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랫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어른을 위한 동화 12
황석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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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전쟁 직후 서울 한강변의 '모랫말'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이야기들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도 한다. 이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대로 접어야 했다던 작가의 말에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어떤 뉘앙스가 풍기는 듯 하다. 왜 그랬을까? 너무 사실적인 이야기를 그저 무덤덤하게 그려주었기 때문에?  책속에서 나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내지 못했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던 작가만의 감정이 녹아있을테지만 글쎄, 그 시절을 겪어낸 사람이 아니라면 독자로써 그 느낌을 전해받기가 쉽진 않을 듯 하다.

열편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살짝 한번 들춰내보자. 동네 다리밑에 움막집을 짓고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은 땅그지 춘배의 이야기였던 꼼배 다리. 어찌어찌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지만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춘배는 아내와 가족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니들만 사람이냐를 외쳐대던 춘배의 한은 어쩌면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고단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직후였으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양색시가 되어야 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준 금단추나 그 양색시를 어머니로 두었던 아이를 좋아했다는 내 애인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그 시절의 처절함이 묻어났다.  지붕 위의 전투, 도깨비 사냥,  친이 할머니, 삼봉이 아저씨,  낯선 사람, 남매, 잡초...

모든 이야기속에서 허덕이던 시간의 흔적들.. 배우지 못했기에 서러워야 했던 이야기가 있었고, 치기어린 아이들의 용맹성이 하나의 자랑거리처럼 여겨지던 어린시절의 추억같은 이야기가 있었고,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멈춰선 채 알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의 짧은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절을 살아내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만큼이나 이해할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먼, 그야말로 몇 백년전의 이야기가 아니니 그저 옛날에는, 전쟁이 있었던 그 때에는 이랬었단다 하는 느낌없는 단어들일 뿐이다. 그때는 그렇게 어려웠다고, 배고픔에 서러워 울기도 했다고,하니 요즘 아이들의 말이 수퍼에 가서 라면이라도 사먹으면 되는데 왜 굻어요? 했다던 속아픈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 역시도 그 전쟁을 겪고 나서야 태어난 사람이니 말해 무엇할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전쟁의 혹독함을 겪어냈던 내 어머니 아버지의 시대가 가고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의 시대는 그 기억들을 어찌해야 하는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살아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당혹스러울 것도 같다. 그 혹독함을 견뎌냈던 부모님 세대들의 힘겨움이 고스란히 나의 어린 시절속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나 어린시절에도 한쪽 손끝에 손대신에 쇠갈고리를 달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고, 커다란 대바구니를 등뒤에 짊어지고 다니며 집게로 헌종이나 빈병 따위를 주우러 다니던 젊은 넝마주이가 많았었다. 모두 전쟁의 상흔이었을거라고 지금에야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책속의 화자로 보여지던 수남이..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배고픔이나 힘겨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남이를 돌보기 위하여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던 태금이를 잊을 수 없다던 화자의 말을 빌려보더라도 그렇다. 마지막 이야기였던 잡초.. 그 이야기속에서 태금이는 그야말로 이팔청춘이다. 어찌하다보니 젊은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이념의 시대였으니 그 사랑또한 이념따라 흔들렸을 수밖에 없었을게다. 밀고 밀리던 전쟁중에서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던 태금이의 이야기는 이 편도 저편도 될 수 없었던, 하지만 살아내야 했던 현실앞에서 냉정해야 했던 내 부모님 세대들의 서러움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의외로 잔잔하다. 특별하게 다가오는 어떤 진함도 없다. 거기에 삽화로 잡아주는 배경 또한 아련한 느낌을 준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표현하기엔 딱 좋아보이는 수묵화처럼.. 어쩌면 그 아련함으로 작가의 어린시절은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들에게는 정말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었을까? 왠지 삐딱함이 엿보이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그 어린시절이 그다지 즐거운 시절로 기억되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따뜻함이 어둠속에서 빛난다던 작가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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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 In the Blue 1
백승선.변혜정 지음 / 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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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쓴이의 말을 빌려보자면  면적이 한반도의 1/4인 나라,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나라, 우리와 비슷하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슬픈 국경을 너무도 쉽게 넘는 나라가 크로아티아다.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동안 맨 몸으로라도 그 마을 한 귀퉁이에 숨 붙이고 살고 싶었다던 마을, 과연 그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공기인듯 물인듯 나무인듯 자연스럽게 그 속에 섞여 살고 싶었다던 글쓴이의 말을 보면서 생각해보자니 그야말로 마을 자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을거라는 환상이 생겨난다. 누구라도 행복을 담아간다는 곳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글쓴이의 찬가는 정말이지 극치를 이룬다. 꼭 그곳에 갔어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그곳에서 그들이 보고 만지며 느꼈던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펼쳐지는 사진들이 나를 유혹한다.

