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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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만화책일까 소설책일까? 일단은 그것부터 물어야 할 것 같다. 만화책일거라고 생각했었던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엔 아주 조금 억울한 면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건데 분명코 이건 만화책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고 싶었던 내가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그 두께에 놀랐고 만화책이 아니었다는 것에 또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은 이 작가의 전작에 대한 믿음으로 책장을 펼쳐보기로 한다. <사신치바>와 또다른 작품을 통해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속도감을 기대했다는 게 더 좋은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신치바>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없는 현실밖의 세계를 현실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작가의 글솜씨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모던 타임스..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찰리 채플린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속에서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고나니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역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으며 미지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과연 누가 내려주는 것일까? 이 이야기의 중심축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거짓된 면만을 보여주었던 것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면서부터 시작되어진다. 그 불편한 진실의 참된 얼굴을 보기 위하여 책속의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은 '검색'이었다. 그 '검색'으로부터 우리의 주인공들은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단지 '검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단어 몇개를 인터넷이라는 바다속에 던져넣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인 상담. 이 세가지 단어를 입력하여 검색을 시작했던 책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일들을 당하게 된다. 주인공 와타나베를 중심으로 고탄다, 오이시, 이사카 코타로, 오카모토 다케루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탄다와 오이시는 같은 회사의 선배와 후배로써 우연하게 맡게 된 일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얼핏보면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고 있는 듯도 보여지고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지금의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속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은 구석이 있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려내지도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만을 믿어버리고 마는 인터넷의 잘못된 속성에 대해서 일종의 경고성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 작품속의 공간이 인터넷과 정보의 테두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반으로 내달리면서 어라? 이건 뭐지? 싶은 생각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존재,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같이 보이는 와타나베의 부인 가요코부터가 그렇다. 불편한 진실을 안고 있는 하리마자키 중학교가 특수한(일종의 초능력과 같은) 학교였다는 설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가요코의 존재와 오가타의 존재감은 왠지 썰렁하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초능력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느닷없는 초능력의 황당함과 인터넷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만들어내는 황당함이 엇비슷하게 맞물리는 듯도 보여 씁쓸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내기에도 사실은 조금 벅찼다. 잘못하면 옆길로 샐 것만 같다는 느낌때문이기도 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노린 듯이 보여지는 만화들이 내 정신을 혼란속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차라리 저 그림들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게다. 흐름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림들이 살짝 얄밉기까지 했다. 이런 장르를 시험삼아 시도해본 거라면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익숙해지지 싶다. '그렇게 되어 있는' 시스템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밀어부치는 미약한 인간의 힘 대결.. 과연 누가 이겼을까?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그 시스템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 시스템에 이끌려 다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니 어찌하겠는가!

