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음산하다. 쫓고 쫓긴다. 죽고 죽인다. 그리고 피... 추리소설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스릴러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호러물같은 얼굴을 하기도 한다. 짧지만 단단하게 조여드는 문체. 미사여구를 섞지 않은채 그야말로 걸러내지 않겠다는 듯 직설적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는 욱,하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의 작품 <핏빛 자오선>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가 그의 작품 배경이다. 전쟁이 끝난 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 소설의 배경들은 정말이지 참혹하다. 어쩌면 더이상은 어쩌지 못할 정도로 섬세한 모습이었을텐데 뚝뚝 끊어먹는 그의 말투때문에 책속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벅찼다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된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작품속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꽤나 강한 집중을 요한다.  그런데 화가나는 것은 그렇게 강하게 집중을 요구해놓고는 너무나도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마치 너의 내면에도 이런 면이 있으니 두 눈 크게 뜨고 보라는 듯이..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국경의 이야기는 그의 삶일까? 그를 대표하는 소설로 국경 삼부작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무수한 소문속에서 이 작품의 제목을 듣게 되었고 책장속에 모셔놓은지가 오래였다. 

책을 펼치면 이 작품의 원제 'No Country for Old Men' 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시를 읽게된다. 왠지 읽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석에 끌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늙은 사람은 한갓 하찮은 물건이고 막대기에 걸린 누더기니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썩어 갈 모든 누더기를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래를 배울 곳은 어디에도 없다...갑짜기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느 구절에서부터 이 작품속에 녹아들었을까?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은 예정되어져 있다. 처음의 출발은 탈출이다. 무엇을 위한 탈출인지는 그를 따가가야만 알 수 있다. 그의 탈출이 있었으니 그의 탈출동기가 또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준다. 그런데 문제는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이 장난을 건다는데 있다. 탈출범이자 암살자인 시거와 희생양이면서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모스, 그리고 그 탈출범을 쫓는 동시에 모스를 보호해주고자 노력하는 보안관 벨, 이렇게 작품속의 시선은 세갈래로 나뉜다.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그 범인을 따라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마치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고 있다는 듯이.. 그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아마도 이 소설의 끝이리라.  모스를 중간에 두고 벨과 시거의 내면은 선과 악의 대립구도처럼 보여지지만 왠지 모르게 선보다는 악이 더 강해보인다. 어쩌면 시거와 대응하고 있던 모스가 자신도 모르게 거래와 타협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거의 입을 통해 한번 내뱉어진 말은 곧 운명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어진 순간에도 버젓하게 일어나는 살인의 정당성을 보면 운명은 거부한다고 비켜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국경분쟁도 그렇지만 이 작품속에서 얼핏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보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서로에게 총을 쏴대고 죽고 죽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 현장속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선과 악을 대신한다는 보안관 벨과 암살자 시거는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선택은 자신의 의지였다는 말일까? 같이 겪었음에도 나중의 길은 너무나도 다른 걸 보면서 내가 하는 말일 뿐이지만 그것조차도 운명일 거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냉철함과 잔혹함이 시거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면 흔들림과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벨의 내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용부호를 잘 쓰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한다. 왠지 군더더기를 제외한 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꾸미지 않은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우리의 문단에도 그런 작가는 있다. 그런데 어떤 배경으로 작품을 끌어가느냐에 따라 나의 내면에 젖어드는 강도가 다르다. 코맥 맥카시라는 작가의 작품에서도 인용부호를 만나기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너무 강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읽는 나는 가끔씩 역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철저하게 작품속으로 들어가보라는 말일까?  따라가며 호흡하기에도 바쁘니 책을 읽고 있는 나만의 사적인 생각을 접목시킬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한번쯤 더 만나볼까 했던 생각을 접는다. 이제 더 이상은 그런 강렬함속에 나를 내팽개쳐두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예이츠의 시를 다시한번 읽는다. 다시 또 머리가 아파온다. 시의 어떤 부분이 이 작품에 제목을 불러오게 했을까? 문득 떠오른 책속의 문구..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내다보는 창인지 나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또다른 시각,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으니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일을 겪고 말았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12쪽) ..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첫장부터 보안관 벨의 입을 통해 들려주었던 말은 모순투성이였다. 모든 인간들은 영혼을 모험에 걸기를 원하기도 하고, 그 모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또한 그러고 싶어한다. 모스가 피해갈수도 있었던 운명앞에서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졌던 결말을 벨은 알고 있었다.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밖의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될거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가 모험을 할때 영혼을 걸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모험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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