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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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카프카와는 다른 묘한 에로티시즘의 향기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렸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편하게 구매를 했는데, 왠지 오랜만에 서점에서 직접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는 기분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처럼 깔끔하게 잘 정돈된 서점에서 예전 헌 책방에서 느꼈던 그럼 정겨움을 느껴볼 수 없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비치된 ‘모래의 여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에 봐왔던, 그렇지만 다소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정겨운 이름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마르케스, 베케트, 이문열, 밀란 쿤데라, 카프카 등등,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과 함께 나열했던 어느 시인들의 이름처럼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한지 어언 6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6년 동안은 확실히 지난 십 몇 년의 내 문학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쓰기 모임이 등단이라는 특정한 목적과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내가 이 모임에서 등단 목적으로 글을 제출해본 것은 신춘문예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이다. 나머지 숱한 등단을 위한 글쓰기 대회에도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는 ‘엽서시’라는 특정한 문학공모 정보 제공 사이트를 알고 있음에도, 근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이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로 방문해봤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모전에 글을 내본 적도, 아니 어느 공모전이 어떤 형식의 글을 원하는지조차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모임에서 원하는 등단용 작품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문학전집에서 내 시선도 한국문학전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번 모임에서 선택한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선택된 ‘모래의 여자’를 통해 그간에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달콤하면서 독한 관념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미의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강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으키는 집요한 집착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모래의 여자’ 몇 장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문장의 집요함이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우리네 문장의 서술형식이 같은 까닭인지, 문장에서의 집요함과 어떤 집착이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묘했던 것은 문장이 끈덕지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고, 간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내용상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글속 주인공의 벌레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래 속에 사는 벌레에 대한 집착, 좀길앞잡이. 그리고 그와 함께 딸려서 전해지는 모래에 대한 집착. 그런데 왜 하필 모래와 좀길앞잡이일까? 주인공은 여기서 갑자기 유체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든 과학시간이면, 특히나 물리 시간이면 더욱 생경하여 잠을 자거나 공상의 나래로 멍을 때리던 나로선,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가공할만한 정보력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함을 한층 빛내주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해보았다. 그런데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함께, 유체역학이 기체와 액체에 관련된 운동에너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즉, 한 마디로, 유체역학이란 것은 기체가 액체로 변해도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이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연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고체인 모래에 대해 유체역학을 들먹인 것일까? 물론, 글속에서 주인공은 모래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나름의 논지를 펼치기는 한다. 먼저, 모래가 다른 흙과 암석과 달리 일정한 크기인 1/8m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다른 암석 파편의 입자와 달리 바람이라는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라는 정의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이 모래의 유동성에 의해 많은 찬란한 문명들이 매몰되어갔음을 글 중간에 살짝 언급한다. 즉, 이제까지 모래는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도 바람과 함께 그 입자가 지닌 특유의 고유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왔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은 모래를 유체역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반부에 이 글은 다소 난해한 모래와 좀앞길잡이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전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인공이 이 좀앞길잡이를 찾아들어온 사구에 정착해 있는 어느 마을에 갇히게 되면서 글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어 간다. 사실, 원래 직업이 학교 선생인 주인공은 이 사구에 살고 있는 ‘좀앞길잡이’ 중에 다소 변이종을 찾기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의 한 집에 묵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 집에 감금되게 된다. 그것도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처음에는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나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이 고작 모래 속에 파묻혀 지은 집인 이유로 날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까닭이다. 즉, 여자 혼자서는 그 집에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노동과 가사를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니,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이 세찬 날의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렇게 살기 힘든 구조의 집이라면 그냥 나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 도심이나 마을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여자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의 그 어떤 항변에도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해본다. 처음엔 꾀병으로 아픈 척을 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동력으로써 무가치한지를 입증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그대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는 작정을 변경하여, 마을에 적응하고 있는 척하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집에 생필품 물자를 공급해주는 날에 여자를 인질로 해서 자신을 그 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오히려 물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국,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남자는 결국 마을 사람들과의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절망감으로 인해, 아니 사실은 오랫동안 해묵은 여자와의 섹스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삶의 방식과 마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남자 그 자신도 그 생활방식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 마을을 탈출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와 수긍이라는 측면에서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부당함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다소 오랜 시간을 걸쳐 탈출 계획을 세운다. 마치 남자 자신이 마을에 다 적응한 것처럼 시간도 들이고, 여자와 관계도 가지면서, 마을의 구조에 대해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 물어서, 머릿속에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남자가 끊임없이 도주한 길은 어찌된 일인지 마을로 다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가 들켜, 반대 길로 남자는 열심히 달아나본다. 하지만 남자는 모래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다시 지속된다. 