검색, 정보, 시스템, 사이트, 인터넷, 엔지니어..라는 말만으로도 이 소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대시스템의 흐름앞에서 만들어진 진실에 대한 도전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 도전의 댓가가 너무 참혹한 까닭이다. 21세기 코믹잔혹이라고는 하지만 호러물도 아닌 것이기에 약간의 반감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뒷면을 다시한번 살펴보자면 이렇다. 인터넷의 댓글로 인한 피해가 그와같지 않을까 하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정보에 의해 (여기서 말하는 정보라는 것은 네티즌이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의 소행이기도 하다. 앞뒤 가릴 것없이 너나없이 퍼 나르고 그 퍼나르는 과정에서 나쁜 이야기들은 덧붙여지고 하는 그런 악순환을 말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 행위들이 남을 파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 이 책속에도 등장한다. 과연 인터넷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우리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가 다시한번 되짚어 생각해 볼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편이다. 왠만하면 우리 스스로가 정화되어진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정보는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하면서 타인의 정보는 굳이 없는 것까지 만들어가며 캐내려고 드는 의식이 문제일 뿐이지만 내가 있듯이 남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짧아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작품속에서 인터넷의 댓글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던 만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한테는 자기를 보여주려는 욕구와 창작욕, 이 두가지가 있겠지만 전자를 버리고 나면 이해해주는 독자수가 한사람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325쪽) 그리고 또 한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요즘 세상에 독재자는 없다던.. 그 사람 하나만 소멸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던.. 세상의 황폐도, 증오도, 누구 한 사람이나 어떤 단체 탓이라고 꼭 꼬집을 수 없다는 거(-328쪽) 라는 말은 곱씹어 되새겨 볼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던 것들에 대한 새로움이었다고나 할까? 단순히 소설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다.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첫머리에 나왔다던 말을 앞에 두고서 한참을 바라다 본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배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318쪽) 어쩌면 정보라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것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지배하기보다는 우리를 도와주는 정보와 인터넷이라는 말은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게 다가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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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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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산하다. 쫓고 쫓긴다. 죽고 죽인다. 그리고 피... 추리소설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스릴러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호러물같은 얼굴을 하기도 한다. 짧지만 단단하게 조여드는 문체. 미사여구를 섞지 않은채 그야말로 걸러내지 않겠다는 듯 직설적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는 욱,하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의 작품 <핏빛 자오선>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가 그의 작품 배경이다. 전쟁이 끝난 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 소설의 배경들은 정말이지 참혹하다. 어쩌면 더이상은 어쩌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모습이었을텐데 뚝뚝 끊어먹는 그의 말투때문에 책속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벅찼다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된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작품속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꽤나 강한 집중을 요한다.  그런데 화가나는 것은 그렇게 강하게 집중을 요구해놓고는 너무나도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마치 너의 내면에도 이런 면이 있으니 두 눈 크게 뜨고 보라는 듯이..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국경의 이야기는 그의 삶일까? 그를 대표하는 소설로 국경 삼부작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수한 소문속에서 이 작품의 제목을 듣게 되었고 책장속에 모셔놓은지가 오래였다. 

책을 펼치면 이 작품의 원제 'No Country for Old Men' 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시를 읽게된다. 왠지 읽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석에 끌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늙은 사람은 한갓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니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썩어 갈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갑짜기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느 구절에서부터 이 작품속에 녹아들었을까?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다. 처음의 출발은 탈출이다. 무엇을 위한 탈출인지는 그를 따가가야만 알 수 있다. 그의 탈출이 있었으니 그의 탈출동기가 또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준다. 그런데 문제는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이 장난을 건다는데 있다. 탈출범이자 암살자인 시거와 희생양이면서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모스, 그리고 그 탈출범을 쫓는 동시에 모스를 보호해주고자 노력하는 보안관 벨, 이렇게 작품속의 시선은 세갈래로 나뉜다.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그 범인을 따라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고 있다는 듯이.. 그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아마도 이 소설의 끝이리라.  모스를 중간에 두고 벨과 시거의 내면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처럼 보여지지만 왠지 모르게 선보다는 악이 더 강해보인다. 