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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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도발에 관한 변명 혹은 예찬

 

 

  2001년 신경숙의 부석사를 끝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작별을 고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저 그 때 내 자신은 졸업이란 믿겨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당면한 내 문제들로 자기똬리를 틀기에도 버거웠다. 물론 일종의 한국문학에 대한 내 개인적 매너리즘이 작용했던 것도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이 지금까지 10년을 내 스스로의 문제에만 쫓겨 살아 온 것이 더 자명한 진실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10년 만에 접한 이 번 이상문학집은 내게 매우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일단 표지부터 전혀 눈에 익지 않았고, 안에 작품을 풀어 놓은 배열순서마저도 생경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올해부터 적용된 것이라면 나뿐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상 수상작이 김영하였기에 이런 단순한 편집방식마저 내겐 이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김영하를 처음 접한 건,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김영하란 작가의 작품이 열풍처럼 문학계를 강타한 후, 그 열기가 조금은 식어있을 때였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의 등장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함께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운동권 문학에서 후일담 문학으로...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대안은 그러한 문학의 시대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길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시대 또한 모두 탈근대를 넘어서 탈현대를 부르짖고 있었던 차라, 한때 문화의 선두주자라 자부하던 문학에서 1996년이 되어서야 김영하 같은 작가가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조금은 돌연변이 같은 유하라든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러한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숱한 자맥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잘 편승했으리라고 추정해보는 우리의 문학계는 그들 보기를 돌같이 하였던가, 혹은 돌같이 그들을 바라보았던 거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우리의 금강석과도 같이 단단한 문학계가 발칙한 김영하를 선택한 것일까?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작품에 손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 내가 전혀 모르는 문학계는 논외로 치고, 왜 우리 세대는 김영하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비록 지금 나는 김영하란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지만, 실은 그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내 개인이 추구하는 바와 너무나 방향이 다른데다, 그가 논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늘 도발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글은 전혀 진지하지 못하고, 현란한 현학들로 가득차 보일 때가 많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인공의 철학하는 친구가 섹스파트너에 대해 정의 내렸던 것처럼 무언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 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발은 항상 대중에게 어필한다. 그런 이유로 그 다수의 대중의 하나인 나 또한 그의 작품에 쉽게 도발당하며, 유혹된다. 왜냐하면 그의 도발은 바로 앞서 표현한 것처럼 달콤한 소비라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고매한 정신도 정치적 목적도 특별한 신념도 필요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파고들면, 그의 도발은 단순히 섹스어필할 뿐인데다, 거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교묘하게도 어떤 엑스터시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런 발칙한 도발과 자기파괴 속에서 영적인 황홀경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번 그의 작품 ‘옥수수와 나’는 그러한 지점을 슬며시 독자에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은 모르긴 몰라도, 매우 자전적인 작가 개인의 욕망이 투사된 소설이라고 여겨본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글속에 ‘나’라는 인물이 그러한 욕망을 글속에서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자신의 광적인 팬인 편집장의 절세미녀 부인과의 섹스는 이 소설에서의 이러한 지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여기서 그의 욕망은 머물지 않고, 한 차원 더 나간다. 글쓰기란 관념을 통해 소설이란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발기하고, 그것을 매개로 여자와 끊임없이 섹스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열흘이란 기간 동안 그는 잠도 자지도 않고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념이란 또 다른 짐승의 냄새를 펄펄 풍기며 그의 여신이자 섹스심벌인 편집장의 아내와 질펀한 정사를 열흘 동안 벌인 후, 그는 깊은 잠속에 빠져들기를 꿈꾸는 것이다. 마치 다음에 펼쳐질 죽음의 위기를 예견하듯이.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되풀이되는 그의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권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소설 서두부터 자신은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닭들과 새들이 자신이 옥수수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옥수수란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아니란 말인가? 그의 도발은 이제 끝났단 말인가? 아니면 도발에 대한 변명을 하길 원하는 것일까?

 

 

  결국, 그가 서두부터 늘어놓은 옥수수 우화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파괴에 대한 철저한 변명이란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꿈꾸는 도발과 파괴는 열흘간의 관념과 실제의 섹스를 오가며 맛본 엑스터시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엑스터시를 맛볼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다. 그냥 잠들면 모두 끝인 줄 알았는데, 그는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광팬이자 여신의 남편인 총을 든 편집장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총을 든 인물이 그의 광팬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의 부인과 그는 섹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잠깐 떠올려보면 이 인물들이 실제 작가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창작이란 작업을 통해 그것이 자기파괴가 되었든 혹은 엑스터시가 되었든, 일단락 지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독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허상과 거짓 위에 쌓여진 모래성인 것을 까맣게 잊고서, 작가에게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총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닭이 되어 당신은 옥수수여만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자기파괴는 사라지고, 흉폭하고 잔학한 파괴만이 남겨지게 된다. 작가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결국, 독자가 강요한 약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국엔 파괴되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고 부르짖더라도.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야 할 거 같다. 이 번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고뇌와 고백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비록 그 방식이 여전히 도발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심지어 비겁한 변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저항을 표명하고 싶은 건지도, 그렇게 독자를 저주하며 스스로를 예찬하고 싶은 건지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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