핑게도 좋다. 밥값의 거스름돈을 넘치게 받았으므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으러 다시 두브로브니크에 가야 한단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가슴 가득, 그야말로 한아름 안아들었을 길위의 행복이 저절로 느껴진다. 사진과 함께 어울어지는 글쓴이의 짧은 감성조각들이 그것을 보는 내 감성마져도 달아 오르게 만든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위에서 바라다보는 글쓴이의 시선들이 사진으로, 짧은 탄성으로 내게 다가온다. 정말 멋지다! 이쯤에서부터는 나도 은근히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여권을 만들어 크로아티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글쓴이의 말처럼 사람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빨간지붕이 모여 있는 노브리예나체 요새쪽은 나도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빨래를 널어놓은 풍경, 내가 참 좋아하는 그림이다. 거기에 뒷배경이 돌담이라면 더 비할데가 없다. 덜 짜여진 빨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그렇게 뚝.뚝. 정이 떨어져내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시골 어느 마을을 지나치다 높은 종탑이 있는 교회를 보면 차를 세우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종을 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종소리를 열어 내 마음을 울려보고 싶은 까닭이다. 그렇게 '정情'스러움을, 그런 아름다움을 글쓴이들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찾아낸 듯 하다.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말이다. 슬픈 기억을 호출하는 바닷빛... 도대체 어떤 그림이었길래 이토록이나 슬픈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지 두브로브니크의  그 바다가 궁금하다. 그들도 배를 띄워 풍어를 기원하는 사람들일진데 그들의 바다가 무에 그리 특별할까 싶어서. 모르는 사람들앞에서 무장해제된다는 것, 경계심을 허물어뜨린다는 것, 표정없이 눈에 독기를 품지 않아도 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곳이라는 말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상처를 품은 너의 도시를, 너의 사람들을, 너의 물빛을 기억할게, 라고 말하며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글쓴이는 정말로 두브로브니크를 사랑했었구나 생각한다. 놀랍도록 절제된 문장속에서 놀랍도록 커다란 사랑을 발견해낸다.

내가 글쓴이의 사진을 통해 이곳이라면 정말로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플리트비체다. 오직 물소리만 들었고 하늘과 땅사이 나무와 폭포와 호수와 그 호수속의 하늘만 있다는 곳.. 물속에 잠긴 나무가 나무요정이 되어 글쓴이의 추운 현실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는 곳.. 그가 사진으로 보여주며 안내하던 플리트비체는 사진만으로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물도 나무도 하늘도 모두가 물들어 버릴 것만 같은 푸르름으로 옷을 해입은 듯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빗속에서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는 그 말조차도 부럽기만 했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떠날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말없이 펼쳐지는 몇 장의 사진들이 나를 유혹한다. 정말 환상이다! 정말 아름답다!  같은 공간위에서 펼쳐지던 계절의 유혹이었다. 그곳만이 색다른 계절을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이 정말 많은 것을 담아내는구나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어쩌면 절대로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는 곳 플리트비체는 나도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