어쩌면 시거와 대응하고 있던 모스가 자신도 모르게 거래와 타협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거의 입을 통해 한번 내뱉어진 말은 곧 운명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어진 순간에도 버젓하게 일어나는 살인의 정당성을 보면 운명은 거부한다고 비켜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경분쟁도 그렇지만 이 작품속에서 얼핏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보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서로에게 총을 쏴대고 죽고 죽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 현장속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선과 악을 대신한다는 보안관 벨과 암살자 시거는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선택은 자신의 의지였다는 말일까? 같이 겪었음에도 나중의 길은 너무나도 다른 걸 보면서 내가 하는 말일 뿐이지만 그것조차도 운명일 거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냉철함과 잔혹함이 시거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흔들림과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벨의 내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용부호를 잘 쓰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한다. 왠지 군더더기를 제외한 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꾸미지 않은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우리의 문단에도 그런 작가는 있다. 그런데 어떤 배경으로 작품을 끌어가느냐에 따라 나의 내면에 젖어드는 강도가 다르다. 코맥 맥카시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도 인용부호를 만나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너무 강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읽는 나는 가끔씩 역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철저하게 작품속으로 들어가보라는 말일까?  따라가며 호흡하기에도 바쁘니 책을 읽고 있는 나만의 사적인 생각을 접목시킬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한번쯤 더 만나볼까 했던 생각을 접는다. 이제 더 이상은 그런 강렬함속에 나를 내팽개쳐두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예이츠의 시를 다시한번 읽는다. 다시 또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떤 부분이 이 작품에 제목을 불러오게 했을까? 문득 떠오른 책속의 문구..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내다보는 창인지 나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또다른 시각,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으니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일을 겪고 말았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12쪽) ..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첫장부터 보안관 벨의 입을 통해 들려주었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모든 인간들은 영혼을 모험에 걸기를 원하기도 하고, 그 모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또한 그러고 싶어한다. 모스가 피해갈수도 있었던 운명앞에서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졌던 결말을 벨은 알고 있었다.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밖의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될거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모험을 할때 영혼을 걸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모험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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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보급판 문고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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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쓴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이 있다. 지금 살펴보면 아마도 그가 <신한국인>이라는 작품을 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 한국인을 말한다'라는 제목을 내세워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가 각인되듯이 내게 다가왔던 까닭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도 힘찬 메세지를 전해줄 수 있었는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은근히 글쓴이의 작품에 유혹을 느꼈던 것이.. 개인적으로 쓸데없이 말줄임을 하는 표현들을 싫어했던 터라 처음 digital 과 analog 가 하나로 합쳐져 Digilog가 되었다는 말 자체에는 약간의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컴퓨터와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접지 못했다. 그렇게 만난 <디지로그Digilog 선언>은 역시 글쓴이의 역량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처음 디지로그Digilog란 말을 들었을 때 도대체 뭐지? 했었다. 디지털digital 이면 디지털digital 이고 아나로그analog면 아나로그analog지 도대체 디지로그Digilog가 뭐야? 아나로그analog인가 디지털digital 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을 살면서, 아니 이제는 모두가 디지털digital 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회의 흐름속에서 아나로그analog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디카가 좋아 모두 디카를 들이대지만 언제고 원하면 볼 수 있는 사진, 그리고 어느곳에서나 공유하고 싶어하는 함께 했던 흔적들을 컴퓨터라는 장치속에만 묶어두기엔 우리의 감성이 너무나도 아쉬웠을 게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인화하기를 원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해야만 할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의 젓가락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도 쓰고 일본도 쓰는 젓가락문화가 무에 그리 새삼스럽다고? 했었던 사람들이 그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우리의 젓가락 문화를 다시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안에 담겨진 것이 더 크고 더 깊기 때문은 아닐런지.. 