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물어보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까, 사회 문제일까? 가난은 죄일까, 죄가 아닐까? 세상에는 정말이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눈에 환히 보여지는 것들,  조금만 어떻게 해보면 될 것 같은 그런일들이 의외로 참 많다. 여기 이 책속의 주인공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고 사회문제이기도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가난은 죄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라는 커다란 틀에 부합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을테니 말이다.

책속의 흐름은 두 줄기의 강물같다. 하나는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한때 주류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나 흑인차별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출신지인 빈민가로 돌아와서 갱단의 보스가 된 제이티이다. 그가 대학까지 나왔고 나름대로 전공했던 분야도 있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끌어가는 갱단내의 모든 상황들은 차분하다. 분노의 격정에 휘말려들것도 같은데 제이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또 하나는 빈민가 사람들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며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를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주민들이 서비스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기며 부정수익자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이는 또하나의 중간계층 베일리 부인이다. 그가 해결해주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내야 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다. 전기가 나갔다든지, 수도가 끊겼다든지, 대문이 떨어져 나갔다는지.. 그런데 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마져도 해결할수가 없는 것일까? 그들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 수디르는 그들을 향해 섣부른 동정도, 비판도 또한 미화도 하지 않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여론조사라는 게 있다. 통계라는 게 있다. 언론시상에서 대다수의 의견인양, 대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인양 떠들어대는 그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발표할 때는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주제에 대한 조사를 한다음 그 조사결과를 가지고 통계를 내거나 연구를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직접 발로 뛰어 그 주제속으로 들어가 알아내고 그것을 근거삼아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옳은 일일까? 일반적인 견해로 볼때 전자의 방법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어느한쪽만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듯 하다. 어떤 근거자료나 조사자료를 보고, 혹은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낸 자료를 모아 기획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다 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직접 연구대상을 만나고 그들의 삶속에 뛰어드는 후자를 선택했다. 잘한 일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수디르의 마음을 내가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정도는 충분히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생겨난다. 저명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그들의 사회정책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는 현저하게 동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했고 발표했던 사회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과 얼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 수디르는 자신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테두리안에 그들도 함께 머물렀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자경自警주의적 정의가 못내 안타까웠던 수디르는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점점 다른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얼마전에 읽었던《100℃》의 주인공 영호가 생각났다. 그가 처음에는 외면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점차 자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인정하였던 그 순간이. 거센 물결앞에서 저항하다가 끝내는 죽음마져도 불사했던 선배들의 그리고 동료들의 그 외침속으로 동화되어가던 영호의 모습. 거기에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정의가 존재하고 있는것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수디르 역시 많은 혼란과 마음의 갈피를 느꼈음에도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수디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좀더 접근법을 써서 말한다면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보다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세상사람들 중의 몇퍼센트만이라도 인정해주길 바랬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외면하고 있을뿐.. 사람은 누구나 내가 먼저라는 의식속에서 살아갈테니 말이다. 단 한사람이,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단지 연구과제를 풀기 위해서, 단지 학위논문의 자료로써 써먹을 요량으로 갱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필요성에 의하여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갱단 보스 제이티와 수디르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과의 접촉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던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앞에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태의 정의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겪어야 했을 혼란과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가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리라. 자신의 마음이 이편도 될 수 없고 저편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곳의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범위를 정해놓은 채 대화를 나누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의 위치와 환경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생활 자체를 충분히 즐기며 살아갈 뿐이고, 없는 사람들은 또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저마다의 잣대로만 상대를 평가하려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처럼 관심두기를 꺼려하는 일이 당연한 듯이 우리앞에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순과 아이러니가 비일비재하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들이 흘러넘친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없는 자들만이 죽어라고 자신들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어느것도 온전하게 옳다고 말 할 수 없는 세상..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어느것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서로를 향한 거짓과 위선을 제외한다면 단지 자신의 안녕과 평화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만 접촉을 허락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