아직 내전의 상흔이 남아있다는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밀실같고 미로같다는 구시가지의 풍경은 왠지 낯설었다. 무슨 굴속같다. 누군가 죄를 짓고 숨어 들어와 살기 시작했던 곳은 아니었을까? 이 곳을 여행하면서도 짧게 짧게 여행자의 메세지는 계속된다. 감성을 울리는 메세지들.. 초록색으로 칠해진 나무창과 공중전화 하나를 보고도 지나치지 못하는.. 여행하는 내내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여행자들의 기착지. 서글프고 아련한 넥타이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해 준 곳.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게 했다던 장바구니를 머리에 인 아낙네상이 있던 곳. '공존共存'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던 타국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의 일정을 바꾸게 했던 곳. 그 곳, 자그레브를 끝으로 그들의 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들이 공존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는 자그레브에서 마침표를 찍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순간까지도 미련과 여운이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에게도 당신의 등을 떠미는 한장의 사진이 있느냐고.. 있다! 어쩌면 다른사람도 가슴에 품고 있을만한 그렇게 흔해빠진 사진 한장이지만 기회만 닿으면 꼭 가보리라 다짐하는 그런 사진 한장이 내게도 있다.

흔적. 사랑의 흔적, 우정의 흔적, 이별의 흔적, 배신의 흔적, 슬픔의 흔적.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점점 늘어간다. ( 이 책은 쪽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저 보고 느끼면 그만인 탓에.. 그래서 이 글이 어디쯤인지를 말하지 못한다. 단지 여행자들이 자그레브의 거리를 걷다가 낙서가 있는 벽을 찍었던 사진위에 이 글이 적혀있었다고만 말해야겠다.. 이렇게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으니 그 여행은 한편의 시처럼 다가왔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글쓴이가 남겨주는 마지막 메세지는 아니었을까? 여행, 흔적처럼 남겨질 여행의 기억들.. 그 흔적을 영원토록 지우고 싶지 않겠지..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일게다. 마음에 상처를 내는 흔적만 아니라면- 돌이켜보아 아픈 기억을 되새김질 해야 하는 그런 흔적만 아니라면- 그런 흔적이 내 가슴속에도 살아가면서 자꾸만 늘어갔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굳이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유적지 탐방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단지 책과 여행을 사랑한다는 두사람의 마음과 시선만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 한 장, 그들이 들려주는 작은 속삭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을 아무런 생각없이 느낌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게 쉽진 않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또하나의 여행길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고 작지만 그들이 건네주는 여유를 한 움큼 받아든 느낌이다. 여행은.. 참 매혹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여행만 하며 살아보고도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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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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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물어보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까, 사회 문제일까? 가난은 죄일까, 죄가 아닐까? 세상에는 정말이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눈에 환히 보여지는 것들,  조금만 어떻게 해보면 될 것 같은 그런일들이 의외로 참 많다. 여기 이 책속의 주인공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고 사회문제이기도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가난은 죄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라는 커다란 틀에 부합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을테니 말이다.

