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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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이상’에 관한 진실과 거짓 혹은 고백과 부인

 

 

  글이란 왜 쓰는 것일까? 근래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쓰면서, 또 지워가면서 나는 혼자서 되뇌어보곤 한다. 다가설 수 없는 먼 수평선에 대한 동경? 혹은 너무 가까워서 감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가령 예를 들면 늘 쓰고 있어서 손이라 평소에 지칭하기 쉽지 않은 그런 대상에 관한, 치열한 도리깨질? 내 내면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이 두 가지 물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 내부의 고유의 속성,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치열하게 부서뜨려 자연적인 그 형태를 자신만의 자의적 형태로 바꾸어내고 싶은 본능들... 물론, 여기서 나는 이런 고차원적인 글쓰기에 관한 본질에 관해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눠진 밤의 사이를 가로질러 부인하고 싶지만, 차마 세 번 부인할 수 없던 어떤 대상에 관한 보고서인 이 글에 대해 막연히 내 감정을 써내려가고자 할 뿐이다.

 

 

  북구의 습기를 한껏 머금은 예테보리나 항구에 당도하여, 국경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초소를 지나, 한없이 북쪽으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 안데르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운자 크레보’란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에 P는 천사 같은 그의 부인 M과 함께 살고 있다. P,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넘어설 수 없는 대상이었던 그, 그가 존재했기에 나는 항상 학창시절 2등이었고, 같은 외과의로서 그가 보여준 정점을 통해 나는 스스로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자각을 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그가 사라졌을 때, 나는 손쉽게 외과의라는 자신의 존재 위치를 벗어나, 영화판이라는 전혀 새로운 곳에 뛰어들 수가 있었다. 아니,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임과 동시에 이정표였던 그가 사라지게 되자, 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미국에서 또 다시 외과의로서 정점을 찍으며, 독창적인 논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나는 나름의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어 외국에서 인정받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의뭉스럽게도, 그는 또 갑자기 모든 정점을 찍었던 미국의 생활을 접고, 이곳 너무나도 낯설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북구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외과의였던 그의 전공을 ‘면역학’으로 바꾸면서, 이제는 환자들을 수술하는 의사가 아닌 새로운 의학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연구의로서... 그리고 마치 그 모든 삶이 농담이라도 되는 듯 그의 찌든 가난을 보여주는 자동차란? 글쎄, 삶에 모든 정점을 찍었기에 가능한 그만의 농담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 농담 같은 삶의 표징을 넘어서 그가 착수하고 있는 ‘러브피아’라는 프로젝트는, 마치 무슨 영원히 사랑을 지속시켜 주는 콘돔 광고 같은 이름이지만, 영원한 사랑을 가능하도록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말하는 모양새가 사뭇 진지하여 차마 농담이라 폄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의 삶과 그 아우라는 늘 그 모든 허공에 뜬 이상들을 진짜처럼 바꾸어왔기에, 그 누구도 그렇게 폄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가 여기 북구에 온 것은 영화 시사회와 대학 강연이라는 허울 좋은 푯말이 있었지만, 실은 순전히 그를, 온전한 내 삶의 표징이었던 그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에게 그 10년이란 세월을 통해 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내부에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의 영화시사회를 같이 가길 바랐지만, 그는 그저 전날 메이킹 필름을 보는 둥 마는 둥 할 뿐이다. 그리고 감추는 법 없이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해댄다. 그런데 거기에 단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감출 수 없었을까? 왜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시금 나는 그에 대한 한없는 콤플렉스를 느낀다. 개성적인 영화로 한국보다 유럽의 세간에 더 널리 이목을 끌어온 내 영화가 한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삼류영화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다. 이렇게 그 앞에 서면 나의 모든 존재는 한없이 위축되기만 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 아니 그의 아내 M에게서 감춰진 비명의 소리가 들린다. M, 처음으로 자신이 감정을 느꼈던 대상, 그러하기에 어쩌면 10년 동안 P를 보지 아니한 것은 P에 대한 자신의 콤플렉스보다는 M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P였기에 그는 아주 간단히 M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오직 P만이 M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숨길 수 없는 M의 절규는 뭉크의 화실을 통해 들려온다. 대체 무엇이 M에게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일까? 그는 이야기한다. 뭉크의 화실에서 훔쳐온 ‘절규’와 ‘마돈나’에 관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뭉크 자신을 빗댄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절정에 이른 M의 표정은 마돈나와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마돈나와 섹스를 할 수 없는 자신이 내어줄 건 자신의 마돈나 밖에 없다고. 