그것에 대한 답을 아주 명쾌하게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IT(정보기술)를 RT(Relation Technology 관계기술)로 바꿔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누가? 젓가락 문화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이! 도대체 젓가락 문화가 어떤 것이길래?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정(情)과 믿음(信)의 힘..이란 저자의  말에 어쩌면 고개를 갸웃거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아주 대단하게 들려온다. 저자의 말처럼 하찮은 젓가락에 무슨 그렇게 대단한, 거창한 철학이나 의미를 부여하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근조근 설명해가는 말을 듣다보면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디지로그Digilog가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참 많았던 것 같다.  천리밖의 모습도 볼 수 있었던 천리안으로 공주의 병을 알게 된 왕자, 그러자 천리마를 가진 왕자는 둘을 태우고 공주가 있는 성으로 달려갔고, 불사의 약초를 가지고 있던 왕자는 그 약초를 공주에게 먹여 공주를 살려냈다는 '세 왕자의 수수께끼' 와, 돈많고 못생긴 동쪽 남자와 가난했으나 얼굴이 잘생긴 서쪽 남자의 청혼을 받게 된 한 처녀의 '동가숙서가식' 에 얽힌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일례로 들려주던 그 이야기속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숙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 보였다.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것 모두를 소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현실속의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라는 말에도 일단은 공감한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말의 겹침 현상이 또하나의 기술로 보여지게 되는 겹치기 기술.. 우리의 저력.. 타지인에게는 청룡열차를 타는 사람들로 비유되었다는 우리의 극단적인 모습 또한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대단함으로 평가해버리고마는 저자의 말에는 역시 힘이 들어가 있다. 비관보다는 희망을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저자만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기호에 대한 풀이도 흥미롭다. 각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는 @기호..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호를 '달팽이'라고 부르며 독일 사람들은 '원숭이 꼬리', 폴란드나 루마니아 사람들은 '작은 원숭이', 터키에서는 '귀'라고 부르기도 하고,  핀란드로 가면 '원숭이 꼬리'가 '고양이 꼬리'로 바뀌게 되고, 러시아로 가면 '개(소바카)'로 둔갑하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어떨까? 중국 사람들은 쥐에다 노자를 붙여 '라오수', 일본은 '나루토(소용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아무리 봐도 달팽이나 원숭이 꼬리로는 보이지 않으니 각 나라마다의 문화적 차이라는 게 참 신기하기까지 하다. 스웨덴에서는 '코끼리 몸통'이라고까지 부른다고 하니 왜 아니 신기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부를까? '골뱅이'다. 그 '골뱅이'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음식문화와 디지로그Digilog를 겹쳐 보이게 하는 저자의 생각이 놀랍기까지 하다. 먹는 문화와 정보문화를 대표하는 인터넷문화는 딱히 연결되는 것이 없어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저자의 그 관념의 크기에 놀랄뿐이다. 그 생각을 말함에 있어 강하고 다부진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 듣기를 즐겨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려운 것들도 저자의 목소리로 표현되어져 나올 때 내게는 쉽고 편안한 느낌으로 전해진다는 것이 저자만의 강점이기도 하다.

앞마당과 뒷마당으로 나뉘어 펼쳐지는 저자의 무대는 꽉 차보인다. 앞마당에서 디지로그Digilog가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선언했다면 뒷마당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한껏 풀어 헤쳐놓은 듯 하다. 특히나 우리에게 실패보다는 성공의 신화로 알려져 있는 에디슨의 실패담은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성공을 위해서는 겪어야 했을 실패가 있다. 그랬기에 에디슨의 실패담은 의외였다. 그리고 그 실패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많아보였다.

 저자와의 대담에서 말했던 디지로그 증후군이란 말이 떠오른다. 숫자의 세계인 디지털digital 과 말의 세계인 아나로그analog의 동거가 가능하냐고 생각하냐던 기자의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지금의 우리는 수많은 숫자속에서 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라거나 자격증번호 따위의 나를 대신하는 그 많은 숫자들.. 그러나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언어로 전환시켜 이육사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시인이 있었듯이, 386세대라는 말을 기존의 숫자적 의미와 달리 3.1절과 8.15와 6.25를 모르는 세대라는 정치 패러디로, 9.11 역시 점을 빼버리면 911 미국의 구급 비상전화번호가 되며, 그것을 다시 뒤집으면 119 한국의 비상전화로 바뀐다는 것..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11을 뒤집은 119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라는 사실.. 이렇게 아무런 뜻도 없는 숫자에 문화적. 역사적 의미를 부가했을 생겨나는 의외성.. 언어를 숫자화하는 것이 디지털 문화라면 숫자를 언어로 전환시켜 우연성을 높이는 것이 바로 디지로그Digilog의 증후군이라던 저자의 대답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듯 보였다. 관점의 차이..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으니 그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도 될테다. 젓가락문화의 훌륭함이 몸에 베인 한국인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던 희망찬 메세지를 이 책을 통해 만나보았던 시간이었다. 정말 뿌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러기에게 배워야 한다던 저자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에게는 따로이 대장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짐승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것은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V자 대형으로 날면 길도 잃지 않고 힘도 아낄 수 있으니... 