책속의 흐름은 두 줄기의 강물같다. 하나는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한때 주류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나 흑인차별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출신지인 빈민가로 돌아와서 갱단의 보스가 된 제이티이다. 그가 대학까지 나왔고 나름대로 전공했던 분야도 있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끌어가는 갱단내의 모든 상황들은 차분하다. 분노의 격정에 휘말려들것도 같은데 제이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또 하나는 빈민가 사람들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며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를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주민들이 서비스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기며 부정수익자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이는 또하나의 중간계층 베일리 부인이다. 그가 해결해주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내야 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다. 전기가 나갔다든지, 수도가 끊겼다든지, 대문이 떨어져 나갔다는지.. 그런데 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마져도 해결할수가 없는 것일까? 그들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 수디르는 그들을 향해 섣부른 동정도, 비판도 또한 미화도 하지 않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여론조사라는 게 있다. 통계라는 게 있다. 언론시상에서 대다수의 의견인양, 대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인양 떠들어대는 그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발표할 때는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주제에 대한 조사를 한다음 그 조사결과를 가지고 통계를 내거나 연구를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직접 발로 뛰어 그 주제속으로 들어가 알아내고 그것을 근거삼아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옳은 일일까? 일반적인 견해로 볼때 전자의 방법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어느한쪽만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듯 하다. 어떤 근거자료나 조사자료를 보고, 혹은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낸 자료를 모아 기획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다 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직접 연구대상을 만나고 그들의 삶속에 뛰어드는 후자를 선택했다. 잘한 일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수디르의 마음을 내가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정도는 충분히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생겨난다. 저명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그들의 사회정책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는 현저하게 동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했고 발표했던 사회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과 얼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 수디르는 자신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테두리안에 그들도 함께 머물렀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자경自警주의적 정의가 못내 안타까웠던 수디르는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점점 다른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얼마전에 읽었던《100℃》의 주인공 영호가 생각났다. 그가 처음에는 외면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점차 자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인정하였던 그 순간이. 거센 물결앞에서 저항하다가 끝내는 죽음마져도 불사했던 선배들의 그리고 동료들의 그 외침속으로 동화되어가던 영호의 모습. 거기에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정의가 존재하고 있는것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수디르 역시 많은 혼란과 마음의 갈피를 느꼈음에도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수디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좀더 접근법을 써서 말한다면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보다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세상사람들 중의 몇퍼센트만이라도 인정해주길 바랬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외면하고 있을뿐.. 사람은 누구나 내가 먼저라는 의식속에서 살아갈테니 말이다. 단 한사람이,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단지 연구과제를 풀기 위해서, 단지 학위논문의 자료로써 써먹을 요량으로 갱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필요성에 의하여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갱단 보스 제이티와 수디르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과의 접촉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던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앞에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태의 정의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겪어야 했을 혼란과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가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리라. 자신의 마음이 이편도 될 수 없고 저편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곳의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범위를 정해놓은 채 대화를 나누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의 위치와 환경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생활 자체를 충분히 즐기며 살아갈 뿐이고, 없는 사람들은 또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저마다의 잣대로만 상대를 평가하려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처럼 관심두기를 꺼려하는 일이 당연한 듯이 우리앞에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순과 아이러니가 비일비재하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들이 흘러넘친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없는 자들만이 죽어라고 자신들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어느것도 온전하게 옳다고 말 할 수 없는 세상..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어느것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서로를 향한 거짓과 위선을 제외한다면 단지 자신의 안녕과 평화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만 접촉을 허락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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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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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에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은 무엇일까? 밤이 오기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어둠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처음 《ZOO》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치밀하게 그려진 내면의 어둠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몇분간 내 곁에 있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었다. 나는 아마도 작가의 이름보다는 《ZOO》라는 작품을 먼저 생각하면서 《베일》의 책장을 열었을게다. 다시 그 오싹했던 밑바닥의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단지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을 뿐인데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품이다. 어쩌면 어둠은 인간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또하나의 어둠을 자궁삼아 잉태되는 모양이다. 야기와 교코의 시선을 서로 비켜가며 들려주는 첫번째 이야기 <천제요호>는 서글프게도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소년이 결국 악마에게 몸을 팔아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의 아기가 되어줘, 너의 몸을 나에게 줘, 그러면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께.. 보통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거래가 오고가는데 이 소년에게 악마가 요구한 것은 소년의 몸이었다. 영혼은 육체를 필요로하는 까닭이었을까?