매일 똑같이 바람에 실려 날려 오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구슬을 꿰매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라디오를 집에 들일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집 앞 한 귀퉁이에 모래 덫을 만들어, 까마귀가 잡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잡힌 까마귀에 자신이 편지를 달아, 그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의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의 생활권이 인간의 생활권과 밀접하기에 그 편지가 십중팔구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제 그 마을에 온지 반 년쯤 된 것 같다. 그동안 여자는 임신을 했고, 자신이 ‘희망’이라 명명한 모래 덫에는 잡히라는 까마귀는 잡히지 않고, 어이된 일인지 물이 솟아올랐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의 지표를 까마귀에서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로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잘만하면 그 유수현상의 연구를 통해 얻은 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남자의 목표는 탈출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협박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어차피 그 모래의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로 세상에 이야기해봤자 누가 자신을 알아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아주고 들어줄 청중은 이제 마을 사람들 밖에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문장의 묘한 집요함에 끌렸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강금되면서부터 문득,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의 산’의 주인공의 원래 계획과 달리 어느 요양소에 방문하게 되었다가 그 자신이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7년 동안 강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폐병이 어쩌면 그 자신에게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끊임없는 관념과 독설들이 왠지 모르게 이 글의 시작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대다수 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글이었기에 이 글 ‘모래의 여자’에서 등장하는 사구의 마을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 글은 그런 관념들보다는 사구의 마을 중에서도 특히 과부인 여자의 집에 갇히게 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특정한 현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카프카 식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서의 강금처럼,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모래의 마을과 여자에 강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의 강금이었던 카프카의 ‘굴’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강금과 풍유의 구조들이 사뭇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다 읽고서, 일부러 미뤄두었던 작가 연보를 보니, 이 야베 코보라는 사람이 일본의 카프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토마스 만과도 그리고 카프카와도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감춰진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났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실, 카프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달리, 한 마디로 그 이전의 서양 작가들과 달리, 근원적인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끝없는 나열들의 형식인 글쓰기가 아닌, 근원적인 불안과 생에 대한 허무이거나 허위의식을 풍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지만 역시 서양 작가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관념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근원적인 불안이거나 허무의식조차 관념의 역작용이거나 파생일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야베 코보의 경우 역시 성진국인 일본 작가인 까닭일까? 처음부터 등장하는 좀앞길잡이서부터 모래, 그리고 모래의 여자와 마을, 모두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거의 대놓고 전면에 드러내놓았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서도 그는 모래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좀앞길잡이의 유혹 행위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왜 하필 제목이 모래의 여자란 말인가? 글속 주인공이 계속 벗어날 수 없는 모래의 마을 그 자체를 여자가 대변하고 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글속 주인공은 다소 생경한 좀앞길잡이의 변종을 찾아 사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소 특이한 변종인 여자를 찾아 사구의 마을로 들어섰던 것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이 모래의 여자에 야베 코베는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와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 넣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정신적 강간이라는 새로운 병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이 아닌 자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초적 여자의 이미지로써.......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혹은 내 개인은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그리고 나름 완벽한 이미지의 여인을 판타지로 그려놓았다면, 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악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쯤엔 거의 덧없는 혹은 허무와 같은 이름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글속 주인공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끝끝내 마을 사람들과 상이한 자아일 것임을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마디로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양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율배반의 첫 이유가 되는 모래의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는 말 그대로 모래라는 늪이다. 사실, 남자가 가진 여자의 성적 판타지이거나, 고유한 이미지는 그동안 물이거나 바람의 속성과 관련되어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이 글에서 여자를 모래로 표현했고, 모래가 가진 유체역학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줄곧 사용해온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동시에 모래에 투영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모래의 속성이 지닌 잔인함과 공포를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 남성들이 투영시킨 여성의 판타지에 스스로 갇혀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여성이라는 희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거나 혹은 이 주인공 남자가 이 판타지를 벗어나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인가? 사실, 글속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남자의 어떤 탈출도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길들은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길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주인공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고, 유수현상과 관련하여 덧없는 ‘희망놀이’에 빠져있을 뿐이다. 즉, 끝내 이 모래의 여자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임신이라는 짧은 언급을 통해, 주인공 자신은 전혀 희망이라 명명하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희망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속 전개되어져 감을 은근히 말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혼자만의 ‘희망놀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어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의 근본적인 속성이 지닌 허상과 덧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허상이 존재해야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이 글은 여자에 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본 세계문학전집의 이 책을 통해 잠깐 관념의 세계에 빠져본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처음부터 관념보다는 에로티시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글을 해석하는 내 자신이 너무 관념적이기에, 결국엔 관념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허무하지만,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념에 빠지는 것 그 자체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남자가 하는 그 덧없는 희망놀이처럼 허무한 관념놀이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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