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의 샛별 - 201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한국소설가협회 엮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달로 간 파이어니어 - 포스트모던 글쓰기에 대한 소고

 

 

  모던이란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이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현대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너무 거창한 화두일지는 모르겠지만, ‘달로 간 파이어니어’란 짧은 단편을 다 읽고서, 내 안에 생긴 질문이었다. 아주 생소한 소재, 매우 간결하게 관념을 지워버린 문체, 그리고 분절된 의미들... 이런 세 가지 소스를 잘 엮으면, 아마도 이 글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세련된 글이 될까?

 

 

  먼저, 앞에서 언급한 생소한 소재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생소한 소재라는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 글쓰기에서 환영받을만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것이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소한 소재 자체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생소함에 경험이 부재되어 있다면...?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을 쓴 이세은이란 젊은 작가를 모른다. 그러하기에 이 작가가 실제로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근거로 하여 썼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내가 쓸 글들은 역으로 진실이 부재된 잡설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실이 어찌됐든, 경험의 부재를 가정으로 하여 나는 내 평의 논리를 구성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경험이 가정된다면, 차후에 내가 파고들어갈 ‘간결한 문체’와 ‘분절된 의미’에 대해 논리를 감히 펼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나로선, 이 글속에 경험을 공감하기에 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시체를 치워봤다거나, 아니면 이와 유사한 직종에서 일 해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그저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해보았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패된 포유류를 몇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또 다시 자연스럽게 인간의 죽음과 살인욕구에 대해 관념적인 접근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자신이 이러했기 때문일까? 깨끗하게 관념이 배제된 문체 속에서 나는 생소한 소재가 갖는 경험의 부재를 여실하게 느끼곤 한다.

 

 

  글에 지나친 관념은 독이 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란 의미 자체는 이미 ‘탈관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글쓰기에도 적용되어 글속에 ‘관념’ 자체가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지지해 준다. 동시에 ‘관념’이 내포한 ‘의미’에도 그러한 논리는 적용된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는 무엇이 될까? 그것은 묘사이다. 관념이 깨끗하게 배제된 간결한 묘사. 때문에 여기서 ‘경험’이나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애초에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글쓰기에서 그 ‘관념’과 ‘의미’를 지탱해 줄 ‘경험’과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그 안에도 나름의 ‘진실’과 ‘의미’를 담보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실’과 ‘의미’가 없다면, 애초에 ‘글쓰기’ 자체가 ‘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논리가 작가의 ‘진실’과 ‘의미’가 분리된 글 자체 내에 ‘진실’과 ‘의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글’이라는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한 논리이고, ‘글’이 스스로 지닐 수 있는 최상의 ‘권리’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한 ‘권리’와 ‘자유’ 속에 ‘책임’은 고스란히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글 쓰는 자에게 분리된 ‘글’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책임은 읽는 ‘독자’에게로, 그 ‘독자’가 내리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진실’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을 대체 ‘독자’가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그리고 해석한다고 해도,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그냥 심심풀이땅콩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구조는 사실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시체를 치우는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글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지극히 사소한 감정과 관념이 배제된 묘사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글속에서 누구도 ‘의미’를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무료한 일상을 깨뜨릴 대척점으로 ‘달로 간 파이어니어’와 ‘올리비아 밴슨’이란 인물을 이야기 곳곳에 끼워 넣는다. 정말 말 그대로, ‘끼워’ 넣는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치밀하게 구성된 ‘논리’나 ‘관념’이 필요 없는 까닭이다. 그냥 그 자체로 아마도 대개의 독자들은 그 두 대척점 사이와 간극과 염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간극과 염원을 치밀하게 논리와 의미로 채워간다는 게 더 이상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분절된 언어로도 충분히 우리는 이를 눈치 챌 수 있고, 오히려 분절되어 있기 때문에 두 대척점이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여기서 어떻게 새삼스럽게 새로운 ‘의미’와 ‘관념’을 말할 까닭이 무엇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분절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있는 것을...

 

 

  사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한편으로 분명, ‘글’ 자체에 무한한 자유와 권리를 주는데 지지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주의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역으로 이러한 생경한 소재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묘사에 치중한 글쓰기를 표방한 글들에 허무함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글쓰기 속에서 글 자체가 지닌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한 몸부림과 생존의지를 느끼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란 말도 ‘모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절된 글쓰기도 전형적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에 대한 염원과 동시에 어떤 염증도 없이 분절되기만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맨 처음 누군가 시도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이러한 시도가 있어왔고, 이제는 너무 익숙할 만큼 이 방식이 존재한다면, 조금 더 글속에 치열함과 진실을 시도해보는 것도 작가정신이 아닐까?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든, 그러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잠깐, 감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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