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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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삶과 죽음에 관한 진부한 문학적 접근

 

 

  처음 소설을 접했을 때 첫 문두에 모택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이 무언가 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닌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치 진지했던 혁명가인 모택동이 이 시대에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해서, 혹 현대 시대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소설인가 하고 다시 착각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 집단자살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뭐 땜시 거창하게 모택동에 혁명의 폭력의 당위성, 그리고 현대 시대의 그 폭력적 소비성에 대해 언급한 것일까? 전에 박민규 소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만 살짝 본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주제인 죽음에 관한 문제... 물론, 소설에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죽음을 간과하고 쓸 이야기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철학적인 접근이 아닌 문학적인 접근 속에서 삶과 철학을 어우른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질문 방식을 어떤 식으로 취하고,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가 문학적 화두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서 취한 방식에 대해, 글쎄 뭐랄까, 나는 도무지 긍정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이유로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 소설이 취한 접근방식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자살에 관해 최근 사회 문제가 되었던 집단자살에 관한 이슈를 통해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낄 때, 이 소설 속에서 집단자살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이슈로 끝나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집단자살 속에 있는 어떤 심리의식이라든가, 하다못해 주인공이 왜 집단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드러나 있지가 있다. 물론, 박민규 특유의 소설을 개인이 아닌 소외계층그룹에 대한 관심사로 돌리는 성향이 이곳에 묻어난 것이라면 일정 부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집단자살에 대한 어떤 심각한 문제의식보다는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한편으로는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접근의식을 갖지 못한 채 단지 소재로 채용을 한 것은 하나의 겉멋이나 허례로 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글속에서 낙태를 하는 여인의 낙태에 대한 당위성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또한 주인공의 자살충동의 근본적 이유의 하나로써 하나의 도구로 채택되었을 뿐, 근본적인 질문이나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박민규 자체가 어떤 현상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고 그 저변에 대해 파헤치기보다는 연민하고 공감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란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연민과 공감을 극대화하기에 이 소설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 정공법이었다. 여타 다른 박민규 소설에서 드러난 어떤 특유의 해학이라든가 문학성이 이 글속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두 번째로 왜 하필 많은 박민규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을 이상 문학상에서 택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조금은 기대했던 박민규에 대해 크게 실망할 뻔했다. 만약 그 이후 그가 쓴 다른 단편들을 보지 않았다면 난 분명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전에 읽었다고 잠깐 언급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실제로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다른 스터디의 합평 책으로 이 책이 채택되어 어쩔 수 없이 읽었는데, 것도 그 주에 유난히 무슨 일들이 겹쳐 합평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스터디 시작하기 30분 전에 발췌독으로 대충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 소설에 대해 느낌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줄거리 파악하고, 아 박민규는 비 오는 날 갑자기 당기는 200원짜리 자판기 밀크커피에 담배 한 대 같은 느낌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박민규를 결코 무시한건 아니다. 왜냐하면 난 그 느낌 때문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시를 다시 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지만 그 정도의 독서로 박민규에 관심을 갖고 알고 있다고 하기엔 무리라고 이야기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스터디 누군가의 필사본을 통해 난 이번 기회를 통해 진짜 박민규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점은 박민규를 단순히 비오는 날 당기는 200원짜리 싸구려 커피와 담배 한 대만으론 취급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같은 죽음의 문제를 다뤘어도 그의 소설 ‘근처’에선 근처라는 문학적 뉘앙스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색다르게 접근하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누런 강 배 한 척’과 ‘낮잠’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를 끈끈하고도 풋풋한 노년의 로망스와 인간애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침의 문’에서 선택한 방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앞에서 잠깐 밝혔듯이 무언가 정공법을 택한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끼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기왕지사 정공법을 택했다면 좀 더 치밀함과 처절함을 가지고 질문해 들어가는 것이 맞을 텐데, 이 글속에선 난 그런 끈끈함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학성 또한 정공법을 택한 까닭인지 단순한 도식과 구조를 이용해 죽음과 생명에 대해 표현을 한 것으로밖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 번 기회를 통해 박민규라는 작가를 알게 된 이유 때문인지, 그래서 더욱 그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의 글 중 이렇게 가장 떨어지는 그답지 않은 글을 이상 문학상을 준 이들에게 솔직히 독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굳이 꼭 이렇게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삶과 죽음이란 거창한 문제를 다뤄야지만 작가로서 인정을 해주는 건지, 이렇게 굳이 깊이에의 강요를 통해 자유롭고 번뜩이는 한 작가의 어깨에 힘을 잔뜩 실어줘야만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를 더 던지고 싶다. 문학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라면 철학도 있고, 심리학도 있고, 예술도 있는데, 왜 꼭 우리는 문학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어떤 문학이 지닌 특유의 문학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학성이란 걸 꼭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틀과 잣대로 들이밀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언가 또 아쉽고 아쉬워 의문이 내내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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