앞선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대열에서는 앞장서려고 싸우거나 꼴찌라고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단다. 힘의 법칙이 아니라 순환하는 협력의 질서에 의해 멀리 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에게는 정말 부끄러운 진실이 아닐 수가 없다. 같이 간 두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물고 그런 다음에야 다른 기러기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잡는다고 한다. 정말이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함께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는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디지로그.. Digilog.. 새롭게 다가왔던 언어, 더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기에, 컴퓨터와 정보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는 세상을 사는 우리이기에 한번쯤은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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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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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이라는 식물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식물은 어느 한부분이 시들거나 죽으면 나머지 부분들도 다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식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고 나왔던 <아디안텀 블루>라는 책이 있었다.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중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의 작품에서 풍겨져나오는 분위기가 딱 아디안텀 블루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알 듯 모를 듯 안개같은 사랑이 항상 존재한다. 굳이 찾으려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항상 그 사랑은 너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처럼.. <9월의 4분의 1>이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는 참 미묘하다. 가을이라는 분위기도 풍기고 어느정도는 익숙해진 듯 하지만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는 그런 느낌도 있다. 왠지 이제부터는 무르익어갈 사랑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은 기대감도 은근슬쩍 끼워넣게 된다. 그런 사랑이야기들이 이 책속에 머문다. 한편의 서정시같고 한장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사랑을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다.

사랑이란 감정은 구체적으로 어떤것을 말하는 것일까? 둘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을 때 그 손가락끝을 보는가, 아니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함께 보는가 하는 문제처럼 사랑이란 것은 각자의 느낌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것이 옳다고 딱히 정의를 내릴 수가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했으나 그 사랑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첫번째 이야기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요리코와 다케이는 어느 한쪽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끝만 서로 바라보았을 뿐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랑을 품고 살았을거라는.. 함께 있어도 마음깊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그래서 서로를 가슴 가득 채우지 못한...

자신이 계획했던대로 삶이 살아진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을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10년간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지내왔던 직장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그만 둘 수 있었던 유이치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통의 편지를 따라서 켄싱턴으로 찾아가는 그의 머리속에서 끝없이 그려지던 타락墮落과 추락墜落의 글자가 주는 느낌은 나에게조차 바윗덩어리같은 무게감을 안겨주었다. 두번째 이야기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속에서 마주치는 유이치와 미나코의 사랑은 진지하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깊이가 내게도 전해져오는 듯 하다. 동물나라의 화폐기준이 '기린'이라고 말해줄 때의 산뜻함이 전해져오는 그들의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 왜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지켜야 할 거리와 쌓여가는 짐의 무게만 주의하면 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서로에게 마음으로 의지하고 마음으로 안아준다는 것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는 애잔하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을 때는 또 그사람을 위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가진 사랑. 그 남자의 좁은 방안으로 스며들던 햇살, 그 따뜻했던 방이 그리웠기에 눈물 흘려야 했던 마미. 우스운 물방울 커튼과 벽에 기대어 기타를 치고 있을 그사람을 끝내는 다시 보지 못한 채 스물아홉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마미는 왠지 여름날을 힘겹게 울다가 스러져가는 매미같다. 스물다섯까지만 예정되어졌던 자신의 삶이 스물다섯을 넘어서자 비틀거렸다. 노래로 산화시켜야만 했던 그 조바심을 스물다섯이 되기 전날 스물넷의 마지막날에 놓아버리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앞에서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이 되어버렸다. 어딘가에 자신만이 짊어지고 가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을게다. 사랑은 그런게 아닐까? 편히 쉬고 싶은 가슴을 원하는 것, 그렇게 편히 쉴 수 있는 가슴을 온전히 상대방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것..