그는 술에 잔뜩 취해 계속해서 그렇게,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M을 비하함으로써 동시에 나를 비하한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가 왜 이렇게 취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취기어린 농담을 그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의 삶에 대한 가벼운 농담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취해, 이제 그의 삶 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가 없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아니, 모든 것은 취기에 불과했다. 그의 ‘러브피아’란 프로젝트도, 그의 마돈나인 ‘M’도, 결국 모두 취기어린 어릿광대짓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갑자기 믿고서, 받아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M의 끊임없는 비명은 P의 취기 속에서 비집고 새어나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부피의 현실이다. 그리고 결코 내가 간여할 수 없는 비명과 절규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 비현실적인 북구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도 같은 P와 M의 집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여전히 자신을 찾는 P를 부인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나는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함으로써 그 모든 존재를 지워낼 수 없기에, 수화기를 내린 채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를 만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마지막 P를 세 번 부인하지 못한 주인공 ‘나’의 모습을 통해 내가 예수와 베드로의 설화를 떠올린 것은 비단 내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은 아니리라 잠시 믿어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이러한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는 것은 내가 분명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P라는 존재를 통해 내가 본 것은 하나의 표징과 이상이었다. 실제로 P가 말하는 ‘러브피아’라는 그 자체가 그 얼마나 이상적인 표징이란 말인가? 하지만 언제나 이상이란 것은 하나의 표징으로써 존재할 때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일 때 그 씁쓸한 허무함이란... 아니, 놓지 못한 이상의 추구라는 현실은 주위를 비명과 절규로 물들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이상은 분명히 만족되지 못한 현실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서도 ‘러브피아’는 그러한 맥락의 복선을 깔아놓고 있다. 하나의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온도차, 그리고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위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기반으로 P는 어쩌면 인간의 영역에선 함부로 꿈꿀 수 없는 ‘영원한 사랑’에 관해, ‘러브피아’에 관해 감히 발설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글 속에서 표현되었듯이 무슨 콘돔 광고처럼 허황되고, 씁쓸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하나의 가벼운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그의 삶이 M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게 연신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M으로 표상되는 그녀가 진짜로 마돈나이기 때문일까? 글 속에서 ‘나’는 어쩌면 그녀를, 그녀의 팔목을 통해 마돈나로 숭고하게 격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P'인 그는 그런 마돈나의 존재를 섹스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마돈나는 그런 성스러운 마리아의 관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물론, M은 결코 그런 성스러운 관능을 간직한 마리아가 아닐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아름다운 ‘운자 크레보’보다 서울의 텁텁한 공기가 그리운 하나의 평범한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P라는 이상적인 표징의 존재와 더불어 그녀는 마돈나로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P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이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발상이며, 비현실적인 존재방식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P'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존재였기에 그 존재가치를 주위에 인정받았고, 그 빛을 발하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빛이 언제까지 발할 수 있을까? 나는 부인한다. 망가져버린 P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아니, 나조차 이렇게 그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는 없다고 나는 고백한다. 왜냐하면 P의 존재는, ‘이상’이란 그 이름은, 비록 취기어린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현실 속에 존재할지라도 쉬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인 까닭이다.

 

 

  두서없이 감정의 결대로 써내려온 품평을 이제 대충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아니, 맨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 거 같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의 구겨진 여백들을 놓지 못하는지... 나는 이 글의 ‘나’처럼 역시 쉬 대답할 수 없다. 아니, 쉬 부인할 수 없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부인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도 쉬 이야기할 수 없기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제스처는 부인할 수 없는, 한두 번 쉽게 현실이라는 굴레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세 번 씩이나 그 모든 ‘이상’과 ‘꿈’들은 허황된 거짓에 불과하다고, 그런 놀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밑도 끝도 없는 ‘글’이란 ‘이상’의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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