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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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형도의 수많은 시들 가운데 나는 이 시와 10월이란 시를 유독 좋아하였다. 하지만 10월의 경우, 시의 1절에서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이후, 2절에서의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란 구절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걸림돌이 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은 기형도란 시인과 내 속에서 꿈꾸고 있는 시적 자아가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인 까닭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시는 언제나 수평선 너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혹은 완전히 모순적으로 내 개인의 내적 자아를 할퀴고 도려내는 열망인데, 기형도란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일 뿐인, 추악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가였던 고 김현 선생님의 말을 빌면, 이것은 너무나도 도저한 어둠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들은 대부분 춥고 어두운 밤 겨울의 날씨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나마 추억을 기념하는 그의 가을의 시들조차 얼마나 황량하기 그지없는지... 언제나 죽음의 편에 서있기만 하다. 그럼에도 왜 내 젊은 날 나는 자석처럼 기형도의 시에 이끌렸던 것일까?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 도저한 어둠속으로...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어언 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시어 한 구, 한 구에서 총성을 듣는다. 마치 내 관자놀이에서 터지는 극대화된 쾌감처럼 혹은 절망처럼...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을 그가 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어둠이 그의 감당하기 벅찬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봄빛을 기다렸다는 듯이 분질러져, 또 다시 다가올 계절에 관한 희망을 머금고 있는 까닭일까? 하지만 그 희망은 나뭇가지에서 툭, 툭 떨구어진 눈발처럼 지면에 닿으면 금세 사그라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슬픔과도 같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그 눈발을 관조하는 대상이거나 혹은 상상하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처럼, 나는 모든 눈발을 훌훌 털어낸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거나 관념뿐인 것이다. 그래도 계절은 다시 오고, 나는 죽은 나뭇가지 위에 우연히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꿈을 꾸거나 혹은 결국엔 툭 분질러져버린 가지가 썩어 그 위로 이끼들이 자라나고, 그 이끼들 틈새로 온갖 잡초들이 피어올라, 언젠가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길 너무나도 간절히 망상하고 있다. 그 추악하게 말라비틀어진 죽은 가지의 날렵함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말을 빌자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거추장스러운 무엇을.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드는 청년들의 욕망 속에서, 그 같은 종류의 쾌락 속에서... 내 젊은 날의 길바닥을 뒹굴며 토악질을 하던 그 구토물 속에서... 그 한 가닥의 연민을, 나는 본다. 내 속에서, 그리고 기형도의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 속에서.

 

 

  끝으로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복학한 후, 기형도를 읽고서 썼던 시를 여기에 덧붙여 두고 싶다. 그 시를 통해서 언젠가 다시 읽을 기형도에 대한 미련을 여기에 남겨두고자 한다.

 

 

 

기형도를 읽다

 

 

 

아주 조금씩

그렇게 무겁게

내어뱉은 읊조림들로

깊은 전철역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은 언제나

바람이 맺혀 있었다

 

 

검은 외투를 부여잡으며

거리로 뛰쳐나오면

푸르른 하늘에 비친 어둠

무서워...

하지만 검은 외투는

때묻지 않은 잿빛으로

오래 닳고 닳을 수가 있어

 

 

그토록 푸른 하늘을 지나

다시 깊은 낭하로 들어서면

바람이 검은 외투에 맺혀

내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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