몇 년뒤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요, 라는 말은 영화나 소설속에서 많이 듣는다. 그리고 그런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못한채 영원히 가슴속에 묻혀버리고 말지.. 하지만 지켜졌기에 아름다웠던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십년 뒤 오월, 피렌체 두오모에서. 를 약속했던 아오이와 쥰세이의 이야기 <냉정과 열정사이>가 떠올랐다. 각인되듯이 남겨졌던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떠오르게 해 주었던 마지막 이야기 '9월의 4분의 1'
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9월 4일에서 만나요, 라는 수수께끼같은 메세지를 남겨둔 채 떠나버린 나오를 9월 4일마다 기다렸던 겐지.. 만나지 못한채 13년을 보내버리고 다시 그녀를 처음 보았던 그랑 플라스.. 그리고 그곳에서 알아버린 9월 4일역.. 수수께끼같았던 그녀의 메세지가 풀려지고 그녀가 앉아 자신을 기다렸을지도 모를 카페에서 자신도 똑같이 그녀를 기다리는 나, 겐지..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그녀, 나오.. 너와 만났을 때 그때는 괴롭고 절실하고 슬펐지만 자유로웠다고. 막 만들어낸 솜사탕만큼 이라는 마지막 문구가 내 눈속에 새겨진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딱히 신비로운 느낌도 없다. 다분히 일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주변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세계가 어쩌면 따분하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왠지 따분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면 안될 것 같다. 가만 가만 숨을 죽여가며 읽게 되는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의 작품은 은근한 매력이 있다. 강한 태클보다는 부드러운 손길이 기다려주는 듯한.. 그래서 내가 이 <9월의 4분의 1>을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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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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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인터넷상에서 그런 글귀가 떠돌던 때가 있었다. 엄마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어 많이들 퍼나르며 너도 나도 읊어대던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짧다. 우리의 감성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얕기만 하다. 조금만 더 길고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엄마를 부탁해>라는 이 책이 나온 뒤로 우리들의 엄마는 뭐라도 되는 양 그렇게 도마위에 올려졌지만 과연 그 뭐라도 된(?) 듯한 엄마는 몇이나 될까? 단지 책속의 엄마로써, 내 엄마가 아닌 타인의 엄마로써만 동정을 받았고 딱 그만큼만의 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부터 신경숙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나는 후후 웃었다. 속으로 웃었다는 말이다. 무채색같은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싸아해지던 그런 느낌들을 잊을 수가 없었고, 또한 여지없이 드러나는 그녀 주변사람들의 삶이 그랬고, 여전하게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그녀의 고향집이 거기에 있었기에.. <깊은 슬픔>에서 은서와 사랑 줄다리기를 했던 완과 세의 고향이기도 했던 곳.. 그녀의 그곳은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는 지천명을 바라다보는 그녀의 세월처럼...

그녀는 어쩌자고 엄마를 잃어버렸을까? 그녀는 어쩌자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엄마의 존재를 들이밀었을까? 그녀는 어쩌자고 우리가 숨기고 또 숨기려 애쓰는 가슴 한쪽의 빈 공간을 후벼파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늙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더이상은 하얘질수가 없어서 이제는 오히려 까매지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녀는 문득 엄마라는 말보다는 한사람의 여인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딸이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딸이 엄마처럼 똑같은 엄마의 자리로 들어서서야 보여지는 엄마의 존재는 아마도 남달랐을 것이다. 처음 아이를 나았을 때 병원으로 찾아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여주던 엄마의 표정이, 황달이 심한 아이을 어쩌면 집으로 데려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던 간호사의 말을 들었을 때 딸의 표정을 먼저 살펴보던 엄마의 마음이, 다행히도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었던 외손주를 당신이 안고 차에 오를 때 엄마는 오로지 딸의 거동만을 살피셨던 것 같다. 그랬던 엄마를 이제는 내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가까이에서 늘 말친구가 되어주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었지.. 어쩌냐? 너는 나처럼 딸도 없어서? .. 그러게 엄마. 아무래도 나는 늙어서 외로울 것 같아. 딸같은 며느리는 없다잖어. 그치?  언제부터인가 친구처럼 말을 섞는 엄마와의 대화가 나는 너무도 좋았었다. 어쩌면 작가가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여인의 체취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게 살진 않았을 게다. 그러니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도 아니었을 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엄마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곤혹스러운 삶을 살아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일상적으로 힘겨운 가정사에서 빠져나가길 원하며 살았던 아버지와 자식들의 그 염치없음을 모른 체 눈감아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우리의 어머니. 어쩌면 그 힘겨웠던 노역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는 부엌을 좋아했어? 딸이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지.. 부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 나는 아마도 장독대 뚜껑을 엄청 많이 깨먹었을 게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부엌일, 밥먹고 돌아서면 다시 밥을 해야 했다고.. 맨날 똑같았던 일, 도무지 헤어날 길이 없어보이는 그 공간에서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을 집어던져 깨뜨리던 순간뿐이었다고.. 항아리 뚜껑을 다시 사야했을 때 속이 쓰리긴 했지만 오래도록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노라고.. 그러니 너도 힘들면 접시를 깨뜨려보라고..