장난같은 게임속에서 마법의 힘은 발휘된다. 코쿠리상.. 초혼술의 일종으로 영혼을 불러 질문하고 대답을 얻는 놀이라고 해석되어져 있다.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도 심심찮게 한다는 '분신사바'같은 종류의 게임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루함과 따분함을 이겨내지 못해 코쿠리상을 하게 되는 소년.. 누구 있어요? 라고 묻는 소년앞에 사나에라는 영혼의 대답이 보여지고 소년의 삶속에 예견이라는 형식을 빌려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한다. 친구의 죽음을 말했던 사나에의 예견대로 친구는 죽고 앞으로 사년 뒤 괴로워하며 죽을거라던 자신의 죽음예견에 소년은 그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 때 사나에가 말했지. 몸을 나에게 넘겨. 인간의 몸이야. 대신 더 튼튼한 몸을 줄게. 나이도 먹지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고 거래는 끝났다. 그리고 소년 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늘 그렇듯이 악마와 대적해야 하는 사람은 마음이 곱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야말로 악마와 대적하기엔 최적의 대상이다. 그러니 야기를 만나는 교코 역시 그렇다. 어둠의 분위기,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정체모를 불길함, 전쟁터를 헤쳐나온 것처럼 지저분한, 거기에 온몸을 붕대로 감싸고 있는.. 하지만 교코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 올려졌을 때 공포와 두려움, 슬픔따위의 복잡한 표정을 보여주었던 남자와 한공간에서 머물게 된 교코가 이상하리만치 그 남자 야기에게 끌렸던 것은 어쩌면 교코의 내면 깊숙이에 감춰두었던 어린시절의 어두운 면 때문이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어둠에 대하여 야기에게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꼈던 교코의 마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숨기려고만 하는 내면의 어둠을 보게 된다.

야기가 교코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따라가다보면 야기가 악마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절절하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 따스했던 가족과 멀어져야 했고, 짧았던 순간의 선택으로 인하여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어둠의 저편으로 몰아내버린 야기의 고통.. 서서히 동물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팔지않은 영혼마져도 육체에 잠식당해가는 그 과정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교코를 통해 알게되는 처절하고도 끔찍스러운 야기의 서러움을 어찌할까..

두번째 이야기 'A MASKED BALL- 그리고 화장실의‘담배' 씨 나타났다 사라지다' 에서 보여주는 어둠의 동기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낙서'다. 낙서하지 마시오. 그렇게 쓴 당신의 말이 낙서입니다. 장난처럼 시작되어지는 화장실의 낙서가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지만 그 비극을 불러들이는 주인공 역시 어둠 저편의 존재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한편의 학교괴담 시리즈같다고나 할까?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을법한 사소한 비밀따위가 남들앞에 드러날 때는 또하나의 약점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결코 가벼운 이야기처럼 보여지지는 않는다. 이중의 얼굴, 가면을 쓴 채 살아가야 하는 삶의 테두리.. 그것이 우리에게는 알지못하는 사이에 하나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보다는 거짓이 우선인 이 사회의 아이러니일까?

