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다시 돌아보는 신춘등단에 대한 갈망

 

 

  이번 신춘문예는 다른 시기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거의 처음으로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는 점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 때문에 그전엔 잘 보지도 않았던 각 신춘문예의 작품들도 다시 들춰보게 되고, 신춘문예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 개인적 취향과 맞아 들어가는 신춘문예등단 글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이유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 개인적인 코드가 일반 대중적 코드와 다소간의 거리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울러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해야 할까? 작년에 대충 10편 정도의 중단편을 습작했지만, 대다수가 고름 짜기에 급급했던 작품이라, 딱히 낼만한 작품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엔 그냥 각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단편 매수와 일치하는 작품들을 그냥 제출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사실, 신춘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엔 이번엔 나도 신춘 스타일에 맞는 글을 꼭 써보리라 다짐도 했건만, 결국 되돌이표 곡조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아직 내 자아를 온전히 다 걷어내지 못하고, 오만한 까닭일까? 아니면, 그저 실력이 안 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대충 내 생각들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일단은 이번 신춘문예 각 작품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코멘트를 정리를 한 후, 다시 개인적 방향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처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수족관’과 ‘아돌프와 알버트의 시간’을 읽고서,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 뭐 그런 거였다. 이게 왜? 이런 작품들이 왜? 물론, 나는 지금 이 작품들이 내 개인의 작품보다 더 나쁘거나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나 뻔한 도식과 정형화된 공식이 소설 속에 눈에 보이게 드러남에도 뽑힌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돌프와 알버트의 시간’의 경우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진지성은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란 소재와 더불어, ‘특이 언어’에 대한 소재의 특이성을 제외하고는 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정형화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심사평의 언어의 틈새에서 오는 다의적인 울림이라는 거창한 이야기가 당최 와 닿지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수족관’은 사실 처음엔 이야기에 몰입감이 있었다. 사건의 특이성이 주는 긴장감과 많은 대사들이 가독성을 높였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 허무한 느낌이었다. 이 역시 그냥 뻔한 하루의 일상을 그냥 다른 소재로 풀어낸 느낌밖에 달리 내겐 전해지지가 않았다. 만약 서두부터 어떤 감춰진 시적인 복선이 있는 상태에서 결말 부분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희망의 전초로써 반전이었다면 개인적으로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많은 대사와 서사로 풀어간 이 글에서 마지막에 뜬금없는 시적인 반전은 어쩐지 내겐 작위적인 설정으로만 비춰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읽은 ‘얼룩, 주머니, 수염’은 읽는 내내 재미가 있긴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캐릭터를 살리는데 재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증과 성격장애를 동시에 가진 여주인공 그리고 선 연구원에서 선전부장 비슷한 걸 하고 있는 전직가수의 이야기들이 기묘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빈티지, 복고라는 코드가 더해져 글이 마치 최근에 인기 있는 일본소설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또, 이런 측면들 때문에 너무 많은 소재와 특이한 캐릭터에서 오는 개연성의 부재가 있을 법도 한데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마 이는 글의 화자가 나름 중립을 지키려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주인공과 같은 내내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특이한 캐릭터가 주인공과 물리적 거리가 발생했을 때 이별하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인 느낌은 내가 항상 최근에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일본소설을 읽고 나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그래서 대체 뭐? 어쩌라고? 물론, 지금 이 어휘가 다소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저 현상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오는 허무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나열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다시금 자문해본다. 그 이면에 무언가 다른 감동이나 깨달음이라는 가장 흔한 문학적인 공식은 논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허탈한 감정이 들게끔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나중에 내용을 다시 떠올려본 적도, 또 떠올린다 해도 기억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글쓰기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네 번째로 읽은 작품은 문화일보의 ‘유령의 2층 침대’이다. 이 작품은 일단 읽을 때 매우 재밌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 개인적인 코드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내면의 심리를 다루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방식,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밀도 있게 풀어내는 방식... 뭐 대충 이런 거, 이런 종류의 소설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물론, 이 글이 밀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함구하고 싶다. 