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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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인 소설은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아마 군대를 갓 제대하고서 쯤이었을 것 같다. 대학 신문사에 있던 후배가 문학포럼에 초청을 받았는데,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 기성세대 작가인 최인훈, 최인호, 이성복 등을 비롯하여 비평가인 정과리, 당시 인기가 있던 성석제, 유하, 김영하 그리고 신경숙까지 총망라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갖는 포럼이라고 하였다. 당시 문학에 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였기에 나는 흔쾌히 청을 수락하여, 후배와 함께 포럼에 참석하게 되었다. 약 40명의 가까운 작가들이 각자 문학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피력하였고, 때문에 포럼은 장장 3~4시간을 족히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설만큼 재치 있게 언변을 펼치던 성석제도 아니었고, 무언가 그 시나 소설의 파격만큼 남달랐던 유하나 김영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말도 너무 못하고, 정말 작가가 맞는지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도 잘 못 드는 여류작가, 바로 신경숙이었다. 원래 여류작가들의 문체를 좋아하였던 나였기에 당시 신경숙의 소설도 두 세권쯤 읽기는 하였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내밀하고 정갈한 문체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작가 신경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 문학포럼을 통해서였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부끄럽게 하여, 차마 말도 못 하게 만든 것일까? 그런데 어찌하여 그녀의 글속엔 그렇게 자잘자잘 할 말이 많은 건지.......

 

 

  그녀 소설이 누군가의 아류인지 혹은 비평가인 남편의 힘을 빌은 출세인지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늘 그녀의 소설 속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 특유의 밖으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상처이다. 여기 외딴방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녀의 상처의 근원지인 쇠스랑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골이 지긋지긋한 소녀, 그래서 어서 서울에 있는 오빠가 서울로 데려가주기를 꿈꾸는 어떤 토속적인 동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소녀, 하지만 쇠스랑을 가장 신경이 밀집되어 있다는 발바닥으로 밟고서도 외마디도 지르지 않는 소녀... 그 쇠스랑을 그녀 집 앞 우물에 내던져버리고서, 이제는 어엿한 중견작가가 되어 살아가는 그녀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전화가 온다. ‘하계숙’이란 이름.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래서 소설로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상처들. 그런데 그 상처가 생생하게 살아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왜 나는 존재케 하지 않느냐고?

 

 

  한참 글쓰기에 골몰하던 때, 어느 날 낮에 선잠을 자고서 깨어났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흐느낌만이 남아 내 속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제발,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그 동안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로써 치부하였던 나였기에, 그 흐느낌은 내게 어떤 공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하룻밤의 정사를 꿈꾸고서 낳은 나의 그 사생아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어느 귀퉁이에 내던져 버리고선, 그것을 밀쳐낸 힘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이 내게 자신의 존재를 들이민 것이다. 마치, 수년간 버려져 여기저기를 뒹굴다 어느 사창가 귀퉁이에 겨우 자리 잡은 어린창부가 내게, 내가 마치 자신의 아빠 같다며 달려드는 것처럼. 그리고 서툴렀던 첫 정사에서 들었던, 이런 식이면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어느 여자의 차가운 말이 군대에서 잠 못 드는 밤 연신 떠올랐던 것처럼. 만약, 그럴 리는 없지만 그 어린 창부가 그 정사에서 떼어낸 사생아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제 와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들을 일일이 되물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되묻는다면 그것이 내게 있어 하나의 담장 너머의 흐릿한 꽃과 같은 상징으로 여겨지는 글쓰기가 가능할까? 그것은 소설도 그렇다고 수필도 아닌, 하나의 기억에 대한 왜곡이거나 곡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글쓰기의 존재적인 물음을 회피하고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온통 거짓과 가식일 뿐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글쓰기란 그 존재에 대한 응답이거나 대답일 것이다. 또한 그러하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인한 생채기에 메스를 들이미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깨질이 될지, 아니면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하는 작업이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글이 끝나긴 전까진.

 

 

  소녀는 소녀의 원대로 서울로 오게 된다. 그리고 공장생활을 하며, 산업근로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당시, 노조 간에 갈등이 고조되던 80년대시기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선 노조를 탈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이제 열여섯 살 밖에 안 된 소녀에게 그러한 선택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왜 서울에 올라왔던가?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나름 중산층이었던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모든 부당한 대우와 삶을 감당해야 하는 여공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겨우 그것을 위해 그녀가 온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언젠가 이룰 그 막연한 꿈을 위해서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녀는 배신이란 각인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끔찍한 나날들, 그런 나날 가운데 그녀는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희재 언니’ 무표정한 작은 얼굴, 무심한 작은 얼굴, 조용한 작은 얼굴... 햇볕같이 표정이 없는 무심한 얼굴, 그렇게 작고 희미한 존재... 어쩌면 그녀는 희재 언니를 통해 그녀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렇게 힘겨웠던 나날들 그녀들은 ‘그럼’이란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난 잠을 자겠어. 사흘 나흘 깨지 않고 푹 자겠어.

 ......그럼.

 동생이 학교 졸업하고 설마 대학 간다고는 안 하겠지, 안 그래?

 ......그럼.

 그래도 가겠다 하면 보내야겠지.

 .....그럼.

 모르는 소리. 이보다 더 일할 수는 없어. 하루는 24시간뿐이니까.

 ......그럼.

 난 이정밖에 할 수 없어.

 ......그럼.

 반장님이 내일쯤은 작업실에 환풍기를 달아주겠지?

 ......그럼.

 이 다음에 마당이 있는 이층집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럼.

 

 

  그럼, 그럼, 그럼....... 마치 자신들의 희미한 존재에 의미를 겨우 부여하는 것처럼 들리는 공명. 그렇게 그녀들은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럼’이란 게임을 통해 앞으로 더 좋아질 시간들을 함께 하고픈 바람을 노래하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공에 희미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우리가 함께 뜨겁게 불렀던 그 희망도, 그 기억도, 그 사람도 결국엔 사라져버리게 된다. ‘희재 언니’는 그렇게 어느 명절 날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며 그녀에게 자신의 방을 잠거 줄 것을 부탁하고, 며칠 후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때 너무 어렸다. 공장에서의 삶도 버거운데 한 존재의 죽음을 감당하기엔 그녀는 너무도 어렸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도망치듯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든든한 큰오빠가 있다. 마치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그녀의 큰오빠 덕에 그녀는 무사히 그 시절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한 무거운 존재의 그림자를 그녀가 지울 수 있을까?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 우물 속에 내던진 쇠스랑은 부식되어 우물을 시나브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서 그녀는 그녀의 희재 언니가 우물 속에 쇠스랑을 건져 올리는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갈무리하려 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의 존재와 쇠스랑의 존재에 대한 너무 가벼운 대답임을 알기에 그녀는 쉬 글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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