악마와 거래를 해야하는 순간은 누구나에게 찾아온다. 그것도 자신의 욕심, 과한 감정상태일 때 찾아오는 것이 악마일게다. 그러니 참 어렵다. 내 자신을 다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경우가 더 많은 까닭이다. 베일 저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만들어진 내 모습에 더 익숙해져서 내 안의 참모습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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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신화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신화속을 들여다보자면 황당한 이야기도 많지만 왠지 가슴 깊숙히 다가오는 이야기도 꽤나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많이 회자되어지는 이야기는 뭐니 뭐니해도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프시케와 에로스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북유럽 신화속에서 만났던 브룬힐데와 시구르드의 사랑이야기에 야릇한 기분을 느꼈었다. 지옥의 문을 빠져나가기 한발전에 뒤를 돌아다 본 오르페우스는 그만 에우리디케를 다시 저승으로 보내버리고 말지.. 그리고 괴로워하다가 그도 죽는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 그런 안타까움을 또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다. 일본신화속에서 보았던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이야기다. 먼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찾아갔던 이자나기에게 이자나미는 자신을 돌아다보지 말라는 부탁을 하지만 이자나기는 그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돌아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자나미의 얼굴이?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동양의 신화가 서양의 신화보다는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신화.. 정말 멋지고 매혹적이다. 학창시절에 그리스 로마신화에 빠져 있다가 성인이 되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만났을 때의 황홀감이라니.. 그리고 나서 북유럽신화쪽에 눈길을 돌렸던 것 같다. 사실 이렇게 저렇게 비교해보면 신화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세신화라는 게 그렇고 저마다 내세우는 각각의 신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을 전해준다. 하기사 자연속에서 잉태되어진 이야기이니 어디로 간들 달라질까?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여러나라의 신화들 또한 비슷하게 다가왔지만 이집트 신화나 인도 신화, 마야, 아즈텍, 잉카의 신들을 다루어주었던 중남미신화는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토록 많은 신들을 다루었으니 책의 분량이 이렇게 두꺼워질 수 밖에 없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양을 다루다보니 읽는 동안 약간의 지루함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냥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원래는 그리스의 신화였지만 로마에게 점령당하면서부터 로마쪽으로 역전되었다던 그리스 로마신화나 세계 신화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집트 신화는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라 살풋 웃음짓기도 했었다. 특히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이 이집트 신화를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웠다. 이집트 사랑의 여신 하토르가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로, 아누비스는 헤르메스로, 악의 신 세트는 티폰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은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신화를 그토록이나 좋아하면서도 이런 지식을 놓치고 있었다니 참으로 짧은 나의 지식을 한탄하게 한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신화의 증거물들을 보면 신화가 모두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닌듯 싶기도 하고.. 그 많은 증거물들을 가진 나라가 이집트라고 하니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선다.

몽고가 맞을까, 몽골이 맞을까? 이 책속의 몽골신화를 읽다보니 정답을 알겠다. 몽고라는 이름은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 전쟁에 시달려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故'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원래는 '용감한'이란 뜻을 가진 부족이 몽골부족이었다고 한다. 그 몽골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칭기스칸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몽골부족이 우리와 너무나도 흡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세시풍속이나 관혼상제에 관한 풍속들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하니 이곳 또한 한번 가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이런, 아무래도 세계여행을 해야 할 듯 하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으니...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윤회를 말하고자 하는 신화가 있는가 하면 삶과 죽음은 어차피 다른 것이라는 말을 하는 신화도 있었고, 인간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환상적인 신의 세계를 그린 신화도 있었던 반면 인간과 함께 어울어지던 신들의 모습을 그린 신화도 있었다. 또한 그들의 역사가 하나의 신화로 둔갑되어져 버린 이야기도 있었으며 신화 자체가 그들의 역사로 치부되어져버린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각각의 상황에 맞게 다루어져 꾸며지고 달라졌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신화를 문화의 밑바탕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만든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신화의 기초는 자연이 아닐까 싶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깊은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북미신화속에 나오는 크리족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온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이 사라진 뒤에야, 그때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671쪽) ..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따스함과 자연의 안락함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자연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부대에서 낙오된 병사가 늑대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쫓기던 인디언들은 그에게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었다. 마지막엔 그이름을 달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인디언부족에게 섞여 들어갔던 남자주인공의 이야기가 오늘 문득 각인되듯이 떠오른다. 이름하나까지도 자연속에서 찾아낼 줄 알았던 그들의 지혜,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 어울어져 하나가 된 듯이 살아가던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내 가슴속에 울림을 전해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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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도 두고두고 질리지 않을 이야기
    from 감똘나라님의 서재 2010-03-24 17:31 
    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와 비교해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와 달리 구성이 창세부터 건국까지 진행되도록 하였으며 알기 쉽게 정리했다.  이 책은 세계의 모든 신화에 없는 우리 신화와 몽골신화,오세아니아 신화가 들어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신화를 잊어가는것 같아 아쉽다.하지만 이 책은 동남아시아 신화를 뺀 것이 아쉽다.하지만 중국신화나 일본신화를 더 쉽게 시간이 흐르듯 구성되었고 몽골신화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