그러기엔 지면도 짧았고, 어떤 시적 형상화 작업도 없었고, 아니 너무 가감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게 이 글의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깔끔함이 있었다는 느낌도 있고, 속도 시원하고. 다만, 조금 더 지면이 할애되어 주인공의 더욱 내밀한 심리와 주인공의 콤플렉스 대상인 ‘휘’의 캐릭터가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신춘이라는 정형화된 틀에선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이 정도면 내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괜찮은 작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다소 제대로 이야기해 볼 작품인 ‘선긋기’와 ‘1교시 언어이해’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일단, 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두 작품이 한 사람에게서 나온 작품임에 개인적으로 나는 놀랐다. 사실은 처음에 ‘1교시 언어이해’를 먼저 읽었는데, 신선한 기법과 소재에도 노련하게 녹아있는 삶의 이야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춘에서 이런 작품도 나오네, 뭐 이런? 그리고 ‘선긋기’의 경우에는 읽기 전, 같은 작가 작품이지만 ‘1교시 언어이해’보다는 덜 하다는 평을 누군가에게서 듣고 읽었다. 그렇지만 읽는 내내 ‘어, 이건 뭐지? 역시, 뭔가 예사롭지 않은데.’하는 생각들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따로 뜯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1교시 언어이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문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나름 만족하고 지내던 직장 내에서 주인공이 글속의 등장인물 중 ‘우애경’이란 캐릭터와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갈등은 다소 미묘한 부분이 있다. 일단, 주인공은 직장 내에서 실무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점에 대해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긍심이 우애경이란 인물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우애경이란 인물은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일단, 좋은 학벌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학벌은 자신의 직속상사인 유부장과의 파벌을 형성한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두 번째 문제에서 발생하는 회사 내 컴퓨터의 야동 팝업 사건으로 인해 우애경은 역으로 그녀의 예쁜 외모에서 오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좁히는데 성공한다. 즉, 직장 내에서 인맥과 관계란 측면에서 주인공보다 한 발짝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주인공은 회사 내에서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러한 고립감을 김소진의 소설 ‘개흘레꾼’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 개인적으로 다소 처음에 읽을 때 당혹스러웠다. 일단,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읽어보질 않아, 당최 소설 내에서 이야기하는 ‘테제’와 ‘안티테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헤겔이 이야기하는 역사적 변증법인가하는 생각 정도를 했다. 하지만 글에 대해 분석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그냥 안 읽고 넘어가기엔, 내 성격이 좋게 포장해서 너무 완벽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해야 할까? 결국, 그 까닭에 ‘개흘레꾼’을 읽게 되었고, 그것은 내 성격의 기인한 연유이든 어떻든 간에, 매우 옳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 글의 경우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내용을 모르고선, 제대로 독해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 내에선 공지영의 ‘부활 무렵’이라든가, 흐와스코란 사람의 소설 이야기가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키워드는 글 내에서 충분히 정보제공을 하고 있기에, 굳이 그 글을 찾아 읽어보지 않더라도, 대충 글을 독해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일단, 정보제공도 충분치 않은데다, 글 전반부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기실, 그렇기 때문에 글속에 등장하는 ‘테제’와 ‘안티테제’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테제’와 ‘안티테제’는 헤겔이 말하는 역사적 변증법이 아닌, 자기 정체성에 관한 ‘테제’와 ‘안티테제’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김소진의 ‘개흘레꾼’ 소설 내에서 등장하는 ‘내 아버지는 종놈이었다.’는 일제 강점 하라는 인식의 테제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내 아버지는 남로당이었다’는 한반도 분단이라는 상황 하에 인식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하지만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주인공이 이도 저도 아니듯, 그리고 그 때문에 다소간의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처럼, 이 글속에서 주인공은 삶의 터전인 직장 내에서 자신의 ‘테제’와 ‘안티테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내내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두 번째 문제에서 내내 우애경과 더불어 유부장과 갈등을 겪다, 그녀 자신이 그토록 찾던 자신만의 ‘테제’와 ‘안티테제’의 사이, 즉 김소진에게 있어선 ‘나의 아버지는 개흘레꾼이었다.’를 자신의 회사 대표이사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테제’와 ‘안티테제’란 사이가 정말 규정짓기 힘든 애매모호한 장소이기 때문일까? 우애경과 유부장에게 시달리면서도 혼자 회사에 남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녀를 격려하며 대표이사가 툭툭 치고 간 부분은 가슴도 옆구리도 아닌, 무언가 만져져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민감한 부분은 이 글의 세 번째 문제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애시당초, 대표이사는 주인공의 내면적인 갈등에도, 그리고 주인공이 피고름을 짜서 만들어내는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몸에만 관심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결국, 회사 내에서 자신의 ‘테제’도 ‘안티테제’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 자신이 진정으로 적을 둘 수 있는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이라는 영영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를 끝으로 남겨두며 쓸쓸하게 회사를 떠난다.