화제가 되었던 TV드라마가 생각났다. 일년만 휴가를 달라고 호소하던 엄마의 입장을 누구도 헤아리려하지 않았었지. 엄마는 오직 그자리에서 멈춰선채로 있어야만 엄마인거라고 그렇게들 말하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 엄마가 짧은 휴가를 얻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공간에서 떨어져나왔을 때 그 엄마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아니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알았었다. 그리고 그 짧은 휴가기간동안 자신이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면서 살아보려 했지.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짧은 휴가기간조차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움직일 수 없는 엄마의 자리로 되돌아와야만 했었다. 그랬다. 우리가 인정해주지 않았던 거다. 엄마도 엄마가 아닌 한사람의 여인으로써 살아갈 권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던 그 말은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왔다.

엄마를 부탁한다는 그녀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네가지다. 큰 딸이었던 너의 눈으로, 맏이로 태어나 엄마의 꿈까지도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아들의 눈으로,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번도 나란히 걸어보지 못했던 남편의 눈으로, 그리고 엄마 자신의 눈으로 막내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살림밑천이라는 첫딸로 태어나 오빠들에게 치이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주장하고 싶어했던 큰딸. 불쌍한 엄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던 장남. 그들이 지금 기가 꺾인 채 살아가고 있을, 아니면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 386세대들이다. 극심한 가난과 빈곤을 짊어진 채 혼란기의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에게 그런 엄마가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보퉁이를 들고 간다해도 한번 뒤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야 했던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을테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게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 알며 살아가던 아버지들에게 그런 아내가 있었다. 거기 그자리에서 그 엄마가, 그 아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단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 모두가 엄마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뒤집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채로 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필요할 때만 찾아나서는 물건같은 존재가 엄마는 아닐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책속의 작은 딸이 언니에게 말했듯이 나도 엄마같은 엄마는 되지 못했다. 아니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라고 말하며 엄마의 가슴속에 훓어내리는 듯한 아픔을 주기도 했던 나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핑게일테지만 말이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마져도 조금씩 퇴색되어져가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던 작가의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엄마를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시는 나의 엄마는 다시 까만 머리카락이 나오고 있다. 엄마, 하얗던 머리가 다시 까맣게 나오면 오래 산대요.. 어이구,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지 더 오래살면 뭐하냐? 그저 자고 일어나니 죽었더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내 소원이다.. 요즘 들어 부쩍 가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엄마를 붙들고 눈물 바람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엄마도 더이상은 늙지 않을까? 엄마, 나의 엄마.. 작가의 작품속에서 잃어버린 엄마처럼 딱 그만큼의 삶을 살아내신 나의 엄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조금 더 일찍 당신을 사랑해야 했다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가끔씩은 못된 년이 지 엄마한테 큰소리를 친다고 뭐라고 하셔도 저는 그것이 좋으니 어쩌겠습니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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