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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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 멀티 우주 속에서 소통과 소통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일본 소설(?)을 읽은 지가 꽤 오래 전 일로 기억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가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와 류의 소설을 제외하고 읽어본 2000년대 일본 소설의 전부일 것이다. 누군가 왜 안 읽어 보았냐고 묻는다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느낌은 그냥 그 가벼움이 싫었던 것 같다. 읽는 순간에는 재밌는데, 읽고 나선 무언가 남는 게 없는 공허한 느낌? 이런 기억들이 근래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일본문학들과의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결국 나의 이런 선입관에 어떤 여지를 주지 않고 단단한 성을 쌓아버리게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로 인해 내 이런 단단한 성과도 같은 선입관이 바뀌었느냐고 스스로 자문해 보면, 역시 크게 달라진 바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이러한 소설 속에 감춰진 현대적 흐름과 감각을 그동안 내 스스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너무 무감각하게 대응하여서, 가끔은 조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 아마 이 정도가 나에게 이 책을 통한 수확이라면 일종의 수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이 속에 감추어진 세계관을 살펴보는 것이 내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다고 여겨져, 거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첫째로, 이 소설 속의 구성과 관련한 세계관이다. 이 소설은 누구나 다 알 듯이 옴니버스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소 특이한 것은 하나의 공동체(집) 아래서 각자 주인공이 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설의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설 중간과 끝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구성 자체에서 Multi-Universe의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원래, Universe라는 어원은 ‘보편적이다’라는 의미에서 도출된다. 즉 하나의 우주, 하나의 진리의 개념이 이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많은 소설 속에서 하나의 화자와 주인공을 우리는 마주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현대적 가치와 관념을 반영한 소설이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보편이 통용하던 시대를 벗어나, 다변화된 사회적 가치와 관념을 하나의 우주 속에 발현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우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우주의 틀을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있는 공간으로써, 집의 기능이 기존의 결혼한 남녀와 아이가 이루고 있는 가정의 기능을 대처한다든지, 조금은 기존의 체제에서 정상범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외형적 변화가 주어져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곳에선 시간의 왜곡도, 타인의 생각을 완벽히 알아낼 수 있는 독심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개개인은 주인공으로 각기 다른 양식 하에 시간이라는 퍼레이드에 동참하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이곳에선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소통이 중시된다.

 

 

  둘째로, 앞에서 언급한 소통의 문제이다. 이 소설은 소설 내에서 줄곧 소통의 문제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가장 좋은 비유를 들자면, 아마 채팅창의 비유일 것이다. 채팅창은 익명의 공간이다. 익명은 어떤 의미에서 무한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만약 어떠한 재제와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선 개인이라는 각기 다른 욕망만이 존재하게 되어 소통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인간에겐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본질적 자아가 아닌 어떤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이 가면의 얼굴은 타인과 소통을 가능케 한다. 즉, 채팅창과도 같이 달라진 우주 혹은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서로 발가벗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하고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어떤 순기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글 속에서 사토루에 대한 요스케의 역할이 아마 그러한 순기능의 일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처음에 다루었던 익명이라는 무한한 욕망의 섬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소설은 나오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나오키에 관한 문제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사실 내내 걸렸던 인물은 나오키이다. 사토루까지만 해도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소통에 있음이 분명했는데, 뜬금없는 나오키의 ‘살인의 추억’ 포스는 소설의 방향키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장르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보여준 그런 유의 소설도 아닌데, 생뚱맞은 나오키의 본질 앞에서 잠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 소설이 옴니버스 식의 소설이고, 소통의 가능성 속에서 소통의 부재 또한 다루고 있다는 처음의 귀결로 차근히 되돌아가면서, 나오키가 그 부재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라면, 왜 굳이 그 집의 실제 주인이며, 사회적 성공 모델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나오키를 그러한 부재 속에 빠뜨렸느냐 하는가이다. 여기서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나오키를 현대인의 표상으로 혹 작가가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럼에도 역시, 그 작위성 때문인지 혹은 여러 개연성들의 부족 때문인지 나오키 인물 캐릭터 자체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품평을 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움이 아닌 꿰맞추기 식 억지스러움이 있지 않았나, 잠시 반성해 본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사유해 볼 수 있는 부분을 바로 이 점 때문에 놓치지 않았는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을 살아가면서, 조금 더 진중한 접근으로 메워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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