 

  일단, 이 글에 대해 칭찬하고 싶은 점은 가장 정형화된 기법을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온전하게 삶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형식을 추구하는 경우, 형식이라는 탈피를 위해 무리수를 띄워, 일상의 삶과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대중과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글의 경우에는 다소간의 형식적인 파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일상의 삶을 그려냈고, 단순히 그려낸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굳이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반적인 대중이, 나와 같이 애초에 ‘개흘레꾼’을 몰랐던 대중이, 과연 이 소설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이것은 숨겨진 코드로 이해될 수는 있다. 글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숨겨진 미덕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그러한 코드를 일부러 찾아 읽는 일은 흔하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숨겨진 코드란 미덕이 역으로 글의 몰입감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점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에 일부러 김소진의 ‘개흘레꾼’ 이야기를 자잘하게 펼쳐 정보제공을 할 이유는 개인적으로 없었다고 믿어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 소설이 역으로 ‘개흘레꾼’에게 삼켜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것은 어차피 ‘이 소설의 흐름은 이런 거고, 이렇게 흘러 갈 거야.’라고 스스로 밝히고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평론가의 몫이고, 독자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소설 내에서 작가가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보다 정확한 정보제공을 했었다면, 이 소설은 이미 뻔히 예상되는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 김소진의 ‘개흘레꾼’과 이 소설의 ‘테제’와 ‘안티테제’는 전혀 다르고, 그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선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마저도 부인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너무 명확한 ‘개흘레꾼’에 대한 정보제공이 있었다면, 이러한 결론까지 이르는데 대한 여운이 분명히 약화되었으리라 예상해 본다. 때문에 이 글속에 ‘개흘레꾼’은 분명히 숨겨진 미덕의 코드이다. 다만, 독자의 혼란을 조금 더 배려하여, 다소간의 정보제공은 더 필요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1교시 언어이해’의 저자였던 이은희 씨의 또 다른 작품 ‘선긋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이 글은 읽는 내내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일단, 문체 자체도 까칠한 고등학생 소녀의 심성이 그대로 묻어나있어, 읽는 내내 신경이 긁히고, 역함이 올라오는 걸 참아야 하는 감정을 주인공 화자와 함께 느껴야했다. 그만큼 사실 이 글은 문장과 문체의 힘이 강렬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익숙지 못한 독자들에겐 다소간의 불편한 시선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동시에 이 글 역시, ‘1교시 언어이해’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코드가 숨겨져 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 무단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투척하는 7층 아줌마, 그리고 주인공 소녀가 그리는 그림들... 아니, 솔직히 나는 이것을 숨겨진 코드라 불려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문학적인 은유에 가깝게 느꼈으니까. 하지만 저자의 강렬한 문장과 문체만큼 도드라진 이 은유들이 처음에 결코 쉽게 읽히진 않았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 대한 소녀의 애착과 부담어린 시선은 다소 진부해보이기도 했고, 7층에서 무단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투척하는 아주머니의 아들 이야기는 다소 뜬금없어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녀 자신이 병적일 만큼 예민하고 순수하기에, 모두에게서 소외받고 있는 두 인물에 대한 고통을 자신도 모르게 내내 감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말 부분에 와서야 희미하게 드러난다. 소시지가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으로 7층 아주머니의 아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과 단순히 선을 그어 쌓아 올리는 그림으로 폐지를 리어카에 쌓아올리는 할머니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었는지, 그녀 스스로 얼마나 소외되고 있었는지, 그래서 그녀가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인 그림을 통해 7층 아주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그녀 자신 스스로를 끌어안고 싶었음을, 글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는 노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무언가 소통하고픈 마음이 글속에 잘 전달되었기에 내 개인이 다시 숙고해보게 되지 않았나하고 다시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어차피 소통이란 그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도 다소간의 어려운 이 은유를 통한 소통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도 덧붙여 보고 싶다.

 

  2015 신춘문예 등단 작품을 전체적으로 읽은 다음 내 개인이 느낀 바는 이러하다. 일단, 내 개인의 성향이 다소간의 대중적인 코드와 거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자연 정형화된 신춘 스타일은 내가 쓸 수도 없고, 다가서기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로 잘 된 작품, 이은희 씨의 작품들을 보면서는 개인적으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어차피 다소 관념적이고, 그 이유로 문학적으로 숨겨진 코드에 대해 미덕으로 보는 내 개인이라면, 그런 종류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덜 여문 까닭에 내 글들은 그러한 코드도 부족하고, 따라서 당연히 완성도도 떨어진다. 기왕 정파가 아닌 사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적어도 정파 쪽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비기가 있어야 될 텐데, 그렇지 못했던 점들에 대해 되새겨보게 된다. 아니, 나만의 그러한 비기를 앞으로 열심히 갈고 닦아야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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