 쪽의 편도 들어주고 싶지 않다. 어느쪽이 되었든 무슨 상관일까?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그렇게 훌륭한 병원이 시작되어졌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황정이라는 인물을 따라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은 참 많았다. 특별하게 튀거나 요동치는 듯한 장면은 없었을지라도 잔잔하게 읽어가기엔 꽤나 괜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중원>.. 또하나의 배움으로 다가왔던 책!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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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타락천사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A. M. 젠킨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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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전제로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내용의 글은 많이 보아왔다. 파울로 코엘료의 <악마와 미스프랭>에서도 미스 프랭을 찾아와 거래를 하자던 악마가 있었고, 흔히 알고 있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가 나온다. 그들은 기가 막히게도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낸다. 하긴 타락천사도 천사긴 천사이니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게도 그런 악마가 찾아와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나는 당연히 악마와 거래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지만 아마도 나는 정말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의 천사와 악마는 누가 규정지을까? 당연히 나다! 내가 어떤 쪽으로 마음을 더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냥 천사가 되느냐 타락천사가 되느냐가 갈려지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니..

순간적인 찰나를 이용하여 인간의 육체를 빌린 타락천사 키리엘.. 그가 잠시 빌린 육체는 십대소년의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보았다. 왜 십대소년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답을 찾아냈다. 이런 저런 이유와 조건을 나름대로 열거했지만 어쩌면 순수함이 정답이었을거라고.  아무래도 거친 세상을 살아내면서 닳아빠진 어른보다는, 머리 굴리는 계산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어른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순수함이 남아 있을 십대의 육체를 선택했을 거라고. 그리고 그 타락천사는 인간이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정신적인 느낌과 육체적인 느낌을 함께 만족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마음먹은대로 다 되는 일은 아니니 하나쯤은 조금 포기해도 괜찮았다.

먼저 말했던 <악마와 미스프랭>이나 <파우스트>속의 악마는 분명한 거래조건을 제시했었다. 마치 인간을 실험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의 주인공 타락천사 키리엘은 그렇지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보고 싶었으며 자신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차지했었던 그 육체를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창조주의 피조물로써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에게 딱 삼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어찌보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전혀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형식만 빌렸을 뿐이다. 우리의 십대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정말 솔직하게 잘 그려주고 있음이다. 대단히 소설적인 이야기지만 현실적으로도 있음직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그런 내용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숀이라는 외로운 소년의 육체를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모습은 정말 외롭고 아팠다. 이혼한 엄마의 마음도,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닫아 걸어버린 동생 제이슨의 퉁명함도 모두가 아픔이었다. 가슴 깊숙이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타락천사 키리엘의 느낌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이해받고 싶은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54쪽) 던 키리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아픔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어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주변을 감싸는 다른 실, 그러니까 애정과 믿음의 실이 있어서 그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던 키리엘의 생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닌 그 믿음과 애정의 실이 점점 가늘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가슴아프게도.. 

그래서 타락천사 키리엘은 생각했다. 이곳에 왔다갔다는 흔적 하나쯤 남겨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지옥에서 영혼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의 사소한 것들때문이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깨우져주고 싶다고... 그리고 작가는 그 타락천사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게다. 저녁과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 되었고, 또 둘째날이 되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천사 하나엘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포를 기다린다. 죽음의 공포를. 처음 자신이 숀의 육체를 트럭에 치이던 순간 낚아챘던 것처럼 육체를 다시 트럭에 치이게 하여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을 아파하면서.. 그리고 키리엘처럼 우리도 죽음을 기다리며 산다!

책표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인지 일꺠워주는 작품"이라는.. 인정한다.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의 문체만 봐도 알 수 있는 말이다.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왜 자꾸만 죄를 짓는가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는 재미는 그렇게 키리엘만의 재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그리고 공감하게 되는 책이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볍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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